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식대로 일요일을 한주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나의 한주는 테니스로부터 시작한다. 일요일 아침마다 테니스를 친지도 벌써 9년째, 돌이켜보면 참 꾸준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쳐왔다는 생각이 든다.

1. 기분
테니스를 잘친 날은 한주가 즐겁다.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내가 날렸던 빨랫줄 같은 스트로크를 떠올리면 기분이 금새 좋아진다. 하지만 그다지 잘 못친 날에는 일주 내내 짜증이 난다. 어제? 어제는 4전 4승을 하며 MVP가 되긴 했지만, 선이 굵은 테니스를 못하고 실수를 하지 않는, 얍삽하고 소극적인 테니스를 쳤기에 기분은 별로다. 기억에 남는 스트로크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2. 골프와 테니스
주위 사람들 중 골프를 치는 애들이 꽤 된다. 그들은 말한다. 조그만 구멍에 공을 넣는 건 인간의 본성이라고. 골프의 재미는 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고. 골프를 쳐본 적이 없으니 골프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안다. 골프는 운동이 안된다는 거. 골프를 치는 주위 애들은 어찌된 것이 갈수록 배가 나오는 듯하니까. 이것도 안다. 골프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몰라도, 테니스 역시 넋을 잃을만큼 재미있다는 걸. 한때 우린 눈이 오면 눈을 치워가며, 비가 오면 비가 그칠 때를 기다리며 하루 4시간이 넘도록 테니스를 쳤었다. 열정이 조금 식은 지금도 테니스는 여전히 최고로 재미있는 취미다.

3. 레슨
운동에 쓰이는 도구가 길면 길수록, 폼이 좋아야 한다. 탁구를 레슨받는 사람은 없지만, 테니스 레슨은 꼭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내가 처음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 것은 95년, 그때 난 개폼으로 테니스를 쳤다. 세게 치면 대부분 아웃이 되었고, 그렇지 않은 건 네트에 걸렸다. 그나마 치고나서는 어깨가 아팠다. 좋은 폼으로 치지 않으니 어깨에 무리가 갈 수밖에.

군대에 가서부터 난 레슨을 받았다. 개폼이 몸에 익어서 고치는데 무지하게 힘이 들었지만, 6개월쯤 지나자 난 어느새 최강의 포핸드를 구사하고 있었다. 내가 공을 치면 바람 소리가 났고, 공은 네트위 2센티 높이로 날라가 코트에 꽂혔다. 무리하게 내 공을 받다 인대가 늘어났던 내 친구는 그 뒤부터 웬만하면 몸을 날려 내 공을 피한다. 빨래줄같은 내 스트로크는 그 자체가 예술이기에, 난 내가 친 공을 넋놓고 바라보곤 했다. 자신의 모습을 연못에 비춰보는 사슴처럼.

4. 아쉬움
백핸드를 배울 무렵, 난 갑자기 바빠졌다. 방송에 출연할 일이 좀 많아져서였는데, 그러다보니 아침 5시 반 레슨에 자꾸 빠지게 되었고, 결국엔 레슨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난 백핸드를 잘 치지 못하며, 공이 백핸드 쪽으로 오면 더 빨리 뛰어 포핸드 자세로 만든 뒤 공을 쳤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아쉽다. 단 몇 달만 백핸드를 연마했었다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을 텐데. 복식을 하니 백핸드를 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친구들은 집요하게 내 약점인 백핸드 쪽으로 공을 준다. 치사하게시리.

5. 발
다른 종목도 그렇지만, 테니스에서도 순발력이 도움이 된다. '발바리우스'란 별명처럼 난 발이 빠르기로 유명하다. 받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공도 어느새 뛰어가서 받아내곤 한다. 난 말한다. "땅에서 15센티만 떠 있으면 다 받는다!"고. 스트로크가 잘 안맞아 속상한 적은 있어도, 발에는 슬럼프가 없었다. 어제도 난 말도 안되는 공을 수없이 받아내 상대로부터 "징하다" "질렸다" "인간이냐" 등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6. 인간성
테니스는 인간성이 좋아야 한다. 테니스를 취미로 한 4명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들이 대충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우린 파트너가 실수를 해도 화내지 않으며, 아웃 세이프 같은 민감한 판정은 가까운 사람이 본 것을 그대로 믿어준다. 스코어를 잘못 기억해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전혀 없다. 아웃 세이프를 놓고 십분, 이십분씩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친구들을 만난 게 나로서는 행운이랄 수밖에.

