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이야기 -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가
재미있다.
더하여
그가 했다는 공부도 재미있다.
그러니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면서 공부도 재미있게 하는 셈이다.
어떤
공부?
그가 전공했다는 물리학에 대한
매력을 담뿍 느끼며 또한 깨달음에 대한 과정을 마치 공부하듯 차근차근 해 나가는
재미,
이게
바로 책을 읽는 기쁨이 아닌가 싶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책의 줄기가 잡힌다.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또 하나는 창고에 갇힌 도둑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저자의 생애와
오버랩되며 저자가 자기 생의 고비고비마다 비교하며 따라간 멘토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많이 알려져 있기에 여기에서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이야기는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앎을 훔쳐내는 학문 도둑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姜希孟)이
쓴 도자설(盜子說)에
나오는 것으로,
저자가
공부 도둑이라 자칭하며 자기 생에서 공부를 마치 부잣집 곳간에 들어간 도둑처럼 금은보화 같은 공부를 빼내어 온 것을 비유하는 아주 적합한
비유이자,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여기 등장하는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쓴 '훈자오설(訓子五說)'중
하나로,
아들에게
스스로 터득하는 '자득(自得)'이
학문 연구에서도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지극히 천하고 몹쓸 짓을 하는 도둑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도둑 이야기 http://blog.yes24.com/document/7903939)
아버지 도둑이 아들 도둑에게 스스로
지혜를 깨우치도록 하기위해 일부러 아들을 창고에 가두는 이야기를 '발단-
전개-
위기-
결말'의
서사적 구성 방식을 취하여 아들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내용을 뒤에 제시하고 있다.
강희맹은
도둑의 도(道)에도
'자득(自得)'이
있듯이 학문의 도(道)
역시
자득(自得)이
있어야 천하에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래서 도둑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자득의
원리’는
장회익 교수의 학문 방법을 그대로 말해주는 아주 적절한 비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자득’의
이치를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이 기간 동안 혼자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득했고,
이후
이 것이 내 일생의 공부방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내가
수시로 미지의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대학
교육을 통한 수동적 학업에 지치고 질린 나머지 학업을 거의 포기할 상황에서 나 홀로 몇 년간 공부에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이 평생의 학문적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412쪽)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
이미
초판을 낼 때도 내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그간 칠팔 년이 경과하면서 공부가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다른
하나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내 최근의 생각이다.>(5-6쪽)
<나는
나 자신을 공부꾼이라고도 했고 때로는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고도 했다.
그저
앎을 즐기고 앎과 함께 뛰노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이 과정 자체를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기로 했다.
혹시
이러한 앎의 유희에 흥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공감하는 바를 넓혀보자는 것이 취지라고 할 수 있다.>(9쪽)
깨달음 이란
무엇인가?
이해의 새 지평이 열리는 것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공부에
관한 이야기만큼 더 의미있는 것이 바로 그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그는 어떤 스님을 방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201쪽)
그런데
그 스님 방에 들어가니 탁자 위에 ‘지구의’가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이
지구의는 나중에 커다란 깨달음의 소재가 된다.
(‘지구인의
눈’과
‘우주인의
눈’
- 343쪽)
그러나
그 때는 그 지구의에 대하여 묻지 못하고 그저 깨달음을 얻는 방법만을 물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돈오와 점오에 관한 경험을 하고 -
그저
듣고 오는 경험?-
돌아
온다.
돈오(頓悟)란
그 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
즉석에서
깨닫는 것’이고,
점오(漸悟)는
‘조금씩
학습해 가면서 깨닫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해의
틀’과
그 틀 안에 넣어야 할 ‘이해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으며,
‘관념의
틀’과
‘관심의
폭’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깨달음의 정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작은
돈오로 구성되는 하나의 큰 점오>가
바로 깨달음이다.
(207쪽)
그러기 위해서는 물음이
필요한데,
그
물음은 꼭 명시적으로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 구석 그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찜찜함을 느끼는 형태로 오기도 한다.
(207쪽)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어떤
현상을 대할 때에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되었으니,
그것도
하나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종교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
공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의외로 종교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색 중 하나이다.
각
마당마다 거의 한 꼭지씩 담아 놓았다.
셋째 마당의
‘교회에서는
왜 질문을 안받나’,
넷째
마당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
다섯째
마당 ‘성경이
과연 하느님 말씀인가’,
여섯째
마당 ‘스님
방에서 받은 깨달음 수업’,
아홉째
마당의 ‘인간의
도’
등이다
이중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게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내가
이 시험 -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
과
관련하여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를 드릴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합격하면 누구 하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나를 붙여 달라는 것은 누구 하나를 떨어뜨려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닌가?>
(147쪽)
여기서
잠깐!
독자들
중에 위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고민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
결국
나는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길밖에 없었다.>(147쪽)
어떤가?
그런
기도가 적절한가?
이런 기도를 드린 후에 결국 그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다른 경우에서 발생한
일인데,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가지 않고 그가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경우도 그렇게 -
공정하게
해달라고 -
기도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떻게?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내가
적합한 사람이라면 시험과정에서 실수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283쪽)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게 더 인간적인 기도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끝으로 읽어야 할 대목은
410쪽
이하의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이다.
“뉴턴은
자기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는
그자신보다 한 세대 앞섰던 데카르트의 선구적 방법론에 힘입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414쪽)
고
말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익힌 사람이 뉴턴만은 아니었을진대,
오직
그만이 멀리 보게 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스스로의 공백기간을 통해 마련된 자기만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기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414쪽)
그래서 그렇게 할 때에 시야가 하루
하루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요체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하여 그는 평생을 걸려 공부했고,
공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 두고 싶은 말들
<아침에
도를 깨닫고 낮에 이를 적어 놓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403쪽)
<학문의
본령을 터득한 학자가 학문 전체의 내용을 재음미 해가면서 그 안에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추려내고 이것을 다시 일반 지식인들이 함께 깨우쳐내게
하는 매우 적절한 방식을 강구해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학문이라는 것이 오직 이를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몇몇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407쪽)
<‘앎
중심’
학문이
식품의 생산에 해당한다면 ‘삶
중심’
학문은
음식의 마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상황은 엄청나게 많은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이를
적절히 선택하고 배합하여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줄 요리사가 부족한 실정이라 할 수 있다.>
(408쪽)
저자의
선조인 '장현광'의 우주설(宇宙說) - 303쪽 이하
'동굴의
비유'(367쪽)
이 비유는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가
아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생각이 녹아 있는 신선한
비유인데, 이
부분 독자들이 읽어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