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날의 문장들
조안나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럽다, 저자의 책 읽기와 글 쓰기

 

마냥 부러웠다. 저자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성이. 그리고 그 정리되어 나온 내용들이. 더군다나 저자의 약력 및 하는 일을 살펴보니, 더더욱 부러워졌다. 책 읽는 일, 그게 그의 일이니 무슨 말을 더 할까? 나는 그저 부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내가 마치 그가 된 것처럼, 그가 책을 앞에 두고 읽는 것처럼 해보자, 하면서 읽어보자, 했다.

 

저자가 읽었다고 하면서 이 책을 통해 소개한 내용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 아주 주관적인 분류다. 내가 읽은 책 그리고 내가 읽지 않은 책, 이렇게 두 종류다.

 

내가 읽은 책들도 상당수 있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언급된 책은 읽지 않았지만 소개된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책을 읽은 경우도 있어, 반가웠다. 예컨대 에쿠니 가오리 말이다. 그가 쓴 책, 소개된 책은 <한낮인데 어두운 밤>인데, 나는 그것은 읽지 못했고, 대신 그의 다른 소설 <냉정과 열장 사이>를 읽었다, 그리고 영화로도 보았다. 그러니 그 책 소개 부분에서 나는 네 가지를 동시에 한 셈이 되었다. 에쿠니 가오리를 상기하게 되었고, 그의 책 <한낮인데 어두운 밤>을 저자의 뒤를 따라가며 저자의 감성을 느꼈으며, 그의 다른 책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복기하였고, 또 그 영화를 떠올렸으니, 참으로 책 읽는 일이 이처럼 신기하다. 책을 앞에 두고, 그 책이 열어준 생각의 통로를 통하여 여기 저기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말이 나왔으니, 영화를 통해 소개된 작품에 새롭게 접근하게 된 경우도 있다.

<인생의 베일>, 서머셋 모옴의 작품이다. 그 책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중에, 저자는 그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내가 책을 읽다가 바로 거기에서 멈췄다. 내가 서머셋 모옴의 작품이 원작인지도 모르고 본 영화. <인생의 베일>을 영화화 하여 내건 제목 <페인티드 베일>. 저자가 친절하게 영화의 제목까지 알려주어서, 그 이름이 눈에 뜨였다. 바로 내가 본 영화였다. 그리고 보니 그 내용이 선연히 떠올랐다. 나오미 왓츠의 모습, 그리고 에드워드 노튼. 저자는 그들의 내면 연기가 일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내게는 아픈 사랑이어서 아프게 보았던 영화, 그 영화가 책을 읽음과 동시에 떠올랐다. 그렇게, 이 책이 아니었으면 서머셋 모옴의 작품 하나가 나에게 아예 나타나지 않았을 것인데, 그저 평범한 영화로만 저장되고 말았을 것을. 아니 애시당초 서머셋 모옴라는 이름은 거기 영화에서 눈치채지 못했으니, 이 좋은 작품 하나가 다른 구석에서 따로 자리 잡고 있었을텐데, 이 책 덕분에 제자리를 찾게 된 것도, 이 책을 읽은 기쁨 중의 하나이다.

 

물론 저자가 소개한 책 중에서 나의 촉수에 잡히지 않은 책들 또한 다수 있다. 그러기에 안타깝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과 그 작품이 영화화된 다른 것들 중 내가 미처 읽지 못했고, 보지 못한 것들은, 그 느끼는 감흥이 저자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 것쯤은 나중에 내가 다시 그 작품을 읽고, 또 영화까지 보게 된다면, 곧 따라잡을 수 있겠지?

 

그런데 저자는 책을 이야기하면서 중간 제목을 이렇게 붙여 놓았다. <나를 생각하게 하는 당신>, <내게 영감을 주는 당신>, <나를 말하게 하는 당신>, <내게 영원히 기억될 당신>, <나를 달뜨게 하는 당신>.

