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단테는『신곡』안에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을 모두 담아냈지만, 후세의 추종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가 결말에 보장한 천국에의 당도보다는, 추악한 죄악과 형형할 길 없는 형벌에 몸부림치는 지옥도에 매료당한다. 르네상스의 찬란한 인문주의 안에서도 그랬고, 노스트라다무스가 잘못 짚은 세기말에도 그러했으며, 굳이 단테에게서까지 지옥을 빌려오지 않아도 충분한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아르노 들랄랑드는 프랑스의 시나리오작가이자 소설가라고 하는데, 과연 『단테의 신곡살인』은 거대한 세트장과 현지로케가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영상물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인상이 절로 들었다. 단테에서 영감을 얻은 추리물들이 넘쳐나는 까닭에 “또?”라는 생각에, 기대감보다는 벌써 시들어버린 흥미도였다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단테클럽>과 <단테의 ~살인>하는 책들이 이미 한 번 광풍을 일으키고 간 후인걸. 그래도 단테와 지옥도가 들어간 책치고 재미없을 수도 없으니, 일단은 환영이다.


    그런데 뭔가, 이 작가는 베네치아라는 매혹적이며 암투가 자행하는 생동하는 무대에 너무 큰 빚을 지고 있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가 심취해있는 것은 ‘작가주의’나 ‘예술영화’가 아닌 것이 자명했다. 어떻게든 3시간(극장주에 따라 30~40분가량은 들어낼 수 있는)의 런닝 타임 안에 후다닥 반전에 반전과 반전에 집착하다가 해피엔딩을 위해 네러티브는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헐리웃 대형 스튜디오의 블록버스터 시스템에 안에서 제조되는 빈약한 스릴러가 하나 늘었달까.


    주인공 피에트로 비라볼타는 지금까지 만나본 히어로 가운데 가장 매력이 없고, 미숙한(그 미숙함이 인간적인 매력을 더하지는 않는다) 인물이다. 프로필에는 넘치게 과욕을 부렸으나, 매력을 증명할 문체는 구태스럽다.『신곡』에 예고된 9옥, 9개의 살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추적과 실마리를 얻는 과정 내내 기지와 직감과 추론을 발휘하기 보다는, 언제나 한 발 늦은 후에 주변인들이 넘치게 흘려놓은 단서들을 수집하는 격이다. 절친한 친우로 등장하는 ‘카사노바’가 옆방 죄수로 카메오 출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카사노바의 몫까지 페로몬을 내뿜으며 압도적인 영감으로 지옥도 안에서 인성의 승리를 쟁취해야 마땅한데도!


    배교, 육욕, 식탐, 낭비와 인색함,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배반으로 예고되고 자행되는 9개의 살인은 치밀하게 짜여 진 거미줄이 되어야하는데도, 각각의 죄악과 대상들이 그리 부합된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구색만 맞추는 격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을 생각해보라. 모건 프리먼과 브래드 피트가 7개의 대죄(단테의『신곡』은 9개의 지옥이 있지만, 크게 7개의 대죄로도 분류된다)를 예고하며 소름끼치는 살인마, 케빈 스페이시와 벌였던 헤모글로빈의 향연은 진정한 반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단테가 헐리웃에 가서도 무색해지지 않았던 참으로 멋진 승부를 보여주었건만.)


    거의 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안에 피에트르 비라볼타는 활약이 없는 것에 반비례하게 전설적 명성을 구축하며, 그리 신통치 않은 연애를 전설로 만드는 사랑에서도 결국은 승자가 되지만 여전히 뒷심은 부족하며 긴장감이 한참은 떨어진다. 주인공만큼이나 온갖 트릭, 가면, 사교의식, 허장성세로 무장한 악의 축, ‘일 디아볼로’마저도 기대이하이다. 9옥에서 펼쳐지는 배신과 반전의 한판승부는 여전히 밋밋한 구석이 많고, 주고받는 대사들에서 살인극의 합당한 종결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굉장히 쉽게 읽힌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복합적인 정치상황과 방탕한 축제 속에 깃든 사악한 예고살인극은 극 안의 인물들만이 심각해 보이는 면모를 띈다. 익숙한 구성, 어디서 빌려온 듯한 주인공, 예측불허의 긴장보다는 허약한 우연으로 사건을 무마시키는 의미가 퇴색해버린 반전. 단테에게서 태어났을지는 모르지만, 대문호의 명성을 공유하기보다는 조금은 흠집을 내고 있지는 않았나 자평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김선우 지음 / 미루나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TV에 잘 등장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내용물은 하나도 바를 바 없는 오락 프로그램에 겹치기 출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새 영화 홍보인가? 이번에 드라마 시작하는구나.’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사인회를 하고, 대담을 하고, 인터뷰를 하고....... 김선우 시인의 사인회 소식을 접하고, ‘아, 새 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무렵, 두 개의 일간지와 하나의 문예지에서 그가 들려주는 작품과 시와 인생에 대한 인터뷰를 접했다. 시인의 산문집이라니, 절로 관심이 갈 수 밖에.


