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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파더 스텝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1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미아베 미유키(이하 미미 여사)는 추리소설 작가지만, 그의 작품들엔 추리만 나오는 게 아니다. 예컨대 몇 달 전에 읽은 <이유>라는 책은, 분명 추리를 모토로 하고 있지만 일본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걸 느끼게 했다. 어떤 미녀분한테서 선물로 받은 <스텝파더 스텝>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건, 머리가 좀 한가해지면 읽겠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가수 김경호가 맨날 5옥타브를 오가는 노래만 부르는 건 아니듯, 미미여사라고 묵직한 소설만 쓰는 것도 아니었다. <스텝파더>는 어쩔 수 없이 중학생 둘의 아빠 노릇을 해야 하는 도둑의 얘기를 아주 유쾌하게 그렸는데, 그 도둑은 돈이 좀 있는 사람의 돈을 훔쳐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한다. 훔친 돈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지 않으니 홍길동 스타일은 아니고,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아르세르 루팡과 비슷한 면이 많다 (카리스마는 떨어지지만). 근데 어찌된 게 시작부터 그렇게 재미있는지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신촌 지하철역에서 누군가와 만나 술을 마시기로 했던 날도 이 책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1) 그 사람이 늦게 온다고, 미안하다고 문자를 날렸을 때 기쁜 마음으로 괜찮다고 천천히 오라고 답을 했으며 2) 그 사람이 도착했는데 어디냐고, 여섯 번이나 전화벨을 울렸음에도 전화가 온 줄을 몰랐을만큼 책에 빠져 있었다. 3) 올해는 책을 읽고도 리뷰를 안쓴 게 꽤 되는데, 이 책은 같이 즐거움을 나누고자 읽고난 뒤 이틀도 안되어 리뷰를 쓰고 있다.
말을 이렇게 해놓으니 다 읽고 "뭐야! 재미없잖아!"라고 따질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혹시나 싶어 범위를 좁혀보면, 의사 이라부의 이야기를 다룬 <공중그네>와 비슷한 느낌이다. 쌍둥이들이 말을 할 때 한 문장을 나눠가지고 교대로 말하는 게 아주 귀엽고, 박찬호가 언급되었을 때 반가웠고, 다음 표현은 발랄 그 자체다.
"요즘 수확이 풍성하다보니 가슴이 따스하다. 세상 모든 것에 관대해지는 기분이다. 벽을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보아도 슬리퍼로 내려치기 전에 이초 정도 그냥 놔줄까 생각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309쪽)."
이 정도 소개했으니 재미없다고 욕먹을 일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본다.
* 사족: 우리는 조세형처럼 부자들만 터는 사람을 다른 잡범들과 구분해 '의도-의로운 도둑'이라 부른다. 그건 부자들이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 거란 인식 때문이고, 그들보다 도둑이 더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충실히 뿌리내린, 돈이 최고라는 인식만이 횡행하는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의도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고보면 루팡은 때를 잘 만났다. 지금은 루팡이 안팔리는 시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