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당무 비룡소 클래식 3
쥘 르나르 지음, 펠릭스 발로통 그림, 심지원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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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늘상 하는 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아니, 있다. 분명 안 아픈 손가락이 존재하더라.

홍당무는 유독 안 아픈 손가락이다.

아니, 손가락이 아니라 이물질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엄마는, 르픽 부인은 홍당무를 사랑하는 척 하기에도 지쳤다.

홍당무는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척 하기에도 지쳤다.

지금도 세상의 어느 음습한 곳에서는, 어떻게 해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과

가장 동떨어진 홍당무가 자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꼭 쥔 주먹사이로 피가 맺힐 지경이다.

 

홍당무는 잔인하다, 바보다, 멍청하다, 밉살스럽다, 버릇없다, 못생겼다, 거짓말쟁이다,

망나니이다, 미련하다, 도무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다-

-홍당무의 엄마, 르픽 부인 혹은 르픽 일가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다.

반쯤은 악의에 찬 모함이고, 반쯤은 외면하기 힘든 진실일 수도 있다.

홍당무는 호감보다는 오래 두고 사귀어 보지 않으면 그 장점을 쉽게 알 수 없는

비호감의 절정에 있는, 아웃사이더니까.

 

하지만 홍당무는 아이다. 아이일 뿐이다.

엄마의 냉대 속에서, 아빠의 방치 속에서, 형의 우월감 속에서, 누나의 무관심 속에서,

가정부의 동정 속에서, 선생님의 차별 속에서... 세상의 모든 편견 속에서 혼자인 아이.

 

홍당무는 쥘 르나르의 자전적 동화이다.

동화? <홍당무>가 동화???

정말 어렸을 때 읽고나서, 그저 나는 읽었으니까,

 "<홍당무>, 넌 그것도 안 읽었니?"식으로 뻐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한 권 한 권 그 때의 동화를 찾아읽는 과정에서 다시 만난 홍당무는 나를 가혹하게 두들겨댄다.

내가 이런 경험을 해본 것도 아니지만,

까미유 끌로델이 평생 엄마의 미움 안에서 가족 내에서 엇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쥘 르나르에는 르픽 부인 같은 엄마 안나 로즈 콜랭 르나르 부인이 있었고,

늘 비교와 우위에 서 있던 펠릭스 형 같은 모리스 형이 있었다.

언제나 아무 것도 관심 없어 보이는 르픽 씨 같은 아버지도 물론.

 

르나르 부인은 피에르 쥘(쥘 르나르)이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지 않았다...라구?

이것이 체험 속에서 태어난 이야기라는 것이 나는 못 견디게 아프다.

 

쥘 르나르에게 글 쓰는 천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까미유 끌로델에게 조각을 빼앗았다면(결국은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지만, 미치기 전까지...)

어땠을까? 무섭다.

꽃봉오리 채 저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에 무섭다.

<홍당무>는 잔혹한 이야기이며, 성장의 저편에 도사린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행복한 이야기만 들려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의 숨겨진 약점이자 자기혐오이다.

<홍당무>는 아프다. 아프고, 아프고, 아파서 분하다. 속이 터져버릴 것 같다.

아늑한 애정에 둘러싸여 있었고, 깨물기 전에도 아픈 손가락이었던 나지만,

견딜 수 없이 '홍당무'가 아프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홍당무가 아니라는 안도감에서 오는 죄책감 때문에.

 

홍당무와 애정을 가장한 엄마와의 관계는 가족의 비밀도 아니다.

언제나 탕아 취급 받는 그 아이는 어느 새 혼자 커서 "엄마는 필요없다"라고 선언한다.

늘상 이야기 속의 방관자로 존재했던 아버지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고 싶어 아이를 질책한다.

사랑을 갈구하기에도 지치고 지친 나머지 무감각의 세계에 피투성이가 된 채 뛰어든,

그 억척스럽고 드세고 외골수인 아이가 나는 너무 아프다.