    연애시를 쓰는 젊은 시인. 아니 이제 중년의 나이를 바라보지만, 중견 문인은 아닌. 동안의 시인- 김선우 시인의 이미지는 그랬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너무나 김선우 시인다워서 불편하기까지 한 타이틀. 파블로 네루다의 ‘젊음’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시인답다. 표지에 흩뿌려진 색색의 꽃은 또 어떤가. 책등의 삼면이 연보랏빛이다. 뭔가 심상찮다. 꽃물이 든 것처럼 온통 색 고운 페이지들에 현기증이 난다. 선연한 꽃빛에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파블로 네루다, 만해, 자크 프레베르, 휘트먼, 소월, 로렌스, 김수영, 니체, 에밀리 디킨슨, 릴케, 로버트 프로스트-, 그리고 김선우의 시.


    연애 시들을 전진배치하고 시인이 사랑의 연서들을 쏟아놓는다. 시인이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연애, 간절함, 소녀성, 실연, 그리고 사랑, 사랑, 사랑. 김선우라는 이름 대신 ‘원태연’이나 ‘이정하’였다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매끄럽고 유려하지만, 그 달콤함에 질식할 것만 같은 불편함. 산문집을 기대했으나, 학교 다닐 때 종종 문구점에서 사곤 했던 소녀 일러스트가 그려진 연습장 뒷면에 써진 속닥거림이 가득했다.


    시인은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놀라운 진솔함을 보이지만, 꽃물로 물든 페이지의 수줍은 연서에 마음이 동하는 독자들과의 소통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랑을 논하는 심상 안에 깃든, 너무 달콤해서 아찔하기까지 한, 제어되지 않아 넘치는 감각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당혹스러움이 밀려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라는 말이 이렇게 홍수처럼 밀려드는 책을 또 어디서 보았을까 생각하니, 그 사랑에서 구출되고 싶은 심정이다.


