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 청소년평전 22
김민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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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위인전집 청소년평전에 소개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만나보았는데요


썬양이 알고 있던 인물들도 있지만 몰랐던 분들이 더 많아서


이번 기회에 역사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썬양도 자신을 다잡는 기회가 되었다네요.









세계위인전집이라고 하면 어쩐지 내용도 어렵고 따분할 것 같지만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은 딱딱한 필체가 아닌 소설처럼 되어있어서

지루함 없이 한 권 한 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책을 읽는 독자가 청소년이다 보니 청소년의 수준에 맞게 이야기를 담아

초등 고학년부터 중학생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오늘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인물은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백범 김구!

백범 김구는 집요하면서도 부드럽고 대범하면서도 감성이 서려 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데요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에는

올바른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부터 시작했던

김구의 나라와 미래를 위한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답니다.








세계위인전집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는

천방지축 소년이던 김구의 유년기부터

동학사상을 접하고 서양 문화를 흡수하면서 성장해 온 청년기를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기까지 백범의 일생을 그렸는데요

한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으로

나라를 지켜낸 지도자의 숨결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를 통해서 느껴보아요.







김구는 이름이 여러 개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구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김창암이랍니다.

창암은 호랑이처럼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잘못된 일을 보고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의로운 정신과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갈 때 손가락을 베어 입에 피를 넣어 줄 만큼 효자였던 아버지를 보며 효심을 배웠고,

어머니의 당찬 모습에서 큰 힘을 얻으며 가난과 풍파 속에서도 꿋꿋한 소년으로 자랐답니다.

원래는 양반이었지만 영의정까지 올랐던 선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면서

살아남은 친척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상놈 행세를 했고,

그 이후로는 대대로 양반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하면서 상놈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네요.







무시당하며 사는 게 싫었던 창암은 아버지의 친구 정문재 훈장에게 학문을 익혀서 과거를 보러 갔지만

돈으로 답안지를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실망을 하여 과거 보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좀 더 보람찬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양반인 오응선을 찾아가 계급이나 돈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동학을 배우게 되고, 이름도 창수로 개명합니다.

양반들에게 천대받고 벼슬아치들에게 시달려 온 사람들은 동학 교인이 되었고

창수는 어린 나이에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가장 많은 교인을 거느린 접주가 되었죠.

전봉준 접주가 교인과 농민을 이끌고 관군과 싸운다는 소식에

김창수 일행을 포함한 전국의 접주들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답니다.







하지만 외세를 몰아내고 모두가 평등한 새 세상을 만들겠다는 동학농민군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동학 농민군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관군에게 잡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동학의 지도자 최시형은 정처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며

김창수도 일본군을 피해 숨어 다니는 처지가 되었지요.

그러다가 언젠가 서로에게 위험이 닥치면 도와주기로 비밀 약속을 맺었던 안태훈의 집으로 가서

안태훈이 마련해 준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네요.

그리고 안태훈의 집을 드나들며 책도 읽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했는데

안태훈의 맏아들이 후에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었다든 사실!

스무 살이 되도록 자신이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김창수는

안태훈의 집에 드나드는 학자 고능선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 마음과 몸을 바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김창수는 방물장수 행세를 하며 나라를 위해 할 일을 찾고 있던 김형진과 뜻을 모아

함께 나라를 구할 길을 찾아 청나라로 가서 김이언이 이끄는 의병대에 들어갔지만

김이언의 계획 없는 진격으로 크게 패하고 김창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그 무렵 궁중으로 들이닥친 일본의 깡패에게 국모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김창수는 치하포의 여관에서 조선 사람으로 변장한 일본군 장교 쓰치다가 국모를 죽인 자라고 확신하여

쓰치다를 처단하고 일본군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죠.

일본 경찰은 김창수를 살인강도로 잡아왔다고 했지만 김창수의 이야기를 들은 관리들은

김창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으며 김창수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감옥으로 음식을 가져오거나 돈을 넣어주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김창수는 교수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그런 가운데서도 김창수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응원해 주는 감옥의 관리로부터 세계의 역사와 지리,

문화에 대한 책들을 받아 열심히 읽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네요.

자신의 공부뿐만 아니라 죄수들까지 가르쳐서 인천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고 칭송이 자자했어요.

시간이 흘러 김창수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

고종이 김창수의 사형 감행을 정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인천 감옥은 잔칫집 분위기가 되었죠.

2년이 흘러도 여전히 감옥 생활을 하던 김창수는 탈옥에 성공하여

감옥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 역시 도움을 받습니다.

남쪽으로 떠돌며 여행을 하던 중 뜻밖에 김창수는 절에서 지내다가 스님이 되었군요.!

백범 김구가 스님이었다는 건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네요.






사람이 그립고 나라의 일도 걱정되었던 김창수는 절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갔다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서울로 올라가 최준례라는 여성과 결혼을 합니다.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김구는 아내를 서울 경신학교로 보내고

자신도 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죠.

그때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1904년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이겼고

일본은 대한 제국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맺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으며

대한 제국을 자기 나라처럼 지배하게 되었답니다.

본격적으로 교육에 앞장섰던 김구는 양산 학교에서 사범 강습회라는 교사 훈련 과정을 만들어

국어, 생물학, 물리학, 식물학, 경제학 등 여러 과목을 가르쳤고,

학교를 세우는 일을 돕고 지역을 다니면서 강연도 했지요.






1920년 8월 29일 일본과 대한 제국은 한일합병 조약을 맺었고

일본이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세우자 김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비밀 조직인 신민회에 들어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1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보내다가 형이 5년으로 줄어들어 살아갈 희망이 생겼지요.

김구는 출옥 후 아내 최준례가 교사로 있는 안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노름과 도적질이 만연하기로 유명한 동산평에 농사 감독으로 가서

도박을 하는 사람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어

동산평은 점점 도박이 사라졌고, 농부들의 생활 형편도 나아지자

농부들은 김구를 믿고 따르게 되네요.






그 무렵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는 삼일운동이 일어났어요.

여러 민족 단체와 종교 단체, 시민과 학생이 스스로 참여한 운동은 온 나라에 울려 퍼졌지만

김구는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상하이로 건너가 동지들과 임시 정부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어

1919년 4월, 마침내 상하이 거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태극기가 휘날리게 되었지요.

오늘날의 경찰청장과 비슷한 경무국장을 맡아 물샐틈없이 임시정부를 지켰던 김구~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미국으로 가버려 지도자가 없어지자

이동녕은 김구를 국무령으로 추대하여 김구는 정부 조직을 새롭게 바꾸고 살림을 꾸리는데 힘을 기울였지만

일본의 탄압이 이어지자 일본에 투항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임시정부의 살림이 어려워져 끼니를 굶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배추 잎을 주워 먹는 날도 있었네요.

그런 생활 속에서도 김구는 1년에 걸쳐 '백범일지'를 완성했답니다.







