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교사 이우평의 한국 지형 산책 1 - 백두산에서 독도까지
이우평 지음 / 푸른숲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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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구석구석 명승지를 찾아, 맛 기행을 목적으로, 일상을 벗기 위한 여유를 회복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발 딛고 서는 우리 곳곳의 생성과정을 풀어주는 현대판 ‘대동여지도’를 만났다. 현직 지리교사 이우평의 『한국 지형 산책 1, 2』는 봇짐 하나 메고 짚신이 닳도록 조선의 산천을 누볐을 김정호의 유산을 이어받아, 더욱 조밀하고 생생하게, 한반도 명소들의 태곳적 이야기와 지금의 역사를 교과서 밖으로 연장해 현장수업으로 안내하고 있다.

    기암괴석들로 눈길을 끄는 명산들을 칼라화보로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눈길이 집중되는가 싶더니, 어떻게 생성된 암석들인지 이내 분석에 들어간다. 가물가물한 지리용어들이 나오는 데서부터 가독성이 떨어지나 싶더니,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설명하는 부분 부분들이 친절하다. 모래알 하나, 공룡 발자국, 암각화, 화산지대, 종유동굴, 해저지층- 지루하기 쉬운 지형지리 이야기들이 잘 조율되어 실려 있다.

    백두산부터 시작되는 장에서 단순한 지형적 생성과정을 일러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시대적 과제를 읽었다. ‘창바이 산’이라는 중국식 지명이 국제적으로 안착되어가는 것을 환기시키는 일부터, 지키지 않으면 우리 문화가, 문화재가, 민족의 성지로 품을 수 없는 소명이 느껴진다. 명산과 해상낙원의 안내서라면 현지교사가 아닌 여행전문가의 저서들이 더 마땅할 테지만, 생성과정까지 거슬러 올라 만나는 우리 땅에 대한 애정과 책임의식을 갖도록 촉구 받는 느낌이 든다.

    책에 소개된 곳은 단순한 관광명소가 아니다. 한반도에 산재해있는 국제적으로도 보존 받아야하는 지리상의 보고들이다. 우포늪처럼 유명한 곳도 등장하고 있지만, 한반도의 작은 사막인 신두리의 해안사구같이 생소한 곳도 많다. 발길이 잦은 산과 바다는 이미 제 모습을 뺏긴지 오래인 심각한 상황들이 언제까지 되풀이될까? 막혀버린 석호에 폐수들만이 역류하는 모양새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귀한 공룡발자국 유적을 만지고 파내는 일들 사이에서 훼손되는 일들을, 일부러 만들어도 쉽지 않을 신비로운 종유석이 잘려나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이 함께 책 밖으로 나서야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설의 섬 이어도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저서에서 국제 관계 속에서 미약한 위상으로 이리저리 치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재를 읽는다. 제주도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건설한 ‘이어도 해상기지’를 두고 영토분쟁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동해바다를 온전히 지키는 것도 벅차 보이지만, 지켜내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땅이 되어주지 않을 것이다.

    30억 살이라는 한반도의 나이 앞에, 하루하루 그 연륜의 흔적을 파괴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중단해야함을 절감한다. 현장에서 듣는 교과서적 이야기가 때로는 지루하고, 넘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언제고 옆에 두고, 관심 있는 장부터 차근차근 다시 읽고 싶다. 우리 땅이 간직한 사연들 안에 우리가 깃들어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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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이오지마 총지휘관 栗林忠道
가케하시 쿠미코 지음, 신은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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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죽음의 미학은 과연 아름다운가. 피면서 지는 벚꽃처럼, 아름답게 죽음을 완성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 무사도의 정수라고 감탄해야 옳을까. 그러나 그것이 부패권력 유지와 우매한 대중호도를 위해 조작된 신화를 이어가기 위한 기계부속처럼 세뇌되어가는 것처럼 악취 나는 것이 또 있을까.


