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빼앗긴 세계 - 거대 테크 기업들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박상현.이승연 옮김 / 반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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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빼앗긴 세계 - 또다른 형태의 디스토피아

 

원숭이의 꽃신

 

이 책을 읽으니, <원숭이의 꽃신> 이란 동화가 떠오른다.

맨발로 다니던 원숭이, 어느 날 여우가 가져다 준 꽃신을 신어보고 그 푹신한 느낌에 혹해 꽃신을 신기 시작했다. 처음 꽃신을 권할 때 여우는 그저 공짜로 신어보라더니 신던 꽃신이 헤져 다시 꽃신을 신겠다 하자, 이번에는 값을 달라고 하고, 또 그 다음에는 점차로 값을 올린다는 이야기. 맨발로 걷던 원숭이 발은 이제 꽃신 없이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우리가 그런 원숭이 신세가 된 것 아닌가.

이제 핸드폰 없이는 전화 한 통도 못한다.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질 않으니!

그전에는 전화번호 수십개는 쉽게 외우던 머리가 이젠 자기 전화번호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게 다 테크기업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맨발로 걷던 원숭이, 꽃신을 신고 다니니 발은 부드럽게 편해졌는지 몰라도 치러야 할 비용이 만만치 많다. 여우 손에 꽉 잡혀 지내야 한다.

 

그것처럼 테크기업 덕분(?)에 우리 일상은 너무나 편리해졌다. 그런데 그 편해진만큼 치러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

 

그래서 결론을 미리 말하면, 저자는 이들의 독점이 빚어낸 결과를 꼼꼼히 따져보고 우리 역할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글 읽어보자. 충격이다.

<우리는 이미 일정부분 사이보그가 되었다. 우리의 폰은 기억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고, 기초적인 두뇌활동을 알고리즘에 위탁했으며, 자신만의 비밀을 외부 서버에 저장해서 컴퓨터로 정보를 캐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20)

 

우리는 알게 모르게, 테크기업의 손 안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저자가 갈파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가 되어서, 원격조정을 받고 사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테크기업에서 우리의 식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우리의 거처도 알고 있으니, 근처 마트로 가서 이러저러한 식품을 사라고 문자를 보내준다. 마트에서 보내주는 할인행사 안내문도 수시로 받아본다. 그런 문자에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정신차리고 보니, 이게 웬일?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단순히 기계와 한 몸이 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기계를 운영하는 기업들과 한 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고(思考)의 외주화 - 알고리즘에 맡겨버린 결정과정

(역자는 알고리즘이라는 용어를 알고리듬으로 번역하여 놓았지만, 요즈음 거의 모든 용례가 알고리즘이라 하기에 여기서도 알고리즘이라 표기하였음.)

 

<알고리즘은 사고를 자동화하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인간의 손에서 내려놓기 위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88) 것이다.

 

그렇게 개발된 알고리즘을, 아무 생각없이 정확하게 단계를 따르다보면 실패없이 매번 같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에, 이제 모든 의사 결정과정에 알고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알고리즘은 누군가 그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기기에 장착해 놓은 사람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기에,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누군가의 손에 자기 의사결정권을 맡겨 놓은 셈이 되었다.

 

이를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문제는 우리가 사고를 기계에 아웃소싱하면, 사실은 그 기계를 운영하는 기업에게 아웃소싱하는 거라는 점이다.> (98)

 

사고의 외주화, 흔히 매스컴에서 듣는 '사고(事故)의 외주화'가 아니라, '사고(思考)의 외주화'다.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내가 삽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그 삽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지식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113)

 

정보가 풍부해질수록 주의력은 결핍된다.(117)

( 이 부분은 우리가 인터넷 서핑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기에 길더라도 인용해 둔다.)

공짜 콘텐츠의 범람은 새로운 형태의 결핍을 낳았다. 읽고 보고 들을 것이 넘쳐나고, 링크를 따라가다보면 끝도 없이 사이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오디언스의 주의를 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를 총체적인 소음이라 한다. 총체적인 소음 속에서 우리는 집중력이 떨어진 채로 인터넷의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글을 읽게 되었다. (……) 따라서 정보가 풍부해질수록 주의력은 결핍된다.

 

다시 이 책은? - 우리 곁에 와있는 테크 기업

 

데이터를 축적하면 당신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그들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238)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사용자들의 프라이버시를 파괴해서 (그들만의) 제국을 건설했다. (240)

 

괄호 안에 그들을, 그들만의를 집어넣은 것은 이 책의 결론을 말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미 그들이 만든 제국의 백성이 되었다. 세상 편해졌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태평성대를 구가한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를, 우리의 손발은 어느새 그들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낸다.

