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 비룡소 클래식 5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프란시스 던킨 베드포드 그림, 장영희 옮김 / 비룡소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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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매튜 배리는 “두 살이라는 나이는 끝의 시작”이라고 천명한다. 자라야하는 숙명 탓에 태초의 기억을 망각하며, ‘성장’을 받아들여야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의 원형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곳’에 초대받을 수 있는 기회를 누구에게나 제공하고도 있다. 그곳은 ‘네버랜드’다.


    배리 이전에도 ‘네버랜드’와 꼭 닮은, 그러나 완전히 개별적이기도 한 모험이 샘솟는 장소에 대한 끊임없는 헌사가 이어져왔다. 떠나온 그곳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몇날며칠 끙끙대다가 결국은 그 노력마저도 망각해버리고 마는 ‘성장’한 이들에게 ‘네버랜드’란, 자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책임과 의무와 변명 이전의 천진무구한 이기심대로만 살아도 충분했던 나날로 이끄는 노스텔지어의 주문이 된다.


    조그만 젖니가 진주처럼 반짝이는 피터 팬과 네버랜드의 모험은, 일상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 때를 가진 아이들이 비밀스레 공유하는 꿈의 편린이다. 자라지 않기로 한 맹세를 깨뜨리고, 해적과 싸우는 대신 목을 죄어오는 타이를 매고 회계장부를 뒤적이는 삶을 선택해버린 이들은 추억의 영역에서마저 피터와 네버랜드를 망각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지키지 못한 맹세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아이들을 질투하지 않는 척 할 수 있을 테니까.


    국내에 나와 있는 비룡소 클래식, 네버랜드 클래식, 김영사판의 완역『피터 팬』, 그러니까 1911년에 발표된 원본 『피터 팬과 웬디』에서는 볼 수 없던 내용이, 예림당에서 나온 저학년용 『피터 팬』에는 나와 있는 부분이 있다. 피터 팬은 부모님이 “우리 귀여운 피터가 커서, 은행에서 근무하면 좋겠어.”라는 대화를 듣고, 양복을 입고 매일같이 은행에 출근하는 삶이 너무 따분해보여 집을 떠나기로 한다. 완역본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지만, 여러 판본들에서 피터 팬이 가진 시적 은유들을 현실감을 덧대어 풀어쓴 부분들은 역시, 배리의 의도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피터 팬에 대한 묘사는 배리가 ‘아이’(데이비스 부부의 아이들만이 아닌)라는 존재에 갖는 환상과 편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자신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유년에 대한 집념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동심에 대한 그의 진정성에 불순한 해석을 섞고 싶지가 않다. 아이의 이기적인데다가 무정한 행동들(피터 팬을 따라 네버랜드로 가는 여로와 모험)은 무조건적인 부모의 관용(결코 창문을 닫지 않는 달링 부부)으로 감싸여지는 시기가 분명 있다. 속을 끓이며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를 놔두고 위험천만한 모험과 일탈을 유유히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돌아갈 집에서 당연히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임을, 사랑받는 자의 우위에 선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추억이 되어 남은 『피터 팬』을 거슬러보니, 맹세를 깨뜨리고 자라야만 하는 우리가 서글펐다. 그러나 공식 속편이 나오고, 블록버스터를 닮은 전편들이 늘어감에 따라 몇 번이고 다시 읽은 『피터 팬』에서 가장 애처롭고 마음 쓰이는 인물은 단연 피터다. 모두들 피터를 홀로 남겨두고 자라난다. 웬디의 딸 제인이, 제인의 딸 마거릿이, 마거릿의 딸...가 모험을 즐기고 돌아가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알아버렸다.


    아이들이 훌쩍 자라 더는 해적과 인어와 인디언을 말하지 않게 순간이 오면, 철지난 유원지(네버랜드)의 쓸쓸하고 압도적인 고독을 견디다 못해, 매 순간의 기억을 리뉴얼하여 자신만 덜렁 혼자 있게 된 추억의 영역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으려고 하는 피터의 절망을. 피터는 웬디를 잊고, 제인을 잊고, 마거릿을 잊고... 영원의 아이로 남지만, 순간을 살아야만 하는 숙명을 택한 이래, 결코 내일로 초대받을 수가 없다.


