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이야기
장회익 지음 / 현암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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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이야기 -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가 재미있다. 더하여 그가 했다는 공부도 재미있다. 그러니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면서 공부도 재미있게 하는 셈이다.

 

어떤 공부?

그가 전공했다는 물리학에 대한 매력을 담뿍 느끼며 또한 깨달음에 대한 과정을 마치 공부하듯 차근차근 해 나가는 재미, 이게 바로 책을 읽는 기쁨이 아닌가 싶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책의 줄기가 잡힌다.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또 하나는 창고에 갇힌 도둑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저자의 생애와 오버랩되며 저자가 자기 생의 고비고비마다 비교하며 따라간 멘토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많이 알려져 있기에 여기에서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이야기는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앎을 훔쳐내는 학문 도둑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姜希孟)이 쓴 도자설(盜子說)에 나오는 것으로, 저자가 공부 도둑이라 자칭하며 자기 생에서 공부를 마치 부잣집 곳간에 들어간 도둑처럼 금은보화 같은 공부를 빼내어 온 것을 비유하는 아주 적합한 비유이자,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여기 등장하는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쓴 '훈자오설(訓子五說)'중 하나로, 아들에게 스스로 터득하는 '자득(自得)'이 학문 연구에서도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지극히 천하고 몹쓸 짓을 하는 도둑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도둑 이야기 http://blog.yes24.com/document/7903939)

 

아버지 도둑이 아들 도둑에게 스스로 지혜를 깨우치도록 하기위해 일부러 아들을 창고에 가두는 이야기를 '발단- 전개- 위기- 결말'의 서사적 구성 방식을 취하여 아들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내용을 뒤에 제시하고 있다. 강희맹은 도둑의 도()에도 '자득(自得)'이 있듯이 학문의 도() 역시 자득(自得)이 있어야 천하에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래서 도둑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자득의 원리는 장회익 교수의 학문 방법을 그대로 말해주는 아주 적절한 비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자득의 이치를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이 기간 동안 혼자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득했고, 이후 이 것이 내 일생의 공부방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내가 수시로 미지의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대학 교육을 통한 수동적 학업에 지치고 질린 나머지 학업을 거의 포기할 상황에서 나 홀로 몇 년간 공부에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이 평생의 학문적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412)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 이미 초판을 낼 때도 내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그간 칠팔 년이 경과하면서 공부가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다른 하나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내 최근의 생각이다.>(5-6)

 

<나는 나 자신을 공부꾼이라고도 했고 때로는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고도 했다. 그저 앎을 즐기고 앎과 함께 뛰노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이 과정 자체를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기로 했다. 혹시 이러한 앎의 유희에 흥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공감하는 바를 넓혀보자는 것이 취지라고 할 수 있다.>(9)

 

깨달음 이란 무엇인가?

 

이해의 새 지평이 열리는 것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공부에 관한 이야기만큼 더 의미있는 것이 바로 그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그는 어떤 스님을 방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201) 그런데 그 스님 방에 들어가니 탁자 위에 지구의가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이 지구의는 나중에 커다란 깨달음의 소재가 된다. (‘지구인의 눈우주인의 눈’ - 343) 그러나 그 때는 그 지구의에 대하여 묻지 못하고 그저 깨달음을 얻는 방법만을 물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돈오와 점오에 관한 경험을 하고 - 그저 듣고 오는 경험?- 돌아 온다.

돈오(頓悟)란 그 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즉석에서 깨닫는 것이고, 점오(漸悟)조금씩 학습해 가면서 깨닫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해의 틀과 그 틀 안에 넣어야 할 이해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으며, ‘관념의 틀관심의 폭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깨달음의 정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작은 돈오로 구성되는 하나의 큰 점오>가 바로 깨달음이다. (207)

그러기 위해서는 물음이 필요한데, 그 물음은 꼭 명시적으로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 구석 그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찜찜함을 느끼는 형태로 오기도 한다. (207)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어떤 현상을 대할 때에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되었으니, 그것도 하나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종교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

 

공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의외로 종교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색 중 하나이다. 각 마당마다 거의 한 꼭지씩 담아 놓았다.