( ……………………… ), 우리 자신에 대한 주체성을 장악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사색하는 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298)

 

( ……………………… )은 일부러 비워놓았다. 저자가 말한 것도 좋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사색하는 생활이 가능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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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불러낸 사람들 - 플라톤에서 몬드리안까지 안그라픽스 V 시리즈 1
문은배 지음 / 안그라픽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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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불러낸 사람들 

 

 

글쓰는 엄마의 이탈리아 여행법(김춘희/ 더블엔)을 읽다가 이런 글을 만났다.

 

<베니스의 집, 그리고 아일랜드의 수도 더불린의 집들이 저마다 예쁜 색깔의 대문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늦게 귀가하는 남편들 때문이다.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오는 남편들이 집을 헷갈려 다른 집 초인종을 눌러대는 바람에 곤란한 일이 자주 생기자, 그걸 막기 위해 대문의 색을 다르게 칠했다는 것.> (146)

 

그렇게 일단 색은 달라야 한다. 그래야 서로 구분이 된다.

색깔이 달라 구분이 되니집들이 저마다 예쁜 색깔의 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색의 쓰임새가 다양한 것,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색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새롭게 듣는 이야기가 많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다양한 내용들이 펼쳐져서 색에 관한 이야기가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느낌이다.

 

먼저 이 책의 제목을 보면, 단순하게 색에 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색을 불러낸 사람들이니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어떤 사람들?

색을 연구한 사람들이다.

색이라 함은 그저 우리가 떠올리는 크레파스 색깔 차원의 이야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 먼저 짚고 가자.

 

색에 대한 그 정도의 인식을 넘어선, 색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또한 색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세상에, 색깔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다니. 의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헌, 하나 이야기 해보자.

그는 어느 날 대리석 사이를 거닐다 한 가지 신기한 현상을 발견한다.

색이 없는 빛이 노란 유리와 파란 유리를 동시에 통과해서 대리석 벽에 비치니 녹색으로 보였다. 그래서 녹색은 노랑과 파랑의 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녹색의 정체를 노랑과 파랑의 합성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18)

 

우리가 미술시간에 배웠던 녹색 = 노랑 + 파랑의 공식,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것이란다.

이런 재미있고 의미있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또 있다. 괴테와 뉴턴의 공통점이 있는데, 무엇일까?

뜻밖에도 그 두 사람은 색채 심리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했다는 점이 같다. (32)

 

또 하나, 그간 우리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것, 바로 잡아보자.

<우리는 어렸을 적 미술 시간에 물감의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이고 이 세가지 색을 다 섞으면 검정이 된다고 배웠다.>(47)

 

그게 사실일까?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빨강, 노랑, 파랑을 섞으면 절대 검정이 되지 않는다. 섞을수록 어두워지지도 않는다.>

 

, 이런 사실을 이제야, 이 책으로 알게 되다니! 그동안 나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잘못된 지식하나 바로 잡는다. 다행이다. 감사한 일이다.

 

정리하자, 물감은 섞을수록 중간색이 나오는 중간혼색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빛은 또 다르다. 빛은 더할수록 밝아진다. 이게 올바른 내용이다.

 

그렇게 하나씩, 한명씩 소환하여 그들이 주장한 바를 읽다보니, 이제 색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니 애초에 색은 감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감정의 색에 감정을 넣어 채색을 하게 된 것은, 놀랍게도 알타미라 동굴에 그림을 그린 시대부터다.

 

<색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전하지만 정보 전달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온통 붉게 칠해진 곳을 보면 위험하다고 느끼는가 하면, 녹색으로 표시된 녹십자를 보면 안전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색은 지역과 언어를 초월한 표시의 수단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부터 이런 색채의 기능을 연구하고 개발하였을까?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도 있지만 확실한 색채 규범을 만든 사람이 있다. 바로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낸 파버 비렌이다.> (97)

 

그렇게 색깔에 의미를 부여한 결과, 색깔이 이제 만국공통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파버 비렌이 오렌지 색을 위험을 알리는 장치로 설계해, 사고를 줄이는데 기여했다는 점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가들의 이야기, 화가들이 화폭을 채우는 다양한 방법들. 색깔과 화가들에 얽힌 일화들, 읽다보면 상식도 겸하여 풍부해진다.

