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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이 개봉했을 때, 개봉과 발맞추어 당연스레 레이먼드 카버 단편선집이 출간되었다. 영화 <숏컷>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을 적적히 배치해, 여러 인물들의 삶이 도처에서 어떤 나비효과를 부르는가를 목도할 수 있었던 유쾌하면서 씁쓸한...
원작의 명성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명감독의 연출과 스타캐스팅으로도, B급 영화 속에나 보여지는 아기자기한 팀플레이 때문에 두고두고 회자 될 만한 영화로 남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재조명될 기회를 잡은(사실, 이런 경우 카버를 재조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재조명 따윈, 이슈화 되지 않아도 오히려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추구되던 작가 아닌가) 카버는 조금 요란한 옷을 입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러 번 자신의 수필집에서 언급한 것처럼(<슬픈 외국어>?)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 존 어빙, 커트 보네커트...등에 매혹되어 왔고, 또 몇몇은 자신이 직접 일본 내에 번역하기도 했다.
<숏컷> 즈음에 국내에 '다시' 출간된 <레이먼드 카버 단편선>은 띠지로 둘러싼 로버트 알트만과 무라카미 하루키로 화려하게 서가에 등장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론을 쓰고, 굳이 그것을 맨 앞 장에 배치해서 얻을 시류를 이용하려는 출판사의 저의가 이해되기는 했지만, 불쾌한 기억으로 두고두고 남았다. 오히려 대중적으로 읽히지 않기에 평단과 독자들에게 내 살 같은 느낌을 주며 진정으로 찬사를 받는 작품들도 있는 것이다.
 
애니 프루는 한국 내에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뭐라 생각할까?
그리고 그 관심이 대다수의 독자들에 의해, "영화보다 별로였다"로 일갈되는 상황에서라면.
애니 프루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출판사 측의 재빠른 출간에 찬사만을 보낼 수 없는 이유는 작품의 성향이 아닌, 독자가 시류에 편승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잘못된 타이틀 선정,
아니 그 모든 것을 고려해, <브로크백 마운틴>을 타이틀로 달고 출판될 수 밖에 없었을 숙명에 있다고 해야 하나?
 
나처럼 애니 프루를 이 책으로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책을 읽는 내내 자신의 산만함을 재발견하게될 지도 모르겠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을 때보다 더 오래 걸렸다. 장르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분량에서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도저히 11편의 이야기를 한 번에 쓰윽 훑어내릴 수 없게 만드는 코너에 밀려 식은땀을 흘리게 되는 다신 겪고 싶지 않을... 그런 경험이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성향의 한 단면을 고백하자면, 나는 서부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몇 년 전까지, 해마다 그래미에서 가스 브룩스가 2~3개의 컨트리 부분을 석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느끼던 싫증.
황량한 초원이며, 박차 달린 웨스턴 부츠며, 마초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카우보이며... 텍사스에서는 24시간 나온다는 컨트리송, 피를 머금은 초대형 레이어 스테이크까지... 난 죄다 비호감이었다!
애니 프루의 단편집은 집요할 정도로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인생의 피로한 단면, 파멸밖에는 남지 않은 거친 삶들을 속사포처럼 쏘아붙인다. 도망칠 수도 없는 나는... 정말 힘들었다. 
 
와이오밍?
서부를 떠올릴 때 조차 낯선 주였다. 구구절절 이야기 하지 않아도 그 불모의 땅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악다구니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생경한 경험의 장이 되었다. 애니 프루는 삶을 포장할 줄 모른다. 아니, 오히려 가장 최악의 것을 더 악화시켜 사실이기에 더 선정적인 기사거리 삼아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문장에 마음껏 메스를 들이대고, 자신의 의도에 맞는 걸러진 단어들만을 가지고 짧은 이야기 안에 파괴적인 메시지를 담을 줄 아는 작가라는 찬사를 보낼 만 하다. 내가 싫은 것은 카우보이적인 마초성이지 애니 프루가 아니다. 그리고 애니 프루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자신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애초에 맞지 않는 조합일 뿐이었지만, 진정으로... 이 단편선은 멋진 작품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그 생들을 전부 목도한 내가 조금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해낸 듯 뿌듯했다. 
 
