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합숙의 제일 큰 목적은 작품 촬영이라기보다 남녀 간의 교류, 즉 동아리 내부 미팅이죠. (중략). 다만 방이 모자라서 부원이 전부 참가할 수는 없나 보더라고요. (중략). 그런 이벤트에 불청객을 끼워줄 여유는 없다는 뜻이에요." - P36

"하지만 최근에 상황이 달라졌어요."
(중략).
"합숙 이 주 전에 참가하기로 했던 부원 대부분이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실은 이 이야기를 해준 제 친구도 그중 하나예요." - P36

"협박장이 왔대요."
뜸을 들이듯이 겐자키 씨가 컵에 입을 댔다. - P37

"예, 자살 동기와 합숙의 인과관계는 불명확하지만 몇몇부원의 증언에 따르면 작년에 촬영한 심령 영상에 사람 얼굴이 찍혔는데, 영연이 연출한 건 아니라나."
"그러니까 지벌이나 저주를 받아서 그랬다고요?" - P38

"예. 신도 씨가 협박장을 보자마자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그쳤대요. (중략). 그의 태도가 어쩐지 찜찜해서 친구는 숨겨서는 안될 일이라고 판단했어요. (중략). 그래서 눈덩이가 커지듯이 참가를 취소하는 부원이 늘어난 거고요." - P39

"미팅을 주선하겠다는 명분으로 졸업생에게 초대를 받았을 텐데 여자 참가자가 없으면 말이 안 되니까 신도 씨도 고심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랑 같이 참가하지 않으시겠어요?" - P40

"잠깐만요. 아까 거래라고 하셨죠? 이래서는 저희만 득을보는데요. 애당초 왜 저희한테 이런 이야기를 꺼내신 건가요?"
그때 살짝 벌어진 겐자키 씨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 같은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중략).
"이유를 묻지 말 것. 그게 이번 거래의 교환 조건이에요." - P41

002


자담장

1

(전략).
산속의 폐업한 호텔, 방치된 지 이십 년 가까이 지났고 주변에 다른 건물도 없으므로 이제 이 지역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걸음하지 않는다. - P43

약 이십여 년에 걸친 하마사카의 연구 인생. 그 모든 것을바친 대학 연구실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중략).
하마사카에게 남은 사명은 단 하나, 이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것뿐이다. - P44

잘 봐라! 어제 우리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 테니까!"
세상을 구하는 전사라도 된 기분일까. 하마사카는 싸늘한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본에서 입학 커트라인이 제일 높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사했다. - P45

2


합숙 당일.
아케치 씨와 나, 그리고 겐자키 씨는 이른 아침에 학교 근처 역에서 만나 전철을 탔다.
합숙 장소인 펜션은 S현 사베아 호수 근처에 있으므로 참가자들은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집합하기로 했다. - P46

언어나 사건은 딱히 걱정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꺼림칙한 협박장보다 조증에 걸린 것처럼 들뜬 아케치 씨를 다른 젊은이들 사이에 섞어놓는 게 제일 걱정이다. - P47

"그건 그렇고 펜션을 대여해주다니 영연에는 배포가 큰 졸업생이 있나 보네요."
내 물음에 겐자키 씨가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지만 부모님이 영상 제작 회사 사장님이라나 봐."
겐자키 씨는 이제 내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친근한 말투로대한다. - P48

문득 겐자키 씨가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는 바로 알았다. 내 왼쪽 관자놀이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사오 센티미터쯤 찢어진 상처라 꽤 눈에 띈다. 머리카락으로 덮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서 눈에 들어온 거겠지. - P49

3

"겐자키 히루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드디어 기억이 났어. 예전에 경찰서에 명함을 돌리러 갔는데 내가 신코 대학에 다니는 걸 알고 어떤 형사님이 그 이름을 꺼내더라고. 빼어난 추리력을 발휘해 경찰조차 애를 먹은 갖가지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로 이끈 소녀 탐정이라는군." - P51

"나도 흥미가 생겨서 다누마 씨에게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 본가는 요코하마에서 유서가 깊은 명문가인가 봐. 그 사람이 사건에 관여할 때마다 보도가 엄중히 제한된대. 가문에 먹칠을 하는 짓이다, 그건가." - P51

