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늘상 하는 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아니, 있다. 분명 안 아픈 손가락이 존재하더라.
홍당무는 유독 안 아픈 손가락이다.
아니, 손가락이 아니라 이물질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엄마는, 르픽 부인은 홍당무를 사랑하는 척 하기에도 지쳤다.
홍당무는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척 하기에도 지쳤다.
지금도 세상의 어느 음습한 곳에서는, 어떻게 해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과
가장 동떨어진 홍당무가 자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꼭 쥔 주먹사이로 피가 맺힐 지경이다.
홍당무는 잔인하다, 바보다, 멍청하다, 밉살스럽다, 버릇없다, 못생겼다, 거짓말쟁이다,
망나니이다, 미련하다, 도무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다-
-홍당무의 엄마, 르픽 부인 혹은 르픽 일가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다.
반쯤은 악의에 찬 모함이고, 반쯤은 외면하기 힘든 진실일 수도 있다.
홍당무는 호감보다는 오래 두고 사귀어 보지 않으면 그 장점을 쉽게 알 수 없는
비호감의 절정에 있는, 아웃사이더니까.
하지만 홍당무는 아이다. 아이일 뿐이다.
엄마의 냉대 속에서, 아빠의 방치 속에서, 형의 우월감 속에서, 누나의 무관심 속에서,
가정부의 동정 속에서, 선생님의 차별 속에서... 세상의 모든 편견 속에서 혼자인 아이.
홍당무는 쥘 르나르의 자전적 동화이다.
동화? <홍당무>가 동화???
정말 어렸을 때 읽고나서, 그저 나는 읽었으니까,
"<홍당무>, 넌 그것도 안 읽었니?"식으로 뻐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한 권 한 권 그 때의 동화를 찾아읽는 과정에서 다시 만난 홍당무는 나를 가혹하게 두들겨댄다.
내가 이런 경험을 해본 것도 아니지만,
까미유 끌로델이 평생 엄마의 미움 안에서 가족 내에서 엇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쥘 르나르에는 르픽 부인 같은 엄마 안나 로즈 콜랭 르나르 부인이 있었고,
늘 비교와 우위에 서 있던 펠릭스 형 같은 모리스 형이 있었다.
언제나 아무 것도 관심 없어 보이는 르픽 씨 같은 아버지도 물론.
르나르 부인은 피에르 쥘(쥘 르나르)이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지 않았다...라구?
이것이 체험 속에서 태어난 이야기라는 것이 나는 못 견디게 아프다.
쥘 르나르에게 글 쓰는 천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까미유 끌로델에게 조각을 빼앗았다면(결국은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지만, 미치기 전까지...)
어땠을까? 무섭다.
꽃봉오리 채 저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에 무섭다.
<홍당무>는 잔혹한 이야기이며, 성장의 저편에 도사린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행복한 이야기만 들려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의 숨겨진 약점이자 자기혐오이다.
<홍당무>는 아프다. 아프고, 아프고, 아파서 분하다. 속이 터져버릴 것 같다.
아늑한 애정에 둘러싸여 있었고, 깨물기 전에도 아픈 손가락이었던 나지만,
견딜 수 없이 '홍당무'가 아프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홍당무가 아니라는 안도감에서 오는 죄책감 때문에.
홍당무와 애정을 가장한 엄마와의 관계는 가족의 비밀도 아니다.
언제나 탕아 취급 받는 그 아이는 어느 새 혼자 커서 "엄마는 필요없다"라고 선언한다.
늘상 이야기 속의 방관자로 존재했던 아버지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고 싶어 아이를 질책한다.
사랑을 갈구하기에도 지치고 지친 나머지 무감각의 세계에 피투성이가 된 채 뛰어든,
그 억척스럽고 드세고 외골수인 아이가 나는 너무 아프다.
동화가 참 신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귀한 경험.
이기심, 좌절, 절망, 나약함으로 가득한 기운이 어린 시절을,
지워버릴 만큼 불행하게 했다고 해도, 외면보다는 정면을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도식화된 동화라면 평가절하하는 얄팍한 기류는,
대체 내 안에 언제부터 흘러들었는가.
<행복한 왕자>? <아기사슴 플랙>? <플랜더스의 개>?
아마... <홍당무>가 그 정점에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