와이오밍에서는 그 삶의 방식 말고는 다른 어떤 시도조차 생각할 수 없기에 목장의 삶이 영속화된다. 겨우내 죽어나간 가 살아남은 가축의 수를 냉정하게 파악하기 무섭게, 봄이라는 계절에 만나게 되는 우박, 강풍,뒤 늦은 폭설, 올해 첫 토네이도 때문에 좀처럼 활기를 느껴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암소는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고, 소 값은 바닥을 친다. 세금 때문에 목장을 빼앗기기 전까지 밑도 끝도 없이 그 시지프스적인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그 와중에 동물의 생식에만 자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아버지의 여자를 훔쳐 달아났다가 평생을 고향을 등지고 살아온 남자가 귀향길에 길을 잃는 아이러니, 로데오에 뼈를 바친 카우보이가 끝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이야기, 9명의 아들을 줄줄이 낳다가 힘이 빠져 죽어버린 아내,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 나를 내치고 도망친 아내를 비틀리게 원망하는 남자, 목장 소유주면서 소 사육에 반대하는 무리에 동조해서 이웃의 울타리 철조망을 몰래 끊다가 비명횡사하는 남자, 100살이 육박하는 언제 죽어도 늦은 게 아닌가 싶은 노인네가 아들이 죽고나자 "모든 건 지구력의 문제지"하며 미소짓는 가족사... 그리고 더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차고 넘치는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절대 쉽게 읽혀지지 않는 풀포기조차 오롯이 자라지 않는 그 척박한 땅은 휴머니즘이 끼어들 사치를 애초에 허락하지 않는 탓에, 살아내는 그 무리들의 어떠한 죄악조차 '모든 건 본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예고된 타이틀 말고, <<애니 프루 단편선집>>, 또는 <<벌거숭이 소>>, <<진창>> 정도를 내세웠다면 안팎으로 좋은 느낌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두고두고 괘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가장 마지막 장에(기다리다 지쳐, 읽어내는 과정에서 책 한번 던져놓았다가 불쑥 뒷장부터 펼치고 마는 독자들이여, 그나마 '브로크백 마운틴'부터 읽어버렸다면, 정말... 힘드셨겠군요!!!) 붙어있는 '브로크백 마운틴' 또한 영화와는 전혀 다른 포스로, 누추함과 비릿함과 궁색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탓에, 영화의 연장선상으로 책을 선택했다면, 쓰라린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영화의 후광을 원한다면 <브로크백 마운틴 스크린플레이>정도면 딱 일 것이다. 
 
애니 프루를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던 영화의 명성에 잠시 감사하며,
카우보이에 대한 온갖 편견과 무관심이 뒤흔들리는 경험에 잠시 휘청거리며,
미디어 2.0이라는 출판사가 제대로 내세웠지만, 작품에 대한 바른 평에는 조금도 기여하지 않는 타이틀에는 오래 분노하면서...
내 나름의 타이틀을 붙힌다.
 
 
<<애니 프루 단편선 : 와이오밍 카우보이 크로니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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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2-1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 프루를 처음 만났던건, 사실 이 영화 나오고서야, 그게 애니 프루였다는 걸 알았지만, 항해뉴스서부터였어요. 그러고보면 항해뉴스도 케빈 스페이시란 걸출한 배우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었네요.
영화보다 책에 두손두발 다 드는 독자도 여기 있습니다. ^^
 
알렉산더의 연인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샨사를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중독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측전무후> 이후의 신작이 대체 무엇일까, 스포일러조차 모르고 있었을 때부터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알렉산더’라니!

 

무엇을 기대했을지 몰라도, 기대한 것 이상, 이하도 아닌... 기대한 것을 모조리 비켜 나갔다고 해야 옳다. 신화와 전설과 역사의 궁극의 결정체에 가장 극적인 서사시를 덧붙이면 ‘알렉산더’라는 키워드가 나올 법도 하겠지만, 샨사의 필력 앞에서 서사는 부재하고, 휘황한 이미지들이 어지러이 펼쳐진다. 기대를 모조리 빗나갔기에, <알렉산더의 연인>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불분명해진다. 내가 알던 ‘알렉산더’와 샨사가 그리는 ‘알렉산더’가 그토록 상이한 이유를 내 빈곤한 상상력의 탓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하겠는가?