1931년 김구는 동지들과 함께 '한인애국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요

이때 이봉창이 김구를 찾아와 한인애국단이 되어 신분을 속이고 일본인 행세를 하다가

일본 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니 실패하고 일본군에 의해 사형을 당하죠.

뒤 이어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일본 왕의 생일 축하식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의 총사령관과 상하이 일본인 단장을 죽이는 일을 맡게 됩니다.

윤봉길 하면 수류탄 도시락과 물병이 떠오르는데 독립투사에 윤봉길을 빼놓을 수 었죠.

그 이후에도 김구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는데요

남아있는 이야기는 세계위인전집 청소년평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를 직접 읽어보시고 확인해 보세요~








김구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져 오랜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는 썬양인데요

김구 선생님의 바람대로 이뤄졌다면 초대 대통령도 달랐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운명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네요.

지난 역사야 바꿀 수 없으니 앞으로라도 누구나 바라는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되어서

지금보다 부강한 나라가 되어 주변 힘 있는 나라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를 읽으면서

김구 한 사람에 대한 일생도 알게 되었지만

김구가 살았던 시대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는데요

책을 읽고 알게 된 내용들을 독후 활동으로 정리를 해 본 썬양이에요.









천방지축 소년이었던 어린 시절의 김구부터

김구가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배경,

김구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

김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백범일지' 등

조목조목 정리를 아주 잘 해놨더라고요.







오늘은 세계위인전집 청소년평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를 소개해 드렸는데요

시대의 어둠 속에서 대한 독립을 위해 분투한 백범 김구 선생님과

모든 독립운동가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으로 여덟 명의 인물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청소년들이 꼭 알아야 할 인물들을 세계위인전집 청소년평전으로

꼭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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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갈망한 슈퍼스타 존 레넌 청소년평전 15
강백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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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안 가는 집콕 명절을 보낸 썬양은 교과 복습도 많이 하고,

책도 읽으면서 슬기로운 연휴 생활을 즐겼답니다.







중등전집,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평화를 갈망한 슈퍼스타 존 레넌>을 선택한 썬양은

"엄마, 존 레넌도 위인이야?"

우리가 어릴 적부터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종대왕, 간디, 헬렌 켈러 등 세계 사람들 누구나 인정하는 업적을 남김 사람들을 일컬었지만

요즘 시대에는 어느 분야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도 위인전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위인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되기 때문에

꼭 위인이라기보다는 그저 인물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중등전집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은

청소년 시기에 꼭 만나야 할 훌륭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요

업적 위주로 쓰인 보통의 위인전과는 달리 위인의 삶을 조명하며

그들의 성공적인 삶 이면에 서려있는 고통과 아픔, 심리적 혼란 등을 보여줍니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다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들은 자신의 성장을 이루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죠.









중등전집, 청소년평전 <평화를 갈망한 슈퍼스타 존 레넌>은

비틀스의 리더로 세계 록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존 레넌의 삶을

시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강백수가 소설처럼 풀어쓴 평전인데요

우리 부모들이야 다 아는 사람이지만

음악에 큰 관심이 없는 청소년이라면 모를 수도 있는 인물이지요.

썬양은 음악에 크나큰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비틀스의 존 레넌은 책으로 봐서 알고 있다고 하네요







존 레넌은 위대한 음악가이자 예술가이며 사랑과 평화의 전도사로 알려져 있는데요

중등전집, 청소년평전 <평화를 갈망한 슈퍼스타 존 레넌>에서는

불우한 가정사에 반항심이 가득한 청소년이자

가족을 돌보지 않은 가장, 거침없는 행동으로 추문을 몰고 다닌 음악가 등

결핍이 많았던 인간 존 레넌의 면모를 진솔하게 그려놓아서

인간 존 레넌에 대해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될 것 같네요.








20세기를 움직인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50인 중 1위에 꼽히기도 했던 존 레넌은

영국의 작은 어촌인 리버풀에서 태어났는데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어머니는 새로운 가정을 꾸려 존은 이모네 집에서 자랐답니다.

4살 유치원 때부터 퇴학을 당할 정도로 사고뭉치였던 존 레넌은

엄격한 교육으로 다스렸던 이모와 살면서 더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재혼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된 어머니 줄리아를 자주 만나면서

공상에 빠지거나 엉뚱한 상상을 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어머니가 알려준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에 빠져 세계 최고의 로큰롤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 어머니가 만취한 경찰이 운전하는 차에 치여 돌아가시자

사춘기였던 존은 난폭하게 술을 마시고, 각성제를 복용하고, 담배와 술을 훔치는 등

폐인에 가까운 상태가 되고 말았어요.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유산이자 어머니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일한 안식처인 음악으로 그 시기를 견뎠더라고요.








존은 친구들과 비틀스의 모태가 된 밴드 '쿼리멘'을 결성하여

친구들 집에서 열리는 파티나 동네 댄스파티 같은 곳에서 연주하곤 했는데요

쿼리멘의 멤버인 피트의 어머니의 주선으로 마을 축제가 열리는 교회의 정원에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때, 비틀스의 핵심 멤버가 되는 폴 매카트니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으며,

폴의 소개로 비틀스의 세 번째 멤버이자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조지 해리슨을 영입하게 되네요.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하여 반항아인 자신과는 상반되는 모범생인 스튜어트와 친해져 밴드에 영입시키고,

조용하고 예의 바른 여학생인 신시아 파월과 연인 사이가 되기도 하는 존 레넌~








밴드 내에서의 싸움으로 인해 드럼을 담당했던 멤버가 떠나자

밴드의 이름을 '비틀스'로 바꾸고 피트 베스트를 드러머로 영입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요.

함부르크의 낡은 클럽에서 뒷골목의 거친 사내 손님들을 상대로 공연하면서

비틀스는 과감한 액션과 거친 욕설이 가미된 공연으로 인기를 끌어 무섭게 성장했지만

한 주에 32번의 공연을 한다는 것은 정신적,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는 일이라

술과 마약, 여자로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했고,

공연에서 번 돈을 죄다 술, 마약, 매춘에 탕진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답니다.

그러던 중 멤버 조지 해리슨이 미성년자라는 것을 신고해버리는 바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비틀스.






영국으로 돌아온 비틀스는 클럽에서 다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예전과는 너무나도 발전한 그들의 실력에 모두 금세 빠져들었으며,

막내 조지가 성인이 되자 다시 함부르크에 가서 활동을 하게 되었고,

멤버 스튜어트의 연인이었던 아스트리드 덕분에 비틀스의 버섯 머리가 탄생되었답니다.

하지만, 스튜어트는 자신의 재능이 음악보다는 미술에 더 강하다는 생각으로

비틀스에서 탈퇴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4인조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비틀스는 운 좋게도 뛰어난 젊은 사업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정식 계약을 체결했고,

브라이언은 이제까지의 비틀스의 불량스러운 이미지를 완전하게 탈바꿈 시켜줍니다.

