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리샴이 쓴 <사라진 배심원>을 보면 주인공은 거액이 걸린 담배 회사와의 소송의 배심원에 선정되는데, 그는 배심원들을 교묘히 조종하며 사상 최고액의 배상을 하라는 평결을 이끌어 낸다. 그걸 보면서 배심제라는 게 멋지구리한 제도이긴 하지만 나름의 허점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입법화된 건 아니지만 현재 시민단체가 추진 중인 사법개혁에는 배심원 제도가 자리하고 있다. 특검제같은 거라면 모르겠지만, 의학전문대학원처럼 우리 현실에 안맞는 미국의 제도를 추종하면서 그것이 개혁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게 난 싫다. 미국이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변호사에 따르면 배심제를 하는 재판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며, 바쁜 사람들을 무한정 가두어 둘 수가 없는 탓에 배심제를 채택한 재판은 일주일 이내에 속성으로 진행을 한단다. 일주일만에 평결까지 끌어낸다면 제대로 된 판단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차지하고라도, 우리나라에서 배심제 때문에 일주일씩 회사를 비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재판 붙잡혀 들어갔다 왔더니 회사 잘렸다’는 말이 유행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난 우리나라 사람들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옛말이 있긴 하지만, 살다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악법 중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도 놀랍고, 과거사 규명보다 경제나 살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도 괴이한 일이다. 과거사 규명이 경제와 상충되는 것도 아니고, 경제살리기가 중요하다 해도 국회의원과 역사학자들이 모두 공장에서 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자기 일을 할 때 나라가 발전한다는 말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귀가 따갑게 들은 얘긴데, 경제를 빌미로 과거사 청산을 미루려는 수구세력의 전략에 어쩜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있담? 고종석이라는 분은 탄핵 직후 여론조사를 보고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이 25%나 된다니 놀랍다... 어느 사회에나 극우는 있지만, 25%는 불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의 비율 치고는 너무 높다”


그렇다. 배심제에서 기대하는 건전한 상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언론에 휘둘리고 양심에 따른 판단이 아닌 정략적 판단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재판을 맡긴다? 차라리 보수적이긴 해도 법리적으로 엄격한 판결을 내려주는 판사들에게 난 내 운명을 의탁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배심제를 반대하는 이유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리오 2005-02-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일에 참, 어떤 것이 올바른 일인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있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판 뿐 아니라, 너무나 많은 일들이 그들의 상황은 이해되지만 그건 너무 심하다... 는 생각이 들게하고.. 이도저도 못하는 제 성격탓일까요?

부리 2005-02-2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생각엔 말이지, 자네가 운명을 맡기고 싶다는 그 판사들도 탄핵에 찬성한 25% 중 일부가 아닐까. 그리고, 나처럼 착하게 살면 재판에 회부될 일도 없을 텐데, 자네 벌써부터 비뚤게 나가려고 하는가?

부리 2005-02-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네. 자꾸 재판받고 싶네. 희한하네!

플라시보 2005-02-2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과거사 진상 규명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경제나 살리라는 말을 하는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갑니다. 님은 직업이 교수라서 어느정도 보장된 월급과 생활을 하시는것으로 아는데요. 힘든 사람들은 정말로 다 집어치우고 먹고 살게나 해주면 딱 좋겠다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물론 극것 만으로 사는게 전부인건 아니지만 그들이 단순하게 무식쟁이거나 수구세력에 넘어가서 혹은 과거사 진상 규명의 중요성을 몰라서만 그러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님이 모르시는 (재벌 2세이시니^^) 서민들의 삶은 되게 고달프답니다. 으흐..^^

BRINY 2005-02-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미국 TV드라마CSI에서, 질질 끄는 재판 일정에 지친 배심원이 용의자를 계획 살인해버리는 사건을 다룬 적이 있어요. 재판 때문에 자기 생활 다 망쳤다고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 배심원이 생각나네요.

샤크 2005-03-0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웃찾사의 대사가 님이 말한 유머? -_-;;; 실력자라 하시구선... 치..
저정도는 나도 따라하겠어요

마태우스 2005-03-0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크님/하핫, 실력자는 자잘한 유머도 많이 하지요. 그러다보면 큰 게 나옵디다^^
브리니님/호오, 그런 일도 있군요. 흐음, 역시 배심제는...
플라시보님/아 제 말은요, 과거사 규명과 경제 살리기가 배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MBC에서 친일파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는 소송을 낸 걸 방영하더군요. 1심은 승소했고, 이대로 가면 국가가 땅값을 물어줘야 한다더군요. 이게 다 과거사 규명이 안된 탓이어요. 국가가 친일파 후손에게 몇천억을 물어주는 것보다, 그 돈으로 경제를 일으키는 게 훨씬 낫겠지요? 그러니까 과거사 규명을 해야 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