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야콥 하인 지음, 배수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작가들의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선 로맹 가리의 에세이『새벽의 약속』에 등장하는 모자지간이다. 영화 <전함 포템킨>에 출연했던 배우이기도 했다는 아버지를 가진 로맹 가리는 러시아 이민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는 호텔 잡역부로 일하면서 그를 양육했다. 아들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스테이크를 굽는다. “엄마 것은 어디 있어?”라고 묻는 어린 아들에게 “엄마는 낮에 더 좋은 걸 먹어서”라며, 어서 먹기를 재촉한다. 로맹 가리는 몇 시간 뒤, 부엌에서 접시에 남은 스테이크 소스를 롤빵에 발라 먹는 엄마의 모습을 본다. 로맹 가리든, 에밀 아자르든, 그의 눈부신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에게 남루함을 벗게 해주기 위해 종종거렸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인 <스완네 집 쪽으로>의 한 장면. 병약하고 심약한 소년 마르셀은 엄마가 잠자리 키스를 해주러 오기만을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마르셀이 이제 다 컸고, 나쁜 버릇이 들기 때문에 이런 아들의 습벽을 못마땅해 한다. 엄마의 발소리가 침실 밖에서 울리기만을 애끊는 심정으로 갈구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을 벗어나 그의 인생의 모든 시간에 깃들어 있다. 프루스트의 어머니는 자신도 신장이 좋지 않았지만, 천식을 앓는 아들을 위해 곁에서 품어주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그가 죽음의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엄마...”였다.
     또 한 사람, 어느 작가의 어머니가 뇌리에 들어와 박힌다. 야콥 하인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하인. 야콥 하인에 대해서 역자 배수아 씨가 전해주는 정보 말고 아는 것이 없다.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를 먼저 만나게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작가로서의 그를 짐작케 하는 것보다, ‘아들’된 입장으로서 어머니를 추모하는 애잔함에, 어떠한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내게도 닥칠 일이라는 공감과 두려움을 더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여기, 야콥 하인의 눈부신 어머니, 크리스티아네가 생생히 살아 숨쉬기 때문에 그가 가진 상실감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함은 한층 배가되고, 죽음의 문제과 더불어 다루어지고 있는 거대한 또 하나의 테마인 ‘통독에서 유대인 공동체로 살아가기’에 대한 고찰은, 200여 페이지의 분량의 책을 단숨에 읽어 내리지 못하게 하는 구속복이 되어 심신을 옥죄어온다.
    야콥 하인은 전작들을 통해 냉소와 지성이 번뜩이는 젊은 작가라는 평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토프 하인은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아들에게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과는 달리 넘을 수 없는 단호한 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아버지가 부재한다. 아니, 이 책은 오로지, 아들이 떠나보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만이 다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크리스티아네 하인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키며 제대로 된 헌화와 묵념을 바칠 수 있게 된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모유수유해서 키우신 분이며, 건강한 식단을 평생 지키셨고, 담배는 진작 끊으셨으며, 지성과 인정이 넘치셨던 자신이 아는 가장 빛나는 존재감을 가진 분이다. 그런데 유방암이다. 왜 병이 어머니를 택했는지, 의사이기도 한 아들은 납득해낼 수가 없다. 두 차례 발병을 통해 어머니는 점점 생명이 점차 소진되어가지만, 아들은 아무런 준비를 할 수가 없다.

 “어머니, 이건 너무 빠르잖아요......”

     크리스티아네 하인이 ‘크리스티아네 안네 에바’였던 무렵, 그러니까 어머니는 유대인이다. 법률에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 가족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은 나치와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 동독과 서독과 통독으로 이어지는 독일의 혼란상과 겹쳐지면서 증폭된다. 통독의 옛 동독 지구에서 유대인 공동체로 속해 사는 것은 ‘시대착오적 부산물이자 오도된 교과서적 잔존물’이라는 대다수의 시각과 ‘정통’이 아니기에 기나긴 가족사를 풀어낸다 해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대인 공동체와의 괴리감은 어머니의 출생과 죽음의 순간까지 명확하게 그 소속감을 부여하지 못한다.