하지만 기묘한 이야기다. 그 정도 실력과 실적을 가진 그녀가 왜 일개 대학교 동아리에서 벌어진 협박장 소동에 일일이 흥미를 보일까. - P52

4

환승역에서 일찌감치 점심을 먹은 후 JR에서 민영 전철로 갈아타고 삼십 분을 더 갔다.  - P51

"오오, 신도, 이번에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상대는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이 영화 연구부 부장 신도인가. (중략).
"이런 예외를 허용하면 안 되지만, 겐자키 씨의 제안도 있고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뭐, 즐겁게 지내다 가자."
말투를 들어보니 너 따위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본심인 듯했다 - P54

이어서 우리도 자기소개를 했다. 겐자키 씨가 이름을 말하자신도가 머리를 숙였다.
(중략).
아케치 씨를 대할 때와는 태도가 매우 다르다. 신도가 한학년 위인데도 존댓말을 쓴다. 고분고분한 그 태도를 겐자키씨는 물 흐르듯이 받아넘겼다.
"아니요, 저도 흥미가 있어서요." - P55

"안녕하세요, 신코 대학에서 오셨죠? 저는 펜션을 관리하는 간노 유이토라고 합니다."
"......작년에 일하던 분은 그만두셨습니까?"
신도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예. 저는 작년 십일월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다른 분들은다 타셨습니다."
간노는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슬라이드도어를 열어주었다. - P56

(전략). 그런데 먼저 온 참가자들은 두 명이 마지막 줄에 자리를 잡고 한 명이 조수석에앉아 있었다. 마치 반발하는 자석처럼 가장 멀리 떨어진 좌석에 나누어 앉다니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신도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없이 둘째 줄에 올라탔다. - P57

"평소에도 이렇게 차가 밀립니까?"
신도가 묻자 간노는 백미러로 시선을 보냈다.
"아니요, 평소에는 텅 비어 있어요. 다만 오늘과 내일은 근처 자연공원에서 야외 이벤트가 열리나 보더라고요."
(중략).
"사베아 록 페스티벌,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아까 찾아보니까 꽤 유명한 밴드도 참가하는가 봐. 그렇지, 미후유?" - P59

"다카기 씨는 작년에도 합숙에 참가하셨나요?"
(중략).
"이 년 연속 참가하는 사람은 나랑 개뿐이야." - P59

내용을 확인하자 2박 3일의 일정 외에 펜션에서 각자가 묵을 방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략).
재학생 참가자는 영화 연구부와 연극부, 불청객인 우리를 포함해 총 열 명. 방 배치에 공백이 눈에 띈다. 2층과 3층에 객실이 합쳐서 열여섯 개지만, 방 여섯 개에는 이름이 씌어 있지 않다. - P60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호시카와를 제외한 나머지여학생들은 조금도 들뜬 모습을 보이지 않아, 갈 곳을 잃은남자들의 목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채웠다. - P61

간노가 차를 느릿느릿 몰면서 즐겁게 말했다.
"그럼 저희 펜션이 마음에 드실지도 모르겠네요."
(중략).
"아니요. 그런 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취미로수집하신 외국의 무기를 펜션에 잔뜩 장식해두셨어요. 검이나창 같은 걸 으리으리하게요.
" - P63

언덕을 금방 다 올라 탁 트인 장소가 나오자 방금 전에 본지붕이 달린 펜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중략).
"뭐랄까..…………. 훌륭한 건물이네요. 좀더 규모가 작지 않을까 상상했는데요."
시골의 초등학교 크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 P65

"빨간색 GT-R이라. 숲속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머신이로군.‘
"가네미쓰 씨 차입니다. 이 펜션 주인의 아드님이에요." 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치스럽죠?"
천만 엔은 됨직한 고급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 P66

남자는 입을 열자마자 집요하게 트집 잡는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잖아. 아침부터 여자애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뚱땡이가 먼저 도착해서 토할 뻔했다고." - P67

"적당히 해, 데메. 우리가 다 부끄럽다."
충고한 사람은 피부가 볕에 잘 그을린 남자였다. - P67

"신코 대학교 후배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 우리는 영연 선배는 아니지만 신코 대학교 졸업생이고 여기 앉은 나나미야의 친구야. (중략). 나는 다쓰나미 하루야라고 해. 저 시끄러운 녀석은 데메 도비오."
웬걸, 데메라는 물고기상 남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 P68