    ‘츄신구라’나 ‘백호대’, 일본이 자랑하는 집단할복으로 나타나는 충의를 나타내는 전통이 제 2차 대전의 태평양 전생의 말미에 ‘옥쇄’, ‘가미가제’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반전이나 항복을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비국민’이라고 말살되는 조류 속에서, ‘지는 것이 너무 당연한’ 전쟁에 참가해, 자살특공대가 갖는 전쟁의 미학을 온 몸으로 거부한 지휘관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쿠리바야시 타다미찌는 태평양 전쟁의 최후의 격전지, 이오지마의 총지휘관이다. 이오지마 전투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전장이었지만, 미국은 종전을 위해, 일본은 본토에 쏟아질 대공습의 저지를 위해, 공수의 역할이 애초부터 예고된 전투였다. 다른 전선들이 무너져가면서 하나같이 옥쇄로 마무리된 일본군의 패전이 공기만큼이나 당연했을 때, 쿠리바야시의 항전은 일본의 대본영과 미국의 10만 해병대와 본국을 경악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오지마는 태평양의 절해고도로 유황으로 가득한 불모의 섬이지만, 세 개의 비행장이 건설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사활을 건 전투지가 되었다. 10만의 미 해병대가 2만 2천의 일본군을 단숨에 물리치고, 최대한 서둘러 종전을 맞이한다는 상식적인 계획은 쿠리야바시에 의해 저지된다. 이오지마의 지하에 굴을 파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미군을 게릴라전으로 격멸하는 전술은 만세격돌이라는 자살공격이 널리 알려진 패턴이었던 일본적인 전술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는 지휘관이 할복을 감행할 시간을 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일본군의 전통에, 쿠리야바시는 지휘관이 섬멸되어도 게릴라로 잔존해야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패전 후 4년이 지나서까지 게릴라로 미군을 공격하는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2만 2천 일본병사의 무덤이고, 태평양 전에서 전사한 미 병력의 3분의 1이 희생된 이오지마는 그래서 두 나라의 성지로 남았다.


    쿠리야바시는 인간적이어서, 너무나 인간적인 지휘관이다. 대다수의 사병들이 지휘관을 만날 수 있을 만큼 권위에 사로잡히지도 않았고, 미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종전교섭을 이끌어내려는 합리적 투장이다. 그를 일본무사도의 화신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군군주의자로 치부할 수도 없다. 전장에서 집으로 보낸 수십 통의 위안편지에 담긴 가장의 모습이 가장 쿠리야바시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전쟁영웅처럼 허황된 신화가 또 있을까. 쿠리야바시를 진정한 군인이며, 명장으로 칭송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숫자들의 합산처럼 무의미해지는 그 소모적 전장에서, 30일 간이 넘는 살육전을 감행할 수 있는 저력에 감탄하는 것도 아니다. 전쟁이 어떤 논리로도 미화될 수 없다는 결론만을 삼키고 삼킨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의 폭력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부하들의 희생이 조국을 정말로 지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 명석한 군인이라는 뜻이다. 읽을수록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어찌됐든 그 전쟁의 (지독할지라도)수혜자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 쿠리야바시와 이오지마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심정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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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노라 에프런 지음, 박산호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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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대의 성공한 뉴요커 노라 애프런이 노년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노년을 다룬 거의 모든 책들에서 설파하는 '아름다운 황혼'처럼 위선적인 것은 없으며, 현실적으로 아름답기 위한 여성들의 분투기를 거침없이 토로한다. 타이틀과 표지처럼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고 펼치게 되었다면, 출판사의 무신경해 보이지만, 의도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마케팅 상의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가볍게 집어들었다면, 조금은 무겁게 내려놓는 과정 속에서 피해갈 수 없는 공감대를 찾았다는 것으로 위안삼으면 어떨까?

