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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이오지마 총지휘관 栗林忠道
가케하시 쿠미코 지음, 신은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일본의 죽음의 미학은 과연 아름다운가. 피면서 지는 벚꽃처럼, 아름답게 죽음을 완성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 무사도의 정수라고 감탄해야 옳을까. 그러나 그것이 부패권력 유지와 우매한 대중호도를 위해 조작된 신화를 이어가기 위한 기계부속처럼 세뇌되어가는 것처럼 악취 나는 것이 또 있을까.
‘츄신구라’나 ‘백호대’, 일본이 자랑하는 집단할복으로 나타나는 충의를 나타내는 전통이 제 2차 대전의 태평양 전생의 말미에 ‘옥쇄’, ‘가미가제’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반전이나 항복을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비국민’이라고 말살되는 조류 속에서, ‘지는 것이 너무 당연한’ 전쟁에 참가해, 자살특공대가 갖는 전쟁의 미학을 온 몸으로 거부한 지휘관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쿠리바야시 타다미찌는 태평양 전쟁의 최후의 격전지, 이오지마의 총지휘관이다. 이오지마 전투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전장이었지만, 미국은 종전을 위해, 일본은 본토에 쏟아질 대공습의 저지를 위해, 공수의 역할이 애초부터 예고된 전투였다. 다른 전선들이 무너져가면서 하나같이 옥쇄로 마무리된 일본군의 패전이 공기만큼이나 당연했을 때, 쿠리바야시의 항전은 일본의 대본영과 미국의 10만 해병대와 본국을 경악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오지마는 태평양의 절해고도로 유황으로 가득한 불모의 섬이지만, 세 개의 비행장이 건설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사활을 건 전투지가 되었다. 10만의 미 해병대가 2만 2천의 일본군을 단숨에 물리치고, 최대한 서둘러 종전을 맞이한다는 상식적인 계획은 쿠리야바시에 의해 저지된다. 이오지마의 지하에 굴을 파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미군을 게릴라전으로 격멸하는 전술은 만세격돌이라는 자살공격이 널리 알려진 패턴이었던 일본적인 전술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는 지휘관이 할복을 감행할 시간을 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일본군의 전통에, 쿠리야바시는 지휘관이 섬멸되어도 게릴라로 잔존해야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패전 후 4년이 지나서까지 게릴라로 미군을 공격하는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2만 2천 일본병사의 무덤이고, 태평양 전에서 전사한 미 병력의 3분의 1이 희생된 이오지마는 그래서 두 나라의 성지로 남았다.
쿠리야바시는 인간적이어서, 너무나 인간적인 지휘관이다. 대다수의 사병들이 지휘관을 만날 수 있을 만큼 권위에 사로잡히지도 않았고, 미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종전교섭을 이끌어내려는 합리적 투장이다. 그를 일본무사도의 화신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군군주의자로 치부할 수도 없다. 전장에서 집으로 보낸 수십 통의 위안편지에 담긴 가장의 모습이 가장 쿠리야바시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전쟁영웅처럼 허황된 신화가 또 있을까. 쿠리야바시를 진정한 군인이며, 명장으로 칭송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숫자들의 합산처럼 무의미해지는 그 소모적 전장에서, 30일 간이 넘는 살육전을 감행할 수 있는 저력에 감탄하는 것도 아니다. 전쟁이 어떤 논리로도 미화될 수 없다는 결론만을 삼키고 삼킨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의 폭력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부하들의 희생이 조국을 정말로 지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 명석한 군인이라는 뜻이다. 읽을수록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어찌됐든 그 전쟁의 (지독할지라도)수혜자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 쿠리야바시와 이오지마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심정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