셋째 마당의 교회에서는 왜 질문을 안받나’, 넷째 마당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 다섯째 마당 성경이 과연 하느님 말씀인가’, 여섯째 마당 스님 방에서 받은 깨달음 수업’, 아홉째 마당의 인간의 도등이다

 

이중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게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내가 이 시험 -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 과 관련하여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를 드릴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합격하면 누구 하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나를 붙여 달라는 것은 누구 하나를 떨어뜨려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닌가?> (147)

 

여기서 잠깐! 독자들 중에 위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고민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 결국 나는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길밖에 없었다.>(147)

 

어떤가? 그런 기도가 적절한가?

이런 기도를 드린 후에 결국 그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다른 경우에서 발생한 일인데,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가지 않고 그가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경우도 그렇게 - 공정하게 해달라고 - 기도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떻게?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내가 적합한 사람이라면 시험과정에서 실수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283)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게 더 인간적인 기도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끝으로 읽어야 할 대목은 410쪽 이하의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이다.

뉴턴은 자기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는 그자신보다 한 세대 앞섰던 데카르트의 선구적 방법론에 힘입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414) 고 말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익힌 사람이 뉴턴만은 아니었을진대, 오직 그만이 멀리 보게 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스스로의 공백기간을 통해 마련된 자기만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기 어깨위에 올라설 수 있었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414)

 

그래서 그렇게 할 때에 시야가 하루 하루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요체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하여 그는 평생을 걸려 공부했고, 공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 두고 싶은 말들

 

<아침에 도를 깨닫고 낮에 이를 적어 놓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403)

 

<학문의 본령을 터득한 학자가 학문 전체의 내용을 재음미 해가면서 그 안에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추려내고 이것을 다시 일반 지식인들이 함께 깨우쳐내게 하는 매우 적절한 방식을 강구해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학문이라는 것이 오직 이를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몇몇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407)

 

<‘앎 중심학문이 식품의 생산에 해당한다면 삶 중심학문은 음식의 마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상황은 엄청나게 많은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이를 적절히 선택하고 배합하여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줄 요리사가 부족한 실정이라 할 수 있다.> (408)

 

저자의 선조인 '장현광'의 우주설(宇宙說) - 303쪽 이하

 

'동굴의 비유'(367)

이 비유는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가 아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생각이 녹아 있는 신선한 비유인데, 이 부분 독자들이 읽어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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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 한방처방 - 이해하기 쉽다 외우기 간편하다 간단한방 시리즈
니미 마사노리 지음, 권승원 옮김 / 청홍(지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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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산()과 환()을 구분할 수 있는가?

 

이 책을 읽는 방법, 두 가지

 

이 책은 두 갈래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그저 상식을 추가한다는 생각으로, !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읽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한방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취할 방법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한방을 직접 따라해 보는 방법이다. 그래서 여기 처방(?)대로 한약재를 이용하여 직접 해 보는 방법이다.

 

나는 한방에 대한 기초적 지식조차 없었던 관계로 첫 번째 방향으로 잡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정말 말 그대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아니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나에게는 상식조차 부족했던지라 그런 부족을 메워줄 수 있는 많은 상식적인 사항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흡족하게 받아 들였다.

 

()과 산()과 환()을 구분할 수 있느뇨?

 

이제 나의 지식은 하나 더 늘게 된다. 바로 탕()과 산()과 환()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많은 약들을 먹고 산다. 비단 몸이 불편할 때만이 아니라, 그저 어떤 습관에 의해서 약을 복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규칙이 존재하지만, 웬만한 증상쯤은 각자 진단하고 약을 사 - 買- 복용하고 있다. 나의 경우만 해도 배가 아프다 싶으면 정로환(正露丸)을 몇 알 먹는다. ‘OO ’, ‘XX 을 마시기도 한다. 때로는 △△ 을 먹기도 한다.

그렇게 탕, , 환이라 이름 붙은 약들을 먹고 마시는데, 실상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지레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 책의 설명을 통하여 확실하게 개념을 잡게 되었다.

 

()은 달인 약, ()은 산제, ()은 벌꿀 등으로 산제(散劑)를 뭉친 환제(丸劑)를 말한다. (103좀 더 자세하게 읽어보자. 66쪽 이하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다.