 

동화가 참 신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귀한 경험.

이기심, 좌절, 절망, 나약함으로 가득한 기운이 어린 시절을,

지워버릴 만큼 불행하게 했다고 해도, 외면보다는 정면을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도식화된 동화라면 평가절하하는 얄팍한 기류는,

대체 내 안에 언제부터 흘러들었는가.

<행복한 왕자>? <아기사슴 플랙>? <플랜더스의 개>?

아마... <홍당무>가 그 정점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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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북클럽
커렌 조이 파울러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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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북클럽 사람들의 인생은, 지금까지 읽어 온 제인 오스틴의 여섯 작품과 다 닮아 있다거나 역할을 바꿔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참신한 전개 또한 아니다. 왜 이렇게 익숙할까? 구성이 파격적인 것도 아니고, 베일 듯한 위트가 넘치지도 않는다. 진부함과 늘 보아 온 사람, 사랑, 배신, 재회, 계속되는 삶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제인 오스틴 북클럽>사람들이 제인 오스틴을 읽는 이유, 내가 오스틴을 읽는 이유와 꼭 닮았다. 어느 페이지를 읽더라도 늘 거기 있는 친숙한 오스틴 월드!

 제인 오스틴의 여섯 작품을 모두 읽었다. 그러니 북클럽 멤버들이 주고 받는 대화, 플롯, 더 복잡한 플롯, 비꼬기...등등, 따라 잡는데 큰 무리가 있지는 않았다. (SF광 그리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눈치도 가지고 있으니까!) 한 작품은 정말 좋아하고, 두 편 정도는 싫지 않은 정도고, 한 편은 잊고 싶은 기억이며, 나머지는 읽었지만 그리 기억하고 있지 않은 편이다. 오스틴의 모든 것이 다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나의 제인 오스틴은 평범하다.

나의 제인은 늘 그런 세상 이야기를, 늘 그렇게 해주는 평범함이다.

조슬린, 결혼한 적 없음. 리지백 품종의 개를 사육, <엠마>(<에머>? 그렇게 안부를랜다!)처럼 중매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레즈비언인 알레그라에게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주려고까지...

실비아, 조슬린의 평생지기친구. 30년을 산 남편과 이혼 후 극복하려는 중.

버나데트, 엘리자베스 테일러마냥 수 많은 전남편들이 있는 지긋한 할머니.

프루디, 누가봐도 자신이 행운인 결혼을 한, 멋진 남편을 둔 프랑스어 교사.

알레그라, 실비아의 딸. 레즈비언. 아드레날린을 추구하는 X 스포츠광. 실연극복 중.

그리그, 여자로 태어났어야 마땅할 성품의 SF소설광.

읽는 내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분명 캘리포니아라고 못 박아져 있는데, 영국 소도시의 티파티...같은 느낌을 받았다. 봄이면 수선화 정원 가꾸기를 즐기고, 정기적인 가든 파티를 개최하고, <미들마치>나 <톰 존스>같은 BBC 드라마는 놓치지 않고 볼 것 같은, 40대 가량의 영국 중산층 부인들의 사교 모임 같다는 느낌...

알레그라의 에피소드마저 그리 신선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비밀스럽게 연인에게만 이야기한 내 과거가 몰래 출판사로 보내지는 원고로 탈바꿈한다? 이거 너무 한 거 아닙니까? 4소절 이상 표절한 게 아니면 된다...식인가? 북클럽 사람들의 저마다의 인생이 꽉 짜여져, 오스틴을 읽는 사이사이에 알알이 들어가 있는 것은 정말 하나도 버릴 데가 없을만큼 좋았다. 그러나 그 안의 인생들은 어디서 한 번 쯤은 보아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연애담들이 매 작품 속에서 변주되고 있는 것처럼. 커렌 조이 파울러는 철저하게 대중을 지향하는 소설을 쓰고자 했고, 성공했다. 상당히 재미있었다. 공감할 만 했고, 읽는 내내 상쾌한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기분이었다. 그 길이 여러 차례 지나온 길이여서 창 밖을 내다볼 필요가 덜 했다는 것이 문제였나?