 

<플루타르크 영웅전>으로 알렉산더를 처음 만난 이들이 의례 그렇듯, 가장 찬란하게 빛나다 스러져간 신적인 영웅의 구현이라고 그를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알렉산더가 변주되기 시작한 것은 동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감히 숭배 이외의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이 희대의 영웅이 섹스어필한 코드로 무장한 채 등장한 헐리우드 영화며, 막 MTV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한국계 애니메이터 피터 정의 캐릭터 디자인으로 탄생한 패셔너블한 애니메이션이며, RPG게임의 미디어믹스 같은 판타지소설에서의 알렉산더까지, 샨사의 ‘알렉산더’가 알렉산더가 아닌 이유가 하등 없지 않겠는가!


샨사는 절대 독자에게 친절한 작가가 아니다. 가장 불편한 치부를 끝도 없이 드러내놓고 얼굴을 돌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야멸찬 구석이 많다. 늘 사랑과 파멸의 순간이 동일선상에서 공존하고, 모든 대치되는 관념들을 동원해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고뇌를 풀어놓는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그 가운데서도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삶과 죽음, 불과 얼음, 태양과 달, 서양과 동양,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


타고난 미모와 매혹으로 주위의 남성들을 매혹시켜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 구축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제국의 축을 쌓아올리는 알렉산더는 팜므파탈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가 고결한 영혼을 추구하는 금욕주의자라서 숭배 받는 것이 아니듯, 동서양을 뒤섞으려는 야심 속에서 관계 맺는 이성은 오로지 알레스트리아 뿐이다.


시베리아 아마존의 여왕인 탈레스트리아는 평생에 걸쳐 사랑한 여성을 찾아 헤매는 여전사족의 여왕이다. 알렉산더와 조우하고 그가 남성이라는 것에 경악하지만, 결국 그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금기를 깨고 아마존의 존엄성의 상징인 'T'를 버린 채, 알레스트리아로 거듭난다.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가 사랑하며 결합하는 것은 알렉산더가 원정에서 부닥트리는 저항 이상으로, 어느 하나 순탄한 것이 없다. 자신이 상실한 고결한 영혼을 알레스트리아에게서 찾는 알렉산더와 전장에서 호흡해야 살아갈 수 있는 운명을 버린 순간부터 질식해가는 알레스트리아지만, 거대한 사랑 앞에서는 저항할 수가 없다. 전투력을 상실하고 왕을 벗고 인간적인 삶으로 회귀한 알렉산더와 순결과 불임의 금기가 전부 해제된 아마존의 여왕 알레스트리아를 통해 샨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도, 전설도, 역사도 아닌 내 영혼을 잃지 않으면 절대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사랑의 파괴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참모습이다.


원제인 <Alexandre et Alestria>를 <알렉산더의 연인>으로 번역한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는 바이나, 플라톤이 주창하는, 태초에 양성을 지니고 살았던 인류가 남성과 여성으로 쪼개진 채, 평생을 한 몸이었던 이성을 추구하며 사는 삶의 현신인 두 사람이기에, 완전한 동격으로 내세우지 않으면 소설의 의미는 거진 소멸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어판의 왜곡된 제목을 통해 샨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원형은 무참히 빛을 잃은 듯하다.


대서사시 같아 보이는 외형 속에서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해서 한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대착점의 이미지들이 향연을 벌인다. 서양에서 동양을 관통하며 전쟁의 길 위에서 살다 간 알렉산더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피해가기를 바란다. 모국어인 중국어 대신 불어로 작품을 쓰는 샨사가 알렉산더의 길을 거슬러서 맞으러 간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샨사의 차기작은 명멸하는 어지러운 이미지의 휘발성이 아닌, 중국색이 듬뿍 들어간 거대한 특유의 중독성 짙은 서사구조로 돌아가 주기를 열망해본다. 설마 샨사의 작품세계가 과도적 변신의 순간에 놓여있는 것을 목도하게 된 것은 아닐까 불안에 떨면서도, 매혹당한 자의 치명적 약점으로 인한 소리 없는 중얼거림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사그러든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셈하지 않고 나 자신을 그에게 맡겨야 했다.

