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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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 앞에서 김훈의 신작을 읽고 있노라 말머리를 꺼냈더니, 묵묵한 독서가이신 아버지께서 한 말씀하신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거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당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철민과 맹인안마사 김복희는 대체 무슨 사이였던 거냐? 빗살무늬 토기랑 소방관은 또 무슨 상관이 있고?" 참 불친절한 데뷔작이라는 것이 아버지와 나의 공론인데, 언젠가 유력일간지에 실린 평론가의 서평에서도 비슷한 대목을 발견하고 조용히 웃어버렸던 적이 있다. 그리고 『공무도하』에는 어느 저작보다 데뷔작의 추억이 짙게 묻어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뭔가 말로써 말해버리면 점점 다른 형상의 것이 되어가는 것 같아 머쓱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던 밥상머리에서 오간 질문의 답이 과연 거기 존재하긴 할까, 의심하며 김훈식 문맥을 힘겹게 등정한다. 

 대대로 뿌리박고 살았던 이들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갯벌은 주민들이 '공유'하는 땅이 아닌 '국가의 공공연한 땅'이기에 간척사업의 진행과정과 전망에는 그네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미군이 10여년을 점유하며 포탄과 탄두를 가득 채워두고 떠난 바다를 돌려받는가 싶더니 방조제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자본과 투쟁해야 하는 '해망'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 않은 짠 내음으로 가득하다. 해망에서 벌어지는 굵직굵직하고 사소한 비일상과 일상의 아귀다툼은 토박이들과 흘러들어온 이들의 밥벌이 이상의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느새 사그러 들고 마는 이슈들의 총제이다. 해망의 이슈들로 밥을 벌어먹는 신문기자 장정수와 홍수로 쓸려가 버린 창야 출신의 출판사 직원 노목희 사이에는 공유되지 않는 추억의 영역에서 동일하게 등장하는 인물군상들이 엮여져있다.

장정수가 쫓고, 적어내는 사건사고 기사들은 데스크의 "만날 똑같으니 언놈이 이걸 신문이라고 읽겠나. 터지고 무너지고 파묻히고, 뒈지고……"(p16)라는 말처럼 밥벌이에 도움이 안 되는 진부함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들의 그 비루하고 난폭한 말투는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근거 없는 적개심이거나, 위안으로 연륜을 과장하려는 허세"(p16-17)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장정수의 기사는 "쓴 기사보다 안 쓴 기사가 더 좋다. 그게 더 진실돼. 안 그래?"(p314)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반박할 수 없음을 그도 알고, 우리도 안다. 비루한 밥벌이의 수단과 묵혀두고 덮어두어야 그릇되지 않은 일들 사이의 갭이야말로, 김훈의 문장이 때로는 진저리처지는 이유일 것이다.