'조슬린은', '프루디는'... 이라고 전개되던 이야기가 불쑥불쑥 '우리는'으로 시점을 확장 분명 제 7의 북클럽 회원들을 배려한 장치이고 참신했다. 그리그의 "<에머>(끙...)를 읽으면서 협박의 느낌을 주목하게 되었어요" 식의 대사는, 책 속에 몸을 들이밀고 한 마디 던지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떡밥 같았다. 하하핫-무조건적인 숭배의식을 거행하는 팬클럽문화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각자가 이야기하는 좋았던 것, 영 아니올시다, 용서할 수 없는 주인공, 심심한 인물들... 그럼에도 제인 오스틴은 늘 결혼과 연애, 실연과 새로운 사랑, 비밀약혼과 폭로되는 추문들 사이사이에 인생의 많은 것들을 마음껏 펼쳐보이는 마법을 부릴 줄 안다. 이 모든 것이 언제나 재기발랄 할 순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한 번쯤 나도 프루디처럼 "제인"이라고 불러보고 싶어지는걸!

결혼으로 끝나거나 약혼, 오해가 해소되고, (우리에게는 답답해보이지만)진정한 사랑을 재확인하며 끝나는 것이 당연한 오스틴. 해피엔딩이다. 비록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와 에드먼드 커플은 만찬에 초대하고 싶지 않은 인물군상이지만, 당당한 해피엔딩의 수혜자들 아닌가. 오스틴은 늘 만족할 만하진 않더라도 해피엔딩을 준비해둔다.

나? 언제부터인지 해피엔딩에 냉소를 보내는 나는 뭐지?

한숨유발 재벌, 악다구니 신분상승, 십중팔구 백혈병, 알고보면 남매, 안약사용의심유발 사별... 등을 준비하느라 '공식'으로 채워진 드라마들에 몸살을 앓다보니, 주인공을 몰살시켜버리는 의도된 새드엔딩이나, 25회 정도까지 홍수가 나다가 26화쯤부터 마구 착해지는 캐릭터와 5분 전 결혼식...싫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스틴의 중도적인 판박이 해피엔딩은 참으로 귀여운 면이 있다.

프루디가 이야기한다. 

"당신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해피엔드를 믿어요?" 

해피엔드를 믿어요?-

오스틴의 주인공들은 늘상 잘못된 사랑을 하고, 함부로 속단하며, 바람둥이에게 절친한 친지를 희생당하며, 상당히 속물적인 인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그렇게 면면을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닐까? 어딜봐도 오스틴은 히어로, 히로인들은 완벽하지 않다. (오스틴의 캐릭터가 완벽한 것이 아니다. 오스틴의 변주의 변주의 변주 쯤 되면 옥석으로 만들어져서 그렇지!!!)

늘상 잘못된 사랑과 실연과, 또 다시 후회할지 모를 사랑에 몸을 던지는 북클럽 회원들, 그리고 우리처럼. 해피엔드를 회의하는 나에게 <제인 오스틴 북클럽>은, 상식적인 사람들의 찻잔 안의 태풍 같은 파란만장 인생들을 양심에 거슬릴 것 없이 펼쳐보였다. 이 책을 읽고나서 꼭 모든 사람이 좋다는 느낌을 가질 것도 없지 않은가. 마치 제인 오스틴처럼. "모든 것이 좋다" 또는 "끔찍하다"의 상반된 평가 속에서, 평범하면서도 절대적인 멜로드라마에 열광하는, 기분 좋은 공감대 정도만 발견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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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공동묘지 - 상 밀리언셀러 클럽 33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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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애완동물 공동묘지>라는 타이틀이 아닌 <고양이 윈스터 처칠>이라는 자칫 발랄(?)해보이기까지 한 제목으로 1권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한밤중에 시체자루를 들고 공동묘지를 위태위태 넘어가던 묘사장면에서 느껴지던 그 짙은 긴박감에, 더는 책을 보지 않고 도서관에 반납해버린 기억. 그리고 황금가지판을 만나기 전까지는 꺼내보지 않았던 퇴락해가는 기억 한자락.
 