 

이 책 덕분에 색깔을 그저 눈에 보이는 색깔로만 인식하고 그치는 게 아니라, 색 속에 색이 있고, 색 넘어 색이 있다는 것, 그렇게 색의 무궁한 의미와 역할 알게 되니 이제야 진짜 색이 제대로 보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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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 노회찬이 꿈꾸는 정치와 세상
노회찬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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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책은 이제는 고인이 된 노회찬을 향한 그리움을 담뿍 담아놓았다.

제목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는 한 문장으로 노회찬 의원을 표현하는 말이 된다.

 

이 책은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노회찬 의원과의 인터뷰한 것을 실어놓고 있다.

2장은 노회찬을 알던 지인들이 쓴 헌사.

3장은 노회찬의 육성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먼저 이런 글 읽어보자.

 

<매일 국어사전을 읽는 사람이 있다. 아니, 있었다. 오래전부터 국어대사전을 탐독해왔다는 그는 읽을수록 한국어의 깊이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간혹 술을 먹고 늦게 귀가하는 경우에도 국어사전만은 꼭 읽고 잠들었다.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이 특이한 정치인의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세상 사람들은 노회찬의 촌철살인·유머가 그저 타고난 재능이겠거니 했다. 그가 한국어를 얼마나 갈고닦았는지는 모르고 있다. 보통 정치인과 달리 그가 적확한 용어와 단어로 상황을 정의하고, 적절한 분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어에 대한 오랜 집착의 결과다.> (227 ~ 228 )

 

그런 노력을 하길래, 다음과 같은 발언이 나왔겠다 싶다.

 

그의 어록

 

정치는 회를 써는 것이지 생선을 해부하는 게 아닙니다. 생선을 해부하듯 회를 썰면 해부는 했을지 몰라도 먹기는 곤란합니다. 이런 일이 진보진영에서 왕왕 생겼습니다. (82)

 

인권을 소금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소금은 많이 넣으면 소금국이 되지만 인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86)

 

얘기가 쉽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재미 속에 내용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들은 뒤 머릿속에 남는 게 있어야 합니다. (132)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136)

 

50 년 동안 삼겹살을 같은 불판 위에서 구워먹으면 고기가 새까맣게 타버립니다. 이제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137)

 

이런 말을 읽으면서 새삼 그를 생각하게 된다.

많은 정치인들이 말들을 쏟아놓는데, 노회찬처럼 격조 있는 그리고 전체를 아우르는 발언을 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재미있는 화술은 현란한 기교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적인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하다”(86)고 말한 노회찬, 많이 생각이 날 거다.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상처가 깊은만큼 물음도 깊어진다. (68)

 

당장 굶는다고 라면을 미화하는 것은 끼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74)

 

우리는 우정과 낙관, 유머로 서로를 북돋울 것이며,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151) - 국제 녹색당 헌장

 

문명이 발전되는데 가장 큰 원동력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다. (167)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다시, 이 책은?

 

체한 것같이 가슴이 답답하다는 뜻을 가진 우리말 먹먹하다가 노회찬 의원을 떠올릴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먹먹한 기분으로, 책을 덮으려는데 이런 말이 보인다.

 

영화 <동사서독> 애서 장만옥은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장국영을 그리며 말한다.

내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습니다.” (229)

 

그 말을 읽으니 가슴이 더 먹먹하다.

이제, 우리에게 아름다운 시절이 와도 그는 없다.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 먹먹하다.

 

아쉬운 점 한 가지

 

노회찬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늦게나마.

그래서 이 책도 열심히 읽을 것이다.

이 책은 노회찬이 대담자로 등장하기도 하고, 또 지인들이 노회찬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도 있으며, 노회찬의 육성이 들어 있는 글도 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대담은 언제 이루어진 것인지 또 노회찬의 육성은 언제, 어디에서 행한 연설인지 알려주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 사항들을 알고 글을 읽으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훨씬 빨리,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을, 전혀 그런 보충설명이 없으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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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김인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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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이런 수필집, 어디서 보셨나요?

 

이 책은 무명인 채 서둘러 세상을 떠난김인선의 수필집이다.

수필, 흔히 말하는 바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

지금껏 그렇게 쓴다는 수필을 여러 편 읽어봤지만, 이번 경우처럼 독창적인 글은 처음이다.

 

어느 글 하나, 구태의연한 게 없다. 적어도 상투성이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식상한 글에 질린 사람, 지금까지 읽으면서 가슴을 뛰게 만드는 글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여기 모여 이 책을 보시기를.

 

이 책 읽으면 금방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글을 봤나! 이런 글, 본 적 없다, 는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글이 우선 재미있다. 떠들썩하게 소리치지 않고 글이 차분하면서도, 신나게 움직인다. 요란 떨지 않으면서 글 속에서는 성벽을 쌓는 듯,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지니. 이게 별 일이지 싶다.