"저 사람이 이곳 주인의 아들이로군."
"응. 삼사 년 전에 졸업한 영연 선배야. 지금도 후배들에게 무료로 펜션을 제공해주니까 아량이 넓지. 데메 씨도 태도가 저래서 오해받기 십상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마음에 둘것 없어."
신도는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빠른 말투로 해명했지만, 여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 P69

"배정된 방 중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방에는 그 사람들이묵고 있다는 뜻이군요."
우리 열 명이 묵을 방말고 숙박자의 이름이 비어 있는 방이 여섯 개 있다. 그중 세 개를 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P70

간노가 프런트의 자물쇠를 열고 카드 다발을 꺼내 왔다.
"방의 카드키를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중략). 오토록이니까 외출하실 때는 방에 놔두고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프런트에 맡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략)." - P71

"저쪽 엘리베이터는 작아서 기껏해야 네 명 정도밖에 못랍니다. 모두가 한꺼번에 올라가기는 어려우니 계단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71

(전략), 나는 여자 참가자들이 전부 미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미인밖에 못 본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 P73

문이 바깥쪽, 즉 복도 쪽으로 열려서 의외였다. 지금까지묵었던 비즈니스호텔은 대부분 안쪽으로 열렸던 것 같다. (중략).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자 자동으로 자물쇠가 철컥 잠기는소리가 났다. (중략).
카드키를 벽의 홀더에 꽂아야 실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것은 비즈니스호텔과 똑같다. - P74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보자 오른쪽에 각 방이 비스듬히 배치된 건물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집합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나는 펜션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 P75

엘리베이터 홀에는 객실말고도 문이 두 개 더 있었다. 문에 끼워진 명판에는 창고와 리넨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 호텔이나 병원 등에서 침구, 시트, 타월 등 섬유 제품을 보관하는 방. - P76

"이야. 병아리 탐정님이네. 나는 사회학부 3학년 구다마쓰다카코야.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자위대 대원처럼 이마에 손을 갖다 붙였다.
오랜만에 밝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 P77

"경쟁자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중략).
"그 사람 집이 유명한 영상 제작 회사를 하거든. 그래서 그 사람한테 잘 보이면 직장을 소개해주기도 한대."
연줄로 취직자리를 얻을 생각인가. 말은 쉽지만 정말로 그에게 그런 권력이 있을까. - P78

"완전히 헛소문은 아니야. 실제로 작년에도 그 회사에 취직한 사람이 있다고. 펜션을 멋대로 사용하게 해주는 걸 보면 부모도 아들 하면 껌뻑 죽는 팔불출 아니겠어?" - P78

"방금 경쟁자 아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구다마쓰 씨말고도 연줄로 취직하려는 사람이 또 있는 거죠?"
그러자 구다마쓰는 아아, 하고 업신여기는 듯한 시선을 홀구석으로 던졌다.
"쟤야 쟤. 부, 장."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문 하나를 가리켰다. 신도 방이다. - P79

나는 중앙 구역으로 되돌아와서 2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간노 말대로 상당히 비좁았다. (중략). 즉 합쳐서 260킬로그램. 성인 남성이 짐을 들고 타면 세 명이라도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 P80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사장님은 중세 전투를 아주 좋아하시나보더라고요."
늘어놓은 무기들을 보니 확실히 장식성을 중시했다기보다개인적인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 같았다. - P82

나는 신경쓰이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간노 씨, 자담장은 펜션치고는 좀 색다르네요. 용도가 불분명한 문도 있고, 방이 넓은데도 전부 싱글룸이고요. 종업원도 간노 씨 한 명뿐이잖아요." - P83

"저렇게 기분 나쁜 사람들이랑 사흘이나 같이 지내야 한다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부 아유무 책임이야." - P84

기분 나쁜 사람들이 졸업생 일행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역시 여자 참가자들은 졸업생들에 대한 첫인상이 아주 안좋았던 모양이다.
한편 신도는 변함없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어물어물대꾸했다. - P85

아케치 씨가 신도에게 물었다.
"요 부근에서 촬영할 거야?"
"아니, 촬영 장소는 폐업한 호텔이야. 차로 조금만 가면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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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 회화에서 캔버스는 평평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어떤 ‘공간‘이 보입니다. 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공간을 ‘환영illusion‘이라고 보고, 환영을 제거해 ‘평면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해야 장르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 P22