 

여기에서 당신은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 ‘당신이니 인칭대명사, 그러면 저자가 읽은 책의 저자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책을 의인화하여 당신이라 칭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이 누구일까를 추리해 보았다. 누구인가를 알면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더 분명해질 것이니, 저자의 책 쓴 의도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독자의 자세가 바로 이것이라, 싶었다.

 

<오늘 나와 함께 동행한 주인공은 ....>(13)

<집 밖을 여행하지 않아도,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여인이 여기 있다.> (17)

 

여기에서 나의 의문이 풀렸다. 저자가 말하는 당신은 책도 아니고 책을 쓴 소설의 저자도 아니고, 바로 작품 속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았다저자는 그렇게 저자가 만난 작품 속의 주인공을 당신이라 칭하며, 독자인 우리에게 그 당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건네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저자 자신을 생각나게하며, 저자에게 영감을 주기도하며, 저자를 말하게하기도 하며, 저자에게 영원히 기억되며, 저자를 달뜨게만들었으니, 당신은 저자에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 그런 존재를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그가 책을 대하는 기쁨이 그중 하나이다.

저자가 책을 읽으며 표현한 기쁨의 광경을 살펴보자.

 

<다시 읽으니,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익숙해서 좋았다.> (67)

<그녀의 소설에는 포기하지 않고 읽게 되는 묘한 분위기가 흘러넘친다.> (67)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지만 나이브한 무드에 취해 가오리상(저자)에게 편지까지 쓰고 싶어졌다.>(71)

 

또 작품을 대하는 저자의 결기를 보라, 이 정도면 저자 역시 '참 좋은 독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한번 읽고 나면 두 번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단순히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243)

 

그런 결기를 가지고 이 책을 썼으니, 저자의 글은 그냥 쓰기 위한, 책 내기 위한 글이 분명 아니다. 그래서 모쪼록, 나의 책읽기도 (혹은 글쓰기도) 저자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그저 부럽다, 부러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쟈로 불리는 이현우가 쓴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세계문학이란 용어가 낯설지 않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보려고 하는 자에게 보인다던가? 그래서 로쟈에 힘입어서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기 시작했으니, 출발은 좋았다. 아니 출발부터 좋았다. 게다가 한겨레신문도 일조를 하였으니, 최재봉 기자가 세계문학이란 제목의 칼럼으로 이 책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가 미처 되지 못한 부분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주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며 읽었다.

 

최재봉 기자의 글은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로 완벽하다 할 수 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다음을 참조하시라)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3599.html <[유레카] 세계문학 / 최재봉>

 

그 칼럼은 신문의 제한된 지면으로 인한 한계가 있지만, 이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데 가치가 있다.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독자인 우리에게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안경으로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지만, 이 책을 통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 세계문학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야기의 진행을 돕기 위하여 먼저 세계문학이라는 말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여기서 말하는 세계문학이란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각각 이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서평가 로쟈(이현우)의 구분이 맘에 든다.

그는 세계문학을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한 바 있다.

첫째,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의미, 해외문학’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

둘째,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게 읽히는 문학으로서의 세계 명작 혹은 고전을 뜻하는 세계문학,

셋째, 개별 국가의 국민문학(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 곧 괴테가 정의한 세계문학’,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세계문학, 즉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문학,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문학이 있다. (12,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279 ~280 )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책들이 어떻게 우리 앞에 왔는가에 대한 흥미있는 분석은 이현우의 책 268~277쪽을 참고하시라.