 

저자의 글 솜씨에 반한다

 

, 성 쌓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책에서는 차안에서 만리장성을 쌓는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23- 28)

 

빨간 티코가 한 대 서있었다.

( …… ) 앞창 유리 너머로 (……) 고전적인 자세가 틀림없었다. 저 옹색한 깡통 안에서 그 발랄함이 비할 데 없는 운동방식이 가능하단 말인가? ( ……)

(……)

(……)

 

사건은 23- 28쪽까지 무려 6쪽에 걸쳐 진행이 되고 있는데, 그게 말줄임표 몇  개로 커버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독자들은 그 앞뒤 문맥을 충분히 감안하여, 잘 이해할 줄로 믿는다.

 

그런 저자의 글 솜씨는 다른 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호흡이 길다, 그러나 단 숨에 읽힌다.

 

<아버지의 호통에 주눅이 든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명년부터는 꼭 우리 식구 먹을 것만 하겠노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셨지만, 이듬해가 되면 마을회관 뒤편 돌밭 긴 이랑은 또다시 오이로 가득 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잇단 사업실패 끝에 남태평양 소도로 망명한 큰아들이 거기서 부디 다시 일어나되 오이처럼 씩씩하고 활기차게 번창하기를 바라는 당신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를 당신도 모르게 오이밭에 담으셨던 게 아닌가 싶다. (123)

 

길고 긴 문장이지만, 쉼표 따라 쉬어가면서 읽을 수 있다. 숨 막히지 않고 문장 리듬을 타면서 읽을 수 있으니, 가급적 문장을 짧게 쓰라는 작문 교사의 가르침은 잠시 제쳐놓아도 될 것이다. 

 

저자의 관찰력에 박수를!

 

이런 문장 읽어보자.

 

<거미는 내 방에서 가장 조용하고 품위 있는 부족이다. 내가 거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놈들의 거주에 최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놈들은 돈벌레처럼 나대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연민을 자아내지도 않으며, 나방처럼 수선스럽지도, 말벌처럼 음험하지도, 귀뚜라미처럼 뚱딴지같지도, 개미처럼 집요하지도, 노린재처럼 약빠르지도, 딱정벌레처럼 갑갑하지도, 흡혈모기처럼 표독하지도, 파리처럼 외설스럽지도 않다.>(82)

 

거미, 하루살이, 돈벌레, 나방, 말벌, 귀뚜라미, 개미, 노린재, 딱정벌레, 흡혈모기, 파리를 아는지? 본 적은 있는지? 그것들의 생김새, 또는 성격이나 성질머리를 아는지?

저자는 안다. 다 알고 있다. 해서 거미 한 마리를 설명하는데, 내가 모르는 벌레 수십 종을 들이댈 기세니이 문장 읽으면서 기가 죽지 않고 어쩌겠는가?

 

그래도 느낌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문장을 재조립해서 읽어보자.

 

거미는 내 방에서 가장 조용하고 품위 있는 부족이다. 내가 거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놈들의 거주에 최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놈들은 돈벌레처럼 나대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연민을 자아내지도 않으며,

나방처럼 수선스럽지도,

말벌처럼 음험하지도,

귀뚜라미처럼 뚱딴지같지도,

개미처럼 집요하지도,

노린재처럼 약빠르지도,

딱정벌레처럼 갑갑하지도,

흡혈모기처럼 표독하지도,

파리처럼 외설스럽지도 않다.

 

저 많은 벌레에 붙어있는 수식어를 보라. 어찌 그리 딱딱 들어맞는지.

 

읽다가 배꼽 빠질 뻔

 

<새 집주인은 개는 싫어하지만 개고기는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75)

 

닭백숙을 해먹는데 냄비 큰 게 없어서 헤매는 장면 중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빠뜨리고 엎어뜨리고 처박고 눌러봐도 완강하게 삐져나오는 두 다리 때문에 뚜껑이 닫히질 않는다. 죽어 자빠진 놈한테 다리 좀 오므려보라고 야단을 칠 수도 없다. >(114)

 

더 있다. 많이 있다. 더 소개한다는 것은 스포일러!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식물은 새벽녘과 해질녘에 잠깐 사람이 알아듣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내게는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성인聖人이고 성인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제가 들은 것처럼 그럴듯하게 거짓부렁을 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18)

 