    유대인인 외할아버지와 아리안 정통의 핏줄을 가진 외할머니의 결합은 유대인, 나치독일,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서 법률상의 결혼이 불가능해졌고, 어머니 크리스티아네가 ‘사생아’로 태어나고 나서, 할아버지는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탈출하지만 그 후 어디서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야콥 하인은 ‘4분의 1 유대인’이라는 태생을 가졌고, 어머니와 함께 동독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녹아들게 해보려하지만 시대와 장소가 그것을 좌절케 한다. 그리고 통독에서의 옛 동독 지구 유대인 공동체는 쏟아져 들어오는 러시아이민자 출신의 유대인들과 정통을 고수하려는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수 없어 부유할 뿐이다.

     어머니는 유방암에 걸릴만한 아무런 징후가 없는 듯했지만, 유럽의 유대혈족들 사이에서의 암 발생률을 따져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어머니는 법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태생적으로, 그리고 ‘병적’으로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아들인 야콥 하인도 유대인이라고 자부한다. 문제는 어머니의 사후, ‘법적’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 묘지에 뭍힐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어머니는 거부당했다. 그리고 이제 야곱 하인도 굳이 유대인으로 남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서장을 장식하는 것은 커트 보네커트의 『제 5 도살장』의 일부분이다. 독일의 비무장 유대지구인 드레스덴을, 무의미하게 침공하고 은폐했던 연합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빌리가, 자신이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에게 잡혀갔다왔다는 것을 주장하는 편지의 일부.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시간 개념은 지구와 다른데, 과거, 현재, 미래의 매 순간이 공존해왔기 때문에 어느 곳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인생의 전부이자 일부를 목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저 죽어 있는 상태’이므로, 다른 순간은 행복하게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빌리가 외계인의 시선을 고안해내지 않았다면, 더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 분명한 것처럼, 야콥 하인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투쟁이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네 살, 스무 살, 스물일곱, 서른 즈음의 야콥 하인과 어머니 크리스티아네의 이야기가, 생명을 꺼트려가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섞여 들어 있다. 현재에서 눈 돌리면 어디서든 어머니가 어머니답게 존재하고 있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트랄파마도어’의 시야를 투과시켜보기도 하는 그 모든 과정 속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짙게, 한없이, 대체할 수 없는 의미로 존재하기 때문에, 추억의 무게는 생의 무게를 더욱 육중하게 하고, 죽음의 무게를 조금은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마땅하지만,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내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일을.

     읽는 내내, 작가의 어머니들에게 사로잡혀 있던 나지만, 책을 덮은 후, 어느 작가의 아버지가 아른거린다. 폴 오스터의 『고독의 발명』의 등장하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살해한 어두운 가족사를 짊어진 유대인 아버지. 아버지의 사후, 폴 오스터가 아무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을 ‘발견’해내는 이야기, 그의 인생의 고비 때마다 ‘아버지스러운’ 어딘가 핀트가 맞지 않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 폴 오스터의 ‘낯선’ 아버지와는 달리 야콥 하인의 어머니는 아들과 인생을 함께 논하면서 가꾸어왔던 내 전 생애에서 유일무이한 살가움이다.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건 어쩌면 아름다울 지도 몰라요.

아직까지 죽음에서 되돌아온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누구에게든 닥쳐온다. 그리고 깨닫는다. 언제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순간이 오고, 거기에는 아무런 준비도 필요 없으며, 그것을 위안 삼을 적절한 말과 마음은 없다는 것을. 다만 그 상실감이 무뎌지는 어느 순간과 아무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완고한 부재 또한 있다는 것을. 간절히 바란다.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소중한 사람들, 언젠가 그곳으로, 어쩌면 아름다울지 모를 그곳으로 떠나겠지만, 내 앞에 가는 그 시간이 최후의 최후까지 늦장을 부려주기를.

     그곳이 아름답다면, 당신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삶의 아름다움이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어딘가로 옮겨가버린 것이겠지.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다시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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