창야에서 노학연대 활동을 했으나 떳떳하지 못한 전력을 가지고 해망으로 숨어든 장철수와 베트남에서 해망으로 시집왔으나 가출한 후에의 모습은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의 장철민과 김복희의 관계처럼 딱 규정지을 수 없는 유대감이 흐른다. 백화점의 화재진압을 하다 귀금속을 몰래 빼돌리고 퇴직한 소방관 박옥출은 '소방관 장철민'의 보다 세속적인 모습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옥출과 장철수가 장기밀매(신장불법매매자와 판매자)로 엮이는 것은 저 불친절한 데뷔작의 문제적 인물 장철민이 장철수와 박옥출로 분리되어 재등장하고 있는 것을, 원래는 한 몸으로 불가해한 정신을 공유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정수는 끊임없이 해망으로 파견을 나간다. 홀로 방치되었다가 개에 물려죽은 아이의 엄마 오금자를 찾다가 멈칫하고, 대형크레인에 깔려죽은 여고생 방미호의 아버지의 방천석의 행방을 끝내 추적하지 못하고, 도난행위에다 불법장기이식을 받고 해망의 유지로 변신한 박옥출을 만나 껄끄러워하다 보니 어느새 해망발 단신들은 기사화될 가치를 잃고 만다. 장정수가 냉혹한 밥벌이와 불편한 양심 사이의 간극을 토로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상인 노목희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죽은 애 엄마도 냅둬, 그 소방관도 냅두고, 냅둬야 해. 놓아주라구.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불쌍한 거지"(p129) 장정수의 간극을 극히 단순화해서 위안을 주었던 노목희가 놓아버린 붓을 회복하러 스위스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냅둠의 미학'을 알고 있는 이의 자기회복력이라고 부르면 괴이쩍은 것일까?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p35)라고 천명했던 장철수의 자기혐오로 가득 찬 추도사는 산 자가 감내해야하는 정확한 몫을 짚어내고 있다. 끝내 강을 건너 불귀의 몸이 된 백수광대의 죽음을 아내 여옥이 슬피 노래했다는 고대시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서 김훈이 빌려오고 싶었던 것은, 자기혐오를 껴안고 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너지 못한 자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일 것이다. 김훈식 문맥을 등정하는 일의 고된 것은 정상에서 맞닥뜨려야하는 것이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게 사는 인간사'인 까닭이다. '냅두고, 냅두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번민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삶을 긍정하기를 단념할 수 없는' 강 건너의 건너에 머무는 동안의 치열한 분투와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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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스위트 홈
장정희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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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집'이라는 어감을 좋아한다. 참신한 시도와 발칙한 실험이 가득할 것 같은 설렘을 느끼며, 등단하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작가가 풋풋한 감성을 가득 담아내었을 건만 같아서. 꼭 그럼 마음으로, 만나본 적 없는 작가의 첫 작품집을 골랐던 나는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멋대로 인상지었던 기대에 전복당하며 묵직한 소설적 무게에 휘청대고 만다. 장정희의 『홈, 스위트 홈』은 타이틀과 표지처럼 달콤하지도, 말랑하지도 않으며, 삶의 씁쓰레한 이면들에 대한 고독과, 상처로 얼룩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도와 파산이 가족을 해체하고, 질병과 가난이 가족을 짐스럽게 만든다. 80년대의 K시(광주)의 소요와 혼돈이 배경으로 등장하는「스무살」에 비추어 아프고 고단했던 지난 세대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기보다, 좀체 경기회복을 체감할 수 없는 붕괴된 가정경제와 돌이킬 수 없는 가정파탄의 실상은 스무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진행형이기에 결코 낯설지가 않다. 그러한 가정사 안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은, 끔찍하리만치 변한 것도 없고, 회복 불가능한 일상을 묵묵히 감내하며, 단 한 번의 일탈에 모든 것을 내맡기려 하기도 한다.
 

가족이란 선택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도 묶여있기 때문에, 애정이 애증으로 화하기 십상인 관계의 결정체이다. 가족부양을 위해 인적도 드문 주유소에서 기름내에 찌들어 사는 여자에게, 눈길에 발이 묶인 남자와의 하룻밤은 폭발적인 위안이이기도 하지만 곧 완벽한 단절로 이어진다(「주유소」). 병든 노모가 죽자 집을 팔고 지하의 단칸방에서 자유를 찾았다고 느끼는 등이 굽은 여자는, 집을 산 도회지의 남자(아내의 불륜에서 도피해 온)에게 끌려 몰래 드나들다 취중의 관계를 맺게 되지만, 다음날 여자를 맞은 것은 열쇠가 교체된 집이다(「봄 날」). 일생일대의 일탈은 왜곡된 소통의 결과일 뿐, 오히려 남은 삶을 더 지난하게 만드는 새롭게 예고된 고독과 상실의 재확인이다.
 

악다구니가 되어 아득바득 살아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의 현장이 이다지도 불편한 이유는, 개인의 문제는 저마다의 특수한 사정이 있지만, 가정의 문제는 어딘가 모르게 닮은 구석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학원에 출강하고 정당 활동에 힘을 쏟는 남부럽지 않은 지위의 남편으로 부러움을 사지만, 정작 성적인 문제를 겪는 아내는 채털리 부인과 닮은 충동적인 욕구에 시달린다(「푸르른 기억-앵무새」). 불륜으로 임신한 아내를 자신의 무정자증으로 인해 보내주고 신체모형을 만들어 파는 남자는, 죽은 애인(남장이 잘 어울렸던 여자)과 닮아 자신을 쫓았다는 여자가 원하는 은밀한 부위의 모형을 뜨도록 허락한다(「마이 트윈스」). 남모를 문제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을까마는, 곪아터진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고 후유증을 남긴다.
 