    아이는 자라서 성인이 되면, 자신의 추억의 가장 흥미진진한 곳에 두고 온 어느 아이에 대한 사죄로, 제 아이에게 모험을 물려준다. 질투와 선망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교차하게 되는 정중앙에 피터가 자리 잡는다. 유년의 시간이 망각과 퇴색된 기억 속에 켠켠히 쌓여 무언가가 잊히는 순간과 더불어, 모험과 비일상이 마르지 않고 샘솟는 네버랜드로의 ‘한 때’의 여행은 지속된다. 그 중심에 선 피터는 ‘오늘’에만 머물다 한참 전의 ‘어제’안에 있게 된다는 것을 ‘내일’의 아이들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자라지 않겠다는 맹세를 깨서 미안해, 피터!

    대신 ‘다음’ 아이를 보낼게.

    나를 잊어도, 다음 아이를 차례로 잊어버려도, 우리는 널 잊지 않아!

    사랑을 담아 '골무'를 줄게,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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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07-06-1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부터 '다음'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데...소식이 없네요. ^^;;

문차일드 2007-06-1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당연필님, 어멋.. 셋째??? 황새가 댁으로 꼭 가기를...^^

몽당연필 2007-06-1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셋째'가 아니라요.
웬디의 '다음'아이랍니다. ^^;;;

문차일드 2007-06-1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둘째 아가쟁이가 눈에 선한데 말이죠...^^;;
웬디 다음 아이는 '제인' 아닌가요? '제인'의 다음아이는 '마거릿'이고...
 
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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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르완다는, 소수부족인 투치족이 후투족을 통치하는 왕국이었다. 벨기에는 효율적인 지배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투치족에게만 고등교육을 허용하는 등, 인종갈등을 조장하는 차별정책을 펼쳤다. 투치족이 독립을 요구하자 벨기에는 권력을 후투족에게 넘기며, 후투족의 투치족 탄압을 적극적으로 조장한다. 독립 후 후투족 출신 군부대통령이 다스리던 르완다는 인종 간 비율을 고려해야한다는 미명 아래, 투치족을 사회중추에서 배제시키고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임마꿀레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마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이 모두 교사인 집 안에서 태어난 똑똑한 아이였는데도, 자신이 투치족인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학교에서 후투족, 투치족으로 구분하는 ‘인종 출석’을 부르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던 이 소녀는 곧 르완다에서 투치족으로 태어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나치리만큼 알게 된다.

    운명의 1994년이 되기 전부터 르완다의 정국은, 후투족의 정부군과 주변국 우간다 일대로 밀려난 투치족 반군 사이의 전운이 매섭게 감돌고 있었다. 후투족 친구들 사이에서 분투하며 대학공부를 하며 후투족 청년 존과 사랑에 빠진 임마꿀레는 서둘러 귀향하지만, 고향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100만 명의 투치족이 학살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르완다 내전 속의 임마꿀레의 처절한 생존기를 볼 수 있게 된다. 가만가만 글로 써내려가는 일이 죄스러워질 만큼, 그녀의 생의 무게가 전하는 거대한 소명 앞에, 안전지대에서 결코 벗어난 적 없던 나로서는 안절부절 못한 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목도해야만 한다.

    반군과의 전쟁이 어려워져갈수록 후투족의 광기가 극에 달한다. 투치족은 ‘바퀴벌레’, ‘사악한 뱀’이기에 죽어 마땅하고, 갓난아기일지라도 죽여서 말살시켜야만 한다는 선전이 전파를 장악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종족간의 결혼이 늘어나 조화롭게 살아오던 땅이 피와 분노로 물든다. 투치족은 사냥감이다. 그리고 사냥을 하는 이들은 극악무도한 악마의 무리가 아닌, 함께 학교를 다니고, 곁에서 평생을 지켜봤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애정과 신의를 나누던 친구이자 이웃들이다.