사랑하는 것은 전쟁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과거, 비밀들, 불가능한 것들을 물리치는 일이다” (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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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쟁이 쳇 한솔 마음씨앗 그림책 6
미야자와 겐지 원작, 엄혜숙 글, 가로쿠 공방 그림 / 한솔수북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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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야자와 겐지의 단편선 가운데 하나인 <쥐돌이 쳇>이 빛그림책으로 나왔다. 일반적인 그림책과 달리 빛그림책은 삽화나 그림이 아닌 입체물을 사진으로 찍어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쥐돌이 쳇> 또는 <쳇쥐>라고 알려졌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여, 나무로 깎아 만든 동물들과 배경들을, 따뜻하고 생기 있는 조명으로 비추어 촬영하여 만들어낸 책이 바로 <떼쟁이 쳇>이다.


쳇은 낡은 천장에 사는 사회성 제로의 이기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린 쥐이다. 친절하게 별사탕을 떨어졌으니 주워가라는 족제비에게, 개미가 방해한 탓에 줍지 못한 것을 “물어내”라고 떼쓰는 것을 시작으로 가공할 만한 떼 부리기가 펼쳐진다. 쥐들이며, 족제비가 상대를 해주지 않자 사귀게 된 기둥, 쓰레받기, 양동이들은 하나같이 쳇에게 베풀어주는 착한 친구들이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일에 생기면 “물어내, 물어내~~~~~”를 수백 번 외치는 쳇에게 질려버린다.


가로쿠 공방에서 1년 반 동안 깎고 칠하고 요리조리 구성하여 만들어낸 앙증맞은 쥐, 쳇을 비롯해, 쳇에게 시달리는 난감한 표정이 일품인 피해자군단(?) 친구들까지, 그냥 귀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찡그린 눈썹, 입 꼬리가 처진 입매, 걱정스러운 눈동자...하나하나 세심하게 표현되지 않은 곳이 없다. 쳇의 가느다란 팔뚝은 늘 상 공중을 헤매고 있다. 아이들이 징징대며 떼를 쓸 때 휘휘 내젖는 손사래를 떠올리면 딱 들어맞는다. 쳇이, 쳇과 꼭 닮은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팔을 휘휘 내저으면서 “물어내~ 물어내~~~~”를 이백오십 번 쯤 해대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뒤통수가  쭈삣거릴 정도로 오싹해진다. 


찡그리고, 성내고, 싫증내고, 닦달하고, 성화부리고, 보채고, 징징대는 모습의 미운 네살 박이부터 일곱 살 아이들에게 읽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궁금해진다. “쳇은 정말 못됐어”라고 섣불리 말하지 못할 만큼 나와 꼭 닮은 모습의 주인공이 친구들을 괴롭히고, 상처주고, 떠나게 하는 모습들을 하하 호호 웃으면서 보면서도, 왠지 겸연쩍은 미소가 얼굴에 걸려있을 듯하다. 늘 누군가의 탓으로 자신의 실패며 실수를 보상받으려는 아이들 속의 잠재의식을 끄집어내어 뚝딱뚝딱 모양을 빚고,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찰칵 사진을 찍으면 <떼쟁이 쳇>으로 완성되지 않을까?

 

거드름을 피우고, 으스대면서 “물어내~, 물어내~~~~”하며 남 탓하기 바쁜 쳇이 단단히 성이 난 쥐덫에 갇혀 훌쩍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자~알 됐다”, “쌤통이다”라고 섣불리 말할 수도 없을 만큼, 그 조그맣고 귀여운 녀석이 불쌍해서 그 자리에서 용서해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과연 아이들은 쳇에게 어떤 결말을 주고 싶을까? 덫에 갇혀 “물어내”라고 말할 기운도 없는 쳇에게는 책을 읽는 아이들이 어떤 판결을 내려줄지 어린 솔로몬들의 결정이 궁금해져온다.


