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근대사 - 정동에서 부산까지 1887~1950
최석호.박종인.이길용 지음 / 가디언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집에 박종인 기자님께서 쓰신 책이 여러권 있다(흔한 기자님 더쿠1). 리뷰를 올린 책들도 있고, 안올린 책들도 있고(!!). 근데 막 이 책보다 출간된지 더 오래된 책들도 있는데, 왜 난 이런 책이 나왔는지 몰랐을까. 심지어 나름 최근 출간된 책이라니. 오롯이 기자님이 다 쓴 책이 아니어서 그런가..


뭐 여튼! 이미 품절된 책,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기웃, 어떻게 저렇게 해서 기어이 구매! 아주 조오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총 6챕터 (서울 정동, 서울 서촌, 서울 동대문, 목포, 부산, 신안)의 글 중 기자님이 쓰신 걸로 추정되는 건, 첫번째 챕터인 서울 정동 편 하나 인것 같다. 



애초에 박종인 기자님이 저자로 올라가 있던 책이라, 제대로 된 목차는 확인하지 않고(...) 믿고 구입했는데 목차를 보고 새삼 놀랐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6개의 골목길, 그러니까 6개의 지역 중 5곳을 이미 내가 걸어봤던 곳이었기 때문에. 역시 사람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느껴야 한다고 하더니만, 확실하 직접 다녀온 장소들이 많아서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 골목이,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서울 정동편

우리나라 근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서울 정동. 그런 서울 정동을 말 그대로 우리나라 ‘근대사’를 보기 위해 두 번이나 걸었다. 물론  두번 모두 길라잡이가 있었다. 첫번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현실 증강게임, 두번째는 무려 박종인 기자님(상상출판 다시한번 사랑합ㄴㅣㄷㅏ...!!!)



  1) 서울도시건축전시관 - 서울주교좌성당 - 덕수궁(+중명전) - 구 신아일보사 별관 - 경교장

  2) 덕수궁 - 고종의길(일명 아관파천길) - 구 러시아 공사관 - 덕수궁 중명전 - 덕수궁 돌담길(인화문 흔적)



이 두 번의 정동산책의 공통점은, 정말 치욕적인 우리나라 근대사가 들어있다는 점이랄까?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공사관에서 가장 좋은 방에 기거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모처럼 안색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개인은 평안했으되, 나라는 거널났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일본이 잠시 후퇴한 사이 황실 인사와 외교, 경제 이권은 러시아가 쓸어갔다. 비등한 여론에 밀려 만 1년 뒤 경복궁이 아닌 경운공, 즉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10년 뒤 160미터 옆에 있는 중명전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꼴을 봐야 했다. p 033



그때 조약에 찬성한 자들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렇게 5인이다. 이들을 똑똑하게 기억하자. 이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p 031



개인적으로 고종이라는 왕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의 부와 안위를 위해 저질렀던 그의 수 많은 행동들이, 고종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수백 수천의 동학농민들이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뿐만인가? 백성들이 입헌군주제를 논하자, 독립협회를 강제해산 시켰다. 백성들의 원성은 가뿐히 무시한 채,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 한 뒤 오로지 황제에 의한, 황제를 위한 대한제국 헌법을 선포했다. 본인의 40주년 즉위 행사를 위해 혈세란 혈세는 다 쏟아부었다. 이런 사람이 조선의 왕이었고, 대한제국의 황제였다. 이런 사람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거나, 나라의 개혁에 노력했다고 미화되는 요즘 드라마를 포함하여 각총 매체를 볼 때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매체들은 지금까지도 생산되고 있고, 심지어 지자체까지도 발벗고 나서고 있으니. 그런데 또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을 하지않는다. 뭐지? 왜지? 자본의 흐름이 만들어낸 현상인가? 음. 씁쓸하다.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6.25 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사용됐다. 전후월남대사관으로 쓰이던 경교장은 1963년 경교장 뒤편에 들어선 고려병원의 원무실로 사용됐다. 안타까운가? 누구 하나를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를 보존하기에는 아직 시대정신이 성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p 025