 

()은 달인 약, 즉 끓인 약을 의미한다. 갈근탕, 인삼탕 등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 그런데 같은 것 같지만 다른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음()이다. 음은 탕과 같이 만드는 방식은 똑같이 달이는 것이지만, 여러 차례 복용한다는 것이 탕과 다르다.

()은 파쇄한 생약을 벌꿀 등으로 둥글게 빚어 복용하는 방법이다. 여기 또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이다. 료는 같은 양을 파쇄하지 않고 다린 것을 말한다.

 

그렇게 이해가 되니, 이제 탕과 환, 산이 구분이 되었다. 나로서는 대단한 상식의 진보다.

 

명의의 정의가 새롭다.

 

이 책에 <퀴즈를 풀면서 한의학에 친숙해져 봅시다>라는 항목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것이 나온다. "명의(名醫)의 확률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런데 그 정답이 의외다.

<처음부터 유효한 한의약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처방이) 맞지 않다면 다음 처방을 순차적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이게 답이다.

추가 설명을 들어보자. <어떤 처방을 주고 효과가 없거나 어느 정도 효과를 보였던 것을 참고로 하여 처방을 변경해 갑니다. 명의라도 처방을 통해 진단해 가면서 보다 적절한 처방을 탐색해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106)

 

어찌 보면 이 말 속에 들어있는 처방 철학이 이 책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한약에 대하여 이해를 함에 있어 우리의 사고 방식을 전환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 시스템의 변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패러다임을 바꾸어 나가도록 하는 책이다.

 

그러한 생각의 전환을 통하여 한방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 지식을 얻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있다.

 

한약에 대한 친숙함 획득

 

서두에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애초 이 책을 읽었던 목적은 그저 한방에 관한 상식적 지식을 보충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이런 생각까지 드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다름 아니라, 여기 나온 바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STEP 3>을 읽고 나서부터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직접 한약을 복용해 볼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서양약에서는 그렇지 않다. 병도 없는데 양약을 시험삼아 복용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131)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한방에 친숙해 지는 방법으로 독자들 스스로 복용해 보는 것을 권한다. 한의약은 식재료의 연장으로 한번 복용하는 것만으로 중대한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꼭 시도를 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런 한약에는 우리 귀에 친숙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예컨대, 갈근탕, 십전대보탕 등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각종 증상에 맞는 한약을 열거해 놓은 도표가 보인다. 각 증상별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해 놓아, 참고하는데 편리하게 제시해 두고 있으니, 이게 일반 사람들의 경우에도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 책을 설사 첫 번째 목적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이제 상식적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약에 대해 친숙해지고, 가까이 다가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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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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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점을 먼저 찍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떠올랐던 것은 회화 기법중 점묘법이었다.

점묘법이란 회화의 기법 중 하나로서, 점 또는 점과 유사한 세밀한 터치로 묘사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러니 수많은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하는데, 이 소설이 바로 그렇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화가가 캔버스 위에 붓으로 하나 하나 점을 찍어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용이 짧아서일까, 아니면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듯 해서일까. 그러나 그 점들이 모여 캔버스 위에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듯이, 이 점 같은 이야기들이 결국 모여서 장관을 연출하고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런 이야기의 성격은 무엇일까? 저자가 말한 바, 저자의 자전적인 회고록이 아니다, 라는 말을 믿기로 했다. 설령 그것이 저자의 개인적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개인사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우리 역사를 그려내고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주인공중 한 명인 민효의 이런 발언을 한번 들어보자.

<작년에 정치학과 수업을 들었거든. 교과서가 무려 8백 페이지였어. 거기에 우리에 대해서도나오더라. 우리가 세계의 모든 것인 줄 알았던 사건들이 단 한 페이지로 정리되어 있었어.>(486)

 

그렇게 주인공들 앞에 펼쳐졌던 세계가 단 한 페이지로 정리되는 게 바로 역사인데, 다행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아니라 500여 페이지나 되니까, 역사책도 그렇게 상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읽어볼만 하지 않겠는가?

 

2. 점은 선이 되고, 선은 ....

