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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사의 고백 - 현대의료체계에 대한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고백록
알프레드 토버 지음, 김숙진 옮김 / 지호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한 과목 전체를 의료 문제에 대한 학생들간의 토론으로 채운 적이 있다. 책도 읽고 선배에게 물어도 보는 등 그 주제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오기를 바랐었지만, 학생들은 그저 인터넷에서 뽑아온 자료를 읽기에 바빴다. 내가 바라던 ‘토론’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학기를 그렇게 보내니 많이 허전했다.
올해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그렇게 토론하면 안돼!”라고 말한 뒤 잘 하기를 기대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난 방식을 달리 해보기로 했다. 작년에 내가 모방했던 게 100분 토론이었다면, 올해는 KBS의 <책을 말한다>를 모방하기로 한 것. 책의 내용을 발표하게 한 후 조원들로 하여금 그 책에 대한 느낌을 말하게 하는 게 내 야심찬 계획이다. 토론이 잘 안된다 해도 한학기 동안 책을 한권씩 읽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효과는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책이 좋은지 나도 잘 모르겠어서 의료에 관한 책을 몇권 샀고,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만난 게 바로 <어느 의사의 고백>, 의학과 철학을 모두 전공한 토버라는 저자가 쓴 이 책은 의외로 보석같은 책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의사 시절 겪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하는데, 저자의 유려한 문체는 쉽게 내 공감을 이끌어 냈다. 아픈 소녀의 병상 곁에 앉아 고민하고 있는 의사의 모습을 그린 루크 필데스의 그림처럼 과거의 의사는 환자를 한 인간으로 보고 치료에 임했지만, 현대 의학은 경제 논리와 과학 우선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질병 중심주의에 빠져 환자를 인간으로 보는 관점이 부족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
“의사의 가장 핵심적인 자질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의사들은 과학적 중재자 이상이 되어야 한다.”
저자가 들려주는 일화 중 내가 가장 감동받은 대목 하나. 일주일 전에 만난 환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쾌활한 걸음걸이는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의 시선도 끌만 했다....
여자: 안녕하세요? 저를 기억하시죠.
남자: 물론이죠.
여자: 저..혹시 커피 한잔 안하실래요? 저희 집이 이 근처인데.
남자: 안되는데...의대생들은 바빠요.
여자: 그러지 마시고 같이 가요. 제가 멋진 시간을 만들어 드릴게요. 전 당신이 좋아요.
그녀는 그녀와 함께 할 모든 매력적인 기회를 약속하며 눈앞에 서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자는 말한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그가 수석졸업을 하고 이렇게 훌륭한 의사가 된 것은 바로 그런 엄청난 인내심에 있을 것 같다.(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이렇게 훌륭한 책의 판매가 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엔, ‘어느 의사의 고백’이란 제목이 너무 평범한 것도 이유가 될 듯하다. 요즘 얼마나 고백이 난무하는지, 고백이란 말을 들어도 아무도 관심이 없지 않는가. 알라딘서 ‘고백’으로 검색을 해보니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롯해 무려 218권이 뜬다. 그러니 그런 제목보다는 ‘의사여, 인간이 되라!’라든지 ‘과학아 비켜라, 윤리가 간다!’같은 제목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고 학생들이 어떤 느낌을 말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