평리원과 경성 재판소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건물에서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 건물을 대법원 청사로 사용했다. 의미 깊은 판결들이 이곳에서 나왔다.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법원은 “이 건물만은 꼭 보존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그런데 그 재판정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문화적인 무식함이었는지, 아니면 타협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되, 현재 남아있는 옛 건물은 건물 전면부 외벽과 현관밖에 없다. p 041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시대정신이 성숙하지 않다. 아쉽지만 이 책이 나온지 약 5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많은 역사적 장소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쓸려나가고 있으니까. 당장 가깝게는 내가 사는 시흥 개발, 발견된 수십개의 고인돌이 갈려나갔고, 그 흔적조차 없으며 지금 남은 고인돌이라고는 딱 2기다. 그래놓고는 이제와 선사유적공원을 조성. 내참. 거기다 춘천 중도는 더 심하면 심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청동기 유적지가 발견되었지만, 레고랜드 따위를 만든다며 그 유적지를 훼손훼손훼손. 대놓고 ‘나 중요한 역사 유물이에요~’라는 것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괴하는게 현실이다. 





*서울 서촌&동촌(동대문)


이 책의 첫번째 챕터가 정동이라면, 두/세번째 챕터는 서촌과 동촌이다. 내가 참, 서울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서울은 동서남북중앙 곳곳을 자주 누볐기 때문에 정말 할말이 많긴 하다ㅋㅋㅋ. 물론 이 책에서는 정동과 서울 서촌과 동촌(동대문)만 언급하고 있지만 말이다.



난 거의 해마다 경복궁에 출석체크를 하러 다녔다, 아니 지금도 해마다 출석체크 진행중이다. 거기다 소싯적에는 연극&뮤지컬 보러다니느라 주말마다 대학로도 출석체크 하곤 했다. 의도했던건지, 의도한게 아닌건지는 지금도 참 아이러니 하지만. 이 때마다 참 많이도 걸어다녔다. 경복궁이 메인이었을 땐 서촌, 북촌까지 꼭 올라갔다. 대학로나 창덕궁이 메인일 때는 역시 북촌이나 동대문(동촌)일대를 걸어다녔다. 거기다 한양도성 둘레길을 클리어 한다고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그리고 정동 산책하며 돈의문(터)까지. 아주 그냥 열씸히 걸어다녔다. 어라? 이렇게 보니 내 두 다리로 한양도성 4대문을 다 찍었네? 어머나 세상에ㅋㅋㅋㅋ. 그래서 내 다리가 이렇게 튼실해졌나 흑흑.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타난 수성동계곡을 보면 중간쯤에 다리가 하나 있다. 기린교다.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다가 이 다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파트를 철거할 당시 생태공원을 조성하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수성동계곡을 복원했다. 현재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보존된 다리라고 한다. p 057