 

    로맨틱 코미디의 교과서적인 영화(멕 라이언의 전성기와 완전히 포개져있는)의 각본가와 감독으로 기억되는 노라 애프런의 첫 데뷔작은, 핵 발전소의 위험을 고발하려다 의문사한 여성을 다룬 사회드라마였다고 한다. 그의 성공에 정점에 재기 넘치는 끈적임이 없어 상큼텁텁했던 '로맨스'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영화산업 이면에 자리잡은 좌충우돌 노라 애프런 여사의 일상에 깃든 헛소동들에는 그보다 더 폐부를 찌르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20-3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시간을 비키니를 입고 지내겠다는 한숨 섞인 자조, 성형수술만 빼고 온갖 의료적 방법으로 미모와 젊음을 유지시키려는 한다는 몸부림, 몸짱으로 거듭나보려고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탈골이며 골절로 몸이 망가지곤 하는 부작용, 하나 둘 자신의 곁을 떠나는 친구들의 빈 자리를 두고 느끼는 상실감들 사이사이에 요리, 결혼, 이혼, 육아, 목주름에 대한 한탄, 뉴욕, 고급아파트, 명품, 폭로와 추문들이 버무려져있다. '로맨스'?

 

    노라 애프런은 미워할 수 없는 독설가이다. 부시 대통령을 조롱하다가, 불통이 튀는 곳은 클린턴의 지난날의 스캔들이고, 열혈 민주당원인 그녀지만 좀처럼 용서할 기색은 아닌 것 같다. 정치색을 표출만큼이나 요리법에 대한 레시피가 애지중지되고, 옛 이야기를 풀어가는 향수가 짙어지는 것을 보니, 노년을 짙누르는 중압감의 탈출구가 바로 추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름다운 황혼...하는 그럴싸한 말보다 목주름 없는 '여자'로 남고 싶어하는 노라 애프런의 솔직함이 좋다. 로맨스가 휩쓸고 간 자리 안에 여러 사랑들이 온다. 그것은 도시일 수도 있고, 아파트일 수도 있고, 목욕 오일일 수도 있고, 함께 나이들어가는 친구일 수도 있다. 노라 애프런의 영화에, 책이 로맨스의 환상을 부추기는 속에서, 퍼덕거리는 현실감각이 늘 살아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발견한 느낌이다.

 

    여자는 로맨스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를 잃고는 살 수 없다고 60즈음이 되면 결론내리게 될까? 아무튼 이 책은 '로맨스' 그 후의 시니컬한 일상에 대한 백서이다. 결론은 미모관리를 소홀히 하다가는 '목주름' 때문에 터틀렉 말고는 입을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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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T 했어요