 

그래서, 우리가 <세계문학전집> 차원이 아닌 세계문학이란 개념을 접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는 괴테, 마르크스가 각각 말한 바가 있고, 더 나아가서 파스칼 카자노바의 이론을 통하여 점점 더 깊숙한 논의를 들어볼 수 있다. 최재봉의 정리를 빌려 말하자면, <특히 카자노바는 <세계문학공화국>(1999)이라는 책에서 세계문학 공간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같은 개념을 통해 불평등과 경쟁을 기반으로 삼는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괴테가 생각한 세계문학이 여러 민족문학들 사이의 평화적 교류와 소통, 연대라는 순진한 이상에 가까웠다면 카자노바 쪽이 한층 냉정한 현실에 가까운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자노바 역시 유럽과 비유럽 사이에 불평등한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가령 비문자적 구술 문학과 같은 다른 형태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제시한 민족 알레고리개념은 시사적이다. 현대 서양문학이 낡은 형식이라며 폄하하는 알레고리가 제3세계 문학에서 개인의 이야기와 집단 경험을 아우르는 공통된 미적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제임슨의 관찰이다.>

 

그 정도로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를 끝낸다면, 이제 2 4<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이란 글과, 35<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이란 글을 빠트리지 말고 꼭, 읽어볼 일이다.

 

보편적-평범한-인 독자들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라는 문학이론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문학의 현실적인 모습에 관심이 갈 것이기 때문에, 세계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하다. 세계문학이 평범한 독자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구체적인 예가 바로 위에 언급한 두 글이다.

 

24, 조영일(동덕여대 강사)이 쓴 <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떻게 취급하여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해 놓고 있다. 여태까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왠지 자신의 수준이 떨어져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금기’(301)가 있었는데, ‘일단 국내에서의 지속적인 인기와 국외에서의 높은 평가 때문’(303)에 재평가받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더하여 만일 하루키가 노벨상이라도 타게 된다면? 조영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21세기는 하루키의 세기가 될 것 같다.”

 

이글의 요점인즉, 하루키에 대해서 그간 과소평가해 왔다는 것이다. , 하루키가 단순히 서브컬처적 요소(292)를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이기 이전에 비평가이자 미국문학 전문가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308)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세계문학으로서의 하루키를 논하며, 우리 문학의 편향성을 나무라고 있는 점이 이글의 좋은(?) 점이다.

 

또한 35, 김경연의 <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뜨겁게읽어낸 글이다. ‘뜨겁게라는 말은 가슴 벅차게 감격하며 읽었다는 말이다. 강경애의 소설 <소금>을 전에 접한 적이 있었지만, 김경연이 말하는 바와 같은 기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 글은 세계문학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의 아픈 곳과 여성의 질곡사를 폭로하는 글이다. 다무라 다이지로의 <메뚜기>, 문금분의 시 <지문에 대하여>와 송신도의 기록, 그리고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 허련순의 <누가 나비를 보았을까>, 강영숙의 <리나> , 그냥 지나쳤던 그들의 기록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이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이글에서 주목했던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작가의 정체성이나 소재의 동일성이 아니라 이산 여성들의 편력을 추적하며 그들의 열망과 저항을 읽어내는 공감의 공동성에 지지된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이산 여성들을 단지 희생자로 연민하고 그들의 수난을 기록하는 서사가 아니라, 가부장적 근대 체제의 야만을 증언하는 서사이며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공모하려는 서사이다.> (501)

 

여기까지 읽다가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바로 이게 세계문학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이론보다도, 실제적으로 인생을 기록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기능으로서의 세계문학! 그래서, 나에게 누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려보라 한다면, 유수한 분들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같이 하려는 문학작품이 '세계문학'이라고 말이다.