이런 내용이었었나... 고개가 갸웃거릴 만큼 공포의 깊이와 무게는 짐작했던 대로가 아니었다.
나는 무섭지 않았다. 공포스럽지 않았다. 더는 잘못된 기억의 장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지금 아련한 슬픔에, 그 상실감에, 루이스의 그 묘지로의 발걸음에 목이 메인다.
 
영화 <샤이닝>은 내가 본 최고의 공포영화, 아니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지만, 솔직히 스티븐 킹 원작의 <샤이닝>은 공포스럽기보다 '2% 부족한 큐브릭적'이었달까...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프렌즈'의 조이처럼 냉동실에 넣어두어야 할 만큼의 사명감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대부분의 스티븐 킹 작품은 범작과 평작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으며, 가끔 <미저리>나 <쇼생크 탈출> 같은 원작을 뛰어넘어버리는 회자될만한 명작과 광기의 배우 몇몇과 만나 빛을 발하는 경우(<샤이닝>)와 소품같은 느낌으로 다가갔다가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감상을 안긴 몇몇(<돌로레스 클레이본>), 시시 스파이섹말고는 하나도 기억에 안남는, 유명해서 오히려 외면했던 그것(<캐리>), 그 대단한 감독과 배우와 최고의 원작료가 들어갔어도 '길다~'말고는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던 <그린마일>까지, 내게 킹은 언제나 '영상에 조금은 빚을 지고 있는 작가'라는 각인이 있었다.
그렇지만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아니다. 어디 한구석 빈듯한 곳도 없는 치밀한 구성이나 몰입을 방해할만큼 강박적인 설정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던... 슬픈, 아픈 책이었다.
 
최상의 행복을 만끽한 인생의 그 순간부터 이미 그 시간의 연장이나 확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치닫는 구릉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그 최상의 순간을 딱 짚어내기에는 너무나 미련이 많은 존재인지라, 그 터닝포인트조차 갖지 못한 채, 파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행복으로 포장된 위선적인 유예에 익숙해져만 간다. 그리고 이 소설의 반전은 이미 저택 한길의 매장지로 가는 산책길에서 예고된 바였다. 범인은 처음부터 나왔지만 독자와 관객은 그 수사의 과정을 지리하게 지켜봐야만 하는 긴장감없는 스릴러...같다는 감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에 점수를 더 주고 싶었다.
 
딸아이의 고양이 처치를 살려냈던 것은, 이웃의 친절한 노인네의 애정어린 개입에서 정체모를 음습함에 싸인, 아직은 베일에 가려진 '재생'에의 모호한 폭로로 자연스럽게 교체된다. 이제 곧 어린 아들이 비명횡사할 것이요, 남겨진 아비는 가슴에 자식을 묻느니 그것이 악마의 모습이든 어떻든 다시 한번 되살리려한다. 그리고 이제 아기의 모습을 한 악귀가 칼을 휘두르는 자리에 한둘씩 쓰러지면 되는 것이다...
 
실재로 되살아난 존재가 펼쳐보이는 헤모글로빈쇼보다는 아비된 자의 자식을 놓을 수 없는, 가족의 굴레를 끌어안고 살아가려는 그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시체, 묘지, 매장, 도굴, 야음, 저주, 터부, 죽음보다 상실, 부성, 모성, 자책, 회복, 믿음, 슬픔, 사랑이 더 짙은 향으로 남았다.
작은 고양이, 2살짜리 아들, 행복하게 살을 섞었던 아내...를 짊어지고 저주의 모호한 근원에 다다를 수 밖에 없는 루이스의 고뇌가 나는 아프게 이해되었다. 내 육체와 정신을 쏟아부어 이루어낸 원초적인 집합체인 가족을 상실한 인간의 몸부림이 나는 이해가 되었다.
아빠가 널 살려줄게, 아직은 늦지 않았어, 여보. 난 아직 이 길을 넘을 수 있어...
 