서촌을 처음 걸었을 때, 튼튼한 두 다리에 의존하여 이상의 집을 지나, 박노수 미술관도 지나고, 윤동수 하숙집도 지나서, 수성동 계곡까지 걸어 올라갔다. 한참 뒤에 또 다시 서촌을 찾았을 땐, 자본의 힘을 빌려(ㅋㅋㅋㅋ) 버스를 타고 석파정까지 갔다. 또 그 다음엔 통인시장 일대를 돌아다녔다. 서촌의 수많은 장소 중에서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는 곳은 수성동 계곡. 겸재 정선이 그렸던 그림속의 계곡이, 눈 앞에 그대로 있다는게 너무 신기했었다. 심지어, 수성동 계곡 복원 과정도 신기했다.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기린교를 발견한 거나, 기존에 공원 조성할 계획을 취소하고 계곡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거나. 당시 책임자가 누구였는진 모르겠지만, 정말 훌륭하고 탁월한 선택!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곳을 찍으라면 역시나 석파정이 아닐까. 엄밀히 따지만 석파정은 경복궁의 북서쪽에 위치한,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다. 정확히는 안동 김씨의 소유였는데, 머리 좀 굴린 흥선대원군이 왕이 된 아들 고종을 이용하여 빼앗은 건 유명한 이야기. 뭐 여튼! 석파정은 경치가 정말 빼어난 한옥이다. 우리 한옥들은 정원을 조성할 때, 차경을 이용했다. 그만큼 한옥과 자연 그대로의 조화를 중시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와. 석파정을 보면 이건 뭐 자연속에 그대로 들어온 것 같다. 석파정이 인왕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양보를 한건지, 아니면 인왕산이 석파정을 산의 조화를 위해 이용한건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포목시장이 형성되고,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채소시장이 형성되는 등 흥인지문과 동대문 시장은 우리 역사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변해왔다. 동대문시장과 흥인지문에 또 한번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일제강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15만 5,000원을 들여서 2만 5,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성운동장을 만든다. 경성운동장을 만들면서 허문 성곽 석재는 남촌 일본인 주거지역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1925년 10월 15일 경성운동장 개장식과 함께 조선신궁에 신상일 안치하는 ‘조선신궁 진좌제’도 거행한다.군사적 지배에 이어서 종교적 지배를 단행한 현장 역시 동대문이다. p 090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서울운동장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차지하려고 하는 좌익과 우익의 각축장이었고 (중략) 1985년 잠실운동장은 올림픽주경기장이 되고,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이 된다. p 091



동대문운동장이 떠난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돌아왔다. 포목시장이었던 역사성을 살리면서도 21세기를 선도할 수 있는 멋진 곳으로 거듭났다. p 092



책에서 동촌이라 말하는 동대문 일대. 내 기억속의 동대문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일명 DDP다. 그 이전에는 동대문 운동장이었고, 또 그 이전에는 서울운동장, 또또 그 이전에는 경성운동장이었던 그 곳이다. 하지만 내 기억속에는 DDP. 내가 어릴 적 동대문 운동장이었던 시절도 있었겠으나, 어린 나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것이었고, 동대문 운동장이 철거되었을 때도 역시나 어린 나에게는 관심밖의 것이었다. 그러다 2013년, 옛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신기한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게 바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DDP였다. 어쩌면 옛 동대문 운동장 처럼 내 관심 밖이었을지도 몰랐을 DDP는, 첫 개관 이벤트로써 유치한 전시가 있었으니, 바로 ‘간송미술전’. 간송전 때문에 나는 DDP를 알게되었고, 간송전은 주말에 나를 DDP로 향하게 만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창달한 나라가 저급한 문화 수준을 가진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은 꼭 독립한다. 일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 문호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 간송이 해야 할 일은 문화보국이다.” p 079



“천학매병 속의 69마리 학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날아올랐다. 불감 속에서 목탁소리가 흘러나왔다.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가 고맙다고 손을 잡았다. 백발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다가오더니 큰일 이루었다며 그를 안았다. 1962년 1월 26일 나이 57세 때다.” p 082 (간송 전기작가 이충렬 씀)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이 사재를 털면서까지 외부로 유출될 뻔한 문화재나 화재로 소실될 뻔한 문화재들을 찾아와 보관한 곳이다. 실제로 그 안에는 국보급 문화재, 아니 우리 국보들이 꽤 많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간송이 아니었으면 한글의 원리를 몰랐을 것이며, 고려청자인 상감운학문매병을 못봤을 것이고, 겸재, 혜원, 단원의 그림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간송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이 빈 공백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간송이 끝까지 지켜낸 우리의 보물들을 DDP 첫 개관 이벤트와 함게 전시를 한다니, 이건 내 발길을 DDP로 이끌기에도 충분했다. 






*목포&부산&신안


목포, 부산, 신안편은 앞서 서울 세 편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특히 목포&부산도 저자가 말하는 골목들을 거의 걸어봤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다. 