그림 밖으로 나와 사물이 된 미술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평면성이라는 모더니즘의 원리가 사각형의 캔버스 틀 안에서는 끝내 해결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환영마저도 없애려고 했던 시도가 바로 미니멀리즘입니다 - P26

도널드 저드는 통째로 된하나의 유일한 사물을 전시함으로써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해체하고 환영을 제거합니다. 그는 작품 <무제>에서 상자 모양의 단위체들을 층층이 쌓아 올렸는데, 사이의 움푹 빈 공간은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을 반영합니다.  - P27

또 다른 미니멀리즘 작가인 칼 안드레Carl Andre는 여러 장의 벽돌을 바닥에 깔아놓는 ‘바닥 조각‘을 선보였습니다. 그가 만든 시리즈는 〈등가〉 조각으로 불렸는데요, 그 이유는 높이, 질량, 부피가 모두 같은 ‘등가‘이기 때문입니다. - P27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이처럼 표준화된 산업 자재를 사용해 이것들을 ‘배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줃략). 솔 르윗Sol LeWitt 또한 ‘정육면체를 사용해 반복성과 연속성을 만들어 내는데요, 반복적인 형태들은 끝이 보임에도 그 구조가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느껴집니다. - P30

미니멀리즘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작가가 작품의 중요 요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작품을 만드는 주체가 중요하지 않다니, 의아할 수 있어요. - P30

관람자의 지각과 체험이 중요해진 이유

미니멀리즘을 첫 번째 키워드로 꼽은 이유는 미니멀리즘이 요즘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니멀리즘은 ‘관람객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P34

미니멀리즘 작가들 중에서도 지각의 차원을 강조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전시장에 다면체를 놓아두었습니다. - P34

그런데 모더니즘 비평가인 마이클 프리드 Michael Fried는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이 무대 위의 배우 같다는 점에서 ‘연극성theatricality‘을 지닌다고 비판했습니다. - P35

 프리드가 보기에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의 미술 원리에서 이탈한 ‘퇴보적‘ 미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마이클 프리드의 분석은 비판이라기보다는 미니멀리즘의 특성을 잘 설명한 글로 읽힙니다. - P35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도널드 저드마저도 자신의 작품이 미니멀 아트로 규정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하죠.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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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은 총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모아 놓은책이다. 이 책은 저마다 다른 주제와 소재, 그리고 문체와 서술 기법들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 P323

 그는 서구 문학에서 별로 다루어지지도 않고 크게 알려지지도 않았던 이 도시를 처음으로 알린다는 데에 큰 자부심을 느꼈던 듯하다. - P323

조이스에게 더블린은 대체로 밝고 활발하고 건전하기보다는 어둡고 무기력하고 타락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조이스가 『더블린 사람들』에서 다룬 삶의 양상이 비교적 부정적인 쪽에 치우쳐 있고, 또한 이를 표현하는 데 걸맞게 언뜻 구질구질하거나 상스럽게 비칠 만한 언어를 구사했다는 것은처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로 대두했다. - P324

그럼에도 출판사 측의 압박이 계속되자, 이에 맞서 조이스는 이렇게 소신을 밝혔다.


내가 양보하지 않은 사항들이야말로 바로 책을 단단히 응집시키는 사항들입니다. 내가 그 사항들을 견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내 도덕사의 장을 내가 쓴 방식 그대로 씀으로써 우리나라의 정신적 해방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P325

작가적 소신이 담긴 위의 진술들에는 『더블린 사람들』의 주요한 문학적 요소들, 즉 소재, 주제, 구조, 분위기 및 문체 따위에 대한 그의 철저한 구상이 담겨 있다. - P325

1. ‘마비‘라는 주제

(전략).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당시 아일랜드는 수백 년에 걸친 영국의 제국주의적 압박과 이와 관련한 정치적 부패, 그리고 감자 기근 등으로 인한 경제적 빈곤과 이로 인한 미국 등지로의 이민 물결이라는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일랜드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야 할 가톨릭교회는 올바른 가치관의 지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와 세태 영합의 모습을 보이기도했다. - P328

아닌 게 아니라, 『더블린 사람들』에 등장하는 많은 작중인물들은 이렇게 빈곤과 무지와 환상과 이기심에 의해 고정된 자리에 갇혀 지낸다.  - P328