    김선우 시인답지만, 너무 ‘다운’ 연서들은 십 수 년 전에 도착했어야 할 편지를 이제야 받아든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의 달콤한 밀어들, 수취인불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야콥 하인 지음, 배수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작가들의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선 로맹 가리의 에세이『새벽의 약속』에 등장하는 모자지간이다. 영화 <전함 포템킨>에 출연했던 배우이기도 했다는 아버지를 가진 로맹 가리는 러시아 이민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는 호텔 잡역부로 일하면서 그를 양육했다. 아들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스테이크를 굽는다. “엄마 것은 어디 있어?”라고 묻는 어린 아들에게 “엄마는 낮에 더 좋은 걸 먹어서”라며, 어서 먹기를 재촉한다. 로맹 가리는 몇 시간 뒤, 부엌에서 접시에 남은 스테이크 소스를 롤빵에 발라 먹는 엄마의 모습을 본다. 로맹 가리든, 에밀 아자르든, 그의 눈부신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에게 남루함을 벗게 해주기 위해 종종거렸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인 <스완네 집 쪽으로>의 한 장면. 병약하고 심약한 소년 마르셀은 엄마가 잠자리 키스를 해주러 오기만을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마르셀이 이제 다 컸고, 나쁜 버릇이 들기 때문에 이런 아들의 습벽을 못마땅해 한다. 엄마의 발소리가 침실 밖에서 울리기만을 애끊는 심정으로 갈구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을 벗어나 그의 인생의 모든 시간에 깃들어 있다. 프루스트의 어머니는 자신도 신장이 좋지 않았지만, 천식을 앓는 아들을 위해 곁에서 품어주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그가 죽음의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엄마...”였다.
     또 한 사람, 어느 작가의 어머니가 뇌리에 들어와 박힌다. 야콥 하인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하인. 야콥 하인에 대해서 역자 배수아 씨가 전해주는 정보 말고 아는 것이 없다.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를 먼저 만나게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작가로서의 그를 짐작케 하는 것보다, ‘아들’된 입장으로서 어머니를 추모하는 애잔함에, 어떠한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내게도 닥칠 일이라는 공감과 두려움을 더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여기, 야콥 하인의 눈부신 어머니, 크리스티아네가 생생히 살아 숨쉬기 때문에 그가 가진 상실감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함은 한층 배가되고, 죽음의 문제과 더불어 다루어지고 있는 거대한 또 하나의 테마인 ‘통독에서 유대인 공동체로 살아가기’에 대한 고찰은, 200여 페이지의 분량의 책을 단숨에 읽어 내리지 못하게 하는 구속복이 되어 심신을 옥죄어온다.
    야콥 하인은 전작들을 통해 냉소와 지성이 번뜩이는 젊은 작가라는 평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토프 하인은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아들에게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과는 달리 넘을 수 없는 단호한 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아버지가 부재한다. 아니, 이 책은 오로지, 아들이 떠나보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만이 다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크리스티아네 하인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키며 제대로 된 헌화와 묵념을 바칠 수 있게 된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모유수유해서 키우신 분이며, 건강한 식단을 평생 지키셨고, 담배는 진작 끊으셨으며, 지성과 인정이 넘치셨던 자신이 아는 가장 빛나는 존재감을 가진 분이다. 그런데 유방암이다. 왜 병이 어머니를 택했는지, 의사이기도 한 아들은 납득해낼 수가 없다. 두 차례 발병을 통해 어머니는 점점 생명이 점차 소진되어가지만, 아들은 아무런 준비를 할 수가 없다.

 “어머니, 이건 너무 빠르잖아요......”

     크리스티아네 하인이 ‘크리스티아네 안네 에바’였던 무렵, 그러니까 어머니는 유대인이다. 법률에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 가족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은 나치와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 동독과 서독과 통독으로 이어지는 독일의 혼란상과 겹쳐지면서 증폭된다. 통독의 옛 동독 지구에서 유대인 공동체로 속해 사는 것은 ‘시대착오적 부산물이자 오도된 교과서적 잔존물’이라는 대다수의 시각과 ‘정통’이 아니기에 기나긴 가족사를 풀어낸다 해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대인 공동체와의 괴리감은 어머니의 출생과 죽음의 순간까지 명확하게 그 소속감을 부여하지 못한다.

    유대인인 외할아버지와 아리안 정통의 핏줄을 가진 외할머니의 결합은 유대인, 나치독일,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서 법률상의 결혼이 불가능해졌고, 어머니 크리스티아네가 ‘사생아’로 태어나고 나서, 할아버지는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탈출하지만 그 후 어디서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야콥 하인은 ‘4분의 1 유대인’이라는 태생을 가졌고, 어머니와 함께 동독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녹아들게 해보려하지만 시대와 장소가 그것을 좌절케 한다. 그리고 통독에서의 옛 동독 지구 유대인 공동체는 쏟아져 들어오는 러시아이민자 출신의 유대인들과 정통을 고수하려는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수 없어 부유할 뿐이다.

     어머니는 유방암에 걸릴만한 아무런 징후가 없는 듯했지만, 유럽의 유대혈족들 사이에서의 암 발생률을 따져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어머니는 법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태생적으로, 그리고 ‘병적’으로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아들인 야콥 하인도 유대인이라고 자부한다. 문제는 어머니의 사후, ‘법적’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 묘지에 뭍힐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어머니는 거부당했다. 그리고 이제 야곱 하인도 굳이 유대인으로 남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서장을 장식하는 것은 커트 보네커트의 『제 5 도살장』의 일부분이다. 독일의 비무장 유대지구인 드레스덴을, 무의미하게 침공하고 은폐했던 연합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빌리가, 자신이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에게 잡혀갔다왔다는 것을 주장하는 편지의 일부.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시간 개념은 지구와 다른데, 과거, 현재, 미래의 매 순간이 공존해왔기 때문에 어느 곳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인생의 전부이자 일부를 목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저 죽어 있는 상태’이므로, 다른 순간은 행복하게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빌리가 외계인의 시선을 고안해내지 않았다면, 더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 분명한 것처럼, 야콥 하인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투쟁이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네 살, 스무 살, 스물일곱, 서른 즈음의 야콥 하인과 어머니 크리스티아네의 이야기가, 생명을 꺼트려가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섞여 들어 있다. 현재에서 눈 돌리면 어디서든 어머니가 어머니답게 존재하고 있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트랄파마도어’의 시야를 투과시켜보기도 하는 그 모든 과정 속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짙게, 한없이, 대체할 수 없는 의미로 존재하기 때문에, 추억의 무게는 생의 무게를 더욱 육중하게 하고, 죽음의 무게를 조금은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마땅하지만,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내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일을.

