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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도치의 회고록
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알랭 마방쿠는 혼돈과 변용을 넘나드는 문체를 구사하지만, 마구 뒤섞인 자신만의 문학 세계가 외려 더욱 탄탄해지는 주술이라도 부렸는지, 전작『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에 이어『가시도치의 회고록』까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아프리카 작가로 부상해버렸다. 여전히 빈약할지라도 역주가 없으면 정교하게 섞여 들어있는 대문호들의 문학적 성과들을 간과해버리기 일쑤이지만, 알랭 마방쿠가 추구하는 것이 인용과 패러디가 전부가 아님을 용케 짚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문학은 진화하고 있으며, 제 3세계가 아닌 주류로의 당당한 진입을, 너무나 아프리카적인 것을 근원으로 삼아 ‘아카데미 프랑스’를 공략하는 저력으로 삼는 것에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여전히 온점이 부재한다. 문단이 아니라 덩어리진 거대한 글줄기가 뿜어져 내린다. 군데군데 삽입된 반점들만이, 한 숨 고르게 만드는 유일한 배려의 장치이자 쉼 없는 선전포고의 역할을 한다. 다시 단단히 붙들려 혼돈 속에 섞여들지 않으면, 인간과 야생과 탐욕과 회환으로 가득한 이형의 존재가 들려주는 고해성사를 암호화하여 듣게 될 게 뻔하다. 전작에 비해 확고한 서사구조가 친절하게까지 다가오기까지 하는 걸 보면, 이제는 알랭 마방쿠가 ‘양식화’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언제까지 참신할 것인지, 그가 극복해내야 할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에 이어, 『가시도치의 회고록』은 ‘폴린 캉귀에’에게 헌정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작가의 어머니이자, 작품을 잉태시킬 설화와 민담을 들려주었던 근원의 인물(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한다!)인 셈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흔해빠진 말에 신경질을 부리던 ‘고집쟁이 달팽이’가 술집의 유구한 역사를 ‘깨진 술잔’에게 기록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노인도 노인 다름이지!”라고 일축했던 것에 반하여, ‘폴린 캉귀에’는 사라지면 안 되는 고귀한 노인이자, ‘아프리카혼이 담긴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고집쟁이 달팽이’의 이름으로 첨부된 후기에는 아예 ‘캉귀에 폴린 기술학교’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알랭 마방쿠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아프리카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종종 ‘이로운 분신’이나 ‘해로운 분신’으로 불리는 동물과 영적으로 결속되어 생사를 함께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가시도치 ‘느굼바’는 ‘키방디’의 ‘해로운 분신’이 되어, ‘키방디’가 지명한 인간들을 가시를 빼들고 ‘잡아먹는’ 일을 아흔 아홉 번을 해나간다. ‘키방디’의 음습한 악의 일면을 제어하던 어머니가 죽자, ‘느굼바’가 뽑아들어야 하는 가시의 수가 늘어만 간다. 서슴없는 ‘인간 청소’를 명하는 ‘키방디’는 어둠의 영역에 ‘잡아먹힌’ 형상이 되어가는 반면, ‘느굼바’의 고뇌와 망설임은 ‘키방디’가 저버린 인간적 면모를 닮게 된다. 인간이 야생을 악용할 때, 대체 인간과 금수의 영역은 어디서 어떻게 구분되어지는지 묻고 있는 것은, 본체인 ‘키방디’가 죽은 다음에도 왜 ‘분신’일 뿐인 자신만 살아남았는지 불신에 빠진 ‘느굼바’이다.
인간이 야수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연의 주술을 저주 삼는 순간, ‘인간적’이라는 어느 속성은 야생에게 넘어간다. 잡아먹으려다가 잡아먹힌... 아프리카는 ‘대륙’(유럽을, 프랑스를)에게 잡아먹혔을지 모르지만, 악귀의 형상으로 살아남아 인과율에 따른 응보를 받는 것은 과연 누가될까...하는 안일한 결론을 내릴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느굼바’와 ‘아프리카적인 너무나 아프리카적인’ 알랭 마방쿠의 역습은 혼돈과 변용의 와중에서도 야생성이 듬뿍 발려진 ‘가시’를 곧추세우는 것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깨진 술잔’의 유고하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이 후속작은 한 편의 이야기를 남겨두고 있다고 한다. [외상은 어림없지(위대한 선술집이자 알랭 마방쿠가 원제로 삼은 시리즈의 출발점) 트릴로지]의 완성이 기다려진다. 그 끝에는 방점이 있을 것인지, 방점을 찍기 전에는 인생도, 기록도, 그 어느 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깨진 술잔’의 선고대로, 전 방위적으로 열린 고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끝맺음을 하게 될 런지 기대만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