(전략), 설혹 현실 타개의 엄두를 낸다 하더라도 판단력과 의지 부족으로 말미암아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패배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 P329

청년기에 해당하는 네 작품은 경제적, 사회적인 신분 상승의 꿈이 허망하게 좌절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P330

「경주가 끝난 후」와 「두 건달」은 자신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는 친구에게 아부하며 기생하다시피 하는 종속적인 관계를 통해 이득을 꾀하려는 청년들의 속물성과 허영심을 다룬다.  - P331

(전략), 후자에서 레너헌은 그의롤 모델인 콜리에게 빌붙는 자신의 비굴한 태도와 황새를 따르려는 뱁새 꼴에 불과한 자신의 실제 처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둘 다 마지막에 참담한 패배감과 자기모멸감 속에서 후회할 수밖에 없다.  - P331

「담쟁이 날의 위원회실」에서는 시의원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위원회실에 모인 사람들의 불성실하고 야비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중략). 과거의 추억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 그리고 타락과 배신이 지배하는 위원회실의 분위기는 파넬이 죽은 후 아일랜드 정치가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음을 잘 나타낸다. - P334

「은총」에서는 술 마시고 넘어지는 봉변을 통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신이 추락한 상태임을 여실히 보여 주는 커넌이라는 인물을 구제하기 위해 주변 친구들이 공모하여 그를 피정에 데려가고 거기서 퍼든 신부의 설교를 듣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부의 설교는 하느님과 함께 돈을 섬기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 - P335

여기까지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단편 열다섯 편을 ‘마비‘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양한 인물형들의 다양한 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전반적으로 갑갑하고 어두운 색채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마비라는 한마디 단어만으로이 책에 그려진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 전체를 단순화한다면 과연 온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을까? - P337

 마비라는 단어가 조이스 자신이 이 책에 대해서 사용한말이고 또 실제로 이 책 도처에 마비의 증상이 짙게 감지된다는 점은 물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마비의 증상에 대해서 조이스가 그만큼 안타까워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 P338

2 꼼꼼한 비속의 문체

(전략). 그런데 조이스 학자들의 입에 ‘마비‘에 버금가게 자주 회자되는 이 어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종종 엇갈린다. - P338

꼼꼼한 문체는 조이스의 철저한 자연주의적 작품을 나타낸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읽어 본 사람은 더블린을 직접 가보지 않아도 더블린 시가를 머릿속에 훤히 재현해 낼 수 있을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더블린 사람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 P339

그러나 조이스는 자연주의적 수법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라는 사조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담는다 - P340

 즉 어떤 사물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 안에 내재해 있는 특수한 성질이나 본질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듯이 강렬한 인상을 통해 드러나게끔 하는 것이다. - P340

그러나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드러내고 보여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특히 끝부분에서 점강법, 불완전, 감추기를 보여 주기도 한다. - P341

사물의 절대적인 객관성에 대한회의에서 출발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다각적인 시각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피퍼니도 그러한 착상의 산물이거니와, 조이스는 작중인물과 독자에게 공히 사물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시각보다는 상대적인 시각에 비중을 두도록 했다. - P342

3 네 양상의 구조

조이스가 더블린 사람들의 생활 양상을 최대한 폭넓게 재현하고자 한 노력은 그것을 유년기, 청년기, 성년기, 공공 생활의 네 단계로 나누어 다룬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 P342

『더블린 사람들』을 형식과 구조의 측면에서 상호 관련성없이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들의 부조화적인 묶음으로 봐서는 곤란할 것이다. 조이스는 그가 양보하지 않은 사항들을 견지하려고 애쓴 이유가 그것이 바로 "책을 단단히 응집시키는 사항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P343

이런 견지에서 전체 이야기들의 구조를 꼼꼼하게 비교·분석해 보면 놀랍게도 그것들 사이에 내용상 서로 관련을 이루는 일정한 패턴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P344

이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이스는 대칭, 평행, 대조 등의 형태적 패턴을 바탕으로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이야기들 사이에 표면에 드러나는 것보다 밀접한 상관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 P344

번역 대본으로는 국제적인 제임스 조이스 학술지인 《제임스 조이스 쿼털리 (James Joyce Quarterly)》가 표준판으로 정한책 (Dubliners: Text, Criticism, and Notes, ed. Robert Scholes and A.Walton Litz. New York: Viking Press, 1969)을 사용했다. - P345

가령 딱딱한 한자어보다는 순 우리말을 선택하되, 원본의 어휘가 라틴어 어간을 지니고 있고, 문맥상 그 말에 무게를 실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한자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 P345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안내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이상옥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역자의 게으름 탓으로 번역이 지연되는데도 참고 기다려 준 민음사, 그리고 편집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편집부에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이 번역은 2008년도 세종대학교 교내 연구비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다.