     읽는 내내, 작가의 어머니들에게 사로잡혀 있던 나지만, 책을 덮은 후, 어느 작가의 아버지가 아른거린다. 폴 오스터의 『고독의 발명』의 등장하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살해한 어두운 가족사를 짊어진 유대인 아버지. 아버지의 사후, 폴 오스터가 아무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을 ‘발견’해내는 이야기, 그의 인생의 고비 때마다 ‘아버지스러운’ 어딘가 핀트가 맞지 않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 폴 오스터의 ‘낯선’ 아버지와는 달리 야콥 하인의 어머니는 아들과 인생을 함께 논하면서 가꾸어왔던 내 전 생애에서 유일무이한 살가움이다.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건 어쩌면 아름다울 지도 몰라요.

아직까지 죽음에서 되돌아온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누구에게든 닥쳐온다. 그리고 깨닫는다. 언제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순간이 오고, 거기에는 아무런 준비도 필요 없으며, 그것을 위안 삼을 적절한 말과 마음은 없다는 것을. 다만 그 상실감이 무뎌지는 어느 순간과 아무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완고한 부재 또한 있다는 것을. 간절히 바란다.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소중한 사람들, 언젠가 그곳으로, 어쩌면 아름다울지 모를 그곳으로 떠나겠지만, 내 앞에 가는 그 시간이 최후의 최후까지 늦장을 부려주기를.

     그곳이 아름답다면, 당신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삶의 아름다움이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어딘가로 옮겨가버린 것이겠지.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다시 삶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구?

아니 로버트 레드포드의 개츠비를 보지 않은 사람과는 개츠비를 얘기하지 않겠다.

1974년작, 잭 클레이튼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미아 패로 주연.

재즈 시대의 흥청거림과 퇴폐적인 비윤리성이,

순정한 사랑으로 포장되어 흐르는 미국인의 바이블이 원작인 영화.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로 보이지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시드니 폴락 멜로 3부작에 나오는 레드포드가 더 개츠비적이었던 것은 왜일까?

<추억>의 전투적인 페미니스트 케이트(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사랑을 하고,

작가를 꿈꾸다 헐리우드에 물들어가는 전형적인 프레피,

허먼이 내 눈엔, 개츠비, 아니 피츠제럴드의 화신처럼 보였다.

이래저래 누군가 개츠비를 연기해야 한다면, 피츠제럴드화 해야 한다면,

허먼 풍의 로버트 레드포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개츠비의 영혼의 연인, 데이지를 살펴보자.

개츠비에서 피츠제럴드를 발견하는 우리는 당연히 젤다를 닮은 그녀를 꿈꾼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약간 광기가 흐르지만,

B급 예술가의 기질 때문에 자기 안의 매너리즘에 질식하다 미쳐간,

연인을 파멸케 하는 나른한 미인, 이런 데이지 역에 미아 패로???

나른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남자가 인생을 걸기엔 너무나 빈약해 보이는 존재감.

미녀인 것을 떠나 미아 패로는 미국의 연인, 재즈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말고는 미아 패로가 빛나보였던 영화가 뭐가 있었을까?

우디 앨런???

나는 미아 패로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 1974년의 개츠비에 여전히 반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미아에 대해 이런 혹평을 퍼부어대는 사이,

다카하타 이사오는 세계명작아니메 <빨간머리 앤>(1979년)을 제작하면서

미아 패로를 모델로 앤을 탄생시켰다.