미야자와 겐지의 명성에 비해 별다른 감흥이 없어 난감했던 동화를, 절대적인 상상력 빈곤 탓에 궁색하게 읽어왔던 어른들과 시큰둥한 아이들에게, <떼쟁이 쳇>은 교훈이며 예절바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웃고, 함께 생각해볼 거리를 유쾌하게 안겨주고 있다. 누르스름한 톱밥이 폴폴 날릴 것 같은 가로쿠 공방 같은 신선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작업장에서 탄생될, 재기발랄한 빛그림책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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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의 비밀 일공일삼 1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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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 킨케이드는 4남매의 장녀로 유난히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새침한 아이다. 부모님의 부당한 대우에 견디다 못해-동생 돌보기, 집안일 하기 등등- 세상에서 가장 치밀하고 체계적이며 학구적이기까지 한 가출을 감행한다. 그냥 훌쩍 떠나 온갖 궁색함에 면목 없어지는 가출이 아니라, 최대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우아하게 지내다가, 남겨진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가 만족스럽게 재확립되면 우아하게 귀가할 예정인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가출자금의 확보는 필수이다!

클로디아의 둘째 남동생 제이미에게 가출이란, 귀찮게 씻지 않아도 그만이고, 마음껏 지저분해지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굳이 가출할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을 만큼 만족스런 날들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그만 클로디아의 가출프로젝트의 레이더망에 적정인물로 오르는 영광을 얻는다. 여러모로 자신의 가출관(?)에 반하는 누나에게 자금줄로 지목당해 덜컥 가출소년이 되어버리다니, 세상일이란 원래 그렇게 만만치 않은 법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연일 사람들로 북적대고, 지루할 틈 없으며, 도회지의 심장부라는 허영심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 가출장소를 또 어디서 찾을까. 르네상스관의 우아한 사주식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소녀의 로망(비록 딱딱한 커버 때문에 등이 베기고, 수백 년 묵은 곰팡내가 진동하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해야하지만)과 양치하지 않고서도 잔소리 없이 자도 좋은 소년의 로망이 충족되기도 하는 짜릿함은? 일과를 정해 견학을 하고, 한정된 가출비용으로 자판기 식사를 하면서, 가출 중에도 공부를 하고, 자금줄 제이미의 수전노철학도 깊어져가고... 거기다 분수에서 목욕을 하면 부자가 되는 생활의 발견은 또 어떤가. 여기다 미술관의 미스터리까지 더해져 남매의 미술관 가출기는 날로 버라이어티 해져간다!

 

미술관 최대의 화제로 떠오른 프랭크와일러 부인이 225달러에 판 미켈란젤로의 천사상 조각을 보고, 클로디아는 그것이 진짜 미켈란젤로의 작품인지 알아내고 싶어 한다. 도서관에 가고, 직원들의 말을 엿듣고, 르네상스 실을 견학하고... 그러다 프랭크와일러 부인을 만나러 가기까지, 이렇게 학술적인 가출을 또 어디서 보겠는가.

 

클로디아와 제이미와 천사상의 원래 소유주인 프랭크와일러부인을 만나는 것은 <클로디아의 비밀>의 최대 반전이다. 진위논란을 부추기기 위해 단돈 225달러에 천사상을 팔아버리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비밀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괴짜 미망인인 프랭크와일러부인과 클로디아의 자존심을 건 거래장면에서 두 사람이 동류의 인간형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젠체하고, 우아한 사치를 즐기고, 무료한 일상에 뭔가 특별한 탈출구를 갈망하는 스테레오에 묶이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허영심까지. 거기다 도박과 속임수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득실 면에서까지 제이미를 압도해버리는 이 부인은 지금까지 알아온 어떠한 어른과도 닮지 않았으면서도 가장 잘 통한다. 아이들이 가출 중에 만난, 아니 평생토록 만나게 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으로 비밀스러운 사람이다. 프랭크와일러부인의 복잡한 서류파일(원제:From the Mixed-up Files of Mrs. Basil E. Frankweiler)은 평생에 걸쳐 부인이 추구해온, 인생의 무료함에 대항하여 몰개성의 평범함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는 자기선언이다. 클로디아와 제이미를 부인에게 이끌어주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가장 중요한 코드인 미켈란젤로가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전해지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코닉스버그는 <클로디아의 비밀> 내내, 한 번도 교훈을 전하려하지 않는다. 가출을 통해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죄를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주시하고, 성공과 실패와 여운을 겪으며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단 한 뼘의 성장통을 통해 제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들을 한없이 믿어준다. 한바탕 난리를 겪고 돌아온 집에는 반쯤 넋이 나가버린 부모님이 계시지만 과연 아이들의 바람대로 가출 전의 부당한 일들은 전부다 사그러들까? 아니, 그런 불평불만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일들로 인생을 가꾸는 비결을 찾아내는 몫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있지는 않은지.