2012년 12월
이종일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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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요즘 미술이 어려운 진짜 이유

(전략). 특히 현대미술 작품을 볼 때 ‘저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으시죠? - P5

먼저 ‘요즘 미술‘이라고 불리는 ‘현대미술‘의 뜻부터 짚어보려합니다. 현대미술은 말 그대로 현대에 나타난 미술을 뜻합니다. (중략). 현대미술 이전은 ‘근대미술, 그리고 현대미술을 거쳐 1989년 이후로는 ‘동시대 미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P6

하지만 현대미술은 평상시에 우리가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재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각적으로 익숙한 형상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죠. - P6

현대미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추상‘도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했습니다. 추상이 어렵게 느껴지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단순하게는 대상에서 어떤 ‘본질‘을 뽑아내는 일이라고 이해하면 조금 쉬울 것 같아요. - P7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졌다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어도작품 앞에서의 당혹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가령 현대미술에서는 묘사 능력보다 아이디어가 좋은 작품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거나, 뛰어난 퍼포먼스와 뛰어난 회화 작품의 평가 기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으면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됩니다. - P8

현대미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작가들이 선배 예술가의 작품을 ‘참조‘하는 경향이 짙다는 데에 있습니다. - P8

예술 작품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이성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 미술 작품에 대한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 P9

지금까지 나온 분석들은 미술 전공자가 순수미술의 관점에서서술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P10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될 거예요. 나만의 미술 취향을 갖게 되는 건 덤일 테고요.

2023년 4월
정서연 - P11

KEYWORD

01

미니멀리즘

MINIMALISM

사물을 배열했을 뿐인데 왜 예술이지? - P16

현대미술의 분기점, 미니멀리즘

(전략).

그 이유는 미니멀리즘이 현대미술 중에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 걸쳐 있어서 ‘요즘 미술‘을 파악하는 분기점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P17

먼저 미니멀리즘은 인테리어와 디자인, 패션 분야에서 주로 ‘심플하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 P18

하지만 예술로서의 미니멀리즘은 ‘평면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추구해 ‘사물‘을 전시장 안으로 가져오는 식의 작업을 의미합니다. - P18

모더니즘 정신의 계승

미니멀리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더니즘 미술‘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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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자키 히루코에게

(전략)
변함없이 하는 일 다 잘되고 건강하리라고 믿는다. 인사말을 늘어놓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일전에 마다라메 기관이라는 조직에 관해 조사해달라고 의뢰했잖아. 그 보고서를 보낸다. - P11

이 보고서를 복제해서는 안 되고 남에게 발설해서도 안 된다고 너도 내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으니까. - P12

001

기묘한 거래



1

"카레우동은 본격 추리가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주장했다.
당연히 카레우동은 우동의 아종이며 본격 추리는커녕 본격 중화요리도 아니다. 그건 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 카레우동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비논리적이라는 것이다. - P15

(전략).
"즉, 저 사람은 강의실과 학생식당 냉방이 너무 강해서 추운거야. 특히 학생식당은 통유리라 햇빛이 잘 드니까 냉방도 강하게 설정했겠지. 그러므로 추위를 타는 저 사람이 따뜻한 음식을 찾으리라고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아.‘ - P16

"그래. 저 사람은 친구 두 명과 함께 들어왔어. 친구들은벌써 음식을 받아서 계산하는 중이야. 저 사람은 친구들이 기다릴까 봐 마음이 급하겠지. 여기서 문제, 라면하고 우동 중에 빨리 나오는 건 뭘까?" - P17

하지만 우동과 달리 라면에는 애착이 없는지 맛이 형편없어서 인기가 없다. (중략). 덧붙이자면 라면을 담당하는 (아마도) 필리핀 아저씨도 맛을 떨어뜨리는 원흉 중 하나다.  - P18

