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합숙의 제일 큰 목적은 작품 촬영이라기보다 남녀 간의 교류, 즉 동아리 내부 미팅이죠. (중략). 다만 방이 모자라서 부원이 전부 참가할 수는 없나 보더라고요. (중략). 그런 이벤트에 불청객을 끼워줄 여유는 없다는 뜻이에요." - P36
"하지만 최근에 상황이 달라졌어요." (중략). "합숙 이 주 전에 참가하기로 했던 부원 대부분이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실은 이 이야기를 해준 제 친구도 그중 하나예요." - P36
"협박장이 왔대요." 뜸을 들이듯이 겐자키 씨가 컵에 입을 댔다. - P37
"예, 자살 동기와 합숙의 인과관계는 불명확하지만 몇몇부원의 증언에 따르면 작년에 촬영한 심령 영상에 사람 얼굴이 찍혔는데, 영연이 연출한 건 아니라나." "그러니까 지벌이나 저주를 받아서 그랬다고요?" - P38
"예. 신도 씨가 협박장을 보자마자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그쳤대요. (중략). 그의 태도가 어쩐지 찜찜해서 친구는 숨겨서는 안될 일이라고 판단했어요. (중략). 그래서 눈덩이가 커지듯이 참가를 취소하는 부원이 늘어난 거고요." - P39
"미팅을 주선하겠다는 명분으로 졸업생에게 초대를 받았을 텐데 여자 참가자가 없으면 말이 안 되니까 신도 씨도 고심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랑 같이 참가하지 않으시겠어요?" - P40
"잠깐만요. 아까 거래라고 하셨죠? 이래서는 저희만 득을보는데요. 애당초 왜 저희한테 이런 이야기를 꺼내신 건가요?" 그때 살짝 벌어진 겐자키 씨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 같은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중략). "이유를 묻지 말 것. 그게 이번 거래의 교환 조건이에요." - P41
002
자담장
1
(전략). 산속의 폐업한 호텔, 방치된 지 이십 년 가까이 지났고 주변에 다른 건물도 없으므로 이제 이 지역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걸음하지 않는다. - P43
약 이십여 년에 걸친 하마사카의 연구 인생. 그 모든 것을바친 대학 연구실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중략). 하마사카에게 남은 사명은 단 하나, 이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것뿐이다. - P44
잘 봐라! 어제 우리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 테니까!" 세상을 구하는 전사라도 된 기분일까. 하마사카는 싸늘한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본에서 입학 커트라인이 제일 높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사했다. - P45
2
합숙 당일. 아케치 씨와 나, 그리고 겐자키 씨는 이른 아침에 학교 근처 역에서 만나 전철을 탔다. 합숙 장소인 펜션은 S현 사베아 호수 근처에 있으므로 참가자들은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집합하기로 했다. - P46
언어나 사건은 딱히 걱정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꺼림칙한 협박장보다 조증에 걸린 것처럼 들뜬 아케치 씨를 다른 젊은이들 사이에 섞어놓는 게 제일 걱정이다. - P47
"그건 그렇고 펜션을 대여해주다니 영연에는 배포가 큰 졸업생이 있나 보네요." 내 물음에 겐자키 씨가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지만 부모님이 영상 제작 회사 사장님이라나 봐." 겐자키 씨는 이제 내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친근한 말투로대한다. - P48
문득 겐자키 씨가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는 바로 알았다. 내 왼쪽 관자놀이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사오 센티미터쯤 찢어진 상처라 꽤 눈에 띈다. 머리카락으로 덮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서 눈에 들어온 거겠지. - P49
3
"겐자키 히루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드디어 기억이 났어. 예전에 경찰서에 명함을 돌리러 갔는데 내가 신코 대학에 다니는 걸 알고 어떤 형사님이 그 이름을 꺼내더라고. 빼어난 추리력을 발휘해 경찰조차 애를 먹은 갖가지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로 이끈 소녀 탐정이라는군." - P51
"나도 흥미가 생겨서 다누마 씨에게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 본가는 요코하마에서 유서가 깊은 명문가인가 봐. 그 사람이 사건에 관여할 때마다 보도가 엄중히 제한된대. 가문에 먹칠을 하는 짓이다, 그건가." - P51
하지만 기묘한 이야기다. 그 정도 실력과 실적을 가진 그녀가 왜 일개 대학교 동아리에서 벌어진 협박장 소동에 일일이 흥미를 보일까. - P52
4
환승역에서 일찌감치 점심을 먹은 후 JR에서 민영 전철로 갈아타고 삼십 분을 더 갔다. - P51
