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의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 천재 동양 철학자들의 생각의 향연을 듣다
이중텐 지음, 이지연 옮김 / 보아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진 제자(先秦諸子)에게서 인문학을 배우다 .

 

먼저 제목부터 짚어보자.

이 책 제목은 <이중텐의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이다.

그러니까, 제목에 의한다면 이중텐이 인문학에 대하여 쓴 책이라는 것이다.

제목만 본다면 이 책이 마치 인문학이 어떤 것이라는 등, 인문학에 대하여 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그 안에 인문학이라는 말은 거론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중텐은 선진제가들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중텐은 이 책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그래서 원제를 찾아보니, <先秦諸子百家爭鳴>이었다.

그러니, 이중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진의 여러 학자들이 말한 것을 정리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제목이 붙은 것은?

아마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편집자가 그렇게 고쳤을 것이다.

아무리 이중텐이 유명하다할지라도 선진시대의 학자들이라는 제목으로는 독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할 터이니 '인문학'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바꾼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이중텐이 말하는 것이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그저 제목만 유행어를 따라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이중텐이 선진시대의 제가(諸家 혹은 제자 諸子 - 여러 학자들)의 사상을 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문학이라는 범주에 들어간다면, 그래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보며주는 것이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며 읽었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은 이중텐의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그는 일단 공자로부터 시작한다.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제자 중 묵가, 도가, 법가와의 논쟁, 즉 선진 백가쟁명의 3대 논쟁을 설명한다.

이를 요약하기는 복잡하니, 건너뛰자.

 

그런 다음에 저자는 다음과 같은 ’, 즉 궁금한 점을 설명한다.

 

중화민족은 어떻게 이처럼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어떤 이유로 춘추전국시대에 집중적으로 출현했는가?

그런 사상이 왜 이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강인한 생명력과 영원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가?

 

위의 세 가지 의문점을 설명한 다음에는 선진의 사상가들의 사상을 이 시점에 살려보자 주장한다. 

 

선진 제자의 사상은 인류 문명의 값진 유산이니 당연히 계승해야 하는데, 문제는 방법이다.

이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상서를 읽어보면, 대개 이런 실천 부분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은 독자들에게 맡길뿐, 사상을 실천, 계승하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상 계승의 예로 논어의 오직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가 어렵다라는 구절을 든다.

 

이를 어떻게 실천, 계승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를 구체적 계승과 추상적 계승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세한 내용은 506쪽 이하 참조)

 

이렇게 저자는 제자의 사상을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분류 분석하고, 더 나아가 통합하며, 그것을 계승하고자 한다.

 

이 책, 바로 인문학이다.

 

그러한 저자의 생각을 읽던 끝에 이 책의 제목을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라고 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문학의 정의에 대하여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합당한 것은 특별히 어떠한 한계에 가두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인문학 자체가 통섭의 학문이지 않는가? 그래서 어떤 특정한 분야 예컨대 문 사 철 만이 인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문학의 본질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이중텐이 비록 인문학이라는 말 한마디 언급하지 않았지만,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시대에 맞게, 또는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를 집대성한 선진시대 제가들의 생각을 드러내 보인 이 책, 인문학이라는 범주에 넣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상들을 통하여 인생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도록 하는 이정표를 제시하였기에,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펼쳐보인 제자들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는 점이었다. 제자백가의 사상이 분출하던 시기, 2500여 년 전 춘추 전국 시대처럼 그러한 시간이 되돌아 온 것 같은 이 시대에 생각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한 시점에 오히려 공자 등 제자의 사상들을 이 시대에 대안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 용이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 도처에 용이 살고 있다

 

보았다, 용을.

여기 용이 있다고 해서 과연 용이 있나 했더니, 정말 용이 있었다.

용이 무려 113 마리다. (그런데 용이라 하지만 짐승을 세는 단위인 마리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훌륭한 용이다.)

 

어떤 용인가?

 

용이 있다하나, 용은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존재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니 책 제목에 이끌려서 어디 이야기 속에 용이 있나, 하고 찾는 것은 각주구검 격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은 잃어버린 칼을 찾는다고 벌인 소동이지만, 여기에서는 결코 잃어버린 이 아니다. 원래 보이지 않는 용이니, 용을 찾는다고 여기저기 헤매보아야 보일 리가 없는 용이다.

 

용을 찾으려면 이야기의 겉껍질만 보아서는 찾지 못한다. 그렇게 읽고나서 용이 없다고 말하면 - 아니 용이 - 가 웃을 일이다.

