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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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이하 미미여사)의 <하루살이>를 읽었다. 미미여사의 팬이긴 해도 그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흔들리는 바위>를 읽고 난 뒤에는 미미여사의 시대극은 되도록 읽지 않으려 했다. 그런 내가 <하루살이>를 산 이유는 그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으로, 에도 시대가 배경이라는 걸 알았다면 안샀을 것이다. 그저 제목이 끌렸고, 너무 오랫동안 미미여사의 글을 안읽었다는 자각이 그 책을 사게 만든 이유였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아내가 재미있다고 하기에, 혹시나 하고 읽게 된 것.


책은 기대 이상이었다. 요즘 들어 기차에서는 잠만 자기 일쑤였는데, <하루살이>를 읽는 동안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다음 장면이 궁금해 책을 읽었다. 심지어 강원도 횡성으로 출장을 갔던 날은 그 전날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8%가 나올 만큼 달려서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버스 안에서 계속 책을 읽었다. 앞으로는 미미여사의 시대극에 대한 편견은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한 게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이다.


아쉬운 대목. 각 단편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장편을 향해 달려가는 구성을 가진 이 책에서 첫 번째 사건을 해결한 이는 바로 짱구라는 아이였다.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초상화를 그린 부채가 연관이 있었고, 짱구는 그만의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해 오래 전 발생한 사건을 끄집어내고, 그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여기까지 읽고 “앞으로도 쭉 짱구가 사건을 해결하겠구나” 했는데, 그 뒤 벌어진 사건들에서 짱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2권 말미에 범인에게 목을 졸려 살해당할 뻔한 오하스라는 아이를 위로하려고 웃긴 춤을 춘 게 짱구가 그 이후에 했던 유일한 기여였으니까. 첫 사건 이후 사건들에 결정적 힌트를 제공한 건 유미노스케라는 천재소년인데, 이 아이는 남자임에도 미모가 출중해 보는 사람마다 “그 녀석 참 예쁘네”라는 말을 한다. 그러니 또래 여자애들은 보는 즉시 넋을 잃을 수밖에. 심지어 한 여자애는 그를 가리켜 ‘인형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이런 애가 머리까지 좋아 사건을 곧잘 해결하니, 외모가 하위 10%인 나로서는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소설이긴 하지만 그렇게 완벽하게 그리는 게 미안했던지, 미미여사는 유미노스케가 잠자리에서 가끔 소변을 지리는 설정을 한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여자들한테 물어보면 “잘생기고 머리 좋으면 됐지, 소변 좀 못가리면 어떠냐?”는 반응을 보일 거다. 책을 덮고 나서 웃기는 춤이나 춰야 했던 짱구가 불쌍해 술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너무 역할이 없으니까 2권 중간쯤에 그동안 벌어졌던 사건일지를 다 외우기까지 하는데, 그렇게 외운 건 사건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범인을 잡는 건 물론이고 범인의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는 일까지 모든 걸 담당한 건 잘생긴 유미노스케였다. 좋은 소설은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미미여사의 <하루살이>는 그 범주에서 벗어난다. 머리 좋은 놈이 외모도 출중한 요즘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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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2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3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3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1-03-13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그렇다고 아이에게 술을 사주다니요....근데 그나저나 혈중 알콜 농도가...무려..!!

마태우스 2011-03-13 18:26   좋아요 0 | URL
벌금 8만원 아직 미납입니다ㅠ 글구 에도시대때는 아이도 술을 마셨다는 게 저만의 주장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 때문에 미미여사를 알게 되고,
한동안 미미 여사에 심취하여 엄청 읽는데........
모방범이 제일 가벼운 소설이더라구요. 다른 것을은 읽고 나면 왜그리 맘이 무거운지.
아직도 안 읽은 '외딴집' '레벨7' '나는 지갑이다' 등 집에
손을 차마 못 대고 있는 미미 여사 작품이 가득하답니다. ㅠㅠ

마태우스 2011-03-13 18:27   좋아요 0 | URL
그죠 미미여사는 소설을 통해 일본사회를 얘기하는 작가인데, 그분이 제기하는 사회문제들이 참 무거운 것들이죠. 이유 같은 책이 대표적....

stefanet 2011-03-1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 여사의 에도시대 배경 시대물로는 '외딴집'도 매우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앞부분이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참고 결말까지 보시길 강력 권고드립니다!
미미여사님의 다른 작품에서 보이는 따뜻한 분위기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