이렇게 일관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받고, 타인과의 소통에 심각한 문제를 겪는 이들을 그리는 작가의 감수성에 걱정마저 들었다. 격변의 80년대를 살았던 청춘일 때도, 지독한 스무 해를 보내고, 다시 스무 해 이상을 보냈지만 여전히 이름 모를 분노와 방황에 삶과의 화해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그가 한 데 모은 이 단편들은 작가의 절절한 자기성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삶에 대한 도피가 아닌, 인정과 직시의 결과물이다. 이토록 무겁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달콤함과 상처가 공존하는 삶일지라도, 기쁨은 찰나, 고통은 영속처럼 느껴지는 체감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깨달음 때문인지도. 


질척이지 않는 가벼운 소통과 가족이 부재하는 일상의 판타지에 너그럽고, '쿨'한 관계에 열광하는 세대들에게 장정희의 소설집은 버거울 수도 있다. 낯선 작가와 발랄한 표제와 표지에 이끌려 우연찮게 조우했지만, 글자 하나에도 삶의 무게를 얹을 줄 아는 정공법을 구사하는 작가를 발견했다. 한 편 한 편 힘겹고 눈 돌리고 싶은 이야기의 연속이었지만 이다지도 큰 고통의 뒤에 연이어 더 큰 고난이 올 수도 있을지언정, 달콤한 인생이 곧 씁쓸함과 대면하고, 고통 뒤에는 언젠가는 분명 위안이 따른다는 것을 믿고 싶어진다. 기쁨과 고통은 샴쌍둥이처럼 한 몸에 깃든 두 개의 영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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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jhe 2010-03-09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희입니다. 애정으로 깊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우주피스 공화국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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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지의 언어는 모호하고 불친절하다. 그것이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지라도 인물들은 소통이 부재하는 낯선 방식으로 대화하고, 이질감에 부유하기 마련이다. 신작『우주피스 공화국』은 거듭되는 데자뷔와 미묘한 엇갈림이 축척되면서 발생하는 시공의 뒤틀림이 섬세한 묘사 속에서 극대화되고 있다. 부정확한 목적지로 향하는 망명자의 후예는 영원히 닿을 수도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그 뒤틀린 시공간을 유골이 담긴 가방을 들고 떠돈다. 그 자신도 곧 가방 속의 유골과 같은 처지가 되어버릴망정.


리투아니아 접경지대에 존재한다는 작은 공화국 '우주피스'를 찾아온 '한' 출신의 동양인 할은, 우주피스의 망명자였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모국을 찾으려한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인들에게 '우주피스' 공화국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만우절에 독립을 선포한 농담공화국에 불과하다. 리투아니아어로 '강 건너 저편'이라는 뜻이며, 프랑스어로는 '화장실'을 뜻한다는 '우주피스'는 결국 고유하게 존재하는 어느 곳이라고 증명되지 않는다. 우주피스 어를 하는(현지인들에게는 방언으로 치부되는) 공화국에 관한 소소한 기억들을 가진 이들과 조우하지만, 할은 현지인들과도, 우주피스 인들과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없다.


할은 우주피스에의 닿지 않는 여정에서 요르기타라는 미망인을 만나 모국을 추억하며,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눈 속에 파묻힌 소박한 촌락에서 죽은 아들 게르디할 대신 제비를 키우며 사는 노파 요르기타를 만난다. 요르기타의 남편, 게르디할의 아버지, 노파 요르기타를 만나러 가는 망명자 모두 할 자신인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교차할 수 없고, 교차해서도 안 되는 평행우주의 한 단편이 뒤틀려 발생한 초시공이라도 되는 것인가.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스쳐 지나며, 예정된 최후를 향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근근이 전해진 기억을 통해 건재하는 망각의 나라는 망자가 되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강 저편, 생의 저편일 수도 있겠다.


농담 삼아 선포된 독립국과 망자의 넋을 잠재울 유일무이한 안식처가 동음이의어로 끈끈히 붙어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대척관계의 또 다른 은유일지도 모른다. 공화국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대부분이 암울한 최후를 불러오는 진실보다는 남겨진 자들을 위한 소소한 위안이면 충분할 런지도. 스틱스 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다. 최후의 강을 건너기 전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레테의 강물 한 모금으로 이승의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강 건너의 존재한다는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건너편이기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삶을 비로소 완전히 망각해버려야 다다를 수 있는 최종 종착지를 가리키고 있다.


