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 이름 없는 것들을 부르는 시인의 다정한 목소리
이근화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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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자리의 위치를 바꿨다. 바닥 생활자라 늘 이불이 깔려 있다. 최소주의로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어 방에는 이불과 스탠드만이 놓여 있다. 일찍 일어나 이근화 시인의 산문집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를 읽고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어제의 햇빛이고 바람인데.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휴대 전화에 들어온 메시지 때문이었다.


출근이 잠정 연기되었다. 일단 오늘 하루이지만 다음 주를 장담할 수 없다. 누워서 유튜브로 브이로그 하나를 시청했다. 누군가의 정돈된 일상을 보면서 힘을 낸다. 얼굴도 모르지만 볼 일도 없겠지만 화면 속 그들은 부지런히 요리를 하고 집 안에서도 바쁘게 살아간다. 혼자 먹지만 잘 차려 먹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지금 나는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면 마음도 가라앉기 마련. 얼른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모드 루이스, 낸 골딘, 진 리스.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를 읽었기에 알게 된 사람들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듣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마르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연주만큼이나 격정적인 삶을 산 마르타. 책에는 그녀 삶의 내력이 자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흥미 있게 써 놓았다.


그리고 모드 루이스. 『모드의 계절』이라는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환해졌다. 눈이 내린 작은 마을의 풍경과 그 옆에 뚱하게 앉아 있는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었다. 색감이 너무 예뻤다. 한 인간의 인생은 겉으로만 봐서는 판단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그림들이었다. 불안한 삶이었지만 순수하고 다정한 내면을 지닌 모드. 그녀의 삶을 그린 영화 《내 사랑》과 책 두 권을 봐야지.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에는 정말 아주 작은 인간들의 말이 이근화의 시선에서 새롭게 펼쳐진다. 일상인과 시인으로서의 자아는 충돌과 조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2020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네 명의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저들끼리 노는 모습을 보는 엄마로서. 책 읽기와 글쓰기를 놓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시인으로서. 이근화는 살아간다. 책에는 그림들이 있는데 추측건대 이근화의 아이들이 그린 것 같다. 막눈인 내가 봐도 잘 그린다.


엄마를 위해 큰 딸이 만드어준 「코딱지 왕」 책은 놀랍고 특별함을 자랑한다. 시인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관찰력이 뛰어나다. 외톨이 조가 고독을 떨쳐 내는 이야기, 「코딱지 왕」. 학교에 가지 못해도 마스크를 쓰고 놀아도 즐거운 아이들. 종이와 펜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그려내고 써 내는 아이들. 그 작은 인간들의 말을 이근화는 기록한다. 친분이 있는 시인의 시를 읽고 그가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이주란의 소설, 정세랑의 소설을 읽은 감상기는 위로에 가까운 글이었다. 2020년 이후의 시간들은 내내 위로가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다. 괜찮다는 영혼 없는 위로는 사절하겠다. 대신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한 감상을 적어가며 나를 보살피겠다.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는 팬데믹의 세계에서 나를 지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읽고 쓰기. 귤에 핀 곰팡이를 들여다보는 고운 시선을 기억에 간직하는 일. 영혼의 휴식을 위해 기꺼이 고통 속으로 자신을 내몰았던 이들이 남긴 서사를 해독하는 일. 이근화의 표현대로 세상은 신속하게 망할 것 같지 않다. 천천히 망할 거다. 그 시간을 살아내고 지켜내야 하는 나로서는 아주 작은 인간이 되어 잡음을 만들어 내야지. 망해가는 세상을 비웃으면서. 씩씩하고 다정하게. 이부자리의 위치를 바꿨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마음을 만들어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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