너덜너덜한 가죽옷 대신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혔고,

무대에서 욕을 하거나 난동을 피우고, 술이나 담배도 금지를 시켰죠.

브라이언의 활약으로 다시 함부르크로 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가는 호사를 누리는 비틀스.

하지만 전 멤버였던 스튜어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슬픔에 빠지네요.

또한, EMI 산하의 레이블인 팔로폰과의 계약을 앞두고 오랜 멤버였던 드러머가

링고 스타로 교체되면서 전설의 4인조 밴드 비틀스는 완전체가 되었고,

오랜 시간 존의 곁을 지켜줬던 신시아와 부부가 되었답니다.








1962년 9월 비틀스의 첫 앨범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때 발표한 존과 폴이 작사, 작곡한 타이틀 곡 <Love Me Do>가 처음으로 전파를 탔고,

시골에서 올라온 버섯머리의 귀여운 청년들이 정장을 맞춰 입고 달콤하게 노래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신선함을 느껴

<Love Me Do>는 발표되자마자 영국 앨범 챠트 17위에 올랐으며

비틀스는 유명한 밴드가 되기 시작했답니다.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는 영국의 권위 있는 차트인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의 1위 곡이 되었고,

비틀스의 전국 순회공연 무대에 팬들은 열광했으며,

새로운 곡을 선보일 때마다 차트 순위표 꼭대기에 올라 이제 리버풀의 비틀스가 아닌

영국의 비틀스라고 부를 정도로 스타가 되었네요.

그뿐인가요?

비틀스는 힘들게 미국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미국 차트 1위에 오르면서

전 세계의 언론이 들썩였고, 세계 각지에서 비틀스의 음악이 소개되었다는 사실~

미국의 유명한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하고 미국을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게 만든 비틀스는

유럽과 오세아니아, 아시아를 아우르는 규모의 월드 투어를 성공시켰고,

방이 무려 27개나 되는 저택을 사들이고 운전기사와 가정부까지 고용할 만큼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된 존 레넌.








영국 왕실은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 비틀스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눈부신 성공 이면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함을 느꼈던 존은

공연이 끝나면 술에 취해 여자들과 방탕한 시간을 보냈고,

인터뷰에서도 점차 반항적인 발언으로 위태로웠는데

급기야는 비틀스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다는 말을 하여

미국의 언론은 마치 존이 예수 그리스도를 깎아내리기 위해 내밭은

신성 모독 발언인 것처럼 곡해되어 파장을 일으켰고,

존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나간 말에 자존심을 굽히고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첫 앨범을 낸 이후 수년간 쉼 없이 달려온 비틀스는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죠.

비틀스 활동 이외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었던 멤버들은

각자 자신들에게 결핍되어 있던 것들을 찾아 떠났는데요

조지 해리슨은 가족과 인도 뭄바이로 여행을 가서 인도 전통악기인 시타르와

인도의 역사, 문화를 비롯해 철학에 대한 공부를 했고,

링고 스타는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 가정에 충실했고,

폴 매카트니는 영화에 대해 공부를 하여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만들었고,

존 레넌은 전쟁에서의 죽음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알리기 위한 영화에 출연했으며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전시회를 앞둔 인디카 갤러리를 방문하여 존의 영원한 연인이자 뮤즈,

예술적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던 여인, 오노 요코를 만나게 되죠.








9개월을 매달려 준비한 앨범 <페퍼 상사>는 흥행 여부보다는

비틀스 멤버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을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 잡지 <롤링 스톤>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선' 중 1위에 오를 정도로 젊은 세대뿐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는 아티스트로서도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 세계 수많은 차트의 정상에 오르기도 했네요.

하지만 안타까운 소식!

비틀스를 세상에 내놓았고, 존의 부모와도 같았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약물 중독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하나의 기업이나 다름없던 비틀스는 자신들의 앨범을 생산하고,

매니지먼트까지 담당할 레코드 회사 '애플 레코드'를 설립하여 첫 음반으로

일본인 예술가 오노 요코의 음반을 내놓았는데요

존의 아내 신시아가 친구들과 여행을 간 사이 존은 요코를 자기 집으로 불러

함께 며칠간 작업을 하며 같이 보내면서 신시아에게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설렘을 느껴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마네요.

일정보다 빨리 여행에서 돌아온 신시아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겠지요?

그 이후 존 레넌은 공적이거나 사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늘 요코와 함께 참석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질타에도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이어갔으며

당연히 신시아와는 이혼을 했겠죠.

근데 문제는 비틀스 멤버 사이에서도 불화가 생겼다는 사실~

비틀스가 모여 작품에 대한 회의를 할 때 요코가 꼭 함께 끼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고 하니 멤버들이 낮선 불청객의 참견으로 느끼게 되었고,

멤버들 간 갈등의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자 소신대로 독립적으로 작업을 했다는군요.

그렇게 해서 발매된 앨범 역시 큰 성공을 거두다 보니

멤버들은 이제 비틀스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존 레넌은 오노 요코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대중들로부터 축하보다는 비난을 많이 받네요.

암스테르담과 캐나다에서 두 사람이 진행한 베드 인 퍼포먼스는

'침대에서 평화를!', '전쟁 대신 사랑을!' 등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고,

이제 존 레넌은 단순히 유명한 음악가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운동가가 되었던 것이죠.

'베드 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런던에 돌아간 존은 멤버들과 새 앨범을 만들어

좋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긴 했지만 더 이상 무대에는 오르지 않았던 비틀스,

그리고 1970년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1960년대의 상징이라고도 이야기했던 비틀스는 해체하여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은 슬픔과 충격에 휩싸였지요.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네 사람은

이제 비틀스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각자의 길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마음의 병이 있었던 존은

러시아의 정신 분석학자 아서 야노프에게 엄마의 죽음과 사춘기 시절의 방황까지,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치료를 받았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과거의 아픔들을 그대로 써 내려가 30곡이 담긴 솔로 앨범을 만들었고,

당시 평론가들은 존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관념이 담긴 노래와

자신의 사회적 성향을 담은 노래에 대해 호평을 내놓았으며

현재까지도 꼭 들어봐야 할 명반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네요.








존과 오노 요코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요

존은 계급 의식이 강한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의 운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자신과 비슷한 방식의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미국 내 정치 운동 세력들을 지원하게 되네요.

미국의 시인이자 급진적 정치 운동가인 존 싱클레어의 석방을 위한 자선 공연을 하여

미국의 사회 운동가들이 오랜 노력으로 이뤄내지 못한 존 싱클레어의 석방을

존 레넌이 무대에서 내려온 지 55시간 만에 석방하는 성과를 거두는 걸 보고

더 많은 집회 현장이 존을 원하게 되었답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의 사회 운동가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달잡지 않은 일이라 여러 구실로 존 레넌의 체류 연장을 승인하지 않았고,

신변의 위협까지 느낀 존은 더 이상 사회운동을 하지 않고 앨범 작업에 몰두했지요.