 

이야기 속으로,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야 비로소 거기 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번 들어가 보자.

 

내 말을 다 알아 들었나요? 그러면 이제 침묵.

 

42쪽의 <침묵>이다.

그는 종종 단순한 것들이 여러 모양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기서 그는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장삼이사 정도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저자는 침묵에 관하여는 전문가다. 그가 열거하는 침묵의 종류를 살펴보자.

사랑하는 사람들의 침묵이 있다.

여기에는 애정이 들어있는데, 그 애정이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어느새 변하게 된다.

그래서 애정으로 충만하던 침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애정이 들어있지 않은 침묵으로 변한다는 것, 가정심리학에서 볼 수 있는 통찰이다.

 

수다스러운 사람들의 침묵.

이것은 두배의 가치가 있다. 이것은 사회학에서 고려할 침묵이다.

 

비난하는 듯한 침묵과 만장일치에서 나오는 침묵도 있다.

요즘 소통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러한 통찰은 소통의 문제에서 필히 짚고 넘어가야할 주제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가치가 돋보인다.

 

저자는 또 하나의 침묵을 말한다.

 

뭐니뭐니 해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침묵은 바로 이야기 속의 침묵이다. 이 침묵은 늘 결정적인 마지막 직후에 가차없이 흐른다.”(43)

 

이 대목에서 알아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가 누구인지를.

는 바로 저자다.

저자는 그래서 작품 모든 작품마다 - 에서 마지막 말에, 자기의 마음을 속시원하게 토로한 다음 침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불필요한 췌언을 하지 않고 끝내겠다는 것이다. 아니 독자들이 자기의 뜻을 알아주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끝을 내겠다, 그러니 이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이 알아주시라, 는 말이다.

 

내 심장도 두 개인가? 아니 세 개?

 

<두 개의 심장>(13)을 읽고 나서는 나도 거기에 몇 마디 덧붙이고 싶어졌다.

사람에게 심장은 두 개다. 비록 보이는 심장은 하나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심장은 분명 두 개다. 아니 두 개가 아니라, 두 개 이상이다.

 

저자는 작품에서 사랑을 위한 심장미움을 위한 심장’, 이렇게 두 개가 있다 했지만, 어디 심장이 단지 두 개뿐일까? 작품 속의 주인공은 심장이 두 개 있어서, 감정도 둘로 나눌 수 있다 했는데, 그것은 저자가 한국인이 아니어서 그렇다.

우리말에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만감’(萬感)이란 만개의 감정이 아니라, 사전적 의미로는 솟아오르는 온갖 느낌을 말한다.

그러니, 작가가 이 작품에서 사용한 논리대로라면, 심장이 온갖 느낌을 관장하려면 역부족이니 적어도 만 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논리는 농담 차원의 말이다. 인간에게 심장이 두 개만 있어도 힘들터인데, 만 개는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래서 작품 속에서 심장 둘 중에 하나를 떼어내도록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렇다. 심장은 하나만 허용된 것이니, 다른 하나가 설령 있다면 떼어내야 한다. 그런 경우, 어떤 것을 떼어낼까?

 

작품 속에서 엘레나 부인이 한 것처럼, 남편의 심장 중에서 다른 여자를 향해 뛰고 있다는 심장을 떼어내라고 요청하는 그녀처럼, 자기에게 불필요한 것을 떼어낼 수만 있다면?

 

이 책 도처에 용이 있다.

 

그렇게 이 책의 여기저기 도처에서 용을 보았다. 인생도처 유청산이라더니, 여기 이 책의 도처에 용이 살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부디 용을 보기 바란다, 그래서 그 용이 어떻게 생겼는가,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지를 똑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으로서 소중한 것 - 세상의 중심에서 흔들리는 청춘을 위한 인격론 강의
와타나베 가즈코 지음, 최지운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오늘 당신이 여기 있네요

 

이 책을 읽고, 말 그대로 한 수 배웠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따로 있다.

맞다. 사람으로서 소중한 것이 따로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인격, 사랑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 책의 저자 와타나베 가즈코는 수녀다. 수녀라 하면 마더 테레사, 이해인 수녀님 정도 알고 있었는데, 그 명단에 한 분을 더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마더 테레사의 글은 글쎄, 그분이 쓴 책이 있는지? 읽어본 적이 없고, 이해인 수녀의 글은 시와 수필로 제법 접해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의 경우는 무척 달랐다.

 

읽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인생강의다.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인생강의. 그 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책의 서두에 <수업 전에>라는 글이 있는데마치 내가 그분의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 있는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차분차분하게 강의 수강 시 주의할 점들을 말씀하고 계신다. (저절로 존대어가 나온다.)

