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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날씨가 더우면 추리소설에 끌린다.
올 여름이 다른 여름보다 시원한 편이라 해도 그래도 여름은 여름,
난 닥치는대로 추리소설을 읽으며 여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내가 죽인 소녀>(이하 '내가')는 하라 료가 쓴 작품이다.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을 과감히 산 이유는 그게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서가 아니라,
추리문학의 거봉 물만두님이 추천한 책이기 때문이었다.
그 믿음은 헛되지 않아, 난 이 책을 읽는 사흘간 무척 흥미진진하게 이 책을 읽었다.
열한살 된 소녀가 유괴되는데 주인공인 탐정이 공범으로 몰린다,는 설정부터 구미가 확 당기지 않는가?
그 이후 전개가 독자의 예상치와 맞아떨어지는 게 평범한 소설이라면,
<내가>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내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이 책이 내게 더 재미있었던 건 작가가 사설탐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유명한 사립탐정 셜록 홈즈는
레스트레이드 경감을 비롯한 경시청 형사들을 쩔쩔매게 만드는 신출귀몰한 탐정이며,
모든 수사현장에 우선적으로 다가갈 권리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립탐정 사와자키는
경찰로부터 "수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고,
경찰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힘없는 존재다.
가끔씩 그가 경찰에게 "넌 내 아빠가 아니야!" 하면서 전화를 끊거나
경찰에게 "닥쳐! 지시하지 마!"라며 항거할 때면
괜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더해 저자는 표현력 또한 멋져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을 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1) 여자아이가 유괴되는데, 그 아이의 오빠는 마이클 잭슨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형사들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티셔츠 가슴께에 찍혀 있는 마이클 잭슨의 얼굴이 성형수술을 받은 보람도 없이 추하게 일그러졌다(17쪽)"
2) 어둠 속에서 뭔가를 찾는 주인공,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는 귀와 프로메테우스가 참견한 뒤로 퇴화만 거듭하는 어둠 속에서의 감에만 의지했다.(296쪽)"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쳤다는 걸 이렇게 멋지게 표현한 구절은 처음 봤다.
3) 노파를 감시하는 주인공, 노파가 테이블을 옮기는 걸 이렇게 표현한다.
"경로의식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나로서는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299쪽)"
이제 안타까운 점 하나.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쓰는 작가가 데뷔 후 19년간 딱 4편의 소설을 썼다는 것.
그래도 너무 안타까워하진 말아야겠다.
이제 난 겨우 한편을 읽었을 뿐이니까.
네편 다 읽은 사람도 있는데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