    임마꿀레는 과연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큰오빠 에마블루만이 세네갈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학살을 피했을 뿐, 모든 가족이 몰살당한 와중에, 100만의 투치족이 죽어가는 가운데 그녀는 어디 있었을까. 후투족인 무린지 목사의 옷장만한 침실 욕실에 다른 일곱의 투치족 여성들과 91일간을 웅크리고 견뎌 낸 끝에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매일같이 들려오는 “임마꿀레를 찾아. 하나만 더 죽이면 400명이야!”라는 고함 소리를 숨죽여 들으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한 때는 친구였던 이들이 저지르는 학살극을 벽 하나를 두고 전해 들으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그러다 폭도 무리들마저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면서. 비 좁아서 번갈아 앉아야만 했던 그 작은 공간이 뼈만 앙상해진 탓에 넉넉해져왔을 때, 프랑스군이 르완다로 파병되고, 반군이 승기를 잡으면서 임마꿀레는 밖으로, 죽음이 지천에 깔려있을지라도 삶으로, 다시 걸어 나오게 된다.

    임마꿀레가 전해야할 말들이, 행해야할 용서가, 멈추게 해야 할 또 다른 학살이 분명 있었기에 살아남았다-라고 한 줄로 써버릴 수 없는 회한이 온 몸을 뒤덮는다. 용서도 할 수 없고, 잊지도 못하는 대다수의 투치족들이 지금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힘겹게 생존해간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 친구와 이웃에 의해 내 가족의 피로 물든 그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상.

    식민지배가 남긴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어제의 반군이 정부군이 되고, 오늘의 정부군이 망명한 반군이 되어 언제까지 계속될 런지 모를 참극의 사슬을 잇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있다. 죽고, 죽임으로만 되갚는 내전으로 생지옥을 겪는 그 나라들을 몇 장의 보도사진과 논픽션으로 접하고 마는 세계인에게 임마꿀레가 전하는 분연한 메시지는 분노와 복수가 아니다. 진정으로 용서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희생된 이들의 자리만큼 부여된 사명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 임마꿀레가 살아남은 것은 아직도 해야 할 말과 용서와 바꿔야할 미래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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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책장 정리를 하고,

책이 늘어나는대로 쌓아두고 했더니만,

위태위태한 책무덤이 와르르르 무너지기를 반복,

큰 맘 먹고 다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뒷심이 부족해

되는대로 꽂아두었을 뿐,

이런 것도 정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참담합니다.

앤 페디먼 여사께서 보시면 버럭버럭 하실 게 분명합니다.

서재 결혼시는 것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3개월 동안 늘어난 책을 대충 꼽아보니,

 

 

[도스또예프스끼 한정판 전집]

[네버랜드 클래식 전집]

700페이지 이상 거대합본의 대량유입

온다 리쿠

알랭 드 보통

이벤트 도서

고전, 동화, 그림책 다수

 

 

일단 꽂아두는 데 의의를 두는 정리였다는,

대충주의, 귀차니즘의 역습의 표본이었다는 결론.

 

그래도 이것으로 한달 정도는 버틸 수 있게 되었기를...


 

 

 

 
여기 있는 책장은 문차일드의 방에 있기 때문에
변동사항이 극히 드물고,
그나마 정돈되어 있습니다.
(즉, 보이는 곳만 정리했다는 말씀...)

 

 

 
 해리 포터 7부가 나오면 당장 지각변동이.....
 
 
 
 
 
여기서부터는 서재방입니다.
 

 
하루키, 폴 오스터, 온다 리쿠, 알랭 드 보통...
미국 문학과 일본 문학, 세계명작,
그 외 분류 불가능한 뒤죽박죽-
한심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는 되는대로 꽂아두기-
 
 
 
 

 
 
 
동화와 그림책,
물론 문차일드가 보려고 모은 것입니다.
 
4세부터 80세 이상(물론 노안으로 고생안하신다면^^)까지
커버 가능한 문차일드 도서관이랍니다.
 


 
동화와 그림책 책장 두개는 거실로 이동
조카들 보라고 낮은 책꽂이에 꽂아둔 책들은
정리 불가능
 

 
 
 
 
대하소설이 많은 책장
한국 소설 책장은 정리 불가능이에요.
책장이 모자라요...
 
