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정치인들은 우리와 좀 다른 종족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일민족이니 분명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지만, 그 언어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것과 의미가 다르며, 사고체계도 이상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사례들을 적어본다.

1) 동어반복
총선 전 토론회, 한나라당 은진수 대변인이 열변을 토한다.
"지금 추세로 보아 열린우리당이 250석 정도 석권할 것 같소이다. 그럼 의회독재가 되니 야당에도 표를 주시오"
손석희: 그러니까 거여견제론을 말씀하신 거군요?
은진수: 그게 아니라, 열린우리당이 의석을 너무 많이 가지면 안된다는 얘기죠.
"호형호제를 허락하노라"라고 했을 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형호제가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말했던 개그맨 김학래가 떠오른다. 은진수 뿐 아니라 정치인들은 "그게 이말이죠?"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라고 하지 않고 그전에 했던 말을 반복한다.

2) 일단 부인하고..
한보 때 5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포착된 김덕룡 의원, 대번에 부인한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 이건...음모다!"
하지만 검찰에서 증거를 들이대니 할수없이 시인한다. "아깐 음모라고 하셨잖아요?"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내가 안받았다고 한 적은 없소. 그리고 내가 말한 음모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음모가 아니오"
경선불복으로 대선에 나올 때마다 추궁을 받는 이인제 의원, 그냥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면 될 것을 "내가 한 것은 경선불복이 아닙니다. 전 다시 경기도지사로 돌아가 열심히 봉사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저를 그렇게 놔두지 않아서...."

3) 아예 애매하게...
나중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아예 애매하게 하는 게 좋다. 이걸 가장 잘한 사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는데, 그의 담화문은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문구로 가득하다. 그런 사람은 지금도 많다.
"내가 꼭 밥을 먹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안먹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밥이 중요한 건, 그게 식사이기 때문이다"

4) 봉창을 뚫는다
-탄핵 가결 직후, 박관용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은 전진해야 합니다" 그는 그게 아주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그게 그 상황에서 할 소린가 싶다. 탄핵 소추가 기각된 판국이니 박관용은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전진은 실패했습니다!"
-평소 의정활동에 관심이 없던 윤한도 의원, 국정감사 때 TV 카메라가 오니까 갑자기 주머니에서 무를 꺼내들고 장관에게 묻는다. "이 무가 바로 농민들의 피와 땀입니다!" 누가 뭐래나? 그가 입은 옷도 노동자의 피와 땀인 것을...

5)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쓴다
-김종필이 아니었다면 난 '몽니'라는 좋은 말이 있는지 몰랐을 게다. 그의 말처럼 자민련은 매번 몽니를 부려 정부의 개혁을 갈지자로 만들었다.
-탄핵이 가결된 이후 김영삼은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그가 그 말 뜻을 알고 했다고 믿는 사람은 유감스럽게 많지 않다.
-박재순(로렌초의 시종님이 지적해주셨는데, 김재순이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국회의장이 재산이 너무 많은 게 드러나 촉출당하자, '토사구팽'이란 말을 했다. 그 덕분에 많은 이들이 그 4자 성어를 알게 됐지만, 수백억대의 재산이 있는 사냥개가 과연 있을까?
-97년의 정권교체 후 민주당 모 인사는 '권불십년'을 이렇게 정의했다. "권력은 적어도 십년은 간다는 뜻" 후후, 그의 말처럼 되긴 했지만, 자라나는 애들은 많이 헷갈렸을게다.

그밖에.. 자신의 뜻을 국민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 걸핏하면 "군사독재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우기는 기억의 빈혈, 검찰이 수사만 하면 "야당탄압" 운운하며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 믿고싶은 것만 믿는 사고의 편리함 등등 정치인들은 참으로 희한한 특징들을 가졌다. 원희룡이나 남경필, 송영길같은 소장파 정치인들은 좀 낫지만, 그래도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 어제 하루 글을 못썼다. 지금은 그 한을 풀고 있는 중이다. 여러개를 쓰면 하나는 좋아야 하는데, 다 되지도 않는 글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로렌초의 시종님은 이러셨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글을 하루에 쓰냐"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하는 일이 없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 오늘 내가 한 긍정적인 일은 무슨 자료를 작성해 교학과에 갖다준 것 뿐이고, 그거 말고는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정말이지 시간이 없어 글을 못쓴다. 오늘 술만 안먹으면 열편도 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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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4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4-05-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열정이십니다님. 이 속도로 나가면 열흘만에 책 한권인들 못쓰겠습니까. 하하^^ 허나 놀라운 것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다작을 하면서도 작품마다 수준급이시니..역시 책은 아무나 내는게 아니었습니다.

갈대 2004-05-14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니' 사전에서 뜻 찾아서 열심히 받아적었습니다.
몽니 :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 예) 몽니를 부리다
출저 : 동아 새국어사전(전자사전에 있음..-_-;;)

▶◀소굼 2004-05-1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지만
[-박재순(로렌초의 시종님이 지적해주셨는데, 김재순이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국회의장이 ]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박재순과 김재순에서 헷갈리고 있어요^^;

계란말이 2004-05-1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글 올리시는 것도 매우매우 좋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