 

다시한번 말하자.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가 점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점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 점들은 이윽고 선이 되고, 선들은 면이 되며, 면들은 이윽고 입체가 되어 독자 앞에 드러난다. 그러니 그 점들이 혹시 띄엄띄엄하게 보일지라도 참을성을 가지고 읽어나가야 한다.

그런 이치를 소설 속 강정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빗줄기라는 표현은 틀렸어요. 빗방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한 줄기처럼 보여도 띄엄띄엄 내리지요. 실은 세상 모든게 띄엄띄엄 존재합니다.>(28)

 

그렇게 사건 하나하나가 띄엄띄엄 존재하지만, 그래서 그것이 사건들이 방울방울 이어지는 것 같고, 또 그것이 사실 맞지만, 어디 사람 눈에는 내리는 비가 빗방울로 보이나, 빗줄기로 보이듯이, 이 소설의 이야기들도 이야기가 점처럼 하나하나 그려지지만 결국에는 사건의 줄기가 보이고, 결국은 그게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런 역사를 그려내고 있는 역할을 하는 주인공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이다. 주인공들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와 부딪히며 갈등하는 사이에 그들이 지나가는 궤적이 점이 되고, 점은 선이 되고 이윽고 그 선들이 면을 이루어 입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3. 이 세계가 입체적으로 보이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저자는 하나의 암시를 심어 놓는다.

바로 주인공의 한 명인 진우의 눈 말이다. 한 쪽 눈을 잃은 진우에게 세상이 어떻게 보이나?

<이제 진우의 눈은 사물들이 떠도는 세계를 영원토록 평면으로만 인식할 것이다. 진우는 입체로 구성된 세계의 한 축을 잃은 대가로 누구도 비난하지 못할 자유의 권리를 얻었다.>(474)

 

저자의 이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주인공 진우가 한쪽 눈을 잃은 다음에 이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두 눈이 멀쩡한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저자는 진우를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대가를 우리에게 치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진우는 한 쪽 눈을 잃은 다음에서야 이 세상을 평면으로 보게 되었는데, 당신들은 두 눈을 번연히 다 뜨고 살면서도 이 세상을 그렇게 평면으로만, 아니 면이 아니라, 단선으로만 보고 있느냐고? 이 질문은 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앞에 보여지는 이 사건을 왜 그렇게 조각 조각으로만, 점 하나로만 보느냐고!

 

4. 음수사원 (飮水思源)

 

그래서 이 소설은 모든 일의 원인을 묻는 소설이다.

저자가 주인공 태의에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공연히 읽힌 것이 아니다.

 

<아퀴나스는 주장했다.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원인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483, 505)

 

저자가 이 부분을 두 번 씩이나 인용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주인공 태의가 빨강색 점퍼를 입고 시위에 나가고, 그 시위장면이 채증사진에 찍혔고, 그 사진을 들이대며 네가 맞냐고 추궁하는 문경사에게 오리발을 내밀지 못하고, 맞다고 대답하고 결국은 그것이 진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더 한걸음 나가 진우가 한 쪽 눈을 잃게 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원인은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는 무한궤도처럼 끝없이 달려간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읽은 독자인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어떤 현상에 대하여 거슬러 올라가 그 원인 A, 또 그 현상 A를 거슬러 올라가 원인 B.......그렇게 거슬러 올라가 결국 우리 앞에 놓인 어떤 현상을 만들어 놓은 근본적인 이유 Z를 생각해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음수사원, 지금 물을 마시면서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평범한 이치, 그 이치를 우리 현상에 대입해 보라는 것일게다.

   

5. 역사는 이렇게 평가된다

 

저자가 역사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평가한 대목을 보자

<황우석이 증명한 것이라고는 논문 검증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밖에 없다.>(489)

 

대학에서의 학사관리가 엄정화 - 여배우 이름이 아니다 - 되고 난 변화는?

<그 곳 캠퍼스에서는 오리가 한 줄로 서서 횡단보도를 건너 다녔다.>(490)

 

6. 아포리즘 몇 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아포리즘, 하나!

<“돈이 많으면 행복하지 않아?”

행복하지, 그래도 내 행복 때문에 누군가 불행을 느끼는 건 싫어. 그렇게는 내가 충분히 행복할 수 없는거야.”>(101) 미주의 말이다.

