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마다 같지만 다른 삶
감독 : 빔 벤더스, 출연 : 아쿠쇼 코지, 에모토 토키오, 나카노 아리사
빔 벤더스 감독 작품 중에 ‘베를린 천사의 시’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좋아한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영화 제목에 시가 들어 있기도 하지만 시의 행간을 읽는 듯한 영상이 좋았다. 다큐인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도입부의 음악부터 등장인물들의 서사, 노래와 연주가 정말 좋아서 여전히 드라이빙 플레이리스트로 애정하고 있다. 특히 이브라힘 페레르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핸드폰 수신 벨소리로 듣고 있다.
영화는 골목을 빗질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는 주인공의 하루로 시작된다. 공공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아쿠쇼 코지 분)는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양치와 면도를 하고 분재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입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고 청소도구를 실은 차를 타고 출근한다. 출근하며 늘 올드팝을 듣는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중에서 매일 신중하게 고른다. 작업 담당 구역인 화장실에 도착한 그는 꼼꼼하게 구석구석을 닦는다. 변기와 주변을 닦고 유리창을 닦는다. 다른 화장실에 가서도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같은 구역을 청소하는 동료 타카시(에모토 토키오 분)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청소도 성의 없이 대충하면서 언제나 불만이 가득하다.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해야 한다며 히라야마에게 돈을 빌려 달라기도 하고 히라야마의 올드팝 카세트테이프가 희귀품인 걸 알고 욕심을 내기도 한다. 오전 청소를 마친 히라야마는 공원 벤치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는다. 어린 단풍나무를 발견한 그는 조그만 종이봉투에 담았다가 집으로 가져간다.
퇴근 후 그의 일정도 한결같다. 옷을 갈아입고 단골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단골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술 한잔하고 단골 책방에서 책을 고르고 집에 돌아와 자기 전까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골목을 빗질하는 소리가 모닝콜로 울리고 히라야마의 하루는 다시 시작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출근길에 함께 하는 올드팝 플레이리스트가 바뀐 것 정도일까? 히라야마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변함없는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게 된다. 내 하루를 누가 몰래 엿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잔잔하면서도 묵묵한 그의 일상은 안전해 보이지만 한편 불안하기도 하다. 그렇게 고요해지기까지 그가 선택한 과정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일상에 변화가 온 것은 여동생의 딸인 조카, 니코(나카노 아리사 분)의 방문이다. 어려서 본 조카는 청소년이 되어 있고 엄마와 다투고 집을 나왔단다. 히라야마는 자신의 침실을 조카에게 주고 자신은 좁은 구석에서 잠을 잔다. 아주 작은 변화는 다른 루틴에도 영향을 주고 히라야마는 잊고 싶었던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라든지 결혼이라든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지난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 그의 표정이 혼란스러워 보인다. 나는 흔들리는 그의 하루에서 단골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과 그림자밟기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조카를 출근길에 데리고 다니며 이전과 다른 일상을 보내던 그는 생각이 많아진 것 같지만 여동생이 찾아와 조카를 데려가고 그는 다시 예전의 일상을 회복한다. 잠깐의 일탈은 오랫동안 애써서 만든 그의 루틴을 오히려 단단하게 만든 걸까? 아니면 그의 마음에 새로운 갈등이 찾아온 걸까?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들으며 출근하는 히라야마의 표정은 웃는 듯 우는 듯 복잡하다.
빔 벤더스 감독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촬영할 때부터 음악을 선택하는 안목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퍼팩트 데이즈의 선곡도 정말 탁월하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이 영화의 완성도는 아쿠쇼 코지의 연기가 반, 빔 벤더스 감독의 음악 선정이 반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과 연기자의 조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치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