이래저래 납득하기 힘들지만, 미아 패로는 내 인생에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있다.)


그렇다면 데이지에는 누구를 쓰겠는가. 나라면 페이 더너웨이로 하겠다.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의 무법자의 여자가 아니라,

우연히도 1974년, 같은 해에 제작된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의 그 페이 더너웨이이다.

잭 니콜슨을 온통 혼란에 빠뜨린 팜므 파탈,

그러면서 근친상간에 희생당한 비극의 히로인이였던 마성의 여자.

(피츠제럴드의 저주받은 역작 <밤은 부드러워>에서도 나오는 부녀간의 근친상간...

페이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피츠제럴드 적인 <추억>의 허먼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밤은 부드러워>를 연상시키는 파멸을 부르는 여자, <차이나 타운>의 페이 더너웨이.

내게 있어 이상의, 궁극의 <개츠비>는 이들, 두 사람의 앙상블이다.

1974년이라는 시간상의 우연은 내게 필연이 되어,

페이 더너웨이가 로만 폴란스키에게 묶인 틈을 타,

데이지역이 미아 패로에게 흘러들어간 게 아닐까,

시간 말고는 전혀 신빙성이 없는 추측을 하게 한다.





 <세계명작드라마>로 방영된 TV판의 <위대한 개츠비>도 있다. 

미라 소르비노는 지성과 미모가 메이저급 영화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인디에 머물 때 가장 빛이 나는 배우이다.

<마이티 아프로디테>를 빼고 딱 들어맞는 역을 한 것을 본 기억이...

킬러로는 영 아니였고, 마릴린 먼로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며,

백치미로 밀기엔 배우의 아우라가 너무 아깝다.

데이지?

그 시리즈에서 폴 루드가 한 닉 캐러웨이를 빼면 다 잊고 싶을 뿐.

 

그러나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진짜 주인공은 내가 흠모에 마지않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아니라,

로버트 레드포드를 휘감고 나온 랄프 로렌의 의상들이다.

오드리 헵번이 요정풍의 지방시와 만났을 때,

리차드 기어가 지골로적인 아르마니를 빼입었을 때의 시너지처럼,

이 영화에서만큼 로버트 레드포드가 완벽해 보인 적은 없었다!

 

 

내 안에서 이렇게 심하게 왜곡된 영상미로 재탄생한 개츠비,

웬지 너무 완벽해서 현실감이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arine 2007-05-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영장에서 총맞아 죽은 레드포드의 뒷모습이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였습니다

문차일드 2007-05-0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아무래도 데이지의 방 불빛을 지치지도 않고 응시하는 개츠비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저는 원작이 더 강렬했던 것 같아요. 미아 패로 때문에 몰입이 안되었다는...^^;;
 

 


 

토요일 밤, 멀티플렉스의 가장 작은 상영관, 20명, 커플보다는 홀로 영화보는 싱글이 많다.

 

정말 볼 사람은 다 보았거나, 2~3번째 나만의 영화를 보기 위해 마지막으로 다시 보러 왔을까?

스포일러에 그토록 노출되어 있고, 시상식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직도 이슈가 되고,

펑펑 울었다는 그 선배의 말, 불쑥 사 둔 원작소설...

깡그리 무시하며 볼 수 있을까, 하는 노파심은 금새 증발되어버렸다.

 

 Photo Loading....

 

와이오밍이랬지?

산은 높다. 나무는 푸르다. 구름은 하얗고 몽실거린다.

양... 정말 많다. 끝이 없다...

남자, 말이 없다. 또 다른 남자, 세속적인 가벼움.

춥고, 외지고, 고되고, 말을 아끼지 않아도 충분히 고독한 그 곳에서,

세상에서 다시 없을 한 때, 한 사람을 얻었지만, 다시는 충분히 가질 수 없는,

두 사람, 남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내게도 몸을 똑바로 부딪혀왔다.

 

 

Photo Loading....

 

이 남자, 잭은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내줄 줄 아는 정직한 사람이다.

오히려 가벼워보이고, 한탕을 노리고, 붙박혀 있지 못할 방랑벽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제일 소중한 하나를 위해,

다른 것들 쯤은 언제든지 내던질 줄 아는, 마음껏 사랑하고, 갈구하는,

사랑을 기만하지 않으려는 당당함쯤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다.