 

 

이 수업은 학점을 얻기 위한 수업만은 아니라는 것. (12)

시작과 끝의 예의를 갖추라는 것. (12)

수업이 끝난 후 칠판에 글자가 남아있으면 누구든 지워달라는 것. (13)

수업 중에 잡담은 삼가라는 것. (13-14)

대리 출석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부를텐데, 그 의미는 오늘 당신이 여기 있네요라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라는 것. (19)

 

그러한 주의를 듣고 나니,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되어, 책을 잡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는 난생 처음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읽으면서 곳곳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것도 배웠지만, 다시 듣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가 달리 전달되니, 마음판에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듯했다.

 

인격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그러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 그러니 그러한 인격을 가진 자로서 성장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라는 저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하면서도 울림이 있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렇게 를 이해한 다음에는 타인을 이해하는 단계가 따른다.

그런데 여기, 타인을 이해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노력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마음이, 그럴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런 노력을 세 가지로 말한다.

 

잘 듣는다는 것.

배려한다는 것.

경험을 존중한다는 것.

 

이 세 가지 중에서 특히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세 번째, 타인의 경험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 그런데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 좋아요라고 간단히 결론을 짓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기 아닙니다.>(177)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나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을 타인에게 강요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도 그랬으니 당신도 그럴거야' 라는 생각으로 타인에게 조언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만의 슬픔이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177) 라는 저자의 말에 다시 한번 타인 이해에 대한 생각을 고쳐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마치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저자가 학생들을 호명하는 차례를 경건하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저자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오늘 당신이 여기 있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크 트웨인의 미스터리한 이방인
마크 트웨인 지음, 오경희 옮김 / 책읽는귀족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크 트웨인, 진지함을 가득담은 목소리로 말하다

 

참으로 마크 트웨인답다.

<톰소여의 모험>이라든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책을 통하여 보여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으니, 마크 트웨인답다.

 

미스터리한 이방인을 앞세워, 사람을 조롱하고, 심지어 짐승과 비교하면서까지 인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과연 그답다. 그러니 읽는 내내 시원할 수밖에.

 

사람의 본 모습을 보여주다

 

굳이 이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줄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책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사탄이라는 영적 존재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나는가?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장치와 행복을 느끼는 장치가 결합된 존재>(118)이다. 그래서 행복이란 인간에게 과분한 사치에 불과하다.

 

<온전한 정신과 행복은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조합이라는 것을 여태 모른단 말이야?

말짱한 정신을 가지고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친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미치광이가 행복한 것은 아니야. >(188)

 

그러한 저자의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게 인간인데, 어찌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발언도 들어볼만 하다.

 

<인간이 논리적인 종족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야.>(84)

 

<인간은 양떼 같아서 소수에게 지배당하는 습성이 있어. (중략) 문제는 그 몇 안되는 사람이 옳을 때도 있지만 틀릴 때도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군중들은 옳건 그르건 무조건 그 극소수를 따라가.> (171)

 

짐승과 인간의 차이를 논하다.

 

그렇게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저자는 한 발자국 더 나간다. 바로 인간과 짐승을 비교하는 것이다.

 

여기 작중 인물인 테오도르 피셔 가 사탄이 행한 일에 대하여 짐승 같은 짓이라며 흥분을 참지 못하자, 사탄은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그런 말로 함부로 짐승을 모욕해서는 안 돼. 짐승은 그런 모욕을 당할 이유가 없어.”(81)

 

사탄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짐승은 누군가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야. 따라서 그것은 죄가 아니지.”(81)

 

그러니 저자에게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의 의미

 

저자는 사탄이 인간을 비웃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탄은 진지함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인간들을 신나게 비웃어댔다.”(85)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다. 주어도 사탄에서 저자.

저자는 진지함을 가득담은 목소리로, 인간들을 신나게 비웃어댔다.’

 

그러한 비웃음, 안타깝지만 우리 모두 모두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아픔이나 슬픔 같은 감정은 허술한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153)니까.

 

사족 : 페이지 표식 위치에 관하여

 

꼭 페이지 표시를 그런 식으로 매겨야 하는지?

페이지 표시를 하는 이유는 손으로 책장을 넘겨가면서 바로 페이지를 인식하고 찾으라는 의미일텐데, 이 책은 페이지 표시를 안쪽에다 해 놓았다. 마치 꽁꽁 숨겨놓은 것 같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그래서 페이지 번호를 찾으려면 책을 완전히 펼치고,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니 어느 한 페이지를 찾으려면 불편이 여간 아니다.

