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그녀의
시간’
VS. 다가올
’그녀의
시간’
이 책은 내가
읽었던 <모든
순간의 인문학>의
저자인 한귀은 교수가 쓴 새로운 책이다.
그
책에서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대해 처음 들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았었는데,
그래서
저자의 책이 나온다는 말에 서슴없이 망설이지 않고 읽기로 했다.
바람없이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전,
이란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을 바람없이,
그러나
비가 내리지 않는 토요일 오후에 받아서,
읽었다.
읽기
시작한 것이 오후 3시경,
다
읽은 것은 저녁 7시
조금 넘어.
다
읽고 tv를
켜니 <불후의
명곡>,
김수철이
레전드로 나와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
네 시간 동안 나는 7편의
‘그녀의
시간’을
읽은 셈이다.
일곱
명의 시간이니까.
‘그녀들의
시간’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헌팅’을 망봐주는 마음
VS.
‘헌팅’을 지지하는 마음
먼저 첫 번째
이야기,
헌팅을
읽었다.
백화점에 물건을 헌팅하러 간
여자,
명은의
이야기다.
백화점으로
헌팅을 하러가니,
물건을
사냥하러 간다는 것이다,
타겟이
되는 물건은 주로 옷가지.
기간제
교사인 명은이 옷 때문에 겪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옷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백화점으로 가서 헌팅하는 것이다.
나는
헌팅이란
말을 생각하기를,
물건을
사러가는 것을,
머리
속에 생각한 것을 목표로 하여 구입하는 것이니 헌팅이라 하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언제까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 화자가 명은의 친구인 지수를 언급하면서,
지수가
백화점에서 ‘저렇게
옷이 많은데,
우리가
저것들 중에 하나쯤 그냥 가져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데까지 그렇게 평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수의 말을 옮긴
그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닐텐데,
아니나
다를까,
그
뒤로부터 전개된 상황은 백화점에서 헌팅한다는 말은 옷을 훔쳐 온다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제발
이 어찌 보면 철없는 여인의 행동이 그냥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그래서
비록 옷을 훔치더라도 그냥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백화점을 빠져나가기를 소망하며 읽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저자는
명은을 기어코 점원의 촉수에 걸리게끔 하고 말았다.
옷을 한 벌 훔쳐 백에 집어넣고
나오는 명은을 점원이 불러 세운다.
“손님,
혹시
스커트 두장 들고 피팅룸에 들어가지 않으셨어요?”(39쪽)
그런
시간,
그녀의
시간은 얼마만큼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을까?
내가 그 부분을 읽고 넘어가는 그
시간보다는 분명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입술은 빠짝 말라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다행히도 무사히 흘러가 명은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니,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게 된다.
거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옷을
훔쳐 넣은 가방에 들어 있던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 것.
그래서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지키지
못한 것은 지갑만이 아니었다.
명은은
이미 자기 자신을 내던졌는지도 모른다.
차창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유령같은 자신의 모습이 얼룩져 있었다,
명은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었다,>(43-44쪽)
이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커멘트가
에필로그에 나와 있는데,
명은의
헌팅을 우리가 망봐주고 있었다는 사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명은의 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그녀의
시간’들은
이어진다.
그림은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런데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그림과
그 그림에 대한 간단한 해설을 붙여 놓았다.
그림은
왜 삽입했을까?
물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그림을 곁들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글을
쓰면서 인문학자로서 그녀들의 삶에 덧붙이고 싶은 조언이 있었다.
그것을
그림과 그림에 대한 주석으로 담았다.>(9쪽)
그렇게 프롤로그에서 그림을 곁들이는
저자의 의도를 분명 알고 시작헀는데,
128쪽까지는
글을 읽고,
또
거기에 곁들인 그림들,
그에
대한 해석들을 읽어가면서도 그 그림과 그런 주석들의 의미가 와 닿지 않았었다.
세 번째 이야기
<지금은
별거중>가
끝나는 지점에, 예의
그림이 한점 실려 있었다.
헨리
워카가 그린 <윌리엄
에반스 부인과 그의 아들>.
저자는 그 그림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여 놓았다.
일부만
소개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엄마
스스로가 성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숙씨는 언젠가 그 성장의 힘으로
진정한 사랑을 만날 것이다.
진숙씨의
삶은 유예된 모라토리움이 아니다,
아이와의
진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주석을
읽고나서야,
그
말이 단순히 그림을 해석하는데서 벗어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숙씨에 대한 코멘트인 줄 알게 되었다.
저자가
말한 것이 그제야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인문학자로서
그녀들의 삶에 덧붙이고 싶은 조언’,
그것이
일곱 편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은 비록 이야기
-
겪은
이야기,
들은
이야기,
거기에
덧붙여서 그녀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까지 –
지만,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살이 있는 삶의 궤적으로,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밑줄 긋고 싶은 아포리즘
<우울증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하는 이유는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18쪽)
<뭐든
묵직하게 잡았던 것을 놓치면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것이
오랜 사랑이건,
지겨운
관계건.>(56쪽)
<모녀가
슬픔을 함께 한다는 것은 각자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삶을 같이 산다는 의미다>(66쪽)
<사랑이
지속되는 이유는 사랑 자체가 지속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늘 자신을 지켜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73쪽)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소통이 끊어지면서 생긴다.>(93쪽)
<정말
예쁜 여자들은 다 조금씩 죄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을
유혹하고,
남자들을
절망에 빠트리고,
그
남자의 여자를 우울하게 만들고.>(252쪽)
<‘성공’이
아니라 ‘성장’하려면
자신을 풀어주어야 한다.>(281쪽)
다가올
‘그녀의
시간’에는
이렇게 아포리즘이 될만한 문장들에
밑줄을 긋다보니,
그
대부분이 마음의 상처와 관련된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그녀의
시간’들에
상처가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커멘트인 그림들은
저자의 마음을, 그렇게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그녀의
시간’은
상처받은 시간이라는 것,
그
상처를 이겨내기 위하여 애쓰고 애쓴 시간이라는 것.
그래서
이제 그녀들에게 남은 시간은 그 상처가 아물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평온한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