오노 요코와 잠깐 이별을 하긴 했지만 다시 재회하여 아들까지 낳은 존 레넌.

5년간이나 아무 작업도 하지 않고 오로지 아들과 가정을 돌보며 살다가

5년 만에 오노와 함께 앨범을 발표하고 <롤링 스톤>과의 사진 촬영이 있던 날

집 앞에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라는 청년에게 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존 레넌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안타깝네요.










비틀스라는 그룹을 책을 통해서만 알았던 썬양이 존 레넌의 일생을 담은

중등전집, 청소년평전 <평화를 갈망한 슈퍼스타 존 레넌>을 읽고

존이 음악적으로 대단한 사람인 건 맞지만 가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쉽다네요.

자신이 어릴 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면서 자신도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냐고~

아직 어린 썬양이라 모든 상황에 대해 다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니

그런 생각과 비판을 하는 건 당연한 것 같네요.








존 레넌의 명성으로만 생각했을 땐 그저 좋은 일들만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특히, 어린 시절에 그런 상처가 있을 줄은 몰랐다며

지금 자신은 행복한 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으며

음악과 평화를 사랑했던 존 레넌을 생각하면서 독후 활동을 하겠다는 썬양.







존 레넌의 어머니가 존에게 사주었던 기타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존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기타를 사줬다는 대목이 생각나서

기타 하나를 그렸다고 하네요.







오늘은 중등전집, 청소년평전 <평화를 갈망한 슈퍼스타 존 레넌>을 통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꼽히는 뛰어난 음악가 존 레넌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사회적 불합리에 음악과 삶으로 맞서 싸우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했던

사회운동가로서의 모습도 알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현실 문제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다룬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을 모든 청소년들에게 추천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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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독재자 찰리 채플린 - 개정판 청소년평전 2
김별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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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존경하는 인물에 꼭 세계의 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인생의 롤 모델을 삼기도 했었는데요

요즘 아이들은 롤 모델이 거의 방송인이 아닌가 싶어요.

아무래도 예전만큼 독서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고,

다양한 재미 위주의 매체를 선호하는 것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세상이 변해서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고 사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고전이나 위인전 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분명 많으니

되도록이면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위인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잘 안 봐서 잘 모르지만

혹시 현재 방송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을 수도 있지만요.^^








세계 위인들을 상세하게 소개해 주는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시리즈인데요

이번에 썬양이 선택한 인물을

<스크린의 독재자 찰리 채플린>입니다.

초등 때 인물 학습만화를 통해서 살짝 접했던 사람인데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이 책을 골랐다고 하네요.

썬양 덕분에 엄마도 아득한 옛날 흑백 영화로 봤던 찰리 채플린을 만나보게 되었군요.







세계위인전집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으로 만나 보는 <스크린의 독재자 찰리 채플린>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의 진솔한 생애를 그린 청소년평전인데요

찰리 채플린이라고 하면 독특한 분장의 희극배우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요.








지팡이와 굴뚝 모자, 칫솔모처럼 조그만 콧수염, 우스꽝스러운 몸짓.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빛나게 살다 간

어릿광대 같은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을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의 코믹한 모습 뒤에는 결코 순탄치 않은 슬픔과 불행한 그의 삶이 감춰져 있다고 합니다.

눈물을 머금은 웃음을 자아내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삶을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스크린의 독재자 찰리 채플린>을 읽어보면서 알아봅시다.








유명 배우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찰리 채플린은 어릴 적부터 재능이 아주 많았는데요

아버지가 술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이혼을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른 형 시드니와 찰리 채플린을 키우게 됩니다.

어머니는 열심히 무대에서 일하여 아이들을 키웠지만 목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되자

채플린의 집은 가난해져 어머니가 남의 집 일이나 삵 바느질을 하여 가정을 꾸려갔고,

그러면서도 채플린에게 배우들의 연기 기술을 설명해 주고 연극을 평가하는 등

다정한 어머니이면서 최고의 선생님이었지요.






가정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채플린과 시드니를 데리고 람베스 빈민구호소로 들어가게 되었고,

3주일 후 채플린과 시드니는 고아 빈민아동학교로 보내져 어머니와 떨어져 생활하다가

열한 살이 된 시드니는 훈련 선박에 승선하게 되고,

채플린은 집을 구한 어머니를 따라 빈민아동학교를 떠났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상황이 안 좋아지자 시드니와 채플린은 또 다른 빈민아동학교로 보내졌고,

어머니는 정신병에 걸려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법원의 판결로 채플린과 시드니는 재혼해서 살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가게 되는데

새어머니께 구박을 많이 받으며 살던 어느 날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가

다시 채플린과 시드니를 데려가 함께 살게 되네요.

채플린의 재능을 눈치챈 어머니는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 채플린은 우연히 교실에서 연극을 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에서 유명한 학생이 되고 학교에 흥미를 느껴 성적도 쑥쑥 올라갔지요.

학교를 그만두고 '에잇 랭커서레츠'라는 댄스단에 입단했지만

돈벌이도 별로인데다가 폐까지 안 좋아져서 그만둡니다.








채플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가난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던 채플린의 가족.

채플린은 학교를 그만두고 식품 잡화상의 심부름꾼, 병원 청소, 상점 점원, 인쇄소 공원 등

다양한 일들을 하며 보냈지만 지속되는 가난으로 영양실조와 우울함에 빠진 어머니는

다시 정신병에 걸려 입원하게 되었답니다.ㅠㅠ

남편 없이 두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채플린의 어머니에게 큰 부담으로 억눌렸을 것 같아

같은 엄마로서 마음이 참 안 좋더라고요.







부모님이 배우여서 그런가 채플린과 형 시드니도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요

채플린의 첫 무대는 <셜록 홈스>로 연극은 실패했지만 채플린의 연기는 좋은 평가를 받았죠.

<셜록 홈스>의 공연이 끝나면서 극단은 해체되었고,

시드니는 슬립스틱 극단에 일자리를 구했지만 채플린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혼자가 되었네요.

그러던 중 채플린은 카노의 극단에서 공연 중인 <축구 시합>이라는 연극에 출연할 기회가 주어졌고,

유명 코미디언이었던 웰던을 중심으로 진행됐던 연극은 채플린의 활약으로 분위기를 바꿔 놓았네요.

채플린은 극단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 중 한 사람이 되어 웰던의 질투를 받았지만

채플린은 그런 질투 따위는 무시하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 나갔죠.

어느새 채플린에게도 사랑이 다가왔지만 아쉽게도 다섯 번의 데이트로 만남은 끝이 납니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 너무 많은 영국을 떠나고 싶었던 채플린은

주연급 코미디언을 데려가기 위해 온 미국 극단의 매니저 앞에서 연기를 하여 뉴욕으로 가서

몇 개의 공연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연을 했답니다.

채플린은 동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숙소에서 지내며

헌책방을 뒤지고 공부를 하면서 자신을 채워 나갔지요.