"오오, 신도, 이번에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상대는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이 영화 연구부 부장 신도인가. (중략). "이런 예외를 허용하면 안 되지만, 겐자키 씨의 제안도 있고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뭐, 즐겁게 지내다 가자." 말투를 들어보니 너 따위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본심인 듯했다 - P54
이어서 우리도 자기소개를 했다. 겐자키 씨가 이름을 말하자신도가 머리를 숙였다. (중략). 아케치 씨를 대할 때와는 태도가 매우 다르다. 신도가 한학년 위인데도 존댓말을 쓴다. 고분고분한 그 태도를 겐자키씨는 물 흐르듯이 받아넘겼다. "아니요, 저도 흥미가 있어서요." - P55
"안녕하세요, 신코 대학에서 오셨죠? 저는 펜션을 관리하는 간노 유이토라고 합니다." "......작년에 일하던 분은 그만두셨습니까?" 신도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예. 저는 작년 십일월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다른 분들은다 타셨습니다." 간노는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슬라이드도어를 열어주었다. - P56
(전략). 그런데 먼저 온 참가자들은 두 명이 마지막 줄에 자리를 잡고 한 명이 조수석에앉아 있었다. 마치 반발하는 자석처럼 가장 멀리 떨어진 좌석에 나누어 앉다니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신도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없이 둘째 줄에 올라탔다. - P57
"평소에도 이렇게 차가 밀립니까?" 신도가 묻자 간노는 백미러로 시선을 보냈다. "아니요, 평소에는 텅 비어 있어요. 다만 오늘과 내일은 근처 자연공원에서 야외 이벤트가 열리나 보더라고요." (중략). "사베아 록 페스티벌,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아까 찾아보니까 꽤 유명한 밴드도 참가하는가 봐. 그렇지, 미후유?" - P59
"다카기 씨는 작년에도 합숙에 참가하셨나요?" (중략). "이 년 연속 참가하는 사람은 나랑 개뿐이야." - P59
내용을 확인하자 2박 3일의 일정 외에 펜션에서 각자가 묵을 방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략). 재학생 참가자는 영화 연구부와 연극부, 불청객인 우리를 포함해 총 열 명. 방 배치에 공백이 눈에 띈다. 2층과 3층에 객실이 합쳐서 열여섯 개지만, 방 여섯 개에는 이름이 씌어 있지 않다. - P60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호시카와를 제외한 나머지여학생들은 조금도 들뜬 모습을 보이지 않아, 갈 곳을 잃은남자들의 목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채웠다. - P61
간노가 차를 느릿느릿 몰면서 즐겁게 말했다. "그럼 저희 펜션이 마음에 드실지도 모르겠네요." (중략). "아니요. 그런 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취미로수집하신 외국의 무기를 펜션에 잔뜩 장식해두셨어요. 검이나창 같은 걸 으리으리하게요. " - P63
언덕을 금방 다 올라 탁 트인 장소가 나오자 방금 전에 본지붕이 달린 펜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중략). "뭐랄까..…………. 훌륭한 건물이네요. 좀더 규모가 작지 않을까 상상했는데요." 시골의 초등학교 크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 P65
"빨간색 GT-R이라. 숲속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머신이로군.‘ "가네미쓰 씨 차입니다. 이 펜션 주인의 아드님이에요." 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치스럽죠?" 천만 엔은 됨직한 고급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 P66
남자는 입을 열자마자 집요하게 트집 잡는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잖아. 아침부터 여자애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뚱땡이가 먼저 도착해서 토할 뻔했다고." - P67
"적당히 해, 데메. 우리가 다 부끄럽다." 충고한 사람은 피부가 볕에 잘 그을린 남자였다. - P67
"신코 대학교 후배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 우리는 영연 선배는 아니지만 신코 대학교 졸업생이고 여기 앉은 나나미야의 친구야. (중략). 나는 다쓰나미 하루야라고 해. 저 시끄러운 녀석은 데메 도비오." 웬걸, 데메라는 물고기상 남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 P68
"저 사람이 이곳 주인의 아들이로군." "응. 삼사 년 전에 졸업한 영연 선배야. 지금도 후배들에게 무료로 펜션을 제공해주니까 아량이 넓지. 데메 씨도 태도가 저래서 오해받기 십상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마음에 둘것 없어." 신도는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빠른 말투로 해명했지만, 여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 P69