문차일드 2007-05-2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지 마세요...ㅠ_ㅠ
 
가시도치의 회고록
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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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마방쿠는 혼돈과 변용을 넘나드는 문체를 구사하지만, 마구 뒤섞인 자신만의 문학 세계가 외려 더욱 탄탄해지는 주술이라도 부렸는지, 전작『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에 이어『가시도치의 회고록』까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아프리카 작가로 부상해버렸다. 여전히 빈약할지라도 역주가 없으면 정교하게 섞여 들어있는 대문호들의 문학적 성과들을 간과해버리기 일쑤이지만, 알랭 마방쿠가 추구하는 것이 인용과 패러디가 전부가 아님을 용케 짚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문학은 진화하고 있으며, 제 3세계가 아닌 주류로의 당당한 진입을, 너무나 아프리카적인 것을 근원으로 삼아 ‘아카데미 프랑스’를 공략하는 저력으로 삼는 것에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여전히 온점이 부재한다. 문단이 아니라 덩어리진 거대한 글줄기가 뿜어져 내린다. 군데군데 삽입된 반점들만이, 한 숨 고르게 만드는 유일한 배려의 장치이자 쉼 없는 선전포고의 역할을 한다. 다시 단단히 붙들려 혼돈 속에 섞여들지 않으면, 인간과 야생과 탐욕과 회환으로 가득한 이형의 존재가 들려주는 고해성사를 암호화하여 듣게 될 게 뻔하다. 전작에 비해 확고한 서사구조가 친절하게까지 다가오기까지 하는 걸 보면, 이제는 알랭 마방쿠가 ‘양식화’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언제까지 참신할 것인지, 그가 극복해내야 할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에 이어, 『가시도치의 회고록』은 ‘폴린 캉귀에’에게 헌정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작가의 어머니이자, 작품을 잉태시킬 설화와 민담을 들려주었던 근원의 인물(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한다!)인 셈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흔해빠진 말에 신경질을 부리던 ‘고집쟁이 달팽이’가 술집의 유구한 역사를 ‘깨진 술잔’에게 기록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노인도 노인 다름이지!”라고 일축했던 것에 반하여, ‘폴린 캉귀에’는 사라지면 안 되는 고귀한 노인이자, ‘아프리카혼이 담긴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고집쟁이 달팽이’의 이름으로 첨부된 후기에는 아예 ‘캉귀에 폴린 기술학교’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알랭 마방쿠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아프리카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종종 ‘이로운 분신’이나 ‘해로운 분신’으로 불리는 동물과 영적으로 결속되어 생사를 함께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가시도치 ‘느굼바’는 ‘키방디’의 ‘해로운 분신’이 되어, ‘키방디’가 지명한 인간들을 가시를 빼들고 ‘잡아먹는’ 일을 아흔 아홉 번을 해나간다. ‘키방디’의 음습한 악의 일면을 제어하던 어머니가 죽자, ‘느굼바’가 뽑아들어야 하는 가시의 수가 늘어만 간다. 서슴없는 ‘인간 청소’를 명하는 ‘키방디’는 어둠의 영역에 ‘잡아먹힌’ 형상이 되어가는 반면, ‘느굼바’의 고뇌와 망설임은 ‘키방디’가 저버린 인간적 면모를 닮게 된다. 인간이 야생을 악용할 때, 대체 인간과 금수의 영역은 어디서 어떻게 구분되어지는지 묻고 있는 것은, 본체인 ‘키방디’가 죽은 다음에도 왜 ‘분신’일 뿐인 자신만 살아남았는지 불신에 빠진 ‘느굼바’이다.


    인간이 야수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연의 주술을 저주 삼는 순간, ‘인간적’이라는 어느 속성은 야생에게 넘어간다. 잡아먹으려다가 잡아먹힌... 아프리카는 ‘대륙’(유럽을, 프랑스를)에게 잡아먹혔을지 모르지만, 악귀의 형상으로 살아남아 인과율에 따른 응보를 받는 것은 과연 누가될까...하는 안일한 결론을 내릴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느굼바’와 ‘아프리카적인 너무나 아프리카적인’ 알랭 마방쿠의 역습은 혼돈과 변용의 와중에서도 야생성이 듬뿍 발려진 ‘가시’를 곧추세우는 것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깨진 술잔’의 유고하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이 후속작은 한 편의 이야기를 남겨두고 있다고 한다. [외상은 어림없지(위대한 선술집이자 알랭 마방쿠가 원제로 삼은 시리즈의 출발점) 트릴로지]의 완성이 기다려진다. 그 끝에는 방점이 있을 것인지, 방점을 찍기 전에는 인생도, 기록도, 그 어느 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깨진 술잔’의 선고대로, 전 방위적으로 열린 고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끝맺음을 하게 될 런지 기대만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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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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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경제적인 주량으로 취하고 마는 내 처지가 이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다. 거나하게 취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같고, 일상과 환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저주받은 '주당'의 세계에 발 디뎌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소설의 정수(?)를 죄다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분하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말해, 지나치게 말짱한 상식의 잣대와 통념을 들이대다가는 참말로 재미없어 질뿐이다. 질펀한 농이 푸닥거리는 술판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 혼자 에비앙을 홀짝이고 있을 뿐이라면 과연 흥을 깨는 것은 누구이겠는가?