 

 

 

 

 

 

 

 

 

 

마저 그의 글을 읽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가 요청하는 다른 세계의 실현은 이제 전적으로 우리 몫으로 넘어왔는지 모른다.> (502)

 

그런데 왠일인지, 나는 그의 말, ‘넘어왔는지 모른다는 말이 넘어 왔다로 읽혔다. 그렇게 나는 이 책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많은 일,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해변 빌라

 

이 책을 몇 페이지쯤 읽었을까다시 앞으로 돌려 읽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때까지 읽었던 내용 중 등장인물간의 관계가 파악이 되지 않아서였다. 무슨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인물들 이름도 그렇거니와 사건이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단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인물들간의 관계 정리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이게 무슨 일? 하는 수 없이 다시 읽기로 했다. 그만큼 제 1장의 몰입도는 새학기 첫 수업 같이 어수선했다. 아니 어수선해 보였다. 그런 까닭으로 마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아버지를 나중에서야 알았던 것처럼 나도 그 인물들 간의 관계를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을 늦게 안만큼, 작가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의도도 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다시 읽었다, 그제서야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렴풋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어렴풋이는 소설 끝까지 이어졌다인물들이 한결같이 함께 하기에 거북한 사람들‘(16)이기에 그렇게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책을 일단 다 읽고나서 다시 한번 읽을 생각이 든 것은 끝 즈음에서 문장의 매듭이 어떤 것은 평어체로, 어떤 것은 경어체로 끝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장에서 시작하면서 * 표시로 된 글에서 화자는 누구일까? ‘는 손유지(윤유지)이다. 그리고 그 발언이 끝나고 나서 소설은 다시 1의 글로 이어진다. 그 때의 역시 손유지이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이렇게 같은 화자가 어떤 때에는 경어로 말을 하게 하고 어떤 때에는 평어체로 말을 하게 할까? 여기에 이 소설의 어떤 숨은 비밀이 있지 않을까? 그것을 발견하고서야 이 소설에서 무언가 숨은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화자의 심리를 더 심층적으로 서술하면서, 소설은 진행이 되어간다. 작가의 말대로 소설의 내부에 의식과 시간이 흐르고”(224)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장은 화자인 손유지가 경어체로 말하는 부분에서 이사경이 깨어나기를 기도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런 시작에 앞서 그의 생각은 잠시 노부인과 해삼 잡으러 갔던 때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시점은 노부인이 죽고, 이사경이 평범하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이다.

 

그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에필로그로 글을 마감하기 전() 장인 여우비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따라서 소설의 서두에 시작한 회상이 다시 처음 시점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 것이다.

 

회상의 시작과 끝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런 일들이 의문투성이인채로 진행이 되는데, 작가는 어찌된 일인지 거기에 대하여 속시원하게 설명을 하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한마디로 중간중간 매듭을 지어 놓지 않아 독자를 궁금하게 만들어 놓는다. 일례로, 화자가 윤유지에서 손유지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 사건을 보자.

 

큰 고모부가 아빠인줄 알고 자라던 화자는 어느 날 작은 고모인 손이린이 자기를 나아준 생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20) 그리고 작은 고모를 따라 해변빌라 509호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가는 그 사건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할 해설을 해주지 않는다. 어떻게 생모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큰 고모부는 등장하는데 큰 고모는 왜 등장하지 않는지. 그러한 설명이 봉쇄되었으니, 독자는 더 궁금해진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화자의 위치 - 그리고 존재 자체- 는 갑자기 변화를 맞이한다. 그런 획기적인 사건에 맞딱드린 화자의 심경은 어땠을까? 작가는 극히 말을 아끼고 겨우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가서야 밝힌다. “크레바스를 넘듯 윤유지에서 갑자기 손유지가 되었을 때에, 한동안 밤마다 물이 넘치는 욕조 안에 웅크린 채 울었었다.”(209)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나는 하나의 질문을 입 안에 물고 굶주려 죽어가는 새였‘(22)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진행이 되는데, 그런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니, 작가의 의도대로 충돌을 피하고 사건을 자꾸만 주저앉히고 이야기를 자꾸만 무화시키는형태의 진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을 맺는 법. 거기에 여러 형태의 사랑의 모습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조립해 나간다. 그래서 인물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자신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흐름이 바뀌고 구조에 변화가 오고 차이를 만들어결국은 재조정된다.(224)

 