왜 그렇게 해 놓았을까 그것이 미스터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주인공의 기억 회수 투쟁에 동참하다

 

범죄추리소설이니, 모든 것을 새겨 읽어야 한다.

저자는 여기 저기, 힌트를 숨겨놓고, 언뜻 지나치면 알아볼 수 없게 해 놓았으니, 잘 살펴 읽을 일이다.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뜻밖에도 아무런 관련이 없을듯 하던 극중 화자가 정작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해결해버린다.

그래서 조금은 밋밋한 구조로 되어 있지만, 끝까지 범인을 알 수 없게 해 놓았기에, 추리소설로서는 아주 제격인 작품이다.

 

등장인물

 

레이첼 왓슨 :

캐시: 레이첼의 친구. 레이첼이 임시로 묵고 있는 집의 주인이기도 하다.

어머니 :레이첼의 어머니

 

메건 : 소설의 도입부에서는 레이첼의 생각 속에서 제스라 불린다.

스콧 : 메건의 남편. 레이첼의 생각속에서 제이슨이라 불린다.

 

애나 왓슨 :

톰 왓슨 : 애나의 남편이며, 레이첼의 전 남편, 에비의 아버지

에비 : 애나와 톰 사이의 딸

 

형사 개스킬 경위, 라일리.

 

추리소설인지라, 차츰차츰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설프게 보이나, 차츰차츰 일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무언가 보일 듯, 보일 듯 해진다.

처음에는 주인공조차 마음에 들지 않더니 차츰 차츰 마음에 들게 된다.

 

처음에는 글의 얼개가 흐릿하게 보이더니, 차츰차츰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레이첼 범인이 아니다 - 에 대하여 생각을 몇 번 고쳐먹었었다.

 

1) 그녀를 경멸하다.

 

이 작품 도입부인 첫 번째 장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남은 감정은 경멸이었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알콜 중독자, 레이첼은 친구인 캐시 집에 얹혀사는 신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친구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아침과 저녁에 기차를 타고 다니며 예전처럼 출퇴근하는 척을 한다. 그 출퇴근 기차길에 기차는 잠간 정지신호를 받고 정차하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녀는 기차 창문으로 옆에 있는 집을 보게 된다. 그래서 부부의 이름을 제시와 제이슨으로 이름을 붙이고....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의 상황이나 행동이 못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왜 그러고 살까? 또 실종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웬 오지랖? 하면서 주인공을 못마땅해 해했었다.

 

2) 그녀를 동정하다

 

그렇게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인가, 내 마음에 약간 변화가 생겼다. 경멸의 마음에서 동정으로 바뀐 것이다.

.

<정말 오랜만에 나의 고통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흥미가 생겼다. 목적이 생겼다. 아니 적어도 정신을 딴 곳에 쏟을 수 있게 되었다.> (128)

 

3) 그녀를 응원하다

 

그리고 연이어서 그녀를 응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를 학수고대 하는 심정이 되었다.

기억을 회수하면서부터 그녀가 기억을 되찾는데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기억의 문제

 

 

어찌 보면, 이 작품은 기억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기억에 관한 통찰력이 뛰어나다.

 

<자기가 한 행동이 기억나지 않으면 그 공백을 채우면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게 되잖아요.>(326)

 

이 한 문장, 기억에 관한 분석중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가 지난 날 뭔가 했는데 흔히 말하길 저질렀다고 하는 경우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 어떤 생각이 들까?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한다. 백번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래서 주인공 레이첼은 그 때문에 고통당한다. 그러나, 저자는 레이첼의 기억을 담보로 하여 이 소설을 풀어나가는 것이니, 그의 기억이 하나씩 회수되어 가면서 이 소설은 활기를 띄게 된다.

 

<기억난다. 그 토요일 밤 난 여기 굴다리 입구에 서 있었고, 애나가 톰의 차에 타는 걸 봤다>.(328)

 

그러나 이 기억은 곧 의문에 부딪힌다.

자기의 기억이 온전할 리가 없다는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억일 리가 없다.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톰은 차를 몰고 다니며 날 찾았고, 애나는 그 차에 함께 타고 있지 않았다. 경찰에게 들은 바로는 그랬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기억이다.>(328)

 

또 하나 기억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자리에 아이 에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나를 내버려두고 떠나서 차에 탈 때 아기를 안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에비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 (364)

 

이런 기억의 회수 투쟁에 주인공 레이첼과 함께 하는 것, 이 책 읽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