​1897년 10월 1일 고종 황제는 목포를 개항한다. 부산, 원산, 인천, 경흥 등에 이은 다섯번째 개항이었지만, 외국과 별도로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개항한 첫 번째 칙령개항장이다. p 113



다순구미는 목포 원주민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고, 우리네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개항장거리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백열등을 밝혔고, 보란 듯 한껏 뽐을 내는 고관대작의 집은 아니지만 고단한 하루를 마치면서 지친 몸 편안하게 누이던 보금자리다. 이곳이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이 없어지는 것 같고 목포의 뿌리가 뽑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이곳에까지 기어이 아파트를 지어야 하겠는가! p 121



목포의 근대사는 유달산을 기점으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목표편 역시 유달산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달산에서 목포근대역사관, 다순구미, 이훈동가 정원 등 유달산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일제강점기 때 유달산이 어떻게 일제에 유린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웠달까.



​그래도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장기려 박사는 대안을 모색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다. 대공황기 미국에서 시작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모델로 해서 1968년 5월 13일 723명의 조합원으로 첫 출범했다. 담뱃값이 100원이던 시절에 한 달 의료보험료 60원을 받고 조합원 진료비 40퍼센트 할인, 30퍼센트 보험료, 나머지 30퍼센트 본인 부담 방식으로 사실상의 무료진료를 이어갔다. 1975년 8월 4일에는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직영병원 청십자병원을 설립했고, 1976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 청십자사회복지회로 개편했다.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하루 전날인 1989년 6월 30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p 159



부산은 우리 근대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으로 넘어가는 제일 가까운 도시이자, 해방 후 한국 전쟁 당시에는 임시수도이기도 했던 도시다. 인천만큼이나 근대사에서는 절대 빼 놓을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도시가 부산이다. 다만, 정말 이야깃거리가 방대해서 그랬을까. 내가 생각하던 부분은 거의 생략되어 있었다. 대신 부산에 있던 의사 장기려 선생. 환자만 생각했던 바보의사 장기려. 우리나라 최초 의료보험을 만들었던 장기려 선생에 대한 내용이 풍부했다. 아마도 저자는 한정된 지면에, 한정된 이야기를 해야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은 그런 이야기를 지면에 실은게 아닐까? 즉 저자의 선택과 집중!



하지만 신안편은.... 아무리 저자의 선택과 집중이라지만 너무 특정 종교와 특정인물에 치우쳐져 있어서 정말 많이 아쉬웠다. 내가 신안에 대해 잘 몰랐다면, 신안에는 정말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전에 대한민국 도슨트 신안편을 읽었었기에, 신안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였기에, 신안편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특정 종교 및 특정 인물의 이야기는 좀. 신안에는 우리 근대사에 이름 올려도 이상하지 않을 독립운동가 이야기도 있는데 말이다 ..ㅜㅜ..






전체적으로 신안편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지역은 전부 다녀보았던 곳이라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그 광경들이 떠올라서 너무 좋았다. 분명 집에서 읽었지만, 집이 아니라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 느낌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 오랜만에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역사나 다시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룬샷 -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서는 먼저 과학적인 내용을 짧게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온도의 작은 변화가 딱딱한 얼음을 흐르는 물로 바꾸는 것처럼, 문화가 아닌 구조(시스템)의 작은변화가 조직의 행동을 바꾸는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중략) 리더들은 많은 시간들 들여 혁신을 역설한다. 하지만 온도가 떨어지고 있는데, 분자 하나가 절박하게 얘쓴다고 해서 주변 분자가 얼음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구조의 작은 변화는 강철도 녹일 수 있다. - P8

⑴ 룬샷 Loonshot : 주창자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하고,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프로젝트(아이디어)



⑵ 문샷 Moonshot : 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프로젝트, 아주 중요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다들 기대하고 많은 것을 투자한 프로젝트(아이디어)



⑶ 프랜차이즈 Franchise : 룬샷으로 탄생한 제품의 후속작 또는 업데이트 버전

그 어느 집단도 동시에 두 가지 상태의 행동을 할 수는 없다. 동시에 두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다. 앞서 말한 욕조의 물이 정확히 0도일 때 얼음 덩어리와 액체 상태의 물이 공존한다. 0도보다 조금만 낮거나 높아서 전체가 얼어붙거나 액체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상전이의 바로 그 경계에서는 두 가지 상태가 공존할 수 있다. P 034 - P34