시공이 뒤섞이고, 추억과 망각이 혼재하고, 떠들썩한 유흥과 가방 안의 유골이 공존하는 『우주피스 공화국』의 예정된 결말은, 영원한 순환구조이므로 죽음은 곧 삶의 연장선상이다. 할의 죽음과 게르디할이 요르기타의 젖을 빠는 장면이 연이어져 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일지의 쓸쓸히 정제된 모호하고 불친절한 언어는, 동시대인들의 완전한 소통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면서도, 존재 이면의 근원적 순환 고리가 영속하는 한 완전한 절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유골이 든 가방을 지닌 채 경계를 넘나드는 망명자의 여정에는, 이제 삶과 죽음에 대한 은밀하고 간곡한 의지가 깃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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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가 간다 -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한재호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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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취업준비군 젊은이들을 수식하는 무수한 단어들은 더 이상 낯설지도, 익살스럽게 들리지도 않는다. 이 거대한, 시스템의 저편에 도사리는 일련의 소외된 계층에 의해 주도적으로 번지는 암울한 공감대가 날로 공고해져만 간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과 비슷한 확률로 탈출과 비상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합류하고 추락하는 세 또한 줄어드는 일 없으니, 그들을 한숨과 우스갯소리의 영역에서 종종 확인하는 일은 필수불가결한 숨구멍 같기도 하다.
 

레이먼드 챈들러와 찰스 부코우스키를 모범 삼았다는 작가의 프로필은『부코스키가 간다』의 가장 친절한, 그리고 유일한 가이드라인이 되어주었다. 추적과 불모. '부코스키'를 따라, 백수가 걷는 도시 여정은 추적과 불모의 응축된 시공의 한 단면이다. 무엇하나 심각할 것 없으며, 누구라도 동참가능하고, 기원을 묻는 것은 게임의 룰이 아니며, 전임과 후임이 도시전설에 필요한 만큼만 자생되는, 맨 체이싱 게임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은 진지함과 경박함 속을 누비며 일상의 누추한 모험을 지속한다.

친구의 결혼식이나 취직소식에 무덤덤한 축하를 하고, 지속적인 응모와 짜깁기 매뉴얼로 응시원서를 쓰고, 불쑥 굴러들어온 대로 그렇게 나가버릴게 빤한 같은 처지(구직)의 후배('거북이')와 동거를 하고, 도시의 외진 구석까지 흘러들어온 '부코스키 전설(비가 오면 아침 9시에 슈퍼를 닫고 어딘가로 향하는 '부코스키'라고 불리는 특정인)'에 주춤주춤 동승하는 '나'는 소설적 주인공이 되기엔 한 없이 부족하고, 그가 겪는 도시괴담조차 일상의 또 다른 연장선상이나 다름없다. 백수적인, 너무나 백수적인 백수문학의 현장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최상의 설정인 셈이다.


비가 오면 슈퍼의 문을 닫고, 검은 우산을 받쳐 쓴 채 하염없이 도시를 헤매는 부코스키를, 마지못해 한다는 식으로 미행을 일삼다가 우연히, 우연이 아님을 발견하는 사소함 속에는, 냉혹한 도시의 생존법칙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심심풀이 삼아 이 입 저 입으로 퍼져나가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태도로 흘려듣는 듯하지만, 꼭 다음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부코스키를 쫓는 나, 그런 나를 쫓는 후임자에게로, 비 오는 날 하릴없이 도시를 쏘다니는 이를 추적하는 사소한 모험이 대물림된다. 이것은 부코스키 또한 전임 부코스키를 쫓았던 것에 불과했다는, 실상을 알고 나면 식상하기 이를 때 없는 도시전설의 실체와도 같다.


기약 없는 이력서, 유명무실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행위나,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를 부코스키의 추적게임이나 지극히 비생산적인데도 끊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시 곳곳에 산재해있는 '30살 소년'들이 썩 다를 바 없는 사연들을 공유하며, 타인과의 단절과 소통부재에 시달리다 못해 희미해져가는 나날들에 대한 보고서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와 가장 그럴 듯한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은 수상쩍은 사연으로 동거하게 된 '거북이'도 아니고, 포장마차, 지하철 등에서 부코스키 전설을 소모적으로 나누게 되는 타인들도 아니고,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왕따 초등학생인 것이 참으로 씁쓸하다.