 

그것 하나로는 섭섭하다, 하나만 더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보트에서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냐고. 제가 의아한 건, 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장롱에 침대까지 챙겨들고 보트에 탔느냐는 것입니다.>(154) 대석 형의 말이다.

형(兄)이 말하는 것이니까, 새겨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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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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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 수리와 간디, 그리고 강풀의 운동화

 

이 책은 읽을거리가 많다. 더하여 생각할 거리도 많다.

 

여기 244쪽에 또 하나의 주인공인 수리의 운동화 한쪽이 갯벌에 빠져 사라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수리의 몸이 갯늪에서 끌려 올라올 때에 한쪽 발에만 운동화가 신겨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바라보던 태의는 수리가 벗어 놓은 한쪽을 집어 들어 갯벌 위로 힘껏 던졌다. 그 이유를 묻는 수리에게 이렇게 이유를 설명한다.

정말로 누군가 신발을 찾을 수 있다면, 한 짝보다는 한 켤레가 더 쓸모 있는 것 같아서.”(244)

 

그 에피소드를 읽고 있노라니, 간다의 일화가 떠올랐다.

마하트마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한 뒤 귀국했을 때다.

간디가 열차에 올라서는 승강대를 딛다가 그만 실수를 해서 한쪽 신발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열차는 막 속도가 붙기 시작했으므로 떨어진 한쪽 신발을 주울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떨어진 신발을 포기하고 차내로 들어가자고 권했다.

그 순간 간디는 얼른 신고 있던 한쪽 신발을 마저 벗어 들더니 금방 떨어뜨렸던 신발을 향해 세게 던지는 것이었다. 동료가 의아해서 그 까닭을 물었다.

간디는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한쪽 신발로는 누구도 신고 다닐 수가 없네. 누군가 떨어뜨린 저 신발을 줍는다면 두 쪽이 다 있어야 신을 수 있을게 아닌가˝

 

그 뒤를 이어 강풀의 만화 한 컷이 떠오른다.

이야기의 무대는 한국 서울의 지하철 승강장이다. 만화의 주인공은 지하철에 올라타다가 그만 운동화 한쪽이 벗겨지고 말았다. 그 주인공 그러한 급박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간디의 일화가 생각이 나, 나머지 운동화 한쪽을 벗어 마악 닫히려는 그 문 틈 사이로 집어 던졌다. 누구라도 그 신을 온전하게 신으라는 착한 마음씨(?). 그런데 같은 순간, 그 승강장에 또 한 명의 착한 마음씨가 있었으니! 오지랖 넓은 청년 한 명이 거기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올라탄 사람이 신발 한쪽만 들고 안타까워할까봐 승강장에 떨어진 운동화 한쪽을 얼른 집어 들어 안으로 집어넣었는데, 그 나오고 들어간 순간이 거의 동시! 아뿔싸! 주인공이 던진 운동화는 승강장으로 떨어지고, 오지랖 청년이 던진 운동화는 지하철 안으로 무사히 들어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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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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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으로 세상 치유하기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냥 줄거리 위주로 읽어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줄거리 이외에 그 속에 숨겨진 그 무엇인가를 찾아가며 읽는 것이다.

 

먼저, 첫 째 방법은 어떨까? 그냥 막 읽어서 부지런히 줄거리를 파악하면 된다. 그 작업은 간단하다. 왜?  그 줄거리가 의외로 간단하기에 그렇다. 한 여성운동가가 일에 빠진 나머지,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고 암에 걸렸는데, 그 투병기록을 기록한 것. 그리고 다행하게도 몸은 나았고, 그 소원하던 환희의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는 감동수기!

 

그러나 조금만 각도를 달리해서 읽는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암투병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바로 두 번째 방법으로 이 책을 읽어갈 때에 비로소 파악이 가능한 내용이다.