 





[아리랑] [ 태백산맥] [한강]
[수호지] [삼국지]
[이병주 전집]
최인호, 조정래, 김훈.....
 
 
 

 
 
이 책장은 아빠의 취향대로 정돈하시기 때문에
함부로 손 댈 수 없음.
대부분 문차일드가 선물로 사드린 책들.
 
 
 
 
문예지와 애니메이션 잡지 등등...
한국 문학 서가를 손댈 수 없어서 정리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만,
마음대로 배치를 바꾸면 아빠가 싫어하실 수도 있거든요.
제가 그 맘 이해하고도 남지요
 
 
 
저는 새 전집을 사는 것보다
예전에 빌려읽은 책을 하나씩 마련하는 편이라
새 책이 늘어났다는 감각이 별로 없어요.
 
 
그나마 책 무덤을 전부 해체해서 꽂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한달 정도 버텨봐야겠습니다.
 
 
책장을 들여놓을 곳이 이제는 없는 겁니다...
ㅠ_ㅠ
 
 
 
 
그나저나,
프루스트부터 앤서니 브라운까지...
문차일드 도서관의 정체는 뭘까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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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6-0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집류가 많군요 인상깊게 봤습니다 코스모스와 나니아 연대기가 눈에 자꾸 들어옵니다

문차일드 2007-06-0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뭐든 읽다보니... 그것이 곧 특색이고, 무색이 된 것 같아요.^^

몽당연필 2007-06-19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서니 브라운....넘 좋아요. 적극 추천!!
그런데 책이 많음에도 겹쳐서 꽂혀있는 책이 없다니...부럽습니다.
저희집엔 위의 빈공간에도 무조건 쑤셔넣는데...ㅠㅠ

문차일드 2007-06-1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몽당연필님, 인증샷 올리고나서 바로 가로쌓기 돌입했습니다. 부러워마세요... ㅠ_ㅠ

아영엄마 2007-06-2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문차일드님, 책이 너무 너무 많으시네요!! 거기다 저 깔끔한 책장들. 정말 부럽습니다. (저랑 같은 이미지 쓰시네요. ^^)

genie- 2008-01-2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T^T
 
희망수첩 이야기
한창욱 지음 / 새론북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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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론만 나열하는 일방통행의 자기 계발서가 아닌, 공감대를 이끌만한 드라마를 가진 구조가 인생과 성공의 법칙들을 전하는데 많은 시너지를 불러일으킨다. 30대의 나이에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과 더불어 파산지경에 이르고, 패배감에 젖어 자살충동을 느끼는 S가, T라는 멘토를 만나 성공을 이루는 과정을 담고 있는『희망수첩』은 저자의 의도가 그대로 휘발되지만은 않았던 한 권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구성으로 출판계를 풍미한 어느 자기 계발서와도 닮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운전사 찰리와 자수성가한 사업가 조나단이 주고받던 마시멜로 법칙은 여전히 ‘~이야기’류의 확산에 정점에 서 있는 듯하다. 실패와 가난에 굴복해서 좌절감에 찌든 젊은이와 인생을 관조하며 성공으로 이끄는 법칙들을 설파하는 자수성가형 인물들의 예측 가능한 문답들.

    일방적으로 나열되는 성공의 법칙들은 호소력을 얻기보다는 자기 계발서들을 식상하게 만드는 ‘습관성 저술’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고사들을 인용하거나, 토막토막 삽입되는 주변인들의 경험담에 이입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약간의 창작이 가미되고, 인생살이의 희로애락에 살을 붙이고, 실패와 성공 사이의 롤러코스터를 닮은 상승과 하강곡선을 이야기하고, 실패와 가난을 겪었기에 더욱 값진 성공과 부에 대한 판타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들이 수긍이 간다. 창작이 가미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을 넘어선 실상을 충실히 살아낸 역할모델을 심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희망수첩』은 가독성이 좋은 것에 비례하게 의아한 점이 눈에 띈다. 어투와 문체가 매끄러운 번역물을 상기시킬 만큼, 국내도서가 아닌 외서를 연상케 하는 면모가 의아스럽다. 실패에서 성공가도를 향해, 진정한 부와 성공을 지향하면서 여러 고난들을 통해 다시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주인공 S의 상황이 의문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색한 문어체로 서술되는 전개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성공하는 사람이 지혜 다음으로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밝은 미소,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지, 철저한 시간 관리, 실패를 반전의 기회로 삼는 용기, 잔잔한 여운이 남는 대인관계, 끊임없는 자기 개발이 있어야겠지.” (P150)

 

"그리고 이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는 작은 선물이오.”