거대한 청년실업군, 백수들의 자화상을 목도하기 위해 백수적 일상을 타박타박 따라 걸었다. '좀비 같은' 출근행렬 속에 합류하는 것이 최종목적일 테지만 어설픈 미행으로 보내는 치기어린 하루, 또 하루의 무의미한 축척을 확인하는 난망함. "할 일 없으면 뭐라도 해요. 쓸데없는 짓 말고요. 그래도 밥벌이는 해야죠."라는 타박을 들어도 어쩔 수 없고, 왕따 초등학생한테 왠지 말이 잘 통한다는 칭찬의 말을 들어도 떨떠름할 뿐. 실체 없는 음모론 마냥 부코스키를 쫓는 30살 소년군상들 그 자체가 도심 속에 뿌리박힌 괴담의 몸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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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엔 도서관에 가자 독깨비 (책콩 어린이) 2
미도리카와 세이지 지음, 미야지마 야스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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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을 책으로 채워두고도, 책 무덤 때문에 때로는 방문이 열리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도 도서관 나들이는 언제나 특별한 일상의 모험이다. 천정까지 가득한 가지런한 서가의 숲에서 매혹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내가 좋다. 나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 동안 열심히 읽고, 대출 중인 책이 돌아오기는 기다리는 심정이며, 검색은 되는데 제자리에 꽂혀있지 않은 행방불명의 책 앞에서 절로 입이 나오는 경험을 있는 이들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이 즐길 수 있는 아주 예쁜 동화를 만났다.


『맑은 날엔 도서관에 가자』를 읽으면 지브리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이 떠오른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년 소녀가 나오고, 도서관과 골동품 가게를 오가는 계단 높은 장소의 특별한 일몰, 고민 많은 장래와 풋풋한 첫사랑 등, 물론 시즈쿠와 세이지는 진학과 유학을 앞둔 꿈 많은 중학생이었지만. 소설가인 아빠와 이혼하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시오리는 구모미네 시립도서관의 단골이용자이자 열혈 팬이다. 게임에 몰두하는 주변의 친구들과 달리 '그 시간이면 책을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독서광으로, 단순히 책만 읽고, 빌리는 공간이 아닌, 연일 버라이어티한 일들이 벌어지는 구모미네 도서관의 산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서관에서의 모험담? 일상적으로 대출, 반납 이외의 일들에 무감한 이들이라면 고개를 갸웃할 지도 모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서관의 주요 업무 이상에는 관심이 적다. 사서로 일하는 사촌 언니 덕에 시오리는 구모미네 도서관에서 펼쳐지는 여러 작은 모험들에 참관하고, 때로는 직접 그 모험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전쟁과 예전에 있었던 미납벌금 등등의 사정으로 60년 만에 반납된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귀한 식물도감을 훼손해버려 전전긍긍하는 초등학생 커플의 절판본 구하기, 좋아하는 삽화가의 책을 모으려고 도서관 책을 가져가버린 아이의 사연, 도서관 문화행사에 연사로 초청된 시오리의 아빠……


도서관에서, 책을 통해 만나게 된 다양한 인물군상들은 저마다의 책에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손짓하기도 하고, 공감대를 나누며 특별한 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책을 통해 다양한 로망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책에, 책이 가득한 공간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동화는 시종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인상을 안겨줄 것이다. 하나같이 반듯하고 질서정연한 끝맺음을 보여 다소 정물적이고 착하기만 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 권의 책은 그대로 한 권의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표지를 넘기면 거기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 따라서 나에게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도서관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문이 있는 곳이다"(p7~8)


도서관에서 무수한 세상과 만나는 시오리에게 비 오는 날보다 훨씬 더 많은 '맑은 날 도서관에 가는'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대로 도서관의 역사가 된 60년 만에 돌아온 책이랄지, 도서관에 초청된 유명 소설가랄지, 잃어버린 절판본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일이랄지의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일을 겪지 못하면 또 어떤가? 도서관은 늘 가득한 매혹과 설렘으로 우리를 모험 이상의 곳으로 초대하는 마법의 공간임을 이미 알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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