공포를 만나러 갔다가, 되살아난 지난날의 내 분신같은 존재의 처연한 부활을 목도하고서,
진정한 공포란 내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릴 때 오는 그 상실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에 빠져버리는 감정의 사치 대신, 눈앞의 순리를 부정하면서까지 죽음을 삶의 영역으로 악착같이 끌어내려는 인간의 집념의 실패로의 귀결이 곧 공포였다는 것을, 뒤늦게 수긍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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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여신 - 전3권 세트
윌버 스미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미토스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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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라는 마법의 주문은 언제나 그렇듯 결코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전부를 사랑하게 되거나, 서서히 그 잔혹한 사막의 가열 찬 생명력에 혼을 빼앗기게 되는 법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장 위대한 이집트의 군주였던 람세스 2세나, 인류 역사상 가장 동정 받는 비운의 소년 군주, 투탕카멘이나, 팜므 파탈의 전형이기도 하고, 외세에 맞서 조국을 지켜내려다 실패한 매혹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나왔다. 질리지도 않게, 늘 들어왔던 이야기인데도.

거기다 다신교를 거부하고 유일신을 숭상한 이교도적인 아크나톤 정도면 우리네 왕조마냥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나일강의 여신>은 이집트의 잃어버린 영광의 한 시대를 윌버 스미스의 농밀한 상상력에 기대여 펼쳐지는 늘 거기 있던 이집트이기 하고, 너무 늦게 찾아 온 기시감이기도 했다.

원제는 [River God], 강의 신은 위대한 이집트의 어머니 나일강 그 자체이다.

나일강의 수호신은 하피 여신으로, 여신은 자웅동체의 형상을 가졌다.(흔히 여러 문명에서 가장 완벽에 다다른 신적 존재는 양성체이지 않은가. 연금술의 궁극적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강림하는 헤르마프로디테 또한 양성이다) 로스트리스 여왕의 수호신이자, 이집트 민족의 젓줄기이기도 한 위대한 나일의 범람에 따라, 우리 또한 이집트의 흥망성쇠를 가늠한다.


나일강의 수호를 받으며 펼쳐지는 <나일상의 여신>은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영웅서사시이도 하지만, 내가 볼 땐 위대한 문명인 고대 이집트인들의 자존심을 건 커밍아웃이다. 그토록 당당하게 자신의 온갖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그 존재감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그들은 늘 그렇게 상식의 잣대로는 판단될 수 없는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삶을 영유하는 것이다.

화강암과 황금, 상아와 노예만 있으면 지상 최고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는 그 오만함,

감히 반박할 생각조차 없다!

 

이야기의 큰 축은 타이타, 로스트리스, 타누스의 삼각구도이다.

 

타이타는 로스트리스의 아버지 인테프의 남색취향에 희생당한 거세된 노예다. 노예지만, 메디치가의 수호를 받아 르네상스를 꽃피운,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르네상스맨’이다.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강의 범람을 예측하고, 신탁을 듣는 구도자이며, 전술에 능한 병법가이자, 철학자, 극작가, 의사... 타이타가 하지 못하는 것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 뿐이다. 로스트리스를 사랑하지만 늘 곁에서 충성을 다하며 타누스와의 사랑을 지켜봐준다. 때로는 자신의 욕망 앞에 괴로워하면서도, 정직하고 탐욕스럽게 질투에 눈이 멀면서도.


로스트리스는 타누스를 사랑하지만, 늙수그레한 파라오 마모세 8세에게 바쳐진다. 그렇지만 남몰래 타누스와 통정하여 파라오의 씨가 아닌 왕자를 잉태해 이집트의 왕조를 이어간다.