그리하여 영화에도 출연하고 직접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하면서 어느새 스타가 되었네요.









빈민구호소를 전전하던 가난뱅이 소년은 이제 일주일에 1,250달러를 받는

20대 중반에 영화계의 새로운 영웅이 되어 제작되는 영화마다 큰 인기를 얻고 엄청난 부자가 되었으며

27살에는 백만장자가 되었지만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던 채플린은 부자의 씀씀이에 쉽게 익숙해질 수 없었답니다.

그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여 4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학교에서는 총과 칼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전쟁에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

5년의 징역형이 내려져 청년들은 거의 모두 군복을 입고 다녔지만

전쟁을 반대하는 채플린은 군대를 가지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네요.








채플린은 성공 이후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중에서 첫 번째 결혼은 10살이나 어린 여배우 밀드레드와의 결혼이었는데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여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군요.

사랑 없이 한 결혼이기도 하지만 너무 어리고 어리석은 밀드레드와 대화가 통하지 않아

얼마 못가 이혼에 이르렀고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되는 채플린~

결혼 생활을 하면서 만들었던 영화 <키드>는 개봉되어 굉장한 인기를 누렸고

영화 속의 주인공 4살 재키는 일약 스타가 되었지요.







영국을 떠난 지 10년 만에 채플린은 고향으로 방문을 했는데요

조용히 추억을 되새기며 찾아가고픈 채플린의 마음과 달리

영국에서는 가는 곳마다 채플린을 열렬하게 환영하였고,

채플린은 몰래 혼자 호텔을 빠져나가 자신의 가난한 추억이 서려있는 곳곳을 다니면서

다시금 불행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기도 했답니다.

자신의 일터인 미국으로 돌아온 채플린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던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와의 계약이 종료되자

동료들과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에서 첫 작품인 <황금광 시대>를 만들었는데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여배우와 사랑에 빠져 두 번째 결혼을 했고,

<황금광 시대>는 전쟁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웃음이라는 가장 좋은 약을 주면서 엄청난 반응이 쏟아졌죠.








채플린의 두 번째 결혼도 얼마 못가 끝나버리는데요

아내 리타의 변호사들은 더 많은 위자료를 받기 위해 채플린의 명성을 망가뜨리려고 했답니다.

온갖 추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채플린을 파렴치한으로 만들었지만

채플린의 영화를 사랑하는 팬들 덕분에 채플린은 파멸하지 않았죠.

영국으로 1년 반이라는 긴 여행을 다녀온 채플린은 오히려 무기력했는데

여배우 폴리트를 만나게 되면서 두 번째 아내였던 리타가 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자주 만나 시간을 보냈고,

활발한 폴리트도 채플린의 아이들과 만나 잘 어울려 놀았답니다.

발랄한 폴리트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영화 <모던 타임스>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두 사람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결혼을 했지만 결혼 후에 사이가 나빠져서 또 세 번째 이혼을 하게 되네요.

그래도 세 번째 이혼한 폴리트와는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게 되었다니 다행인 건가요~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게 된 채플린은

영화가 만들어져도 상영할 가망이 없다며 제작을 중지하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들었지만

채플린의 고집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독재자>를 본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고 열광했으며

채플린이 만든 작품 중에서 최고의 수익을 가져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요.

아! 근데 채플린이 또 결혼을 하는군요.

50살이 넘은 나이에 17살 배우 지망생 우나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답니다.

결혼 후 새 영화 <살인광 시대>를 만드는 동안 첫 딸을 낳아

채플린은 꽤 늙은 아버지가 되었죠.^^

이때 채플린의 두 아들 찰리와 시드니는 군대에 입대를 했으니까요.








미국에서 40년을 사는 동안 미국인으로 국적을 바꾸지 않고 공산주의자와 친하게 지내자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라로 생각하고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는데요

영화 <라임라이트>의 촬영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여행을 떠난 채플린에게

미국의 법무 장관이 채플린이 다시 미국으로 들어오는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하네요.

미국 정부는 채플린이 떠나기만을 기다렸고, 결국 40년 동안 일했던 나라에서 쫓겨난 것이죠.

그런 가운데 <라임라이트>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채플린은 아내를 보내 미국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도록 하여

날씨가 좋고 평화로우며 재산 관리하기 좋은 스위스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60대 중반이 된 채플린은 돈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영화와 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스위스에서 새로운 스텝들을 모아 <뉴욕의 왕>을 만들었죠.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렸던 채플린은 모두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아 더 이상 외로운 떠돌이가 아니었어요.

1971년 채플린을 내쫓았던 미국이 화해의 악수를 청하며 채플린에게 명예 오스카상을 수여하였고

채플린은 다시 미국으로 가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가

1977년 크리스마스에 가족이 모두 모여 파티를 마치고 잠들었을 때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지요.

미국의 희극배우 보브 포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아직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책으로 만나 본 채플린이

말없이 몸으로만 연기를 하면서 사람들을 웃음으로 행복하게 해줬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썬양.

지금은 바빠서 영화를 볼 시간이 없지만

겨울 방학이 되면 꼭 찰리 채플린의 작품을 찾아서 봐야겠다고 합니다.

무성영화가 어떤 것인지 급 궁금해졌다면서요~~

그리고 결혼을 네 번이나 해서 70살이 넘어서도 아이를 낳았다니 대단하다고~ ^^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스크린의 독재자 찰리 채플린>을 읽기 전에는

왜 채플린이 독재자일까 궁금했었는데

영화를 만들 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굽히지 않고 추진하여

결국은 성공을 한 사람이라 스크린의 독재자라는 말을 썼나 보다고 하네요.

그리고, 채플린이 엄마의 공연에 따라갔다가 엄마가 목 상태가 안 좋아서 공연을 못 하게 되자

5살 나이에 무대로 나가 즉석에서 재미있는 공연을 해서

망쳐진 무대를 성공적이게 만들었던 부분이 인상 깊었다고 해요.

또, 어머님을 향한 사랑도 지극했는데 어머님과 건강하게 함께 살 수 없었던 점이 안타깝다는군요.

채플린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본받아

자기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합니다.






독후 활동이 너무 무채색이라 색을 입혀서 좀 꾸미는 게 어떻겠냐는 엄마의 말에

찰리 채플린의 시대는 흑백영화 시대였기 때문에

흑백으로 표현하는 게 더 낫다는 썬양.ㅋㅋ

네가 엄마 보다 낫다~~~







오늘도 역사 속의 개성 넘치는 위인을 한 명 소개해 드렸는데요

어린 시절의 가난과 배고픔, 절망과 괴로움을 극복하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준 찰리 채플린의 일생을 보면서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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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의 꿈, 이상 청소년평전 26
이원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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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필독도서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을 통해서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인물들을 만나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요

그때는 시험 문제로 배워서 그런가 사실 크게 남는 게 없답니다.