 

 

Photo Loading....

 

이 남자는, 에니스 델마는, 과묵하다. 아직은 풋풋해보일만도 할 나이에도 노인의 눈을 가졌다.

늙수그레해 보이는 인상, 말투, 옷차림, 사고방식, 사랑법...

사랑해 달라고 호소하는 남자를 외면하고,

살을 섞고 함께 생명을 만들어낸 아내를 아프게 하면서,

자신의 행복 쯤은 언제나 챙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사람이다.

 

 

Photo Loading....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비슷한 감정으로 출발해, 생활과 책임과 후회로 만들어진 삶을 살다가,

그 때, 브로크백에서 누린 그 짧은 순간이 인생의 황금시간이라는 뒤늦은 깨달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베트남전 징집을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일보다 더 나쁜,

어느 한 순간 몰래 끌려가 개죽음을 당해도 너무나 당연한 일인... 그런 세상에,

남자가 남자를, 잭과 에니스가 계속 사랑할 수 있기란 세상이 허락하지도,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전한 나를 허락하지도 않았기에... 점점 파국을 부른다.

 

-난 게이가 아니야.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다시 여기 올거야?

-그럼 나중에 보자.

 

산을 내려왔을 때,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후회로 가득할 인생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아니, 키스를 하고, 사랑을 하고, 주먹질을 하는 모든 것이,

자신들도 믿을 수 없는 생경한 경험인 탓에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듯,

상실해보지 않았다면, 다시 갈구하고, 그토록 약한 끈이나마 계속 붙잡아둘 수 없었겠지.

 

에니스가 잭의 트럭이 떠나는 것을 보고, 울음도 아닌, 쓴물도 아닌 것을,

보기에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도록, 토해내려 애쓰는 것을 보고,

아... 저,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영혼아, 한번도 후련하게 감정을 토로해 본 적 없는 마초여...

에니스가 속 시원히 울어버리지 못했기에, 지켜보는 내가 미쳐버리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집에 와서 원작을 뒤진다.

[일 킬로미터도 채 못 가 에니스는 누군가가 내장을 손으로 한 번에 일 미터씩

끄집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길옆에 멈춰 섰다.

눈송이가 소용돌이치는 속에 토하려 들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여태 이렇게 기분이 더러웠던 적은 없었고, 다시 기운을 차리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내가 본 것, 내가 느꼈던 것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내장을 끄집어내는 아픔... 잭을 보내버린 에니스가 느꼈고, 그런 에니스를 보는 내가 그랬다.

 

4년만에 재회한 그들이, 서로를 삼켜버릴 듯 키스했을 때,

아, 저것은 아름다운 일, 그럴듯 해 보이는 변명거리, 생활에 얼룩진 사랑의 한스러움...이 아니라,

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의 문제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를 보내고, 최대한 나처럼 보이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번듯하게 사는 것.

너를 끌어안고, 어디가로 끌려가서 타이어레버를 이용해 타살되는 것.

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면,

잭은 그래도 장미빛 미래를 꾸려나가기 위한 위험천만한 도전을 택했을 것이고,

에니스는 누구하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망설임으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질식시켜 갔겠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브로크백의 시간을 되돌려 받는다해도,

서로를 온전히 가질 수 없을테지. 에니스는, 에니스 델마는 '고칠 수 없다면, 견디는' 남자니까.

 

Photo Loading....

 

이것이 마지막일 줄 아무도 몰랐겠지만,

일 년에 두 어번 만날 수 있었던 남자와 남자는, 사랑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니라,

이대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누구도 먼저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어,

조금씩 조금씩, 브로크백의 기억을 연장시키며, 서로를 기만하고 있었을 뿐.

 

-우린 그 때 행복할 수 있었어. 망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봐!

-나 모르는 곳에 가서, 나 모르는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면, 잭 망할 트위스트, 널 죽여버릴거야!

-날 죽이겠다고? 나는 너를 20년을 그리워해왔어.

 네가 내게 주지 않는 것을 절실히 원했다고 해서 나를 죽이겠다고?

-네가 날... 날 이렇게 만들었어...