 

미술작품과 미스테리와 사춘기의 아이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에 능한 우리 시대의 작가, 코닉스버그의 <클로디아의 비밀>은, 킨케이드 남매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가출생활에서 맞닥트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코드’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인생과 비밀의 멋드러진 상관관계를 얄밉도록 촘촘한 이야기 망 속에서 절대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을 만큼 탄탄하게 펼쳐내고 있다. 프랭크와일러부인과 클로디아 할아버지와의 은밀한 관계(?)를 떠올리면서 ('정말 못당하겠군!') 두 손을 들고 유쾌하고 기꺼이 항복하고 싶은 마음이다!   

 

 

"할머니는 돈 때문에 판 게 아니야. 정말로 큰돈을 원했다면 증거물을 보여주었을 거야. 할머니는 재미로 판 거야. 짜릿한 재미 때문에"(200p)

 

“일단 비밀이 생기면, 내가 비밀이 있는 줄 아무도 모르는 것이 재미없기 때문이야. 남들이 그 비밀이 뭔지 아는 것은 싫지만 내가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야 돼.”(2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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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이야기 - 전10권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김난주 옮김, 김유천 감수 / 한길사 / 200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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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이 경외해 마지않는 두 명의 절대적인 인물들이 있다. [겐지이야기]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와 여러 야사와 모노가타리에서 신화보다 더 많은 찬미자를 거느리는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가 그들이다.

겐지와는 달리 실존인물이기도 한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는 진의를 알 수 없는 많은 전설적인 에피소드 속에서 불멸의 명성를 이어가면서 엄청난 미디어 믹스로 재탄생되고, 재해석되면서 현대인들에게 점차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아베노 세이메이를 이렇게 대중적으로 고착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작가인 유메마쿠라 바쿠일 것이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를 원작으로 하는 2001년의 NHK판 드라마에서는 SMAP의 이나카키 고로가, 1, 2편으로 제작된 CG가 총동원된 블록버스터 영화(특촬물 같은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닌) [음양사]에서는 일본 전통극 노의 배우인 노무라 만사이가 아베노 세이메이를 연기하면서 지지층을 더욱 확고히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아베노 세이메이는 유메마쿠라 바쿠의 원작을 바탕으로 코믹스화한 오카노 레이코 버전이다. 오카노 레이코의 펜 끝에서 탄생한 아베노 세이메이는 말갛게 비칠 듯한 투명하면서도 색기가 넘치는 미려한 이미지로 극대화된다. 지금은 TV 애니메이션판 세이메이의 손자가 주인공인 [소년음양사]까지 방영되고 있는데, 아베노 세이메이는 헤이안 시대에서부터 현대인에게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추종자를 양산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둡고 음습하면서도 귀족적인 헤이안 시대를 우아하고 정력적으로 살아간 허구임에도 한없는 근원성을 획득한 또 하나의 인물, 히카루 겐지를 만나보기로 하자.

겐지와는 달리 실존인물이기도 한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는 진의를 알 수 없는 많은 전설적인 에피소드 속에서 불멸의 명성를 이어가면서 엄청난 미디어 믹스로 재탄생되고, 재해석되면서 현대인들에게 점차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아베노 세이메이를 이렇게 대중적으로 고착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작가인 유메마쿠라 바쿠일 것이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를 원작으로 하는 2001년의 NHK판 드라마에서는 SMAP의 이나카키 고로가, 1, 2편으로 제작된 CG가 총동원된 블록버스터 영화(특촬물 같은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닌, 복고풍의)에서는 [음양사]에서는 일본 전통극 노의 배우인 노무라 만사이가 아베노 세이메이를 연기하면서 지지층을 더욱 확고히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아베노 세이메이는 유메마쿠라 바쿠의 원작을 바탕으로 코믹스화한 오카노 레이코 버전이다. 오카노 레이코의 펜 끝에서 탄생한 아베노 세이메이는 말갛게 비칠 듯한 투명하면서도 색기가 넘치는 미려한 이미지로 극대화된다. 지금은 TV 애니메이션판 세이메이의 손자가 주인공인 [소년음양사]까지 방영되고 있는데, 아베노 세이메이는 헤이안 시대에서부터 현대인에게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추종자를 양산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둡고 음습하면서도 귀족적인 헤이안 시대를 우아하고 정력적으로 살아간 허구임에도 한없는 근원성을 획득한 또 하나의 인물, 히카루 겐지를 만나보기로 하자.