예를 들어 '윤동주의 서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상의 날개' 등

작가와 작품을 연결하는 것 정도가 다였었는데

청소년평전에서 소개해 주는 위인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좀 더 자세한 시대적 상황까지 알 수 있어서

인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세계위인전집으로 위인들을 알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정말 부럽기까지 합니다.







초등 때는 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해서

다른 주요 과목에 비해 다소 소홀하게 공부했을 수도 있는데요

중학생이 되고 나니 이제 중요하지 않은 과목이 없는 것 같아요.

또, 고등학생이 되고 나면 국어가 더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 국어 때문에 고민하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면,

초등 때, 중등 때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답니다.

국어 개념부터 제대로 이해하고 중등필독도서도 다양하게 읽어 주면서

어휘, 문법, 독해 등 국어에 필요한 모든 능력의 기초를 닦아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중등필독도서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중에서

이번에 썬양이 만나본 인물은 '이상'인데요

'이상'하면 '날개',

'날개'하면 '이상'이 떠오르잖아요.

학창 시절에 하도 달달달 외워서 그런가 이젠 각인이 되어버렸죠.

엄마는 그러한데 썬양은 이상이라는 인물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니 빨리 읽어봐야겠다고 하네요.







자음과모음 <날개의 꿈 이상>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한국 문학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이상의 일대기를 그려낸 평전인데요

이상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당시 인간 해체의 위기를 맞은 한국 사회의 모순적 현실을 작품에 반영하곤 했답니다.







서구의 모더니즘을 이해하고 자신의 작품에 녹아내려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관련 작품을

중등필독도서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날개의 꿈 이상>을 통해서 만나보아요.








이상이 본명이 아니었군요.

이상의 본명은 바로 '김해경'이었더라고요.

가난한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고 큰아버지의 집에 대를 잇기 위해 입양되어 자랐는데

옛날에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 이렇게 형제의 자식을 입양하기도 했었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입양이 되어서도 행복하게 살면 좋은데

김해경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네요.

특히 두 번째 큰어머니와 그녀의 딸 문경이로부터 엄청난 구박을 받았던 이상은

국어와 체육보다 미술을 좋아했는데

어떻게 훗날에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성장했는지 이 책을 읽는 초반에는 이해할 수 없었죠.







이상을 입양한 큰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인 이상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는데요

신명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조선 불교 중앙 교무원이 경영하는 동광학교(중학 과정)에 입학시켰고,

이상은 공부도 잘했지만 미술전람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여전히 미술을 좋아했어요.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해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졸업할 때까지 늘 상위권이었으며

전교생 중 유일한 한국인이면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본명인 해경에서 '이상'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배경이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공업학교 3학년 때 인근 건축 현장으로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현장 실습을 나갔는데

일본인 인부 한 명이 해경에게 '리상'이라고 불렀거든요.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이라면 으레 '김'가 아니면 '이'가라고 여겼던 탓에

해경에게 무심코 한국 사람을 향한 호칭의 하나로 '이상'이라고 불렀는데

이상이라는 말이 듣기 나쁘지 않았던 해경이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이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자신의 원래 이름인 김해경을 '이상'으로 바꾸는 것은

곧 아버지의 이름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이상입니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이상은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다가

새로온 건축과장의 노골적인 무시로 관방회계과 영선계로 옮겼고,

건축회지인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서 각 1등과 3등을 휩쓸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다음 해엔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월간지 <조선>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이상은 숫자와 기호를 사용해 자신의 생각과 분노를 상징화하는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네요.

일제 강점기라는 억압된 시대가 만들어 놓은 주눅 든 언어의 새로운 표현 양식이기도 했었던 것이죠.

영양이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데다가

지나친 술과 담배를 했던 이상은 폐결핵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보통학교 시절에 알게 된 동창인 구본웅을 우연히 다시 만났으며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구본웅은 귀국할 때마다 이상을 찾아 만남을 갖기도 했지요.








각혈이 심해진 이상은 직장까지 그만두었고 하루하루 악화되는 병마와

연속되는 실패의 고리, 쉽게 몰아낼 수 없는 가난으로 힘겨운 삶이 시작됐어요.

그 와중에 국문으로 된 시 <꽃나무>, <1933년 6월 1일>, <거울> 등을 발표했는데요

거울을 통해서 혼란의 소용돌이에 노출된 현실적 자아의 모습과

서로 교류할 수 없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드러냈답니다.

그리고, 21년 만에 그리웠던 자신의 진짜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장만하여

가슴속에서만 영원하던 가족을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죠.

이상의 작품 <봉별기>와 <날개>에 등장하는 아내는

술집에서 만난 기생 금홍과의 동거 생활을 바탕으로 탄생됐다고 하는데

솔직히 작품을 읽어본 것이 아니라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에요.







1930년대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주장을 강력히 내세우는 경향문학이 쇠퇴하면서

이상이 포함된 구인회는 문단의 주류가 되어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는데요

이상과 박태원이 중심이 되어 <시와 소설>이라는 동인지를 펴내기도 했지요.

<보통기념>, <혈서삼태>, <오감도>를 발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갔답니다.

이상의 작품에서는 서정적인 말은 엿볼 수 없고,

숫자와 기하학적 단어, 관념적인 한자로 구성된 지극히 난해한 문학이었지만

그는 형식상의 파격과 내용상의 난해로 한국 근대정신을 무너뜨리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또, 그의 시는 기존 문법을 무시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잘 알려져 있는데

띄어쓰기와 단락 구분의 무시, 역설, 아이러니, 숫자나 기호의 도입 등으로

일상적인 언어 규범을 외면했는데요

이러한 행위는 당시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갇혀 버린 식민지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상은 자유와 개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문법을 파괴했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자 했는데요

죽음처럼 막막하고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암울한 시대 속에서

비명처럼 외쳐 낸 것이 그의 시였다고 할 수 있답니다.






이상과 동거하던 금홍이와 헤어진 지 한참 후에 새로운 카페를 차린 이상은

카페 종업원이었던 권순옥을 흠모하게 되었지만

현실적인 부분이 더 중요했기에 쉽사리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예전에 다방을 운영했을 때와는 달리 카페 일에 전념했어요.

근데 시인 동료 중 한 명이 권순옥에게 좋은 감정을 느껴 고백했다가 거절당하자 자살시도까지 했고,

이상은 동료와 권순옥을 결혼시키는데 앞장섰다니 마음이 참 착잡했겠어요.

1936년 일본 동경으로 떠나게 된 이상은 권태로운 일상과

끝이 보이지 않는 투병에서 오는 좌절로부터 탈출하고자 합니다.







동경에서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이상은 창문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김유정과 가깝게 지냈는데요

김유정은 그 유명한 <봄봄>의 저자이기도 하죠.

두 사람은 똑같이 폐결핵을 앓고 있어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는데

삶이 궁핍하여 약을 제대로 못 쓴 김유정은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이상은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 친구 구본웅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을 만나게 되는데

변동림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수필을 발표하는 등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답니다.

