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이 지방에서 올라왔다. 레이니 선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원칙대로라면 나도 같이 그 공연을 봐야겠지만, 난 그런 류의 음악을 끔찍히 싫어한다. 시끄러운 전자악기 소리에 소리만 질러대는 가수들, 그런 곳에서 두시간을 있는 건 내겐 지옥이다. 내가 사는 홍대앞은 그런 류의 공연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난 한번도 그런 곳에 간 적이 없다.

여친에게 말했다. "공연 끝나고 전화해. 맥주나 한잔 하자"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여친은 전화를 했고, 난 대충 옷을 챙겨입고 대학로로 갔다. 여친은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알던 인터넷 카페 회원 셋과 함께였다. 그런 류의 팬클럽은 전부 여자들인 줄 알았던, 그래서 여자들이 바글바글할 줄 착각을 했던 나는 여친과 같이있는 애들이 시커먼 남자들인 걸 확인하고는 실망으로 가슴이 무너졌지만, 이내 적응해 그런대로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들은 20대 초반의, 한눈에도 착해 보이는 애들이었다.

내가 갔을 때, 그들은 이미 소주 네병을 비워놓은 상태였다. 그때까지 먹은 안주는 조그만 냄비에 담긴 조개탕이 전부. 내 20대 시절이 생각났다. 그땐 나도 찌게를 여러번 덥혀 달라고 하면서 술을 마시곤 했었지. 2천원이면 소주 두병에 계란말이 안주를 먹을 수 있던 시절이었고, 남이 남기고 간 안주를 먹는 게 전혀 흉이 아니었었지. 난 그들에게 '삼겹살 두루치기'와 '낚지볶음소면'을 시켜줬고, 잠시 후 계란탕을 더 시켰다. 그들과 어울려 소주를 한병쯤 마셨고, 2차를 가서 맥주를 세병쯤 더 마셨다. 집에 들어간 시각은 새벽 2시. 피곤해서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이로써 난 새해들어 두번째 술을 마셨다. 얼마 안마신 것 같지만, 새해가 시작된지 사흘간 두번을 마신 셈이니 그리 성공적인 출발은 아니다. 오늘은 안마셨지만, 내일 난 또 술약속이 있다. 모교 동문들과의 신년회다. 안갈 수는 없지만, 그리 내키지 않는 것이, 새해 첫날 선생님 댁에서 어떤 깽판을 쳤는지 아직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갈까 말까, 지금도 난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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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4-0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레이니 썬'은 '시끄러운 전자악기 소리에 소리만 질러대는 가수들'은 아닌데요 ^^; 엄청난 파토스가 느껴지는 그룹입니다. 마태우스님 술일기 예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