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답고 위험한 유혹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에스미 마키코, 나이토 타카시, 아사노 타다노부
나는 고지식하고 하나에 애착을 가지면 그 주변을 들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 내 성격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고 난 후, 그가 감독한 영화를 병적으로 찾아보는 결과를 만들었다. ‘감독이 고레에다 라고? 무조건 봐야지.’라는 생각을 하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한정된 시간에 부족한 에너지로 한 곳에 집착하면 날마다 매 끼니 ‘볶음밥’만 먹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볶음밥에 물리지 않는 줄기찬 고레에다 덕후로 자라고 있다. 아마 그의 작품이 내 입맛에 맞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영화 환상의 빛에 홀린 순간의 기억이 여전히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린 아들을 키우며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 분)와 함께 나름 알콩달콩 살던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분)는 출근한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찾아다니다 그가 집 근처 기찻길를 따라 스스로 다른 세상으로 걸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가정을 꾸렸고 남편이 자신에게 변함없이 다정했다고 믿는 유미코는 그의 선택에 충격을 받는다. 유미코는 소녀 시절,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외출을 말리다 포기하고 돌아와 할머니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 기억이 있다.
혼자 아들을 키우는 유미코에게 이웃이 재혼 상대를 소개하고 유미코는 짐을 챙겨서 시집으로 가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기차를 탄다. 낯선 기차역에 도착해서 재혼할 상대인 타미오(나이토 타카시 분)와 그의 딸을 만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다가 보이는 오래된 집. 시아버지 요시히로(에모토 아키라 분)는 담담한 표정으로 새 며느리의 인사를 받는다. 유미코가 살던 곳에 비해 바닷가 마을은 춥고 불편한 것이 많다. 부부의 방 창문에서 빤히 보이는 바다는 추위 때문인지 유난히 사납게 느껴진다.
유미코는 수줍어하는 의붓딸에게 ‘오늘부터 내가 네 엄마야.’라고 말하며 안아 준다. 그녀는 아들과 딸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시장에 갔다가 만난 이웃 해녀 할머니와 소소한 얘기도 하게 되고 가능한 새살림에 익숙해지려고 애를 쓴다.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도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편의 전 부인 얘기를 듣게 되고 남편의 마음에 아직도 남아있는 그녀의 존재에 질투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전 남편의 죽음에 대해 말하며 그가 죽은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힘들어하는 유미코에게 타미오는 ‘오래전에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는데 멀리 빛이 보이더래. 희미하지만 자꾸자꾸 손짓하는 빛을 따라가고 싶더래. 그냥 그런 거야. 그렇게 가는 거야.’ 타미오의 투박한 위로는, 죽음은 늘 가까이 있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어쩌면 친밀한 이웃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닷가 마을에 겨울 폭풍이 오고 그 폭풍우를 뚫고 기어이 유미코에게 약속한 가재를 바다에서 잡아 오는 이웃 해녀 할머니의 모습은, 죽음이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은 어느 순간 죽음과 만나고 죽음과 화해하며 죽음을 인식하고 있구나. 봄이 오고 있고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놀고 멀리 이웃의 장례 행렬이 느리게 지나가고 그렇게 죽음은 풍경이 되고 타미오가 선물한 자전거를 타고 비틀거리며 달리는 유미코의 아들이 있고 바다는 다시 출렁일 것이고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다가 멀리서 손짓하는 등불을 보고 아름답고 위험한 그 환상의 빛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만드는 영상은 따듯하다. 이야기의 얼개만이 아니라 순간순간 보이는 컷에도 배려가 숨어있다.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날마다 먹는 밥상을 만나는 느낌이다. 한 끼 밥이 주는 힘을 아는 연출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가족'에 주목한다. 다양한 가족의 구성과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주는 영향력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영상에는 시가 있다. 단순하게 ‘미장센’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은유가 있다. 맞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중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