오랫동안 이상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변동림과 이상은 결혼식을 올렸고

변동림과의 새로운 생활은 이상에게 다시 한번 세상을 향해 날고 싶은 욕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죠.

그 이후 이상의 대표작 <날개>도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말이에요.







하지만 변동림과의 인연도 오래가지 못했었군요.

변동림과 헤어진 후 이상은 다시 한번 날기 위해 동경으로 갔지만

추위와 배고픔, 각혈로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공포의 기록>, <종생기>, <권태>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지요.

특히 <종생기>는 이상의 자전적인 단편소설로 <날개>, <봉별기> 보다

더 절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이상이 극한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음을 예감하듯

유서처럼 곳곳에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담고 있다고 해요.







새로운 비상을 위해 동경에 간 이상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요

심한 고문과 각혈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이미 폐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만 26세라는 짧은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한국 근대 문학사가 낳은 천재 작가 이상은 미처 날지 못한 채 사라진 것이지요.







처음에 제목만 보고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던 <날개의 꿈 이상>을 읽고 나니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상이 안타깝고,

그 와중에도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점이 정말 대단한 인물인 것 같다는 썬양.

이상의 짧은 삶에 비해서 고난과 시련이 너무 많아

결코 만 26세에 죽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고 하네요.

하긴 저도 읽다 보니 이상에게 정말 많은 일들이 있긴 했더라고요.






청소년문학 <날개의 꿈 이상>은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 시기에다

이상 자체의 삶이 순탄치 않아서 그런가 우울함이 가득하다는 썬양은

이상이 날개를 달고 맑고 화창한 파란 하늘을 날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상의 이름을 파란색으로 둘러싸도록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고 이상에 대해 알아보면서

이상의 작품이 더욱 궁금해졌다는 썬양.

근데 이상의 작품은 죄다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어서 읽기는 다소 힘들 것 같다고~

나중에 자기가 좀 더 크면 <날개>와 <오감도>는 왜 유명한지 꼭 읽어보고 확인해봐야겠다고 합니다.






평범함을 거부하고 시대를 앞선 작품 활동을 보여준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불우한 천재 작가 이상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세상이 정해 놓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던

실험적이면서도 시대를 앞선 문학을 추구했던 이상을

중등필독도서 청소년평전 <날개의 꿈 이상>을 통해서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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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 청소년평전 30
김나정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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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일생과 그 사람이 성공하기까지의

가정적, 사회적 배경을 알 수 있어서 재미가 두 배인 것 같아요.

이 분은 또 어떤 부모 아래에서 자랐을까?

이 사람이 어린 시절에는 사회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미리 상상해 보는 재미까지 있어서 그 맛에 읽게 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중등전집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세계위인전집을 한 권씩 읽어본 썬양이

"엄마, 데즈카 오사무라는 사람 알아?"

"그 사람이 누군데?"

"엄마가 어릴 적에 재미있게 봤다는 아톰을 만든 사람이지?"

아~~그랬군요.

아톰은 기억하고 있는데 아톰을 만든 사람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던 엄마.ㅋㅋㅋ

엄마도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게 해주는 중등전집 청소년평전이에요. ^^







데즈카 오사무!

일본 만화의 신, 일본 만화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데요

일본 최초의 소녀 만화 작가이자

일본 최초로 스타 시스템을 도입하고,

만화에 영상적 기법을 적용하였으며

일본 최초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어시스턴트 제도를 도입했으며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지요.


중등전집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데즈카 오사무의 삶을 다룬 세계위인전집이에요.







전쟁 후 일본 국민들은 패배감과 절망에 휩싸여 있었는데요

전쟁을 겪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은 오사무는

메스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하지만

만화에 대한 어린 시절부터의 열망으로

결국 의사로서의 안정된 길 대신 만화가의 길을 걷기로 하는데

데즈카 오사무가 성공하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중등전집 청소년평전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를 통해서 알아보기로 해요.







일본인에게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부 데즈카 오사무 이야기는

4장으로 나누어져 소개되어 있네요.






곱슬머리와 좋지 못한 시력, 허약한 몸을 타고난 데즈카 오사무는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심한 놀림을 당했는데요

책을 읽어보니 그 정도가 좀 심했더라고요.ㅠㅠ

그런 데즈카에게 따돌림에서 벗어나게 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데즈카가 그린 그림을 본 후로 선생님도, 친구들도 데즈카를 다르게 대했다고 하네요.

그럼, 데즈카는 어떻게 만화를 좋아하고 잘 그리게 되었을까요?

바로 부모님도 만화를 좋아하셨거든요.

엄마는 데즈카에게 잠자리 독서로 만화를 들려줄 정도였다니 정말 만화광 가족이었다고 할 수 있죠.

매년 1월 3일에 열리는 만화영화제에 온 가족이 가서 전 세계의 만화를 실컷 보고,

영화를 좋아하는 데즈카를 위해 아버지는 영사기를 사다가

가족 영화제를 열어 미키마우스 등 유명한 만화영화를 즐겼죠.










데즈카는 만화도 좋아하고, 밤하늘의 별도 좋아했지만

발아래 펼쳐진 곤충 세계도 신비로워 하고 좋아해서 곤충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기도 했죠.

오죽하면 곤충 도감을 쓴 작가를 만나고 싶어서 멀리 떨어진 도쿄까지 기차를 타고 갈 정도였으니까요.

데즈카는 친구와 곤충 잡지도 만들었는데 만화를 중간에 그려 넣어

친구들이 아주 재미있게 봤다고 해요.

중학생 때는 직접 곤충도감을 만들었는데 사진을 찍을 자신이 없어서

직접 곤충을 그려 넣어 총 500종의 곤충 그림이 두 권에 실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이때 데즈카의 필명인 '오사무'를 지어 훗날 만화가로 활동할 때도 이 이름을 필명으로 삼았답니다.

데즈카의 단짝 친구 '고릴라'와의 감동적인 일화도 있는데

그 부분은 책을 읽어보시고 확인해 보시면 좋을 듯요.







전쟁으로 데즈카의 아버지는 전쟁터로 가시고

데즈카는 체력이 약해서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로 끌려갔다가

거기서도 병에 걸려 격납고 지붕이나 벽에 쓰는 석판을 만드는 공장으로 끌려갔지요.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공장은 파괴되었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데즈카는 집으로 돌아와 꼼짝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서재에서 세계 문학전집, 각종 종교, 의학 서적 등 다양한 책을 읽었죠.

그러면서 만화도 그렸는데 그때 그린 만화가 3000장이나 된다는군요.

데즈카는 자기가 그린 만화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전쟁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어두웠고 친구들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자신이 그린 짧은 만화를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 벽에 붙여

사람들이 자신의 만화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바랐어요.







데즈카는 언젠가 전쟁터에 끌려가게 되면 총을 잡는 군인보다

사람들을 살리는 매스를 잡는 의사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오사카 대학생이 되었어요.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꾸준히 그려 만화가로 정식 데뷔까지 했네요.