<나는 의성어 교육에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획일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까마귀는 까악까악 또는 까르르까르르 우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까록까록이나 쿨럭쿨럭으로 들리기도 한다. 개구리도 마찬가지. 보통 개구리가 개골개골 운다고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걀걀, 그갤그갤, 스웨웨웨웻, 스웨웨웻 하고 울기도 한다. 유아나 초등학생한테 의성어교육을 시킬 때, 아이들을 이미 정해진 의성어에 적응시키지 말고, 자신의 귀에 들리는 그대로 충실하게 듣도록, 기왕이면 자신만의 의성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해 전부터 해오고 있다. 이것이 자연을 깊이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고 또 상상력이나 언어감각을 발달시키는 데도 무척 중요하지 않겠는가. 동물들이 내는 비분절음은 인간에게 굉장한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걸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 언어로 제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70)

 

<사람 말이라는 거, 복잡하기만 하지 내용이란 게 뭐 있나. 언어라는 게 자기 속을 숨기기 위해서 발명된 것이다.> (73)

 

다시, 이 책은?

 

대개 수필집은 한 번 보고는 서가 한 구석에 처박아 두는 법이다. 아니면 책꽂이도 아닌 서재 한구석에 쌓아두거나.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취급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수필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모범 사례로 여기 저기 불려 다녀야 한다이 페이지 저 페이지 펼쳐 보이며, 수필 쓰려는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책이다.

 

그래서 수필 쓰려는 독자 있거든, 이 책, 읽어야 한다,

이 책 읽고 수필 쓰는 법, 배워야 한다.

 

그런데 저자가 요절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진다.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것을, 사람들은 그 무슨 영화 보겠다고 그 악착을 떨어가며 살아간단 말인가. 저자 살아가는 모습 반만 닮아도 되지 않을까?

살아가는 모습, 그뿐만 아니라 글 쓰는 것 반에 반이라도 닮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혹시 마음이 굴뚝같다는 내 말 들으면 저자는 굴뚝새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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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 블록체인부터 죽음까지, 그림 인문학
임상빈 지음 / 박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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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이정도의 책을 쓰려면, 대체 그 내공은 어느 정도일까?'

 

책장을 넘겨가면서, 매 페이지마다 드는 생각이다.

우선 저자의 내공에 놀랄 수밖에 없다는 점, 인정! 인정한다.

 

한 책에 다루고 있는 주제의 광범위함에 다시 놀란다.

이정도 다양한 주제를 한 책에서 다룬다는 것, 대단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할 정도다.

 

그 주제 한번 열거해 보자. (열거하기도 힘들다.)

기술, 과학, 예술, 사람. 이렇게 네 가지. 어디 그뿐인가, 그런 대주제 아래 소주제는 얼마나 또 많은지?

 

저자는 주제를 네 가지로 정한데 대하여, 이 네 가지를 새로운 시대, 누구나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영역이라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4)

 

다른 사람들은 위에 열거한 주제 가운데 하나만 잡고 써가기도 힘든데, 저자는 그 모든 것을 한 책에 담아놓는다.

 

또 주제의 다양함과는 별도로, 글 한 꼭지마다 저 네 가지 주제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저자가 화가인만큼 그림 한 점씩은 꼭 들어가 있다.

 

그렇게 놀랄 수밖에 없는 이 책, 대체 저자는 무슨 의도로 이 책을 썼을까?

저자의 저술 의도를 살펴보기로 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세상만물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맥락으로 파악하며, 여러 생각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의 맛을 내고, 나아가 우리들의 삶에 유의미한 통찰의 지점을 짚어보고자 했다. (6)

 

그렇게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 책을 읽은 나는 어느 정도 그런 목적에 다가갈 수 있었을까?

 

또한 저자는 이 책을 세상에 대한 보다 넓고 깊은 이해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3)이라 하는데, 확실히 세상을 넓고 깊게 이해하는 게 어렵긴 어려운가 보다. 이 책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니! (아니 절반이 뭐야? 반에 반도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

 

하여튼, 저자의 박식, 해박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아쉽다. 저자가 들인 공력에 비해, 그것을 백퍼센트 흡수하지 못하는 독자, 나는 너무 부족하다.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그저 읽고, 읽고, 읽어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러니 읽어도 감이 오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거다. 해서 저자가 의도하는 바, 그런 목적은 나에게 와서 그저 튕겨나갈 뿐, 흡수되지 못했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면?

이 책의 가치는 나의 수준을 넘는다는 것, 그래서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것,

지금껏 읽어본 책 중에 난이도가 가장 높은 책이라는 평가, 그 정도로 평가해 본다.

 

어렵고, 어렵다. 해서 아쉽다.

( 이 서평은 오늘 현재, 1차 분입니다. 추후 다시 읽고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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