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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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로 불리는 이현우가 쓴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세계문학이란 용어가 낯설지 않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보려고 하는 자에게 보인다던가? 그래서 로쟈에 힘입어서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기 시작했으니, 출발은 좋았다. 아니 출발부터 좋았다. 게다가 한겨레신문도 일조를 하였으니, 최재봉 기자가 세계문학이란 제목의 칼럼으로 이 책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가 미처 되지 못한 부분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주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며 읽었다.

 

최재봉 기자의 글은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로 완벽하다 할 수 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다음을 참조하시라)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3599.html <[유레카] 세계문학 / 최재봉>

 

그 칼럼은 신문의 제한된 지면으로 인한 한계가 있지만, 이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데 가치가 있다.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독자인 우리에게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안경으로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지만, 이 책을 통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 세계문학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야기의 진행을 돕기 위하여 먼저 세계문학이라는 말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여기서 말하는 세계문학이란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각각 이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서평가 로쟈(이현우)의 구분이 맘에 든다.

그는 세계문학을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한 바 있다.

첫째,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의미, 해외문학’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

둘째,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게 읽히는 문학으로서의 세계 명작 혹은 고전을 뜻하는 세계문학,

셋째, 개별 국가의 국민문학(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 곧 괴테가 정의한 세계문학’,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세계문학, 즉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문학,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문학이 있다. (12,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279 ~280 )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책들이 어떻게 우리 앞에 왔는가에 대한 흥미있는 분석은 이현우의 책 268~277쪽을 참고하시라.

 

그래서, 우리가 <세계문학전집> 차원이 아닌 세계문학이란 개념을 접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는 괴테, 마르크스가 각각 말한 바가 있고, 더 나아가서 파스칼 카자노바의 이론을 통하여 점점 더 깊숙한 논의를 들어볼 수 있다. 최재봉의 정리를 빌려 말하자면, <특히 카자노바는 <세계문학공화국>(1999)이라는 책에서 세계문학 공간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같은 개념을 통해 불평등과 경쟁을 기반으로 삼는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괴테가 생각한 세계문학이 여러 민족문학들 사이의 평화적 교류와 소통, 연대라는 순진한 이상에 가까웠다면 카자노바 쪽이 한층 냉정한 현실에 가까운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자노바 역시 유럽과 비유럽 사이에 불평등한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가령 비문자적 구술 문학과 같은 다른 형태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제시한 민족 알레고리개념은 시사적이다. 현대 서양문학이 낡은 형식이라며 폄하하는 알레고리가 제3세계 문학에서 개인의 이야기와 집단 경험을 아우르는 공통된 미적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제임슨의 관찰이다.>

 

그 정도로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를 끝낸다면, 이제 2 4<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이란 글과, 35<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이란 글을 빠트리지 말고 꼭, 읽어볼 일이다.

 

보편적-평범한-인 독자들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라는 문학이론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문학의 현실적인 모습에 관심이 갈 것이기 때문에, 세계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하다. 세계문학이 평범한 독자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구체적인 예가 바로 위에 언급한 두 글이다.

 

24, 조영일(동덕여대 강사)이 쓴 <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떻게 취급하여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해 놓고 있다. 여태까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왠지 자신의 수준이 떨어져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금기’(301)가 있었는데, ‘일단 국내에서의 지속적인 인기와 국외에서의 높은 평가 때문’(303)에 재평가받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더하여 만일 하루키가 노벨상이라도 타게 된다면? 조영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21세기는 하루키의 세기가 될 것 같다.”

 

이글의 요점인즉, 하루키에 대해서 그간 과소평가해 왔다는 것이다. , 하루키가 단순히 서브컬처적 요소(292)를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이기 이전에 비평가이자 미국문학 전문가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308)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세계문학으로서의 하루키를 논하며, 우리 문학의 편향성을 나무라고 있는 점이 이글의 좋은(?) 점이다.

 

또한 35, 김경연의 <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뜨겁게읽어낸 글이다. ‘뜨겁게라는 말은 가슴 벅차게 감격하며 읽었다는 말이다. 강경애의 소설 <소금>을 전에 접한 적이 있었지만, 김경연이 말하는 바와 같은 기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 글은 세계문학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의 아픈 곳과 여성의 질곡사를 폭로하는 글이다. 다무라 다이지로의 <메뚜기>, 문금분의 시 <지문에 대하여>와 송신도의 기록, 그리고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 허련순의 <누가 나비를 보았을까>, 강영숙의 <리나> , 그냥 지나쳤던 그들의 기록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이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이글에서 주목했던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작가의 정체성이나 소재의 동일성이 아니라 이산 여성들의 편력을 추적하며 그들의 열망과 저항을 읽어내는 공감의 공동성에 지지된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이산 여성들을 단지 희생자로 연민하고 그들의 수난을 기록하는 서사가 아니라, 가부장적 근대 체제의 야만을 증언하는 서사이며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공모하려는 서사이다.> (501)

 

여기까지 읽다가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바로 이게 세계문학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이론보다도, 실제적으로 인생을 기록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기능으로서의 세계문학! 그래서, 나에게 누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려보라 한다면, 유수한 분들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같이 하려는 문학작품이 '세계문학'이라고 말이다.

 

 

 

 

 

 

 

 

 

 

마저 그의 글을 읽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가 요청하는 다른 세계의 실현은 이제 전적으로 우리 몫으로 넘어왔는지 모른다.> (502)

 

그런데 왠일인지, 나는 그의 말, ‘넘어왔는지 모른다는 말이 넘어 왔다로 읽혔다. 그렇게 나는 이 책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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