"저 사람이 입은 카디건요. 하얀색이잖아요. 저런 걸 입었는데 카레우동을 주문할까요?"
카레 얼룩은 흰옷의 천적이다. 한창 꾸밀 나이의 여학생이 무신경하게 넘어갈 리 없다. (중략).
"카디건은 벗으면 되잖아, 어리석기는!" - P19

여학생의 점심은 학생식당 직원의 추천 메뉴인 간 무와 통조림 참치를 올린 간장 소스 냉우동이었다.
왜!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점심으로 먹기에 딱 좋은 메뉴지만, 당신 추운거 아니었어? - P20

밥을 먹는 학생들의 표정은 환하다. 이 주에 걸친 기말시험도 오늘 오전부로 거의 다 끝났으니 여름방학 계획을 세우느라 마음이 설레는 거겠지.
부러울 따름이다. (중략).
그 원인의 대부분이 눈앞에 앉은 이학부 3학년 선배 아케치 교스케에게 있지만, 가위표를 친 종이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움켜쥐는 표정으로 보건대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모양이다. - P21

나는 처음에 미스터리 연구회, 소위 미스연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 P23

좋아하는 작품을 화제로 삼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모르겠다", "안 읽어봤다"뿐이라 밴 다인과 쓰즈키 미치오를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 P24

"이학부 3학년, 아케치 교스케라고 해. 미스터리 애호회의 회장을 맡고 있지."
미스터리 애호회? 미스연하고는 다른 건가.
"그러니까 미스연의 아류?"
"절대 아니야!" - P25

 미스연 회원들이 즐겨읽는 소설은 요즘 유행에 따라 캐릭터의 개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연애와 청춘소설 요소도 듬뿍 담은 작품들, 이른바 라이트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작품들이었다. - P26

그리하여 나는 그의 조수로서 학교 비공인 동아리에 소속되어 생산성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현재 다른 가입 예정자는 없다. - P26

2

(전략).
"물론 비어 있는데요. 또 고양이라도 찾으시려고요?"
(중략).
고양이 찾기는 그가 가끔 학교 근처 다누마 탐정 사무소에서 맡아 오는 아르바이트다. - P27

하지만 교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가 몇 번 해결한 실적이있으므로 꼭 무시할 수만은 없다. - P28

아케치 씨는 교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근처 탐정 사무소와 파출소에도 쳐들어가 명함을 돌렸고, 그 일을 계기로 다누마 탐정 사무소와도 안면을 텄다. - P28

"실은 영화 연구부가 여름방학 때 재미있을 것 같은 합숙을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 - P28

(전략).
"음. 하지만 심령현상이 일어나는 장소에서 아이돌 연예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콘셉트는 이제 질색이야. 김이 확샌다고."
"격하게 동의해요."
개인적으로는 외국의 엑소시즘도 많이 써먹은 소재라 이제좀 지겹다. - P29

"그래서 우리도 합숙에 낄까 했거든.‘
"뭐라고요?" 갑작스러운 전개에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런데 영화 연구부 부장한테 가서 부탁하니까 거절하더라."
"그렇겠죠."
"지난달부터 벌써 세 번이나 부탁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것 같아." - P30

하지만 하무라, 펜션이라고, 여름 펜션. 거기에 또래 학생이 모여 뭔가 사건이 터질 법한 상황이잖아."
무슨 리라장*도 아니고. - P31

3

(전략).
"또 거절당했어."
아케치 씨는 세월이 느껴지는 커피색 의자에 앉아 나지막한 테이블 밑으로 긴 다리를 쑤셔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 P32

"나는 그저 머리를 숙일 뿐이야. 아무 폐도 안 끼쳤어."
"그게 제일 골치 아픈 사고방식이라니까요."
"아무 사건도 없이 여름을 보낼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해야지." - P33

"처음 뵙겠습니다. 문학부 2학년 겐자키 히루코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이학부인 아케치 씨와도 경제학부인 나와도 접점은 없을듯하다. 아케치 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 이름까지 알다니 도대체 누구일까. - P34

"아케치 씨, 영화 연구부 합숙에 동행하고 싶으시죠?"
(중략).
"영연에 소속된 친구에게 언뜻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주열심히 부탁하신다고요."
"예, 매정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지만요."
(중략).
매정할 것도 많다. 질리지도 않고 끈덕지게 치근거렸으니얻어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겨야 마땅하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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