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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김영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고발한다>의 저자 김영명은 최근 들어 심화되고 있는 영어의 범람에 통탄을 금치 못한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머지않아 우리말이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걱정과 영어 공용화 주장에 대한 분노가 책 전체를 통해 느껴지지만, 유감스럽게 난 그의 주장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에 쓰던 말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그 변화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는 건 불가능하다. 불필요하게, 되지도 않는 영어를 섞어 쓰는 사람들을 볼 땐 나도 기분이 안좋아지지만, 그런다고 우리말이 없어질 거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가 국체를 유지하는 한 한국어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1) 막말
사실 영어 공용화 주장은 허구다. 거기에는 진지한 대응보다는 무시나 풍자가 더 효과적인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분노를 쏟아내며 반박을 하는데, 그 말이 그 말이고, 재탕, 삼탕에 사탕까지 반복되어 읽느라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영어를 쓰는 나라는 식민지 뿐이다"는 말은 수도 없이 나오고,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하겠다"고 해놓고는 끝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막말까지 한다.
-그래, 그러면 당신은 거기 가서 살아라(75쪽)
-백치이거나 미친 놈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91쪽)
2) 어거지
[영어에는...비서양인을 깔보고 서양 것을 최고로 여기며 서양 것, 특히 미국 것을 전파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배어 있다(100쪽)]
영어는 원래 영국의 언어인데다, 그 안에 무슨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런 식이라면 한글에는 한국 것만을 최고로 여기며 동남아 노동자를 깔보는 이데올로기가 배어 있는 것이 되는가?
3) 되지도 않는 비유.
[지금 세계의 언어 환경은 언어들간의 각축전..힘센 언어가 힘없는 언어를 갉아먹고 토착어를 몰아내고... 이러한 상황을 놓고 언어 순결주의니 무엇이니 하는 것은 너무나 세상을 모르는 얘기다. 마치 굶어죽는 사람에게 과식의 폐해를 설교하는 꼴이다(121쪽)]
이 비유가 공감이 가는가? 그보다는 먹을 게 없어서 풀만 먹는 사람에게 고기는 왜 안먹냐고 윽박지르는 꼴이라는 게 더 나은 비유가 아닐까?
4) 잘못된 전제.
[영어 옹호론자들은 영어가 다른 언어들보다 훨씬 더 발달한 언어이며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생활수준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151쪽)]
난 아직까지 영어가 더 발달한 언어라서 영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미국이 힘있는 나라니까, 영어를 안쓰면 낙오되니까 영어를 쓰자는 게 아니던가?
5) 주장의 종횡무진
-130쪽, "민족주의를 멸시하는 것을 무슨 큰 지적 세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연민의 대상이다"
-94년에 썼던 저자의 책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들인지는 밖에 나가보면 너무나 확연히 드러난다...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115쪽, [이러한 과잉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에 관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생각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은 요즘 들어(요즘과 지금의 차이는 뭐지?)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결코 과잉이 아니라는 점을 최근 들어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과잉인 부분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비합리적인 어거지로 나타날 때도 많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117쪽, "근본적으로 나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과잉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그 양도 과잉이 아니고, 질도 과잉이 아니다.
-같은 쪽, "과잉 사대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이제야 이 세계화의 시대에 와서야, 나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휘황찬란한 변신에 눈이 어지럽다. 94년에 민족주의를 비판한 게 잘못이었다고 하면 될 것을 사과를 안하려고 궤변을 늘어놓는 모습이란!
6) 자기 얼굴에 침뱉기
[함석헌의 방대한 전집 20권을 한권씩 읽어가다 두세권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계속 같은 말의 반복이고 더 알아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195쪽)]
두세권이면 불과 10-15%인데, 그걸 읽고 그만둔 건 너무하는 게 아닐까? 참고로 난 이 책이 같은 말의 반복이고,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체계도 없는 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지겨움을 참고 읽었다.
물론 난 저자의 선의를 이해한다. 그리고 논문만을 높이 치고, 맞지도 않는 외국 이론을 수입해 오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학자들이 많다는 저자의 지적에도 백번 동의한다. 신문에 한줄 실리는 게 판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조선일보는 한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그런데 조선일보 자신은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한자를 안쓰고 있다. 이 무슨 자가당착인가?...최근에는 갑자기 영어 장사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나머지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책을 쓰지 못한 듯하다. 저자가 좀더 좋은 책으로 한글사랑을 설파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