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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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으로 세상 치유하기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냥 줄거리 위주로 읽어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줄거리 이외에 그 속에 숨겨진 그 무엇인가를 찾아가며 읽는 것이다.

 

먼저, 첫 째 방법은 어떨까? 그냥 막 읽어서 부지런히 줄거리를 파악하면 된다. 그 작업은 간단하다. 왜?  그 줄거리가 의외로 간단하기에 그렇다. 한 여성운동가가 일에 빠진 나머지,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고 암에 걸렸는데, 그 투병기록을 기록한 것. 그리고 다행하게도 몸은 나았고, 그 소원하던 환희의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는 감동수기!

 

그러나 조금만 각도를 달리해서 읽는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암투병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바로 두 번째 방법으로 이 책을 읽어갈 때에 비로소 파악이 가능한 내용이다.

 

저자의 몸은 아프다, 세상이 병들었으므로

 

이 책을 읽다보면이상한 내용들이 눈에 뜨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비단 자기 이야기만을 하는게 아니다. 세상의 무언가를 같이 이야기한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그것을 파악하면서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관점의 교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저자의 아픈 몸과 이 세상을 연결시키는 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바탕에는 자기 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자신의 몸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긴밀히 엮여져 있으며, 자기 몸이 병에 걸린 것처럼, 엮어져 있는 그러한 세상의 일들 또한 병에 걸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통해 나은 것처럼, 세상의 일들, 역시 그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저자의 투병기록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병들었다는 외침이며,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촉구해 달라는 외침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항상 무언가가 두 개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97쪽에 보면 바다에 쏟아진 기름유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저자는 무엇과 연결시키고 있는가? 바로 저자의 몸에서 피를 유출하는 것과 관련시키고 있다.

 

나무를 통한 세상과의 화해

 

또한 나무에 관한 장은 그 연결이 단순한 표면적인 연결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깊은 성찰의 장을 펼쳐주고 있다.

 

<어떤 다른 것에 이르지 않는다면 인생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무가 장작이 되고 집이 되고 탁자가 되지 않는다면 나무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121)

 

그런데 이 말은 이 말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앞의 말을 살펴보자.

<나는 미국에서 자랐다. 미국의 모든 가치는 미래, , 생산에 있다. 현재형은 없다. 지금 이 상태에서는 어떤 가치도 없고, 오직 앞으로 생길 수 있는 것, 지금 있는 것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당연히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면적인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했다. 일하거나 노력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뭔가 중요한 존재로 만들거나 내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나는 여기 존재할 어떤 권리도 이유도 없었다.>(120)

 

그래서 그 중간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다른 것에 이르지 않는다면 인생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무가 장작이 되고 집이 되고 탁자가 되지 않는다면 나무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121)

 

그런 일반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어떤 것으로 변화해야만 하는 존재'에서 가치를 찾았었는데,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대로 존재하는 나무'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실제로 병원 침대에 누워 나무를 보고 나무 안으로 들어가고 나무 안에 내재된 푸른 삶을 발견한 것, 그것은 깨달음이었다.>(121)

 

바로 현재의 삶이 가치있음을 깨닫는 귀한 순간이었다. 나무는 지금 현재 저자가 누워있는 병실 밖에 있는 것만으로 귀한 존재였다. 그래서 결국 그 나무는 내가 보았으되 볼 수 없었던 나무들, 진정한 사랑없이 사랑했던 다른 나무들을 가져다 주었다.’(122)

 

저자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더 읽어보자.

<나의 나무.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무는 나의 친구가 되었고, 내가 관계를 맺고 명상하는 지점이자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이유가 되었다,>(124)

 

그렇게 나무는 저자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는데, 나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저자에게 큰 역할을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몰이해가 빚어낸 '뜻 깊은' 오해 한가지

 

그것은 독자인 나의 독해력 부족으로 인한 오해로부터 시작된다.

 

<공격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나를 안정시키고 보호하고 세포 구조를 견고히 다져준 것은 나무였다.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146)

 

화학 치료약인 타솔이 오래된 주목의 나무껍질에서 찾아낸 것이 되어서, 결국 나무가 저자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말인데, ‘나무의 마법이 통하다라는 장의 마지막 말이며, 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런데,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비약인지, 아니면 비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상징인지? 그 다음에 어떤 말도 이어지지 않고 끝이 나버렸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다음 장들을 읽어 내려가다가, 그것이 무언가 암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가 그 말을 문장의 말미에 해 놓은 것이 무의미한 말이 아니라, 무언가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까 말한 바처럼 저자가 나무 존재에 대한 깨달음 장면이 떠올랐다, 나무? 나무!

그래서 다시 돌아가 저자가 나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그 기록(118~124)을 되짚어 보았다. 그제서야 그 말 -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 - 이 나무와의 연결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엄마와의 연결을 의미하는 줄 알게 되었다. 나무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이 결국은 엄마와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게 되었기에, 저자는 그것을 드디어 나의 엄마를 찾았다라고 한 것이다.

 

저자는 그 문장의 끝을 마침표(.)로 끝냈지만, 더 깊은 마음속으로는 느낌표(!)로 부르짖지 않았을까?

 

이책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단순히 투병의 결과 암을 극복해서 감동적이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몸이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또한 주변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구도의 과정임을 알게 되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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