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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공동묘지 - 상 ㅣ 밀리언셀러 클럽 33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평점 :
6년 전, <애완동물 공동묘지>라는 타이틀이 아닌 <고양이 윈스터 처칠>이라는 자칫 발랄(?)해보이기까지 한 제목으로 1권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한밤중에 시체자루를 들고 공동묘지를 위태위태 넘어가던 묘사장면에서 느껴지던 그 짙은 긴박감에, 더는 책을 보지 않고 도서관에 반납해버린 기억. 그리고 황금가지판을 만나기 전까지는 꺼내보지 않았던 퇴락해가는 기억 한자락.
이런 내용이었었나... 고개가 갸웃거릴 만큼 공포의 깊이와 무게는 짐작했던 대로가 아니었다.
나는 무섭지 않았다. 공포스럽지 않았다. 더는 잘못된 기억의 장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지금 아련한 슬픔에, 그 상실감에, 루이스의 그 묘지로의 발걸음에 목이 메인다.
영화 <샤이닝>은 내가 본 최고의 공포영화, 아니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지만, 솔직히 스티븐 킹 원작의 <샤이닝>은 공포스럽기보다 '2% 부족한 큐브릭적'이었달까...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프렌즈'의 조이처럼 냉동실에 넣어두어야 할 만큼의 사명감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대부분의 스티븐 킹 작품은 범작과 평작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으며, 가끔 <미저리>나 <쇼생크 탈출> 같은 원작을 뛰어넘어버리는 회자될만한 명작과 광기의 배우 몇몇과 만나 빛을 발하는 경우(<샤이닝>)와 소품같은 느낌으로 다가갔다가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감상을 안긴 몇몇(<돌로레스 클레이본>), 시시 스파이섹말고는 하나도 기억에 안남는, 유명해서 오히려 외면했던 그것(<캐리>), 그 대단한 감독과 배우와 최고의 원작료가 들어갔어도 '길다~'말고는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던 <그린마일>까지, 내게 킹은 언제나 '영상에 조금은 빚을 지고 있는 작가'라는 각인이 있었다.
그렇지만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아니다. 어디 한구석 빈듯한 곳도 없는 치밀한 구성이나 몰입을 방해할만큼 강박적인 설정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던... 슬픈, 아픈 책이었다.
최상의 행복을 만끽한 인생의 그 순간부터 이미 그 시간의 연장이나 확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치닫는 구릉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그 최상의 순간을 딱 짚어내기에는 너무나 미련이 많은 존재인지라, 그 터닝포인트조차 갖지 못한 채, 파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행복으로 포장된 위선적인 유예에 익숙해져만 간다. 그리고 이 소설의 반전은 이미 저택 한길의 매장지로 가는 산책길에서 예고된 바였다. 범인은 처음부터 나왔지만 독자와 관객은 그 수사의 과정을 지리하게 지켜봐야만 하는 긴장감없는 스릴러...같다는 감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에 점수를 더 주고 싶었다.
딸아이의 고양이 처치를 살려냈던 것은, 이웃의 친절한 노인네의 애정어린 개입에서 정체모를 음습함에 싸인, 아직은 베일에 가려진 '재생'에의 모호한 폭로로 자연스럽게 교체된다. 이제 곧 어린 아들이 비명횡사할 것이요, 남겨진 아비는 가슴에 자식을 묻느니 그것이 악마의 모습이든 어떻든 다시 한번 되살리려한다. 그리고 이제 아기의 모습을 한 악귀가 칼을 휘두르는 자리에 한둘씩 쓰러지면 되는 것이다...
실재로 되살아난 존재가 펼쳐보이는 헤모글로빈쇼보다는 아비된 자의 자식을 놓을 수 없는, 가족의 굴레를 끌어안고 살아가려는 그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시체, 묘지, 매장, 도굴, 야음, 저주, 터부, 죽음보다 상실, 부성, 모성, 자책, 회복, 믿음, 슬픔, 사랑이 더 짙은 향으로 남았다.
작은 고양이, 2살짜리 아들, 행복하게 살을 섞었던 아내...를 짊어지고 저주의 모호한 근원에 다다를 수 밖에 없는 루이스의 고뇌가 나는 아프게 이해되었다. 내 육체와 정신을 쏟아부어 이루어낸 원초적인 집합체인 가족을 상실한 인간의 몸부림이 나는 이해가 되었다.
아빠가 널 살려줄게, 아직은 늦지 않았어, 여보. 난 아직 이 길을 넘을 수 있어...
공포를 만나러 갔다가, 되살아난 지난날의 내 분신같은 존재의 처연한 부활을 목도하고서,
진정한 공포란 내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릴 때 오는 그 상실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에 빠져버리는 감정의 사치 대신, 눈앞의 순리를 부정하면서까지 죽음을 삶의 영역으로 악착같이 끌어내려는 인간의 집념의 실패로의 귀결이 곧 공포였다는 것을, 뒤늦게 수긍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