헤이안 시대는 교토를 중심으로 천황과 후지와라 가문으로 대표되는 우아한 귀족문화가 꽃피우던 시기였다. 불교가 뿌리 깊게 자리했지만, 일본 고유의 신도도 숭상 받았으며, 모노가타리와 와카집의 편찬도 융성했던 문학적으로도 많은 성과가 있었던 중흥기였다. 11세기 초에 탄생된 [겐지이야기]의 저자는 쇼시 중궁을 모시던 문학적인 재기가 넘치는 궁녀, 무라사키 시키부이다. 헤이안 시대의 여자들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극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하고서 대부분은 아버지의 관직에 따라 불리운 것 같은데, 무라사키 시키부는 [겐지이야기]의 주인공에서 따온 것이라니, 헤이안시대의 이름도 없는 여류궁정문인의 역작이 이토록 귀중하게 읽히고 있는 것에서, 그 시대의 미약한 여성의 사회적 입지에 반하는 더욱 빛나는 성과가 아닐까싶다. 세계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위상에 연연할 것은 없지만, [겐지이야기]는 일본문학의 긍지가 아닌, 필수적인 세계문학으로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기존의 [겐지이야기]는 방대하면서, 난해하기까지 해서 나 같은 초보 ‘겐지 입문자’에게는 너무나 벅찬 도전이었다.

한길사에서 세토우치 자쿠초가 무라사키 시키부의 원작을 현대일본어판으로 옮긴 텍스트를 번역해내기 전까지, 나남출판사의 전 3권으로 된 [겐지이야기]에 좌절감과 아쉬움을 느끼던 독자들은 만만치 않은 수였을 듯싶다. 대다수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한자독음으로만 읽고 있는 이해불능의 번역투에 반감을 가지면서 오히려 [겐지이야기]에 대한 높은 벽을 공고히 하면서 수차례의 시도에도 절대 정복할 수 없던 껄끄러움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일본에서 세토우치 자쿠초의 순화된 각색판이 [겐지이야기]를 더 대중화되어 읽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한길사판의 [겐지이야기]는 극존경어와 관직명, 궁중용어,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와카들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었다. (‘세토우치 자쿠초’라는 이름이 낯이 익다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홍백전에 심사위원으로 나온 것이 떠올랐다. 불가에 귀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연말의 거대버라이어티에 출연하실 정도면... 헤이안 시대의 ‘출가’의 모습과도 그리 다르지 않아보였다. 세속과 완전히 격리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세에 머물며 신을 구하는...)

그간의 역주가 필요했던 번역물들의 대부분은 행간의 사이사이에 역주를 집어넣거나, 한 챕터 뒤에 역주를 모아두어 그때그때마다 찾아 읽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때마다 역주의 해석에 연연해야하는 상황 속에서 받았던 책 읽는 흐름에 대한 방해 또한 상당했다. 한길사판의 [겐지이야기]가 수월하게 읽혔던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역주가 필요한 모든 부분을 아예 뒷장으로 분류해놓고, 인용되어있는 와카나 문학작품들의 해석도 굳이 찾아 읽지 않고 별개의 흐름으로 읽어도 무방하도록 배치한 것이 좋았다. 연표나 인물관계도, 세토우치 자쿠조의 해설판, 역주, 인용문들이 모두 사이사이가 아닌 뒷장에 배치되어 있어서, 소설로써의 [겐지]를 읽고, 헤이안시대의 풍속자료로써 역주와 해설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읽다보면 어느새 겐지의 복잡한 여성편력도와 복잡한 관직명의 상하관계에도 익숙해지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읽다보면 겐지의 행각에 대한 염증에 자신의 건실한 도덕성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극중 화자인 무라사키 시키부가 푸념처럼 말하는 겐지에의 체념적인 말들도 재치 있게 느껴진다. 헤이안시대의 남녀관계는 욕망을 감추기보다는 추구하는 것이 지탄받는 일이 아니었으며, 편지로 맺어지는 연분이 많은 탓에, 와카를 읊고, 한시를 짓고, 멋진 필체를 가지지 못하면 정사를 이어갈 수 없을 만큼, 풍류와 독특한 미의식이 발달했다. 원 나잇 스탠드 같은 관계도 많았지만, 동침한 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부의 연을 이어갔으며, 여자의 집에서는 사위의 모든 것을 돌봐주어야 하는 등, 정략결혼으로 맺은 인척관계를 이용한 출세가 너무도 당연했다.

