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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피스 공화국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하일지의 언어는 모호하고 불친절하다. 그것이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지라도 인물들은 소통이 부재하는 낯선 방식으로 대화하고, 이질감에 부유하기 마련이다. 신작『우주피스 공화국』은 거듭되는 데자뷔와 미묘한 엇갈림이 축척되면서 발생하는 시공의 뒤틀림이 섬세한 묘사 속에서 극대화되고 있다. 부정확한 목적지로 향하는 망명자의 후예는 영원히 닿을 수도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그 뒤틀린 시공간을 유골이 담긴 가방을 들고 떠돈다. 그 자신도 곧 가방 속의 유골과 같은 처지가 되어버릴망정.
리투아니아 접경지대에 존재한다는 작은 공화국 '우주피스'를 찾아온 '한' 출신의 동양인 할은, 우주피스의 망명자였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모국을 찾으려한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인들에게 '우주피스' 공화국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만우절에 독립을 선포한 농담공화국에 불과하다. 리투아니아어로 '강 건너 저편'이라는 뜻이며, 프랑스어로는 '화장실'을 뜻한다는 '우주피스'는 결국 고유하게 존재하는 어느 곳이라고 증명되지 않는다. 우주피스 어를 하는(현지인들에게는 방언으로 치부되는) 공화국에 관한 소소한 기억들을 가진 이들과 조우하지만, 할은 현지인들과도, 우주피스 인들과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없다.
할은 우주피스에의 닿지 않는 여정에서 요르기타라는 미망인을 만나 모국을 추억하며,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눈 속에 파묻힌 소박한 촌락에서 죽은 아들 게르디할 대신 제비를 키우며 사는 노파 요르기타를 만난다. 요르기타의 남편, 게르디할의 아버지, 노파 요르기타를 만나러 가는 망명자 모두 할 자신인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교차할 수 없고, 교차해서도 안 되는 평행우주의 한 단편이 뒤틀려 발생한 초시공이라도 되는 것인가.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스쳐 지나며, 예정된 최후를 향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근근이 전해진 기억을 통해 건재하는 망각의 나라는 망자가 되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강 저편, 생의 저편일 수도 있겠다.
농담 삼아 선포된 독립국과 망자의 넋을 잠재울 유일무이한 안식처가 동음이의어로 끈끈히 붙어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대척관계의 또 다른 은유일지도 모른다. 공화국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대부분이 암울한 최후를 불러오는 진실보다는 남겨진 자들을 위한 소소한 위안이면 충분할 런지도. 스틱스 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다. 최후의 강을 건너기 전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레테의 강물 한 모금으로 이승의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강 건너의 존재한다는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건너편이기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삶을 비로소 완전히 망각해버려야 다다를 수 있는 최종 종착지를 가리키고 있다.
시공이 뒤섞이고, 추억과 망각이 혼재하고, 떠들썩한 유흥과 가방 안의 유골이 공존하는 『우주피스 공화국』의 예정된 결말은, 영원한 순환구조이므로 죽음은 곧 삶의 연장선상이다. 할의 죽음과 게르디할이 요르기타의 젖을 빠는 장면이 연이어져 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일지의 쓸쓸히 정제된 모호하고 불친절한 언어는, 동시대인들의 완전한 소통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면서도, 존재 이면의 근원적 순환 고리가 영속하는 한 완전한 절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유골이 든 가방을 지닌 채 경계를 넘나드는 망명자의 여정에는, 이제 삶과 죽음에 대한 은밀하고 간곡한 의지가 깃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