“나는...... 사, 사랑을 모르는 바보, 천치였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국의 멋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멋진 여성과 벽난로 앞에서 나누는 뜨거운 사랑이 지상 최고의 사랑인 줄로만 알았다오. 천성이 우둔한 때문인지 얼마 전에야 깨달았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멋진 자동차를 갖고 싶어 하듯이 일종의 소유욕이라는 것을. 갖고 나면 이내 싫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P243)

 

    끝내 가난과 패배의식을 벗고,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할 줄 성공한 부자 되기’를 담은『희망수첩 이야기』에서, 현실성을 취약하게 만드는 커다란 요인이 저자의 문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아쉽다. 매 순간 스쳐 지나는 성공의 기회를 잡지 못해 두고두고 후회와 자조만 하는 실패한 이들이 집착하게 되는 매뉴얼의 형상화가 곧, 닮은꼴의 자기 계발서의 범람을 부른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는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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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 조선 지식인 시리즈
고전연구회 사암.한정주.엄윤숙 지음 / 포럼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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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을 경계해야하는 준엄한 이유가 담긴 명문들만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일단은 읽을 만한 가치에 논박할 것이 없다. 문제는 스스로 발굴한 문장이 아닌 고로, 휘발성이 짙다는 것이다. 힘겹게 한 줄 한 줄 독파해나가다가, 불현듯 깨달음을 주는 단 몇 줄의 광명을 발견하는 기쁨을 아는 이들에게는 그리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것이 한학이어서 조예가 깊은 우리 시대의 선비가 풀이해주는 운치 있는 책들이 속속 나와 주고 있는 요즘이라면 더더욱.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는 벌써부터 시리즈가 갖는 한계성을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일단 타이틀의 참신함으로 주목받는 것에 성공하자, 그 열기가 식기 전에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후속작이 전작과 어떤 차별성을 두고 있는지 모호하다.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까지, 명문들을 인스턴트식 잡문으로 대하게 만드는 구성이 몹시 거슬린다. 몇 번이고 되새기면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색은 잘 갖추었으나 거듭되는 재탕으로 인해 타이틀의 참신함마저 희석되는 듯하다. 앞으로 나오는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까지, 한 권으로 나와도 충분한 책을, 다섯으로 늘려놓은 인상마저 준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말로 일어난 사단의 폐해를. 적절히 침묵하지 못해  그간의 모든 신망을 잃는다거나, 행동이 따르지 않는 빈 말만 능하다는 평가, 달콤한 말만 하다가는 아첨꾼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조선 지식인들이 성현에게서 얻은 말을 아껴야하는 이유와 후대에게 전하고 싶은 적절한 말하기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면서도 가장 손쉽게 헝클어져버리는 덕목이지 않을까. 간언에는 귀를 닫고, 독설에는 능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이즘에는 스스로를 사소하게 만드는 말재간만 들려오고, 침묵의 미덕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토막토막 분절된 명문들이 조선 지식인들의 저서에서 극히 일부분만 발췌되어 실려 있어, 어떤 사연을 담고 쓰여 진 대목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좋은 글귀 모음집이란 흔한 인상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책이 되어버린 것이 아쉽다. 소상한 소개가 아니더라도, 길지 않은 원문을 실어 다른 해설들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원문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해설서들에서만 손쉽게 따와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마저 든다.


    연속된 시리즈의 후광을 입고, 잠시 반짝거리고 주춤하게 될 듯싶은 출판물 같다. 차라리 청장관 이덕무의『사소절』한 권을 진중하게 읽는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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