 

서로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으로, 지금까지 감춰왔을 뿐인 상처를 들추는 그 마지막 시간마저,

에니스는 마음껏 울 수도 없다.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잭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려 눕히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 남자는 또 마음 껏 울지도 못한다. 그대로 무너져서는, 잭에게 안기지도 못하면서,

이보다 더 불행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울지도 못하는 이 남자는, 나를 또 절망에 빠뜨렸다.

 

브로크백에 묻히고 싶었다는 잭,

20년 전의 두 사람의 셔츠를 포개어 간직하고 있었던 잭,

에니스가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잭,

잭을 잃고서야 잭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 미련한 남자, 에니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기억, 세상에 다시 없을 시간을 보냈던 브로크백의 추억 뿐인 남자.

에니스의 말대로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누구도 요구한 적 없고, 한 번도 해 본 것 없는 늦어도, 가장 뒤늦어버린 맹세를 하며.

"잭, 맹세컨대......"

 

Photo Loading....

 

<브로크백 마운틴>의 유명세 탓도 아니었고,

괜찮은 동성애 영화를 만났을 때의 정치성에 대한 올바른 성향을 견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검증 때문도 아니다.

좋았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지만,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 그저 어쩌다 사랑한 것이,

우연히도 남자였더라...식으로 기만하고 있지도 않으며,

원작과 영화가 이토록 서로에게 찬사를 보낼 수 도 있구나... 내가 보는 것이 마법...이 아닌,

와이오밍, 애니 프루, 이안, 히스 레저, 제이크 질렌한, 컨츄리 송, 오리지널 스코어, 밥 딜런-

모두가 하나이며, 독립적인 몇 안되는 영화 중의 하나였다는 기분좋은 발견 때문에, 정말 좋았다.

 

내 앞좌석에서 영화를 본 외국인 두 사람,

잭이 엉터리로 부르는 찬송가 <물 위를 걷는 예수>를 들으며, 미친 듯이 웃더라.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이해못할... 정수를 이해하고 있는 그네들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예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봤을 때,

내 옆에는 우연히도, 같은 학부의 서어서문학과 스페인 강사가 앉아있었다.

거기 나오는 클래식 넘버들을 제법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영화를 즐기던 그 외국인

(아니, 그 때만은 쿠바가 스페인과 화해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음악은 위대했다!)이

영화 못지 않게 내게는 충격적이었는데, 부러웠다. 정말... 나도 큰 소리로 따라부르고 싶었다구!

(정작 나와 함께 영화를 봤던 선배에게 전화했더니,

"너랑 함께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본 것은 기억나는데, 그런 사람도 있었나?",

나만의 쓰잘 데 없는 기억일까?)

 

영화가 끝나고 당연히 엔딩롤이 올라가면서 흐르는 두 곡의 삽입곡.

원래 그 노래까지 다 들어야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 아니었나?

본편이 끝나자마자 출입문을 열고 "안녕히 가세요(빨리 나가지 않고 뭘 꾸물대는 거야?)"포스를

내뿜는 극장 크루들...

당신들 탓에 별이 하나가 날아간다구!

 

 

그는 내 친구였네                         나는 사슬을 하나 더 끊네

그는 내 친구였네                         너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신은 사슬을 하나 더 엮네

울음을 참을 수가 없네                    내가 부수지 못하게

그는 내 친구였으니까                                 :

                                             오 신이여 제가 어떻게 아나요

그는 길에서 죽었지                        오 신이여 제가 어떻게 아나요

그는 길에서 죽었지                        오직 당신만이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항상 떠돌아다녔지                   제 행복을

그는 뿌린 것을 거두지 못했어

그는 내 친구였네

 

면밀히 말해, 영화가 끝나고 나서의 2곡의 노래는 반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잊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휘청휘청 했던 것은 애써 바람 탓으로 자위하게 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이후, OST가 이렇게 나를 두들겨댄 것은 정말 드문 경험이었다.

 

에니스의 남루한 일상에 가끔씩 스며드는 잭의 꿈처럼...

고칠 수 없었기에, 내가 견뎌내야 하는 것들, 잠시 잊고 있었다.

 

 

 

                                                    ----------   2006년 03월 19일, [브로크백 마운틴] 개봉 끝무렵, 문차일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지우 2007-08-1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브로크백 마운틴 ost를 구해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찾아지지가 않네요....휴...ㅜㅜ

Jamie2204 2008-02-06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진을 퍼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삽입곡 가사는 영어가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