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이런 수필집, 어디서
보셨나요?
이 책은 ‘무명인 채 서둘러 세상을 떠난’
김인선의
수필집이다.
수필,
흔히 말하는
바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
지금껏 그렇게 쓴다는 수필을 여러 편
읽어봤지만,
이번 경우처럼 독창적인 글은
처음이다.
어느 글 하나,
구태의연한 게
없다.
적어도 ‘상투성’이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식상한 글에 질린
사람,
지금까지 읽으면서 가슴을 뛰게
만드는 글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여기 모여 이 책을
보시기를.
이 책 읽으면 금방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글을 봤나!
이런 글,
본 적 없다,
는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글이 우선 재미있다.
떠들썩하게 소리치지 않고 글이
차분하면서도,
신나게
움직인다.
요란 떨지 않으면서 글 속에서는
성벽을 쌓는 듯,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지니.
이게 별 일이지
싶다.
저자의 글 솜씨에 반한다
참,
성 쌓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책에서는 차안에서 만리장성을 쌓는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23-
28쪽)
빨간 티코가 한 대 서있었다.
(
……
)
앞창 유리 너머로
(……)
고전적인 자세가
틀림없었다.
저 옹색한 깡통 안에서 그
발랄함이 비할 데 없는 운동방식이 가능하단 말인가? (
……)
(……)
(……)
사건은 23-
28쪽까지 무려
6쪽에 걸쳐 진행이 되고 있는데,
그게 말줄임표 몇 개로 커버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독자들은
그 앞뒤 문맥을 충분히
감안하여,
잘 이해할 줄로
믿는다.
그런 저자의 글 솜씨는 다른 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호흡이 길다, 그러나 단 숨에 읽힌다.
<아버지의 호통에 주눅이 든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명년부터는 꼭 우리 식구 먹을 것만 하겠노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셨지만,
이듬해가 되면 마을회관 뒤편 돌밭
긴 이랑은 또다시 오이로 가득 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잇단 사업실패 끝에 남태평양
소도로 망명한 큰아들이 거기서 부디 다시 일어나되 오이처럼 씩씩하고 활기차게 번창하기를 바라는 당신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를 당신도 모르게
오이밭에 담으셨던 게 아닌가 싶다.
(123쪽)
길고 긴 문장이지만,
쉼표 따라 쉬어가면서 읽을 수
있다.
숨 막히지 않고 문장 리듬을
타면서 읽을 수 있으니,
가급적 문장을 짧게 쓰라는 작문
교사의 가르침은 잠시 제쳐놓아도 될 것이다.
저자의 관찰력에
박수를!
이런 문장 읽어보자.
<거미는 내 방에서 가장 조용하고 품위 있는
부족이다.
내가 거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놈들의 거주에 최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놈들은 돈벌레처럼 나대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연민을 자아내지도
않으며,
나방처럼
수선스럽지도,
말벌처럼
음험하지도,
귀뚜라미처럼
뚱딴지같지도,
개미처럼
집요하지도,
노린재처럼
약빠르지도,
딱정벌레처럼
갑갑하지도,
흡혈모기처럼
표독하지도,
파리처럼 외설스럽지도
않다.>(82쪽)
거미,
하루살이,
돈벌레,
나방,
말벌,
귀뚜라미,
개미,
노린재,
딱정벌레,
흡혈모기,
파리를
아는지?
본 적은
있는지?
그것들의
생김새,
또는 성격이나 성질머리를
아는지?
저자는 안다.
다 알고
있다.
해서 거미 한 마리를
설명하는데,
내가 모르는 벌레 수십 종을
들이댈 기세니, 이 문장 읽으면서 기가 죽지 않고
어쩌겠는가?
그래도 느낌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문장을 재조립해서
읽어보자.
거미는 내 방에서 가장 조용하고 품위 있는
부족이다.
내가 거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놈들의 거주에 최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놈들은 돈벌레처럼 나대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연민을 자아내지도 않으며,
나방처럼 수선스럽지도,
말벌처럼 음험하지도,
귀뚜라미처럼 뚱딴지같지도,
개미처럼 집요하지도,
노린재처럼 약빠르지도,
딱정벌레처럼 갑갑하지도,
흡혈모기처럼 표독하지도,
파리처럼 외설스럽지도 않다.
저 많은 벌레에 붙어있는 수식어를 보라.
어찌 그리 딱딱
들어맞는지.
읽다가 배꼽 빠질
뻔
<새 집주인은 개는 싫어하지만 개고기는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75쪽)
닭백숙을 해먹는데 냄비 큰 게 없어서 헤매는 장면 중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빠뜨리고 엎어뜨리고 처박고 눌러봐도 완강하게 삐져나오는 두 다리 때문에 뚜껑이 닫히질
않는다.
죽어 자빠진 놈한테 다리 좀
오므려보라고 야단을 칠 수도 없다.
>(114쪽)
더 있다.
많이 있다.
더 소개한다는 것은
스포일러!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식물은 새벽녘과 해질녘에 잠깐 사람이 알아듣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내게는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성인聖人이고 성인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제가 들은 것처럼
그럴듯하게 거짓부렁을 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18쪽)
<나는 의성어 교육에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획일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까마귀는 까악까악 또는
까르르까르르 우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까록까록이나 쿨럭쿨럭으로
들리기도 한다.
개구리도
마찬가지.
보통 개구리가 개골개골 운다고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걀걀,
그갤그갤,
스웨웨웨웻,
스웨웨웻 하고 울기도
한다.
유아나 초등학생한테 의성어교육을
시킬 때,
아이들을 이미 정해진 의성어에
적응시키지 말고,
자신의 귀에 들리는 그대로
충실하게 듣도록,
기왕이면 자신만의 의성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해 전부터 해오고 있다.
이것이 자연을 깊이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고 또 상상력이나 언어감각을 발달시키는 데도 무척 중요하지 않겠는가.
동물들이 내는 비분절음은 인간에게
굉장한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걸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 언어로
제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70쪽)
<사람 말이라는 거,
복잡하기만 하지 내용이란 게 뭐
있나.
언어라는 게 자기 속을 숨기기
위해서 발명된 것이다.>
(73쪽)
다시,
이
책은?
대개 수필집은 한 번 보고는 서가 한 구석에 처박아 두는
법이다.
아니면 책꽂이도 아닌 서재
한구석에 쌓아두거나.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취급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수필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모범 사례로 여기 저기 불려 다녀야 한다. 이 페이지 저 페이지 펼쳐 보이며,
수필 쓰려는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책이다.
그래서 수필 쓰려는 독자 있거든,
이 책,
읽어야 한다,
이 책 읽고 수필 쓰는 법,
배워야 한다.
그런데 저자가 요절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진다.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것을,
사람들은 그 무슨 영화 보겠다고
그 악착을 떨어가며 살아간단 말인가.
저자 살아가는 모습 반만 닮아도
되지 않을까?
살아가는 모습,
그뿐만 아니라 글 쓰는 것 반에
반이라도 닮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혹시 마음이 굴뚝같다는 내 말 들으면 저자는
굴뚝새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