의사와 만화가 중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야 할 시기에 데즈카는 자신의 고민을 어머니께 털어놓았는데

어머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짧게 대답을 하셨다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의사를 하라고 말하지 않은 데즈카의 어머니~

데즈카의 어머니는 아들이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데즈카는 고민 끝에 메스로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의 길이 아닌

펜으로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만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죠.

데즈카는 신문에 네 컷 만화 <마짱의 일기장>을 연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데즈카의 데뷔작이 되었답니다.







데즈카는 유명한 만화가 사카이와 공동 작업으로 <신보물섬>을 출간하여

오사카에서 만화의 일인자가 되었고,

여러 출판사에서 데즈카에게 만화를 그려 달라고 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다가

평소에 존경하는 만화가 요코이에게 질타를 받아 큰 깨달음을 얻어

도쿄로 가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하네요.

하지만 오사카에서 그렇게 인정받던 데즈카는 도쿄에서는 그림 실력이 좋지 않다고 무시하는 거 있죠~

우연한 기회에 <만화 소년>이라는 잡지사에 가게 되어

<정글 대제>라는 장편 만화를 연재하여 크게 성공하였고

도쿄의 인기 작가로 도약하여 일본 최고의 만화가가 된 것이지요.







데즈카의 만화는 남자아이들이 좋아했던 지라 데즈카는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도 그리고 싶어서

<리본의 기사>라는 일본 최초의 소녀 스토리 만화를 출간하여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만화가가 되었답니다.

쏟아지는 일에 쉴 시간도 없이 무리하다 보니 건강이 안 좋아지자

의사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은 결혼을 하라고 재촉했는데

33살이 되도록 아는 여자도 하나 없이 살았던 데즈카였네요.

데즈카는 고향에 내려가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에게 불쑥 청혼을 했고,

그 친구는 데즈카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했다니 이런 경우도 다 있군요.ㅋㅋ







계속 비슷한 만화를 그린다는 독자들의 비판에 데즈카는 공상 과학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몇 번의 도전에도 실패를 거듭했지만 데즈카의 도전은 계속되었고,

<로스트 월드>, <메트로폴리스>, <넥스트 월드> 이 3부작이 가장 사랑을 받았다고 하네요.

데즈카는 공상 과학 만화로 지구의 위기를 알리려고 했는데요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란 두 강대국이 냉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로

서로 핵 개발을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데즈카는 전쟁을 막고 싶었어요.

데즈카는 자기 만화를 읽는 아이들이 지구를 전쟁과 싸움질로 망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길 바랐죠.

자신이 어릴 적 전쟁을 겪어 봐서 전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전쟁이 끝나고 일본 경제가 서서히 되살아나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였고

만화가 공부에 방해가 되고 비교육적이라며 만화 추방 운동을 벌였지만

어른들도 차츰 데즈카의 만화에 빠져 오히려 만화의 지위가 높아지게 되었다는 사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넓히려고 노력했는데요

어린이 만화를 그리는 사람으로 어린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꿈을 가졌는지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그 덕분에 데즈카 오사무는 점점 나이가 들었지만 그의 만화만큼은 늙지 않았죠.







만화가로 활동하면서 늘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던 데즈카는

디즈니 <밤비>를 극장 옆 호텔에 방을 잡고 열흘 동안 80번이나 보았고,

다른 극장으로 찾아가 50번을 더 보면서 <밤비>를 철저하게 연구했답니다.

그리고 십 년 안에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디즈니 못지않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지요.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에 도전하여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무쇠팔 아톰>을 만들어

저녁 6시 15분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톰의 활약상을 지켜보게 만들었답니다.

<무쇠팔 아톰>은 보는 사람들에게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어 국민 애니메이션이 되었는데요

<무쇠팔 아톰>은 일본인들에게 미래를 향한 메시지를 보여주었고,

일본인들은 아톰에 나온 미래 일본의 모습을 현실 속에서 이루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으며

실제로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과학자나 엔지니어 중에는 아톰을 보고 인생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사람이 많다고 하네요.







<무쇠팔 아톰>은 미국에까지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요

데즈카는 원작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내용으로 계약을 맺었고,

<무쇠팔 아톰>은 물론 후속작 <에스트로 보이>도 미국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아톰은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이라 저도 어릴 적에 아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죠.

데즈카의 만화는 일본 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전파시켰으며

외국 어린이들은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등 문화 사절 역할을 톡톡히 했던 거네요.

하지만 사업에 소질이 없었던 데즈카는 운영하던 회사가 파산되어

다시 만화를 열심히 그려 자금을 모아 작은 애니메이션 회사를 차려

<점핑>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데즈카의 만화 대신 극화를 보기 시작했는데요

데즈카 만화의 독자가 주로 어린이였고 명랑했다면,

극화는 어른을 상대로 현실 세계를 다룬 냉정하고 비정한 어른 세계 이야기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극화의 유행으로 데즈카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포기하지 않고

젊은 작가들이 그린 극화를 연구하여 <블랙잭>이라는 극화를 탄생시켰지요.

데즈카는 생전에 그린 모든 만화 중에서 <불새>가 일생을 바친 유일한 작품이라고 했다는데요

<불새>는 영생을 얻기 위해 죽지 않는 새 불새를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해요.

1954년에 시작해 35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렸지만

데즈카의 죽음으로 일생을 바쳐 그리고자 했던 <불새>는 미완성작으로 남았지요.







만화 그리는데 전념하느라 자신이 암에 걸린 것도 몰랐던 데즈카는

수술을 받고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연재만화 3편, 애니메이션 3편,

<불새>의 뮤지컬 대본을 쓰는 등 일을 손에서 놓질 않았죠.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7 살에 네 컷 짜리 신문 만화 <마짱의 일기장>으로 데뷔하여

60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15만 장의 원고를 그렸고,

만화 700여 편, 애니메이션 60여 편, 원고 15만 매를 쓰는 등

일생을 만화가로 살았던 데즈카를 일본 사람들은 '일본 만화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재미없는 만화는 만화가 아니다.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웃음이 되는 것,

이것이 만화가의 길이다."






만화는 아이들만 보는 건 줄 알았는데 데즈카의 만화에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들어있어

전쟁 후 사람들의 메말랐던 가슴에 희망을 선사해 주어 일본인들이 더 좋아한 것 같다는 썬양.

아직 데즈카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고 싶다는군요.







만화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데즈카 오사무라는 인물도

중등전집, 세계위인전집 청소년평전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며

데즈카 오사무의 어린 시절부터 유명한 만화, 업적까지 정리를 잘 해놨더라고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발전하게 된 것은 역시 데즈카 오사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프랑스나 러시아 등 전 세계의 만화 영화 제작자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한 디즈니 스타일을 따라가기 급급할 때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다양한 방식을 끊임없이 시도하여

일본 만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끓어 올린 데즈카 오사무를

만화의 신이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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