타누스, 파라오의 자질을 타고났지만, 끝끝내 충복으로 남는 난세의 영웅. 신하로서, 사랑하는 여왕의 곁을 ‘밤의 황제’, 정부로서 지키며,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는 왕가의 수호자. 그러나 그의 영웅적인 행로의 끝은 신성을 거스를 정도록 장대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


타이타와 로스트리스, 타누스의 공통의 적은 로스트리스의 아버지, 인테프이다. 그러나 그는 극의 전반부가 되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악의 축은 이런 탐욕스런 악당이 아니라, 이집트의 존망 자체를 위협하는 이민족, 힉소스이다. 힉소스는 사막과 해전에서의 싸움에서는 능하나, 기마전에는 무지할 뿐인 이집트의 병력을 가볍게 물리치고 왕조를 위태롭게 한다. 힉소스를 피해 망명하는 이집트의 유민들은 이제 나일상의 원류를 거스르고 거스르며... 태곳적의 신비가 가득한 그 원시를, 신과 맞닿은 땅으로 흘러들어간다.

(힉소스와의 마모세 왕조를 건, 이집트의 존망을 건 사투를 지켜보며, 어느덧 나는, 중왕국, 신왕국을 지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패망케한 또 다른 이민족과의 사투, 악티움 해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힉소스보다 수 백배 강한 로마군 앞에서 무력해지고만 이집트여...)


로스트리스와 타누스의 절대적인 사랑은 간간히 나오는 멜로적인 요소일 뿐, <나일강의 여신>은 이집트 민족이 힉소스를 물리치고 다시 왕조를 재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까지의 과도적인 전투일지를 담아내고 있다. 타이타는 지금까지 만나본 그 어떤 군사, 모사가, 전술가와도 닮지 않았지만, 가장 완벽한 전략가이기도 하다.(<은하영웅전설>의 양웬리는 잠시 잊자!) 힉소스에게 일방적인 살육을 당했던 그 처참한 전투를 역으로 이용해, 전차부대 만들어내 그들을 물리친다. 청동기와 철기가 세대교체를 하는 그 한 시대를 마감하고, 여는 바로 그 시점에서!


윌버 스미스가 그토록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리며 만나게 된 것일까? 이집트 시리즈라고 명명된 이 역작에서 <나일강의 여신>은 고작 1부일 뿐이다. 후속작을 펴내지 않는다면 미토스북스는 그 뒷감당을 하기 힘들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그 원시의 땅에 대한 애증이 곳곳에 묻어나는 대서사시에는 얄미울 만큼 약점이 없다. 실로 숨 가쁘고,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능수능란하다. 가공의 이야기라는 것은 전부 작가의 역량을 확인하는 장일뿐이다. 나일강의 지류를 따라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항해와도 닮은 ?이야기는 지루함이 끼어들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김석희 씨의 네임밸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나일강의 여신>, 이 시대의 걸출한 번역자의 명성에 눌리지 않을 만한 탄탄한 서사시는 독자로써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박빙의 승부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펄이 들어간 표지 디자인은 참으로 구태스러웠다. 참신하지도 않고, 고루하지도 않았으나, 센스가 한참은 떨어져보였다(펄이 들어간 표지 디자인치고 성공한 예는 <책만 보는 바보>말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이집트의 기원전 18세기, 잊혀진 여왕의 치세를 부활시킨,

