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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정지환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말>이라는 잡지를 읽으면서 정지환 기자를 알게 되었다. 그의 글은 언제나 날카로웠고, 글 전체에서 성실함이 묻어나왔다. 그런 기억 때문에 그가 책을 낼 때마다 망설임 없이 샀고, 대부분 만족했다. 그가 이전에 낸 책들에 비해 덜하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책 날개에 있는 저자 사진을 보면서, 정지환 기자를 처음 볼 때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글들을 읽으면서 떠올린 외모와 사진에 난 모습이 너무 달랐기 때문. 정재환이라는 개그맨을 닮지 않았을까 제멋대로 생각했건만, 사진의 인물은 아무리 봐도 날카롭다고는 할 수 없었고, 얼굴엔 큰 점도 하나 있다. 역시 글과 외모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법, 글로 감동을 받았다면 사진은 안보는 게 좋은가보다. 이번에 낸 책에 내 사진이 전혀 없는 이유도, 그전에 낸 책이 망한 건 표지에 내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기 때문이라는 출판사의 판단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얘기도 다 재미있지만, <한국논단>이 주최한 '대선후보 사상검증 토론회' 대목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아니, 서글프다고 말해야 하나. 남의 사상을 검증한다는 토론회가 방송3사에 의해 생중계되는 와중에 개최될 수 있었던 것도 어이가 없지만, 거기서 나온 말들이라는 게 코미디를 방불케 한다.
-<모래시계> 등 TV 드라마가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의도광장을 공원으로 바꿔 전시에 비행장으로 쓸 수 없게 됐다
-경실련, 참여연대, 민변 등의 시민단체가...무슨 돈을 가지고 활동합니까? 일설에 의하면 재벌이나 기업의 약점을 미끼로 돈을 긁어 쓴다고 합니다.
이 토론회가 개최된 것은 97년 대선 때, 그러니까 불과 7년 전이다. 지금은 좀 나을까? 오늘 신문을 보니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투표장이 낙동강 전선이다. 어른들이 다시 일어나 나라를 구하자...국회마저 좌익의 손에 넘어가면 공산화를 막을 수 없다(서정갑)"
"여당의 승리가 확실시되고 있다...합법적으로 국회를 통해 적화통일을 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인가(김동길)"
얼마 전 TV에 나온 자민련 모 대변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촛불시위에서 외치는 민주가 자유대한의 민주냐, 북한의 민주냐"
그러니까 극우의 정신수준은 지난 7년간 전혀 나아진 게 없다. 나이든 세대가 물러나면 극우 없는 세상이 올까 싶었지만, 신혜식같은 젊은 극우를 보니 우리는 평생을 극우와 더불어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겠다. 하지만 제발 공부 좀 하시라. 최소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호소력이 있지 않겠는가.
맘이 불편했던 한가지. 화가 오지호를 얘기하던 정지환은 갑자기 딴길로 빠진다. "그런데 나는...예상치 않게 더 많은 자료를 발견했다(225쪽)"며, 5.16 혁명재판 때 이회창이 판사로서 많은 사건을 처리한 얘기를 한다. 우리가 아는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처형도 그때 이루어졌다. 이회창이 그때 저항하지 못한 것은 맞고, 그로 인해 승승장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슬푸른 혁명세력에 저항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대에 저항할 용기를 갖기 힘들며, 우리가 민주화 투쟁에 나선 인사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회창 씨는 이제 정계에서 은퇴를 한 판국인데, 40여년 전 일을 다시 끄집어내는 건 그를 두 번 죽이는 게 아닐까? 이 대목만 뺀다면 좀더 유쾌하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