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사 2 - 전세 역전 2차 세계대전사 2
제러드 L. 와인버그 지음, 홍희범 옮김 / 길찾기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인 1942년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라고 보통 불린다. 무적의 추축군 군대가 1942년부터 결정적 패배를 당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1942년 6월, 태평양의 미드웨이에서 항공모함 4척을 잃는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압도적 전력으로 미국 함대와 결전을 벌여 섬멸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공격을 시작했던 전투에서 반대로 일본 해군이 결정적 패배를 당했던 것이다. 태평양에서의 전체 해군 전력에서 큰 열세였던 미국 해군이 승리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얘기된다. 첫 번째는 미국 해군이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 해군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일본 해군이 압도적인 전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분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갔고, 양쪽 병사들(특히 조종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운과 지도력, 결단력의 차이로 인해 승리는 결국 미국에게 돌아갔다. 


이 미드웨이에서의 패배 이후 일본 해군은 사실상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물론 여전히 치명적이었지만 결코 진주만에서의 위용을 회복하지 못했다. 특히, 우수한 조종사의 상실과 상실된 조종사를 대체할 양성 시스템의 문제가 큰 이유로 지적된다. 조종사와 같은 전문 인력은 단기간에 양성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현대에도 피격 후 탈출한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한 전문 부대가 존재한다.


미드웨이에서의 패배 이후 일본이 상처를 곱씹고 있을 때, 미국이 생각보다 빨리 공세에 나선다.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에서의 전투가 그것이다. 1942년 8월, 미국은 해병대를 보내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이 완성하고 있던 비행장을 점령한다. 이후 연말까지 빼앗긴 비행장을 다시 빼앗으려는 일본군과 이를 지키려는 미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섬에서의 전투 뿐만 아니라 섬을 둘러싼 바다에서도 양국군은 피로 값을 치렀다. 이 과달카날 전투가 배경인 영화가 <The Thin Red Line>이다. 과달카날 섬과 플로리다 섬 사이의 바다에서는 너무나 많은 군함이 침몰하여 해협 이름이 "Iron Botton Sound"로 바뀌었다. 


<2차 세계대전사>의 2권에서 와인버그는 상당히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은 전력을 축차투입하여 결국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고 패배했지만, 일본군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와인버그는 지적한다.

  미국은 영국과 미국 본토에 독일과의 전쟁을 위한 전력을 축적해 왔다. 유럽 우선 전략을 채택하면서 미국은 남태평양 지역에 소수의 증원병력을 꾸준히 투입해 최악의 상황을 막고 손실을 메우는 한편으로 일본군을 밀어내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수뇌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일단 1942년 8월 하순에 전쟁의 기본 윤곽이 짜이자 일본은 9월 초에 이르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로 일본은 과달카날을 포기하고 대신에 뉴기니, 혹은 더 희망적으로 보이는 인도양 등으로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당시의 미국은 선택하기 힘든 방안으로, 대규모 증원병력을 투입해 솔로몬 제도의 미군을 궤멸시킬 충분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일본 해군 전력의 대부분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육군 병력도 다른 곳에서 공세를 벌일 예정이 없었던 만큼 이 방안은 충분히 현실적이었다. 세 번째 -그리고 실제로 채택된- 방안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불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축차투입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는 일본이 미국을 압도할 전력을 현지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이 가운데 일부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은 이런 전략을 채택한 결과 수만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항공기 및 숙련된 항공기 승무원들, 그리고 수많은 함정을 상실했으며, 그동안 유지하던 전략적 주도권마저 1942년 하반기에 전부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인도양으로 진출해 독일군과 연결할 수 있는 기회는 쓰이지도 않은 채 사라져 버렸다. 일본과 독일 모두 그 기회가 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결국 떠난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43~44 페이지)

  ...폰 리벤트로프 뿐만 아니라 히틀러도 도쿄 측에 1942년 6월 하순부터 동부전선에서 하계 공세가 시작되면 일본도 만주로부터 소련을 공격해 양측이 중앙아시아에서 합류하자고 제의했다... 일본은 이미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공격하기 전에 소련의 중립을 보장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일본은 여전히 강력한 이웃나라를 자극할 의향이 없었고, 특히 미국과 힘겨운 장기전을 벌이게 된 상황에서 적을 늘릴 의향은 더욱 없었다.