너무 늦게 찾아오게 된 이 매혹의 스토리, 신과 신을 닮은 인간들의 암투와 항쟁이 깃든 고대의 벽화를 따라가는 경외감에 생각보다 한달음에 세 권을 갈무리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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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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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는 철저하게 대중 소설을 지향하는 미스테리 소설의 거장이면서도, 다양하게 도전하는 장르의 변주에서조차 평작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는 거물 작가이다. 그가 그토록 다작을 하면서도 대중 소설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여러 매체로 확대 재생산 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특유의 문체로 승부할 줄 아는 작가다. 가해자와 피해자, 성인과 아동, 남성과 여성, 엘리트와 비주류에 이르기 까지 작가의 관점을 편중하지 않으면서 사해적이며 인도주의로 무장한 글을 쓰려고 섣불리 자기만의 스타일을 무너뜨린 적이 없다. 언제나 건조하고, 최루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배제 시키며, 반전의 허술함마저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바탕으로 탄생한 영화며, 드라마의 숫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 둘 쯤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탈고 이전에 이미 계약이 진행되지 않을까 짐작이 되기도 하니까. 그런데 미디어 믹스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심각한 방향전환이 생겨난다. 원작이 철저하게 지양한 인간미와 최루성 요소들을 가미시켜 ‘휴먼 드라마’로 탈바꿈하려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영상화된 두 개의 최근작, 드라마 <백야행>과 영화 <편지>를 살펴보면 그것이 극대화되는데, 시청자와 관객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기 위해 인간적인 면모를 넘치게 가미해버린다. 원천적인 원작지상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를 영상화하는 것은, 곧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어 더욱 뇌리에서 떨치지 못하는 선명한 인상을 무디게 만들어 별개의 작품인양, 어떤 결말을 수용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지게 만들곤 한다.

<편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친절했달까, 신문연재소설의 특성을 살려 독자들과의 거리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포석들이 눈에 띄는, 직설적이면서도 유동적인 소설이었다. 동생을 위해서 저지른 충동적이고 계산적이지 못해 서글픈 살인으로 사형수가 되어버린 형과 그 형이 남기고 간 죄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류에서 추방된 채 살아가야 하는 동생을 통해 “정당한 죗값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 하는가”하는 물음을 정면으로 던지고 있다. 교도소에서 한 달에 한 번 보내오는 벚꽃 직인이 찍힌 형 츠요시의 편지는 어떻게든 주류로 편입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다케시마 나오키를 좌절하게 만든다. 늘 상 편지가 발단이 되어 결혼도, 직장도, 출세도 길이 막힌다. 나오키는 희생자인가?

나오키가 받는 차별이 왜 정당한지 설파하는 노(老)사장의 이야기는 한없이 정답에 가까울 수는 있지만, 오차범위가 존재하는 이상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나오키를 번번이 경계 밖으로 내모는 많은 사람들은 나오키에게 변명하는 법이 없다. 늘 이야기한다. “살인자의 동생은 범죄자와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과는 닮았다. 차별의 근원에 대해 모두가 다른 핑계거리를 만들어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으로 관계를 끝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나오키가 벗어날 수 없는 카르마를 재구축한다. 책을 읽은 독자들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지만, 변명에는 서투른 채, 평범하고 적당한 위선으로 무장되어 있어, 희망적인지, 절망적인지 모를 딜레마를 껴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과연 <편지>는 ‘휴먼 드라마’인가?

소설을 읽었을 때 받았던 무미건조해서 더 아팠던,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흐릿해서 더 각인되어 남는 결말을, 영화에서는 너무나 분명하게 ‘휴먼 드라마’여야한다는 강박증으로 끝내버리고 있는 것을 볼 때,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전히 중도적이고, 몰개성으로 희석된 채 영상화되고 있는 셈이다. 소설 <편지>를 ‘휴면 드라마’로 규정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 출판사의 카피여서는 안 된다. 영화를 보며 거침없이 울어버릴 수 있어서 안심이 되었던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 때문이 아니라, ‘다케시마 츠요시’를 연기하는 타마야마 테츠지 때문이었다. 소설이며, 영화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타인의 문제에서만 너그럽게 규정하는 평균치 인간인 내가, 보는 내내 불편했다는 감상에서 오히려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상할까?

 

친절한 히가시노 게이고 씨,

인간의 본성을 ‘휴먼 드라마’의 틀을 빌지 않고서도 이야기해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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