그렇게 해서 화자가 있는 지금’(11)으로 다시 돌아와, 소설은 끝이 난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오면서 아퀴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초반에 인물들간의 관계파악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은 작가의 숨은 의도였던 것이다, 그 인물들간에 관계 설정을 해주느라, 퍼즐 맞추듯이 인물들간에 선을 그려가며 맞추다 보면 어느새 소설은 이야기를 마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독자로 하여금 미로를 따라 헤매며, 출구를 찾아 가게 만드는, 이게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가급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223)고 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나의 느낌은 화자가 마치 처음 자리에 그대로 있는 듯, 있었던 듯 하다. 작가가 그 화자의 인생길을 한바퀴 설명하며 이야기를 해주었음에도 그 동안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하다. 화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애초부터 있었고, 사건은 일어났으나 일어나지 않은 듯. 그래서 작가는 훌륭하게 자기의 뜻을 이 소설로 그려내었다고 생각된다.

 

사족 하나. 사랑은 사람을 따라 여러갈래의 모습으로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진다.

화자와 오휘의 경우, 손이린과 이사경의 경우, 편사장과 해영의 사랑, 진수와 알콜 중독 유부녀, 그리고 해영과 진수의 사랑. 그렇게 사랑은 여러 갈래로 구분되고, 만들어지고, 매듭지어져 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각각의 사랑 형태를 비교해보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일 듯.

 

사족 또 하나. 작가는 , 말이 좋다. 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이 소설을 읽은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다. 

<이상한 것은, 그가 말하는데도 침묵이 들렸다.>(24)

<삶이란 사과 껍질을 가급적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깎는 일이야.> (76)

<혼자 보는 세상엔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누군가 곁에 있다면 같은 것을 두배로 볼 수 있는 것이다.>(97쪽)

<학생들은, 하나의 음을 짚으면서, 동시에 지나간 음을 간직하고 다가올 음을 예상하며 의식을 끌어가는 두터운 현재를 연습해야 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순간 속에 결합되어 멜로디로 흘러갔다.>(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 또 다른 교육 더 나은 세상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번역 총서 2
마이클 애플 지음, 강희룡 외 옮김 / 살림터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질문은 사람에게 생각의 문을 열어주는 귀한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은 책의 제목부터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더니, 끝까지 이 질문을 물고 늘어집니다. 시종일관 저자의 자세가 그렇습니다. 끈질깁니다.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는 놓아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무겁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사회를 바꿔야 하는 당위는 확실한데, 그 방법론에 있어 과연 교육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주제이니, 무거운 것이 당연합니다. 그만큼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울리는 반향이 크리라 믿는데사람들은 어쩌면 이 책을 애초에 잡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우가 앞서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저자가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의 참여를 이렇게 촉구합니다.

 

<나는 또한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에도 주목했다.

1) 누구의 관점에서 이러한 질문을 제시하고 응답할 것인가?

2) 이러한 변혁적 실천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오랫동안 우리의 범주를 확대할 것을 촉구해 왔는데, 여기서 우리란 이러한 질문에 웅답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메시지를 의미한다.>(269)

 

그러한 저자의 촉구에 저도 우리들의 범위 안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자는 독자들에게 세계를 관계적으로 볼 것을 제시합니다. 더하여 자신의 태도를 바꿀 것을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창조적으로 우리를 통제하는 지배세력을 무력화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보다는 이 책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항은 270쪽 이하에 기록된 저자의 한국방문기입니다.

우리가 등잔 밑에 있어서 보지 못한 것들이 그의 눈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록은 앞서 언급한 우리라는 개념이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처음에는 작은 틈으로 보였던 공간을 양보해야만 했다. 그 작은 공간은 나중에 점점 더 커져서 결국에는 권력이 아무리 강압적으로 통제하려 해도 통제할 수 없는 공간으로 내줄 수 밖에 없었다.>(270)

 

다음과 같은 말들은 교육현장을 이해하기 위한 잠언으로 우리 가슴에 남겨둘만 합니다.

