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세바시’에서 성차별에 관한 강의를 했다.반응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난 만족한 상태에서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괜찮은 반응’이라는 건 청중들이 많이 웃었다는 뜻일 뿐이고
그 웃음은 내 특유의 셀프디스, 그리고 찌질한 남성들에 대한 비판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 생각해보자.
청중들이 많이 웃으면 좋은 강의일까.
강의를 듣는 목적은 새로운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의 힘으로 남은 세상을 보다 잘 살아가기 위함이지,
웃기 위함은 아니다.
웃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다리품을 팔아가며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
아래 사진을 보라. 얼마나 웃긴가?
갑자기 이런 글을 쓰게 된 건 손아람 작가의 세바시 강연을 봤기 때문이다.
그 역시 나처럼 성차별에 대해 강의를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180도 달랐다.
물론 사람들은 내 강의에 훨씬 더 많이 웃었다.
하지만 손아람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은
‘아, 정말 그렇구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나처럼 많은 슬라이드를 준비하지 않았지만,
한 장 한 장이 다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넘길 때마다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격렬한 동의를 표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손아람 작가는 내가 6개월간 몸담았던 <까칠남녀> 패널이다.
내가 그만두면서 그 후임으로 구한 분이 바로 손아람인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당시 난 손아람을 몰랐다.
그래서 대기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사를 할 때 이런 헛소리를 해버렸다.
손아람: 안녕하세요. 손아람입니다.
서민: 네, 안녕하세요. 안그래도 정영진 형님이 혼자서 남자 대변하느라 힘든데
많이 도와주세요.
그때 손아람은 이렇게 말했다.
“네? 아니 페미니스트 포지션이 있지.....”
그
날 집에 와서 손아람 작가에 대해 찾아보고 나서야,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그를 각인시킨 버스킹 프로 <말하는대로>의 강연영상을 보고 난 뒤에야,
내가 한 말이 헛소리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뒤 내가 나올 땐 잘 안보던 <까칠남녀>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는데,
손아람 작가의 말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그만둘 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다.
그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는 내 공격대상이 남성들의 찌질함인 반면
손아람은 성차별이 남자에게도 해롭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서민: 성차별 하지 마라. 가진 거 안내놓으려는 너희들, 왜 이리 찌질해?
손아람: 성차별 하지 마라. 성차별을 하면 남성들이 훨씬 더 큰 짐을 질 수밖에 없다.
내 강연이 ‘왜 모든 남성을 찌질하다고 욕하냐’는 반응에 그치는 반면
그의 강연이 남녀 모두를 공감시킬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5분밖에 안되는 강연이니 이 강연을 모두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여기다 링크를 건다.
아쉬운 건 이 주옥같은 강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이런 강연을 듣고도 여성을 욕한다면 답이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댓글들은 여전히 그런 댓글로 들끓고 있다.
그러고보면 찌질한 남성에 대한 욕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강연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댓글에서 위안을 받은 희한한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