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족영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535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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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족영원
-신해욱

깊은 잠을 자는 개의 규칙적인 숨소리 옆에는
음을 영원히 놓친
가수의 표정만이 허락된다고 하지.

그런 표정을 연습한 적이 없으니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애국가보다 재미있는 노래를 하나라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족영원의 순간이라 중얼거려봅니다.

열대에 서식하는 백여 종의 눈먼 생물이
양서류 무족영원목 무족영원과에 속한다고 합니다.

몬순
-신해욱

가계부를 쓴다

구연산의 다음
양말로 짐작되는 것의 다음
물과 피자두의
다음
또 다음

돈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자기앞수표는 어떻게 자기 앞으로 돌아오고

어떻게 빨래는 섞고

저절로 만들어지는 잔액으로는 무엇을 살 수 있는가

밀려 쓰기에 의해서만
페이지는 왜 다음으로 넘어가고

침을 묻혀
다음
또 다음

겉핥기에 중독된 혓바닥

홀로 벌거벗은 정신의 비린내

죽은 손톱의
자주색과 연필심 냄새

모나미의 다음
또 다음 파쇄기의 다음

같이가자그래두가지두않구

-신해욱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저는 왜 늦었습니다

저는 왜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왜 옷이 젖어 있어서

기연가미연가
일광세탁소에서 보내온 화환이
우리 집 앞에서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상심의 가벼움

흘러가는 망각의 구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다리가 몇 개여야 할까요? 이상한 질문을 받으면 이상한 답을 돌려주고 싶은데. 센스가 없다. 아침엔 네 개. 점심은 두 개. 저녁은 세 개인 것은. 이런 옛날 수수께끼가 떠오르고 만다. 답은 사람. 태어나면 네 발로 기고 자라서는 두 발로 늙으면 지팡이를 장착해서 세 발이 된단다. 웃기지 않아도 웃어주세요, 제발. 다리가 없는 동물이 있다. 온몸으로 밀고 앞으로 나아가는. 몸이 곧 발이 되는. 영원히 멈춰있을 것 같은 순간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걷는다. 움직인다.
'돈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라고 묻는 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치사해지니까 말하지 않으련다. 가계부에 적힌 숫자들은 비현실적이고 심미적이기까지 한데.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추위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게 기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시집을 샀다. 시를 읽고 마음대로 생각한다. 진한심, 연한심을 넣은 샤프로 시를 옮겨 적는다. 내일은 언제 오는 걸까. 오늘은 오늘인 걸까. 어제는 무어라고 이름 붙이지? 일기장에는 어제의 반복과 내일의 실망이 적힌다. 다리도 없이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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