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3월 30일 화요일

누구와?: 브로커와
마신 양: 소주 두병씩을 나누어 마셨는데...
나쁜 점: 한병을 넘기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비겁하게 그만 마시자고 했다... 브로커는 측은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담?

사재기의 윤리적 고찰

브로커에게 부탁해 교보에서 내 책을 몇권 샀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에 두세번 정도는 이짓을 하는데, 그 결과 우리집 구석에는 내 책이 제법 많이 쌓였다. 책이 쌓인 높이를 보면 "줄 사람이 많아서"라는 그간의 변명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물론 아직도 줄 사람은 많고, 책을 포장해서 보내는 게 이젠 좀 지겨워져-한두권이면 몰라도 이삼십권을 포장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시간을 끌고 있다. 그렇다해도 더 싸고 편하게 알라딘서 주문을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는 없다.

그렇다. 난 교보의 진열대에서 내 책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진열대에 있던, 그러나 잘 팔리지 않던 책들이 다 책꽂이로 들어갔지만, 내 책이 굳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다 사재기 덕분이리라. 서점 측에선 책 한권당 2천여원이 남으니, 꾸준히 팔린다면 굳이 책을 치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ㅈ' 출판사라는 곳은 언론플레이를 무지하게 많이 해, 책만 내면 기사로 큼지막하게 실어줬다. 물론 신문광고도 많이 때렸고. 책만 내면 일정 부수가 보장된다는 점 때문에,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거기서 책을 내고자 줄을 섰었다.

몇 년 전, <열한번째 사과나무>라는 책이 출판사 측의 적극적인 사재기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 출판사 측에서 "우리만 그러냐"고 항변을 했었는데, 사실 비싼 돈을 주고 광고를 하는 것보다, 사재기로 순위를 끌어올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잘팔리는 책을 사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광고를 때릴 능력이 없으면, 기사로 실릴 연줄이 없으면 사재기에 유혹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출판사가 다 그렇지만, 내가 책을 낸 출판사도 그리 여유있는 곳은 아니다. 게다가 단행본이 주도 아니다. 그고를 할 능력도, 기사로 실을 수도 없는 처지, 정상적이었다면 내 책은 진작에 진열대에서 사라질 위기였다. 그러니 시장원리에 의해 퇴출되어야 할 책을 여지껏 내가 붙들고 있는 거다. 그래서 내 브로커 중 한명은 내게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책도 내 자식같은 존재인데, 되도록 오래 독자와 만나게 해주고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광고를 크게 때리는 출판사의 책이 재벌의 자식이라면, 나처럼 작가가 사재기를 해주는 책은 중소기업의 자식은 될 터, 진열도 못되고 사장되는 수많은 '어둠의 자식들'에 비하면 한결 행복하리라. 있는 집 자식들이 대학도 잘 가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의 운명은 어느 가문 출신이냐에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다. 내 자식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훨씬 의미있을 다른 책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 게 미안하긴 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4-04-0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마태우스님이 브로커랑 사재기 얘기하시면 재밌게 듣고 그랬는데, 사실은 엄청난 시장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던거였군요.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베스트셀러는 점점 더 베스트셀러가 되는게 맞는거 같아요. 왠지 조금 씁쓸하네요...^^;;;

플라시보 2004-04-03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아닌 책들이 베스트셀러라며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것을 볼때마다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사정이 좋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대대적인 광고와 언론플레이로 인해 이름이 많이 알려졌고 바쁘고 시간없는 현대인들은 당연히 이름을 많이 들어본 그 책들을 구입하고 그로 인해 그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죠. 계중에는 괜찮은 책도 있지만 함량 미달의 책이 베스트셀러칸에 자리를 잡고 있을 동안 좋은 책들은 안팔린다는 이유로 서점에서 사라지거나 너무 빨리 절판이 되는걸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알라딘을 이용하는 이유도 바로 저런 언론플레이와 광고의 힘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아닌 사람들이 읽어보고 좋더라 하는 책을 찾아내기 위해서였구요. 나 역시 그래서 리뷰를 쓰는 거구요. 아무튼 그렇고 그런 베스트셀러보다 님의 책이 훨씬 훌륭하고 재미있었음을 고백하는 바입니다. 제발 꾸준하게 팔려서 광고나 언론의 힘 없이 독자들에 의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님. 사재기 계속 하십쇼. 그렇게라도 해야 있는집 자식 발 뒷꿈치라도 따라가고 더 나아가 실력으로 앞설 수 있을테니까요)

마태우스 2004-04-0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자본주의란 그래서 잔인한 겁니다...
플라시보님/제 책이 훌륭하고 재미있다뇨. 아이, 왜이러십니까? 남들이 보면 웃습니다... 사재기는 계속할께요. 오늘 아침에도 잠깐 가서 하고 왔습니다^^

비로그인 2004-04-0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씁쓸하네요!! 제 이미지를 님의 책으로 바꿔야 하나 심히 고려가 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