   프랑스인들이 북아프리카를 관광할 때 가장 충격을 받을 때는, 세상의 끝에서나 볼 수 있는 궁색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슬럼가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부심 넘치는 언어인 불어로 구걸을 하는 것을 볼 때라고 한다. '식민지 프랑스어'라는 어휘에 담긴 경멸과 비하를 조롱과 풍자로 맞받아치며, 그들의 언어로 블랙 아프리카를 마음껏 드러내는 동시에, 프랑스 문단의 젊은 피로 떠오른 알랭 마방쿠의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만큼 거침없이 통쾌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콩고'라는 국명을 쓰는 나라가 두 개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야 확인했다. 세계지도를 보니, 두 나라는 나란히 이웃해있는 크고 작은 나라였다.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는 프랑스령 식민지였던(커다란 쪽의 '콩고민주공화국'은 벨기에령이었다.) '콩코'에 위치한 24시간 연중무후 선술집이다. '고집쟁이 달팽이'라는 수완 좋은 주인이 경영하는 이 술집을 무대로 추레하고 패색이 짙은 사연 많은 군상들이 술독에 빠져 산다. 나라를 망치는 주적으로 지목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거치고서도 살아남은 이 술집의 유구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고집쟁이 달팽이’는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깨진 술잔’에게 노트를 건넨다.

    ‘깨진 술잔’이 써내려가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에는 쉼표를 제외하고 어떤 문장부호도 끼어들지 않는다. 대문자 없이 소문자로 시작해 한 번도 문단이 바뀌지 않는 ‘외상은 어림없지’의 비공식 일대기는 마치, 술잔이 비어있는 틈을 못 견디고 들입다 술을 따르고 마셔대고 따르는, 그 모양새를 닮았다. 콩고의 밑바닥 인생들을 ‘프랑스어 교사’였던 ‘깨진 술잔’이 술김을 빌어 풀어내는 딴죽걸기에는 기절초풍할 향신료가 담뿍 배어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지성의 보고인 문학작품들이 ‘외상은 어림없지’의 단골들의 추잡한 사연들과 버무려져있는 것을 보니, ‘식민지 프랑스어’가 ‘아카데미 프랑스어’에 철저히 되갚아주고 있는 형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전반부의 기록들이 단골손님들을 위한 술집의 연대기였다면, 후반부의 기록은 ‘깨진 술잔’의 음주기행을 담고 있는데, 그의 인생관, 문학관의 유래와 말로를 짐작케 하는 자서전이자 유작이 된다. 대륙(여기서는 프랑스)을 꿈꾸는 본토의 흑인들을 조롱하고, 콩고를 더 우매하게 만드는 군부독재의 권위를 흥겹게 격추시키고, 백인들의 신과 조상의 신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들어나는 비리의 악취들을 더욱 조장하고, 보수적이며 위선적인 식자층에 의해 고사하는 문단에 통렬한 조소를 멈추지 않는 ‘깨진 술잔’은 그저 단순한 술주정뱅이라 할 수 있을까? ‘죽어서야 제정신을 찾았다는’ 돈 끼호테와 너무 닮아서 무시무시한 그가 ‘고집쟁이 달팽이’가 부탁한 대로 마침표가 제대로 찍힌 봐줄만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취하지 않으면 결코 제 정신으로 한 시도 버틸 수 없는 쓰디쓴 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보신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마침표가 상실된 술김을 빌어서야 탄생된 뒤죽박죽곤죽의 기록들. 알랭 마방쿠가 쉼 없이 계속되는 쉼표의 행진으로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취하지 않으면 못 봐줄 것 같은 꼴사나운 인생이지만, 아류의 아류가 판치는 문단에서 고고한 콩쿠르상의 권위가 감히 먹히기나 할 법하냐는 빈정거림이지만, ‘여전히 방점 없이 계속 되는 한, 조금은 살아볼 만, 조금은 읽어볼 만하지 않겠는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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