천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나 친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신하로 격하되는 황자였지만, ‘미나모토(原)’라는 성을 하사받고 ‘겐지(原氏)’라고 불리게 된 이 인물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용모로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는다. 무수한 여인들과 기념비적인 애정행각을 벌이고, 천황이 될 수 없었던 일개의 황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나치게 누리고 살다간다. 어머니를 닮은 선황의 후궁인 후지쓰보(자신의 새어머니격인)를 흠모해 인륜을 거스르는 불륜으로 훗날의 레이제이제(자신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라 아들)를 낳고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다거나, 열 살을 넘긴 지 얼마 안 되는 후지쓰보의 조카인 무라사키 부인을 데려와 자신의 취향대로 양육한 뒤 부인으로 삼는다던가, 가정이 있는 여인을 유혹하고, 양녀로 삼으려는 딸에게 연정을 강요한다던가... 끝도 없는 애정행각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면, 겐지를 읽는 것과 그 추종자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듯하다. ‘어머니와 그 딸과는 동시에 관계를 맺지 않는다’, ‘출가한 여자와는 정사하지 않는다’라는 겐지식 애정관에 어떻게 찬사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육조원이라는 거대 할렘을 만들어 자신과 관계했던 여자들을 불러 모아 살게 하는 듣도 보도 못한 행각을 무라사키 시키부는 ‘한 번 관계한 여자는 잊지 않고 뒤를 보아주는 보기 드문 미덕’이라고 추켜세우곤 있지만, 참 한숨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11세기의 소설이면서도, 복선과 반전이 참신했으며, 인과응보, 권선징악적인 요소들이 구태스럽지 않고, 탄탄한 구성으로 다가올 만큼 흥미진진했다. 겐지의 평생의 악업이 고스란히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배신행위를 보고 있노라면 무라사키 시키부가 그리고 있는 ‘겐지’라는 인물은 인간군상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닌, 자신이 추구했던 세속적인 욕망만큼 번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주인공이었다. 아베노 세이메이가 계속되는 미디어 믹스로 재창출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겐지이야기]는 그 원형에는 손상을 가하지 않으면서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결실을 맺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겐지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라면 벗어나기 힘든 욕망으로 번민하면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허물이 많아 더 흡입력을 가진 존재이다. [겐지이야기]는 일본 문학이지만 세계문학의 한 뿌리 속에 당당히 존재하고 있는, 허구이지만 허상이 아닌 크나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불도를 추구하면서도 토속적인 신도에 열중하고, 선진적인 문화를 꽃피우면서도 미신적인 음양도에 심취해있고, 멋스러운 애정관계를 추구하면서도 세속의 욕망에 죄악감을 느끼며 살아갔던 헤이안 시대의 귀족문화의 최절정의 모습을 [겐지이야기]라는 시대를 담고, 시대를 넘어선 대작을 통해서 생생히 느끼게 되었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소설의 순기능을 11세기에 이미 이토록 충실히 그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고전이지만 고리타분하지 않도록,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번역이 [겐지이야기]에 대한 네임밸류에 눌려 방해받았던 그간의 자유로운 감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고전일수록 현대적인 가치들과 대등하게, 때로는 더욱 도전적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새로운 옷을 입히는 작업에 쉼 없이 매진하는 문학적 성취가 2007년에는 더욱 더 많아졌으면 한다.

한길사의 [겐지이야기]는 헤이안 시대의 풍속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정과 번역의 중차대함을 멋지게 살려낸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전집이었으나, 10권으로 지나치게 늘려 구성했다는 생각이 든다. 300페이지를 넘기는 포켓 사이즈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다소 고가의 세트였으나 '겐지 입문자'를 비롯해, 기존의 '겐지'와 새 번역으로 단장한 '겐지'를 비교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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