 

<교육은 단순히 시험 점수를 만들어내고 길들여진 노동자를 양산하는 공장으로 여겨진다.>(23)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취업이 아니다. 교육은 한 사람의 존재 자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26)

 

<자기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어서 자신들의 과거가 살아있게끔 하며,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간다.>(32)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의 현실이 오버랩되어서, 그러한 교육과는 동떨어진 그 곳, 가야 할 길이 아주 먼 곳을 헤매고 있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게만 느껴졌습니다. 과연 저자가 제기한 질문에 ,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을지?

 

그래서 옮긴이는 그러한 저의 기우라도 아는 듯,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느 선지자(애플)가 우매한 대중에게 교화를 베푸는 경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거나,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책으로 보인다.“(332)

 

그래서 우리는 그가 건네는 말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며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주는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이야기, 힘이 세다

 

이 소설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요? 일단 판타지 소설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판타지 소설과는 다릅니다. 격이 다릅니다. .

언뜻 보면 다른 소설들과 별 차이점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단순히 판타지 소설의 대열에 집어 넣으면 큰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이런 판타지 소설? 읽어야 시간낭비일뿐!’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것도 큰, 아주 큰 오산입니다.

 

달립니다. 주인공 빨간머리 요코는 달립니다. 이야기도 같이 달립니다.

이처럼 흡입력이 있는 책은 모처럼만입니다.

다른 판타지 소설에서 느꼈던 것들보다 월등하게 이야기가 힘을 발휘하는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달리고 달리고, 그래도 힘을 잃지 않는 이야기!

작가가 펼쳐내는 이 이야기, 이야기의 힘이 무척 셉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힘이 있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데, 몇가지 살펴볼까요?

 

작가의 표현력이 대단합니다. 이런 표현, 누가 구사할 수 있을까요?

<외치는 요코를 보며 고개를 쳐들고 웃던 원숭이가 속삭인다.

있지, 이렇게 생각해 볼 마음은 없어?”> (162)

 

생각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대화체 문장입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는 자주 쓰지만, 이렇게 문장으로 만들어진 글을 읽어본 적은?

아마 없는 듯 합니다. 그만큼 이 책의 서술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술술 읽히나 봅니다.

 

이런 문장은 어떻습니까?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 걸었다. 어깨를 빌려준 남자에게는 조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주위 사람들에게는 살짝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도록.>(308)

 

이렇게 문장은 유려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상황을 묘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묘사를 통하여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떠올리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문장들은 다른 여늬 판타지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것들입니다. 거기에서는 사건 묘사에 치우치다 보니, 이렇게 세밀한 심리 묘사는 볼 수 없고, 그저 것핥기에 불과한데, 이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 과연 이러한 것들이 원작의 힘인가요? 아니며 우리 말 번역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런데 그렇게 문장의 아름다움과 이야기의 힘에 빠져들어 읽다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바로 몸 없는 푸른 색 원숭이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푸른 원숭이의 역할이 무언가 살펴보았습니다. .

그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요코가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서 그의 불안을 조장하는 존재, 아니 불안한 상태에서 각성과 조심을 촉구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닌가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각도로 읽어보니, 이 이야기 속에 한편의 심리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환경에 봉착하여 거기에서 맞부딪치는 사건들과 싸우는 일상!

우리네 현대인들의 불안한 모습이 거기에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심리 드라마측면으로, 특히 불안과 관련하여 이 이야기를 읽었던 것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불안은 어떻게 촉발되는가?

 

<외치는 요코를 보며 고개를 쳐들고 웃던 원숭이가 속삭인다.

있지, 이렇게 생각해 볼 마음은 없어?”>(162)

 

이 구절은 불안심리 촉발에 대한 탁월한 묘사입니다.

 

또한 불안은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염되기도 합니다.

