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
고토 히데키 지음, 허태성 옮김 / 부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士’라고 쓰면 보통 우리는 글 읽는 선비, 즉 ‘문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일본은 ‘士’를 보통 ‘무사’라고 받아들인다. 사실 무사도 ‘士’이다. 문반, 무반 합쳐서 양반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士는 문사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문사는 아무래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에 치우치기 쉽다. 반면 무사는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문사는 방안에서 글을 읽지만 무사는 전장에서 적과 마주친다. 글을 읽다가 죽는 일은 흔치 않지만 적과 싸우다가 죽기는 쉽다. 우리는 문사 우위의 사회였고 일본은 무사 우위의 사회였다. 결국 이러한 차이가 양국이 근대 서양과학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도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부터 시작한다. 유키치하면 보통 일본의 계몽사상가이며 1만 엔권 지폐에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키치 역시 하급 무사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1858년 네덜란드 학문을 배우는 난학숙蘭學塾을 세웠으며 이는 이후 명문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學이 된다.


1868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훈몽궁리도해訓蒙窮理圖解>, 요즘 말로 하면 ‘도해 물리 입문’이라 할 만한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궁리열窮理熱’이라 불리는 출판 붐을 일으켰고 이후 수십 권의 물리 입문서가 잇따랐다. (20 페이지)

  일본은 유사 이래로 모든 것을 중국에서 배웠다. 그러한 대국 중국이 아편 전쟁으로 영국에 유린당하자 유키치는 물론이거니와 마쓰시로松代의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조슈長州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도사士佐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한학은 사상성에서는 뛰어나지만 새 시대의 역할을 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한시라도 빨리 사이언스(물리 등 실학)를 배워 일본도 서양의 군함인 흑선黑船을 가져야만 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개화파가 근대화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파 김옥균 등을 게이오 의숙에 받아들었다[원문 오타].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쿠데타 갑신정변은 청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인이 학살되고 제자도 무참하게 처형된 사실에 유키치는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태도를 바꾸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했다. 아시아 동포를 도울 여유 따위는 일본에 없다, 그들을 동포로 생각할 게 아니라 서양 열강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일본도 제국 열강의 식민지 쟁탈에 나서지 않으면 자신들이 제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일본 국내외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일본을 둘러싼 현실에 직면하여 휴머니스트인 유키치는 이상주의자이기보다는 현실주의자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 그 때문에 무장을 뒷받침하는 물리학이 필요했다. 유키치가 물리에 주목한 데에는 그러한 불가피한 사정도 있었다. (21 페이지)


유키치가 물리를 공부하고 책을 펴낸 동기가 인상 깊다. 자연에 대한 이치 탐구가 아니라 부국강병, 무엇보다도 강병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했다는 변명.) 결국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현대물리학의 태동기부터 그 발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책에 나오는 초창기의 일본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야마카와 겐지로山川健次郞: 1871년 예일대학에 입학, 3년간 물리학을 배운 후 이학사가 되어 귀국. 도쿄 대학에서 가르치며 물리학에서 첫 번째 일본인 교수가 됨. 일본 최초로 방전 램프와 뢴트겐 선 실험.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郞: 오스트리아 빈 대학 볼츠만 교수 연구실로 유학. 1904년[Wikipedia에는 1901년으로 나옴] 귀국해 도쿄 대학에서 원자 물리학 연구. 우리가 보통 러더포드 모형이라고 알고 있는 원자 모형을 나가오카가 먼저 주장했다고 나온다(‘나가오카의 토성 모델’). 러더퍼드는 토성 모델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나가오카 한타로의 제자. 1921년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의 지도로 실험물리학 공부. 2년 후 러더퍼드의 제자인 덴마크의 보어에게로 가 6년간 양자역학 공부. 이화학연구소 최연소 정규 연구원. 1937년 일본 최초로 입자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 완성.


그 이후 세대는 우리가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郞,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등이 나온다. 도모나가는 1938년부터 하이젠베르크 밑에서 2년간 유학을 했다. 


일본 물리학자들이 유학해서 배운 학자들의 이름이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어땠나 찾아보니 연희전문에 수물과가 생긴 것이 1915년 4월이고 1919년에 최초로 4명이 졸업했다고 한다[1]. 이중 이원철은 192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26년 미시간 대학에서 천문학 전공으로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된다. 일제시대에 이공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10여 명 밖에 안 된다는데, 이중 물리학과 천문학 분야는 단 4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는 평양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미국 퍼듀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조응천, 연희전문 수물과를 1926년 졸업하고 1932년(1933년?) 미시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가 된 최규남, 연희전문 수물과를 1930년 졸업하고 1940년 교토 제국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박철재가 있다. 경성 제국대학은 1924년 설립되었는데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있다가, 중국과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1938년 이공학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교수진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우리가 처음 서양물리학을 받아들인 시기가 일본과 약 50년이 차이 나고 연희전문에 수물과가 생긴 이후 식민지배가 끝날 때까지 또 30년이니, 제대로 된 물리학의 시작이 일본보다 약 80년은 뒤처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은 1949년에 유카와가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그렇게 보면 우리가 아직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것이 이상하지 않다. 


책에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넘쳐난다. 일본인들은 정말 자신들이 ‘아시아의 유럽’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배에 나선 과거 때문에 경계심과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일본 역사와 버무려져서 워낙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앞에서 나온 인물들을 자꾸 잊어 버리게 된다(그래서 책 뒤에는 간단한 인명사전도 있다). 


우리 물리학도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적어도 발전이 30년은 당겨지지 않았을까. 다른 과학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까지 있었으니 우리 과학기술계가 제대로 된 고민과 발전을 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봐야 60년 정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이제 이만큼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과학기술도 적어도 겉으로는 외국에서 무시 못할 정도는 됐으니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겠지만…


재미있는, 하지만 현실적인, 교수 유형 구분이 나오는데 방목형과 군대형이 그것이다(79~80 페이지). 뜻은 말 그대로다. 야마카와 겐지로, 유카와 히데키, 난부 요이치로南部陽一郞는 방목형 교수였고, 나가오카 한타로,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군대형 교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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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201205N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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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8 1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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