 

저자의 몸은 아프다, 세상이 병들었으므로

 

이 책을 읽다보면이상한 내용들이 눈에 뜨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비단 자기 이야기만을 하는게 아니다. 세상의 무언가를 같이 이야기한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그것을 파악하면서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관점의 교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저자의 아픈 몸과 이 세상을 연결시키는 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바탕에는 자기 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자신의 몸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긴밀히 엮여져 있으며, 자기 몸이 병에 걸린 것처럼, 엮어져 있는 그러한 세상의 일들 또한 병에 걸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통해 나은 것처럼, 세상의 일들, 역시 그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저자의 투병기록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병들었다는 외침이며,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촉구해 달라는 외침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항상 무언가가 두 개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97쪽에 보면 바다에 쏟아진 기름유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저자는 무엇과 연결시키고 있는가? 바로 저자의 몸에서 피를 유출하는 것과 관련시키고 있다.

 

나무를 통한 세상과의 화해

 

또한 나무에 관한 장은 그 연결이 단순한 표면적인 연결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깊은 성찰의 장을 펼쳐주고 있다.

 

<어떤 다른 것에 이르지 않는다면 인생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무가 장작이 되고 집이 되고 탁자가 되지 않는다면 나무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121)

 

그런데 이 말은 이 말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앞의 말을 살펴보자.

<나는 미국에서 자랐다. 미국의 모든 가치는 미래, , 생산에 있다. 현재형은 없다. 지금 이 상태에서는 어떤 가치도 없고, 오직 앞으로 생길 수 있는 것, 지금 있는 것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당연히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면적인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했다. 일하거나 노력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뭔가 중요한 존재로 만들거나 내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나는 여기 존재할 어떤 권리도 이유도 없었다.>(120)

 

그래서 그 중간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다른 것에 이르지 않는다면 인생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무가 장작이 되고 집이 되고 탁자가 되지 않는다면 나무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121)

 

그런 일반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어떤 것으로 변화해야만 하는 존재'에서 가치를 찾았었는데,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대로 존재하는 나무'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실제로 병원 침대에 누워 나무를 보고 나무 안으로 들어가고 나무 안에 내재된 푸른 삶을 발견한 것, 그것은 깨달음이었다.>(121)

 

바로 현재의 삶이 가치있음을 깨닫는 귀한 순간이었다. 나무는 지금 현재 저자가 누워있는 병실 밖에 있는 것만으로 귀한 존재였다. 그래서 결국 그 나무는 내가 보았으되 볼 수 없었던 나무들, 진정한 사랑없이 사랑했던 다른 나무들을 가져다 주었다.’(122)

 

저자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더 읽어보자.

<나의 나무.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무는 나의 친구가 되었고, 내가 관계를 맺고 명상하는 지점이자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이유가 되었다,>(124)

 

그렇게 나무는 저자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는데, 나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저자에게 큰 역할을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몰이해가 빚어낸 '뜻 깊은' 오해 한가지

 

그것은 독자인 나의 독해력 부족으로 인한 오해로부터 시작된다.

 

<공격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나를 안정시키고 보호하고 세포 구조를 견고히 다져준 것은 나무였다.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146)

 

화학 치료약인 타솔이 오래된 주목의 나무껍질에서 찾아낸 것이 되어서, 결국 나무가 저자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말인데, ‘나무의 마법이 통하다라는 장의 마지막 말이며, 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런데,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비약인지, 아니면 비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상징인지? 그 다음에 어떤 말도 이어지지 않고 끝이 나버렸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다음 장들을 읽어 내려가다가, 그것이 무언가 암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가 그 말을 문장의 말미에 해 놓은 것이 무의미한 말이 아니라, 무언가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까 말한 바처럼 저자가 나무 존재에 대한 깨달음 장면이 떠올랐다, 나무? 나무!

그래서 다시 돌아가 저자가 나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그 기록(118~124)을 되짚어 보았다. 그제서야 그 말 -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 - 이 나무와의 연결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엄마와의 연결을 의미하는 줄 알게 되었다. 나무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이 결국은 엄마와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게 되었기에, 저자는 그것을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라고 한 것이다.

 

저자는 그 문장의 끝을 마침표(.)로 끝냈지만, 더 깊은 마음속으로는 느낌표(!)로 부르짖지 않았을까?

 

이책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단순히 투병의 결과 암을 극복해서 감동적이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몸이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또한 주변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구도의 과정임을 알게 되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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