7. 부상
테니스를 칠 때는 부상이 없어야 한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친구들이 부상으로 코트를 떠났다. 어떤 이는 무릎이 나갔고, 다른 이는 내 스트로크를 피하다 허리가 삐끗했다. 또다른 이는 역동작에 걸려 발목 인대를 다쳤고, 한 친구는 사업실패로 테니스를 접어야 했다. 그때마다 난 새 멤버를 구하느라 동분서주했는데, 지금 치는 멤버들은 제발 부상없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 참고로 우리 모임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중 테니스를 못칠 정도의 부상을 입은 적이 한번도 없는 이는 내가 유일하다. 내게 유연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릴 이유다.

8. 기타
어떤 친구는 내 앞에 서면 극도의 공포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스트로크를 날리기 전 공포로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그 얼굴을 보면 웃겨서, 혹은 동정심이 일어서 잘 못치곤 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치니 9년 친 것에 비해 그다지 실력이 늘지 않았고, 게임 후 식당에 가서 허벌나게 많은 식사를 하는 탓에 살도 별로 빠지지 않은 게 아쉽기도 하지만, 테니스가 없었다면 내 인생은 훨씬 더 초라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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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2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운동이라고는. 특히 공으로 하는 운동은 바보라고 불릴 정도로 못합니다. 오로지 오래 달리기, 오래 매달리기, 윗몸 일으키기 등 이 콱 깨물고 버팅기는 운동만 잘 하죠. 그래서 가끔은 기술이 필요한 운동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지하게 부럽습니다. 특히 테니스는 유니폼이 이뻐서 한번 배워보고 싶었는데...(니 다리통 생각은 안하냐? 하며 어디선가 비웃는 소리가 들리네요. 하핫)

비로그인 2004-03-2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도 마태우스님이 만드시는 '몸'이, 테니스로 이루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겠네요. 지금 멤버분들은 부상없이 오래가시길~ ^^

비로그인 2004-03-2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니스~~ 저도 정말 좋아하는 운동 ~ !!!
초딩 때 첫 사랑이 전국에서 놀던 테니스 왕자님이어서, 그래 ? 그럼, 나도 할꺼야 하며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 ㅋㅋ 배운지 3년 만에 코치 선생님께 들은 말 " 넌, 테니스 라켓으로 야구하냐 ? " ㅠ.ㅠ;; ...제 첫 사랑 왕자님도 6살 연상녀 랑, 일찌감치 결혼해 버리고, 실의에 빠진 저, 테니스 라켓 마저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덜 떨어진 제 운동 신경으론 테니스 여왕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슬픔에 젖어, 땅에 끌고 다니지도 말라던 라켓 팽겨치고, 골프채를 잠시 휘둘러보았으나......끝도 없는 헛스윙에 뻣치는 망신살...
도구로 하는 모든 운동에 재능 없음을 깨닫고 몸뚱이 하나로 때우는 헬스나 하며 요가나 하는 저지만, 결론은 " 테니스가 좋아요 ~ " 요즘도, 구입한 지 2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골동품처럼 생긴 '윌슨'이라 적힌 라켓을 보며.....우울한 과거를 잠시 접어두고, 어디, 다시 한번 시작해봐...하며 나름대로 신중한 고려를 해보기도 한다는....... 쿄쿄쿄

마태우스 2004-03-2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님께는 왠지 볼링이 어울릴 듯.... 그것도 공으로 하는 운동이지만요.
앤티크님/그럼요, 제가 테니스라도 치니까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거죠^^
sweetmagic님/여자분이 테니스 잘치면 굉장히 멋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님은 아직 가능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