  ...사실 1942년 당시 일본에 대한 독일의 핵심적 요구는 여름에 요청했던 소련 공격이 아닌 그 해 내내 요구한 인도양 방면의 대규모 공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양 방면의 공세는 일본에게는 결정적인 기회, 연합군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위기였다... 만약 공세가 시작된다면 이란으로 통하는 연합군의 대소련 보급로와 함께 영국의 북아프리카 전선 전체에 대한 보급까지 차단하는 막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1942년에 개최된 독일과 일본과의 대표회담에서는 언제나 이 주제가 빠지지 않았다(연합군 암호해독가들도 보고문 감청을 통해 내용을 알고 있었다). 1942년 여름이 되자 인도양 공략의 실천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먼저 일본 자신이 이 문제를 더 진지하게 검토했다. 영국의 마다가스카르 섬 공격으로 이 지역에 대한 연합군의 주목도를 파악할 수 있었고, 여기에 더해 독일의 거듭된 요구가 주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군 고위층의 시각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일본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1942년 6월에 북아프리카에서 거둔 독일의 승리였다. 이후에 다루겠지만, 이 극적인 승리는 독일과 일본에 범세계적인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넓은 시각을 열어주었다. 이제 독일과 일본에게는 단순한 협력을 넘어 양측의 군대가 직접 연결되어야 할 이유가 생겼고, 일본은 1942년 초까지 유지하던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일본은 상당수의 잠수함을 인도양 서부로 파견해 이집트로 향하는 영국의 보급 항로(이곳을 공격하면 인도-버마 전선으로 향하는 보급물자와 소련으로 향하는 물자도 차단할 수 있었다)를 차단하려 했다. 그리고 일본은 그 해 가을에 인도양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겠다고 약속했다. (45~46페이지)

  이런 상황를 감안하면 솔로몬 제도는 매우 중요했다. 일본은 가용전력으로 과달카날의 미군을 몰아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을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결국 일본은 독일에 약속한 인도양 전략을 실천할 수 없는 소모전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인도양에 파견한 잠수함 전력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대부분을 남태평양에 투입하기 위해 귀환시켰다.

  당시(일부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과달카날의 길고 힘겨운 싸움을 유럽 우선 전략이 방해받은 사례로 생각했지만, 이 전투는 유럽 전선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영국군은 지중해 전선에서 몇 달에 걸친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곳의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로 접근하는 독일-이탈리아 동맹군을 저지하며 재편성과 재무장을 하기 위해 인도양으로 거쳐 오는 물자를 필요로 했다. 소련군 역시 캅카스를 거쳐 중동으로 진입하려는 독일군을 저지하려면 인도양을 통해 이란을 거쳐 들어오는 물자가 절실했다. 1942년 10월이 2차 세계대전 중 이란을 경유한 미국의 원조물자 대부분이 소련으로 전달된 두 달 가운데 한 달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이 과달카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할 시점에서 북아프리카와 소련 남부 전선 모두의 상황이 역전되었다. 솔로몬 제도에서의 전투에 집중하며 인도양 공격 기회를 허비한 일본의 결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독일과 일본은 여전히 미래의 승리를 기대하며 각각 소련과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논할 수 있었지만, 두 나라의 군대가 실제로 힘을 합쳐 승리를 얻으려면 중동과 인도양에서 만나야 했고 일본은 미드웨이와 솔로몬에서의 패배로, 독일은 북아프리카와 소련 남부에서의 패배로 그 가능성이 사라진 뒤였다. (46페이지)


와인버그가 상상한 가능성-'인도양 방면의 대규모 공세'-가 얼마나 실현 가능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실현됐다면 연합군에게는 커다란 악몽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일본군 수뇌부가 과연 과달카날을 포기하면서까지 인도양에서 공세를 벌일 식견이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보다는 왜 일본은 압도적인 전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지 못하고 축차투입하는 길을 걸었는지가 더 현실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일본 해군과 육군간 소통의 문제로 귀결된다. 일본 해군은 육군에게 미드웨이 해전 패배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허심탄회하게 육군의 도움을 구하지도 못했다. 어느 나라 군이나 육군과 해군 사이의 알력은 있으나 당시의 일본군은 정도가 심했다. 한편, 해군 수뇌부는 과달카날의 전략적 중요성을 바로 깨닫지 못했기에 축차투입으로 전력만 소모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차라리 미드웨이에서 도박하는 것보다는 과달카날에서 도박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거창하게 계획하여 벌인 미드웨이 공세에서의 패배 이후에 야마모토는 마음이 약해졌던 것일까. 그것보다도, 불충분한 전력으로라도 공세를 벌이고 버텨낸 미군에게 박수를 쳐야 할 것 같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까. 내가 그 자리에 간다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결론을 아는 우리는 전지적 시점으로 역사를 읽지만... 일요일 저녁이 이렇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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