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여신 - 전3권 세트
윌버 스미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미토스북스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이집트’라는 마법의 주문은 언제나 그렇듯 결코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전부를 사랑하게 되거나, 서서히 그 잔혹한 사막의 가열 찬 생명력에 혼을 빼앗기게 되는 법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장 위대한 이집트의 군주였던 람세스 2세나, 인류 역사상 가장 동정 받는 비운의 소년 군주, 투탕카멘이나, 팜므 파탈의 전형이기도 하고, 외세에 맞서 조국을 지켜내려다 실패한 매혹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나왔다. 질리지도 않게, 늘 들어왔던 이야기인데도.

거기다 다신교를 거부하고 유일신을 숭상한 이교도적인 아크나톤 정도면 우리네 왕조마냥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나일강의 여신>은 이집트의 잃어버린 영광의 한 시대를 윌버 스미스의 농밀한 상상력에 기대여 펼쳐지는 늘 거기 있던 이집트이기 하고, 너무 늦게 찾아 온 기시감이기도 했다.

원제는 [River God], 강의 신은 위대한 이집트의 어머니 나일강 그 자체이다.

나일강의 수호신은 하피 여신으로, 여신은 자웅동체의 형상을 가졌다.(흔히 여러 문명에서 가장 완벽에 다다른 신적 존재는 양성체이지 않은가. 연금술의 궁극적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강림하는 헤르마프로디테 또한 양성이다) 로스트리스 여왕의 수호신이자, 이집트 민족의 젓줄기이기도 한 위대한 나일의 범람에 따라, 우리 또한 이집트의 흥망성쇠를 가늠한다.


나일강의 수호를 받으며 펼쳐지는 <나일상의 여신>은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영웅서사시이도 하지만, 내가 볼 땐 위대한 문명인 고대 이집트인들의 자존심을 건 커밍아웃이다. 그토록 당당하게 자신의 온갖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그 존재감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그들은 늘 그렇게 상식의 잣대로는 판단될 수 없는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삶을 영유하는 것이다.

화강암과 황금, 상아와 노예만 있으면 지상 최고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는 그 오만함,

감히 반박할 생각조차 없다!

 

이야기의 큰 축은 타이타, 로스트리스, 타누스의 삼각구도이다.

 

타이타는 로스트리스의 아버지 인테프의 남색취향에 희생당한 거세된 노예다. 노예지만, 메디치가의 수호를 받아 르네상스를 꽃피운,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르네상스맨’이다.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강의 범람을 예측하고, 신탁을 듣는 구도자이며, 전술에 능한 병법가이자, 철학자, 극작가, 의사... 타이타가 하지 못하는 것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 뿐이다. 로스트리스를 사랑하지만 늘 곁에서 충성을 다하며 타누스와의 사랑을 지켜봐준다. 때로는 자신의 욕망 앞에 괴로워하면서도, 정직하고 탐욕스럽게 질투에 눈이 멀면서도.


로스트리스는 타누스를 사랑하지만, 늙수그레한 파라오 마모세 8세에게 바쳐진다. 그렇지만 남몰래 타누스와 통정하여 파라오의 씨가 아닌 왕자를 잉태해 이집트의 왕조를 이어간다.


타누스, 파라오의 자질을 타고났지만, 끝끝내 충복으로 남는 난세의 영웅. 신하로서, 사랑하는 여왕의 곁을 ‘밤의 황제’, 정부로서 지키며,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는 왕가의 수호자. 그러나 그의 영웅적인 행로의 끝은 신성을 거스를 정도록 장대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


타이타와 로스트리스, 타누스의 공통의 적은 로스트리스의 아버지, 인테프이다. 그러나 그는 극의 전반부가 되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악의 축은 이런 탐욕스런 악당이 아니라, 이집트의 존망 자체를 위협하는 이민족, 힉소스이다. 힉소스는 사막과 해전에서의 싸움에서는 능하나, 기마전에는 무지할 뿐인 이집트의 병력을 가볍게 물리치고 왕조를 위태롭게 한다. 힉소스를 피해 망명하는 이집트의 유민들은 이제 나일상의 원류를 거스르고 거스르며... 태곳적의 신비가 가득한 그 원시를, 신과 맞닿은 땅으로 흘러들어간다.

(힉소스와의 마모세 왕조를 건, 이집트의 존망을 건 사투를 지켜보며, 어느덧 나는, 중왕국, 신왕국을 지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패망케한 또 다른 이민족과의 사투, 악티움 해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힉소스보다 수 백배 강한 로마군 앞에서 무력해지고만 이집트여...)


로스트리스와 타누스의 절대적인 사랑은 간간히 나오는 멜로적인 요소일 뿐, <나일강의 여신>은 이집트 민족이 힉소스를 물리치고 다시 왕조를 재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까지의 과도적인 전투일지를 담아내고 있다. 타이타는 지금까지 만나본 그 어떤 군사, 모사가, 전술가와도 닮지 않았지만, 가장 완벽한 전략가이기도 하다.(<은하영웅전설>의 양웬리는 잠시 잊자!) 힉소스에게 일방적인 살육을 당했던 그 처참한 전투를 역으로 이용해, 전차부대 만들어내 그들을 물리친다. 청동기와 철기가 세대교체를 하는 그 한 시대를 마감하고, 여는 바로 그 시점에서!


윌버 스미스가 그토록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리며 만나게 된 것일까? 이집트 시리즈라고 명명된 이 역작에서 <나일강의 여신>은 고작 1부일 뿐이다. 후속작을 펴내지 않는다면 미토스북스는 그 뒷감당을 하기 힘들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그 원시의 땅에 대한 애증이 곳곳에 묻어나는 대서사시에는 얄미울 만큼 약점이 없다. 실로 숨 가쁘고,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능수능란하다. 가공의 이야기라는 것은 전부 작가의 역량을 확인하는 장일뿐이다. 나일강의 지류를 따라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항해와도 닮은 ?이야기는 지루함이 끼어들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김석희 씨의 네임밸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나일강의 여신>, 이 시대의 걸출한 번역자의 명성에 눌리지 않을 만한 탄탄한 서사시는 독자로써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박빙의 승부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펄이 들어간 표지 디자인은 참으로 구태스러웠다. 참신하지도 않고, 고루하지도 않았으나, 센스가 한참은 떨어져보였다(펄이 들어간 표지 디자인치고 성공한 예는 <책만 보는 바보>말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이집트의 기원전 18세기, 잊혀진 여왕의 치세를 부활시킨,

너무 늦게 찾아오게 된 이 매혹의 스토리, 신과 신을 닮은 인간들의 암투와 항쟁이 깃든 고대의 벽화를 따라가는 경외감에 생각보다 한달음에 세 권을 갈무리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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