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 자기 이름을 붙임으로써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것,

기생충학자라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이다.

실제로 일본에선 요코가와라는 분이 설사를 일으키는 기생충에 자기 이름을 붙였는데,

그게 바로 요코가와흡충.

별반 중요하지 않은 기생충에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인 사람은 부지기수다.


그게 부러웠는지 우리 교실-모교를 말한다-도 그런 작업을 시작했다.

1988년 굴에서 발견된 기생충은

1991년 폐암으로 돌아가신 서병설 교수님을 추모하는 제단에 바쳐졌고

그 기생충의 이름은 무슨무슨 ‘seoi'가 되었다.

의학적으로 중요한 질병을 일으키는 건 아니고

그 기생충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곳도 우리밖에 없지만

그건 보기도 좋고 나름대로 의미도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기생충은 실제 감염자도 많이 있고, 언론보도도 꽤 많이 된 기생충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다음.

‘이’라는 성을 가진 교수님이 그 다음 차례였다.

뱀에서 나온 기생충 중 특성이 약간 다른 게 있었는데

병아리에다 먹여 그 중 몇 마리를 성충으로 키워냈다.

그게 신종으로 명명할만큼 다른 기생충인지 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교수님의 의지는 정말 대단해서

그 기생충을 가지고 박사학위 심사를 받는 사람한테

“신종이 되도록 안하면 박사 못나가!”라고 하셨었다.

결국 그 기생충은 무슨무슨 ‘leei'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그리 중요한 기생충이 아닌 까닭에 그 기생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주, 내게 논문심사 의뢰가 왔다.

논문을 보는 순간 난감했다.

그건 그 다음 차례인 ‘채’씨 성을 가진 교수님을 기리는 논문으로

새로 발견된 기생충에 무슨무슨 ‘chai'라는 이름을 붙이는 내용이었다.

논문심사 때 난 웬만하면 ‘약간 수정 후 게재’에 동그라미를 치고

‘대폭 수정 후 게재’에 동그라미를 치기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수정 없이 게재’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 논문을 누가 썼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쪽에서도 누가 심사를 했는지 너무도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별첨에다 조그맣게 이러이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지적을 하긴 했지만

내가 그 논문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논문은 실제로 잘 쓴 논문이었다)

 

위에서 말한 ‘seoi'의 긍정적인 면이 본인이 아닌 후배들이 학명을 헌정한 것이었던 데 반해

그 다음 두 사례는 당신들 스스로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

이게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단 겸양의 미덕을 더 좋아하기 때문일 터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건

두 분 다 별 거 아닌, 즉 인체 감염 사례가 한건도 없는 미미한 기생충에 당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살아생전 그럴듯한 신종 기생충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계에서 두분의 족적은 워낙 크고 깊다.

한분은 350편이 넘는 논문을 쓰셨고, 학술원 회원까지 되셨다.

또 한 분은 현역 기생충학자 중 외국잡지에 실린 논문이 가장 많고

장디스토마 쪽으로는 세계적인 권위자다.

이게 부족해 더 큰 명예가 필요하셨던 것일까.

남들이 ‘chai'라는 기생충을 좀 더 사랑해 준다면 모를까,

우리끼리의 잔치로만 끝나면 우리나 당신이나 모두 마음이 씁쓸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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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4-0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체 감염 사례가 한건도 없는 미미한 기생충에 당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시는 건 아닐지...^^

무스탕 2007-04-0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전자 남기기만 치열한것이 아니었어요...

마태우스 2007-04-0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그러게 말입니다
켈님/i로 끝나는 것도 있구, 뭐 다 그렇죠 호홓호 (어색한 웃음...)
메피님/그럴지도 몰라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