"배정된 방 중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방에는 그 사람들이묵고 있다는 뜻이군요." 우리 열 명이 묵을 방말고 숙박자의 이름이 비어 있는 방이 여섯 개 있다. 그중 세 개를 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P70
간노가 프런트의 자물쇠를 열고 카드 다발을 꺼내 왔다. "방의 카드키를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중략). 오토록이니까 외출하실 때는 방에 놔두고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프런트에 맡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략)." - P71
"저쪽 엘리베이터는 작아서 기껏해야 네 명 정도밖에 못랍니다. 모두가 한꺼번에 올라가기는 어려우니 계단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71
(전략), 나는 여자 참가자들이 전부 미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미인밖에 못 본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 P73
문이 바깥쪽, 즉 복도 쪽으로 열려서 의외였다. 지금까지묵었던 비즈니스호텔은 대부분 안쪽으로 열렸던 것 같다. (중략).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자 자동으로 자물쇠가 철컥 잠기는소리가 났다. (중략). 카드키를 벽의 홀더에 꽂아야 실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것은 비즈니스호텔과 똑같다. - P74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보자 오른쪽에 각 방이 비스듬히 배치된 건물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집합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나는 펜션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 P75
엘리베이터 홀에는 객실말고도 문이 두 개 더 있었다. 문에 끼워진 명판에는 창고와 리넨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 호텔이나 병원 등에서 침구, 시트, 타월 등 섬유 제품을 보관하는 방. - P76
"이야. 병아리 탐정님이네. 나는 사회학부 3학년 구다마쓰다카코야.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자위대 대원처럼 이마에 손을 갖다 붙였다. 오랜만에 밝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 P77
"경쟁자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중략). "그 사람 집이 유명한 영상 제작 회사를 하거든. 그래서 그 사람한테 잘 보이면 직장을 소개해주기도 한대." 연줄로 취직자리를 얻을 생각인가. 말은 쉽지만 정말로 그에게 그런 권력이 있을까. - P78
"완전히 헛소문은 아니야. 실제로 작년에도 그 회사에 취직한 사람이 있다고. 펜션을 멋대로 사용하게 해주는 걸 보면 부모도 아들 하면 껌뻑 죽는 팔불출 아니겠어?" - P78
"방금 경쟁자 아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구다마쓰 씨말고도 연줄로 취직하려는 사람이 또 있는 거죠?" 그러자 구다마쓰는 아아, 하고 업신여기는 듯한 시선을 홀구석으로 던졌다. "쟤야 쟤. 부, 장."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문 하나를 가리켰다. 신도 방이다. - P79
나는 중앙 구역으로 되돌아와서 2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간노 말대로 상당히 비좁았다. (중략). 즉 합쳐서 260킬로그램. 성인 남성이 짐을 들고 타면 세 명이라도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 P80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사장님은 중세 전투를 아주 좋아하시나보더라고요." 늘어놓은 무기들을 보니 확실히 장식성을 중시했다기보다개인적인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 같았다. - P82
나는 신경쓰이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간노 씨, 자담장은 펜션치고는 좀 색다르네요. 용도가 불분명한 문도 있고, 방이 넓은데도 전부 싱글룸이고요. 종업원도 간노 씨 한 명뿐이잖아요." - P83
"저렇게 기분 나쁜 사람들이랑 사흘이나 같이 지내야 한다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부 아유무 책임이야." - P84
기분 나쁜 사람들이 졸업생 일행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역시 여자 참가자들은 졸업생들에 대한 첫인상이 아주 안좋았던 모양이다. 한편 신도는 변함없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어물어물대꾸했다. - P85
아케치 씨가 신도에게 물었다. "요 부근에서 촬영할 거야?" "아니, 촬영 장소는 폐업한 호텔이야. 차로 조금만 가면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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