<불안해하는 닷키의 목소리가 요코까지 불안하게 한다.>(128)

 

불안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좀먹는가?

 

<이 원숭이는 요코의 절망을 먹으러 오는 것이다.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요괴처럼 요코의 마음에 숨은 불안을 폭로해서 요코를 좌절시키기 위해 나타난다.> (202)

 

<푸른 원숭이의 말은 요코의 불안이다. 원숭이는 그 불안을 폭로하기 위해 찾아온다. 불어난 불안을 먹기 위해서다.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238)

 

<푸른 원숭이는 요코의 불안을 폭로한다. 푸른 원숭이의 말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은 자신을 납득시키는 작업과 비슷했다.> (239)

 

불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런데 그런 불안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긍정적인 방향으로도 작동하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푸른 원숭이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불안까지 폭로해 주니까,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용할 수 있다.> (241-242)

 

불안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자신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며 날이 저문 길을 반달음질로 걸었다.>(287)

<스스로를 열심히 설득하던... >(287)

 

일단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렇게 불안한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을 납득시켜 이겨내는 것입니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러니, 불안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옳다, 라고 스스로 납득이 되게끔 사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안에 대처하다가 드디어 요코는 불안을 내치게 됩니다. 상징적인 묘사이긴 하지만 요코는 불안을 제거해 버립니다.

 

<혼신의 힘을 담아 풀 숲을 후려쳤다. 풀숲을 벤 검 끝은 공기마저 가르며 손에 묵직한 감촉으로 돌아왔다. 흩날리는 이파리 사이로 원숭이 머리가 날아간다. 땅에 떨어져 피를 뿌리며 데굴데굴 굴렀다.>(294)

 

그 보다 더한 방법, 목표와 희망!

 

그러나 그러한 방법보다 실상 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가장 큰 힘을 가진 방법은 바로 요코가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돌아간다. 반드시 그리운 곳으로 돌아간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하니까 내 몸을 지킨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 (204)

<...돌아가고 싶어.> (262)

<마음속에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288)

 

그래서 결국 요코는 해피엔딩을 맞이합니다.

푸른 원숭이인 불안은 요코에게 불안을 촉발시켜 이제 희망은 더 이상 없으니, 빨리 죽으라고 꼬드기는데 요코는 그것을 희망이란 존재로 물리치며 자기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결국은 이겨내는 것입니다.

<아무도 아까워하지 않는 목숨이니까 나만이라도 아까워하기로 했어.> (241)

 

이렇게 이소설을 심리드라마의 측면에서, 푸른 원숭이와 주인공 요코가 불안을 가운데 두고 투쟁하는 심리드라마로 살펴본 나의 시각은 마지막 결말 부분에 이르러 연왕의 말로 증명이 됩니다.

 

요코가 연왕을 만났을 때에 연왕은 이렇게 푸른 원숭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밝힙니다.

<"검집은 원숭이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지. 원숭이는 사람 마음속을 읽는데. 이것 또한 긴장을 늦추면 주인의 마음을 읽어 어지럽히지."> (365)

 

푸른 원숭이란 존재는 바로 그렇게 주인의 마음을 읽어 어지럽히는 '불안'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소설을 읽어보았습니다.

물론 이 소설을 다른 각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요코라는 소녀의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고, 또 요코가 자리를 비우게 되자 그 학교 친구들이 요코를 평가하는 멘트를 통하여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소외가 이루어지는가를 다룬 소설로도 읽혀집니다.

 

결론하여,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로 읽을 수 있는, 한편의 아름다운 프리즘 같은 소설입니다.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통을 돌릴 때마다 화려하게 무늬가 펼쳐지는 만화경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을 펼치기 전에 이런 판타지 소설, 공연히 시간낭비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려준 저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결론하여,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로 읽을 수 있는, 한편의 아름다운 프리즘 같은 소설입니다.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통을 돌릴 때마다 화려하게 무늬가 펼쳐지는 만화경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