‘우리 육군과 해군은 다가올 전쟁을 이기는 데 꼭 필요한 기술 면에서 독일에 한참 뒤처져 있다.’ 군 스스로는 제때에 그 기술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부시는 루스벨트에게 연방정부 내에 새로운 과학 기술그룹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부시가 수장이 되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체제로 말이다. P 056 - P56

1939년 핵분열이 발견된 이후 첫 2년간은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이게 아무런 실용적 용도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군사적으로든 다른 용도로든 말이다. 새로운 유형의 폭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편지를 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집한 과학위원회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1941년 영국의 어느 원자 물리학자 그룹이 만들어낸 새로운 결과는 부시가 다른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부시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핸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에게 비록 핵무기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낮지만, 독일이나 일본이 먼저 핵무기를 손데 넣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루스벨트는 부시의 논리를 받아들여 그에게 이 문제를 맡겼다. 부시는 대대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개시하고 군과 저치 지도자들 사이에 지지를 확보한 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 프로그램을 군에 이양했다. P 71~72 - P72

정말로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 ‘우연의 설계자들’은 그보다 덜 화려한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어느 한 룬샷을 열열히 지지하기 보다는 많은 륜샷을 육송할 수 있는 뛰어난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예지력 있는 혁신가라기보다 세심한 정원사에 가깝다. 그들은 룬샷과 프랜차이즈 양쪽을 모두 잘 돌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하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P 79 - P79

균형을 유지해서 어느 한 상태가 다른 상태를 압도하지 않게 하려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룬샷을 도모하는 예술가와 프랜차이즈를 도모한느 병사가 똑같이 사랑받는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 나약하고 모호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아주 현실적인 얘기이자 자주 간과되는 요소다. P 83 - P83

버니바 부시와 시어도어 베일은 기술 자체보다는 ‘기술이전’을 경영했다. 그들은 룬샷과 프랜차이자 사이의 균형과 소통을 중시했다. P 216 - P216

현장의 병사와 벤치의 예술가 사이에 오가는 균형 있는 아이디어와 피드백을 통해 가장 유리한 룬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오직 신성한 리더의 뜻에 따라 아이디어가 정지될 때, 팀이나 기업은 함정에 빠진다. 리더는 자신의 보좌진을 승진시키고, 바다를 갈라 선택받은 룬샷을 위한 길을 낸다. 위험한 선순환의 주기는 점점더 빨라진다. 룬샷과 프랜차이즈는 서로를 더 크게, 더 빨리, 더 많이 키운다, 전지전능한 리더는 전략상의 이점을 바탕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룬샷에 대한 애정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바퀴가 헛도는 일이 일어난다. P 174 - P174

회사를 떠나는 직원이 줄을 잇는 것은 회사 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시어도어 베일은 ‘나머지를 희생시키면서 어느 한쪽을 무시하거나 편애한다면 반드시 전체의 균형이 깨질 것’이라고 했다.P 226 - P226

균형과 소통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내부의 장벽을 극복하게 도와줄 손길이 필요하다. 어느 모세의 보좌진의 손길이 아니라, 정원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이전되는 데 힘을 너무 받거나(추상적인 명령) 힘이 부족하면(아무 지원 없음), 유망한 아이디어와 기술도 실험실에서 썩게 도리 것이다. 그러면 조직은 그 기술을 상실하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질 것이며, 그 기술을 발명한 사람의 충성심을 잃게된다. 핵심 인재는 회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P 268 - P2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 말로는 경관님이 그 이후에 데니스에게 원한을 품었다고 하던데요. 홀리의 시신이 발견된 후 데니스의 집으로 찾아간 게 경관님이었다면서요. 데니스와 그 범죄를 연관 지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도 말이죠." P 061 - P61

"증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당신 쪽 사람들은 체모를 잃어버렸죠. 당신은 증인들을 유도해서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게 만들었고요. 아들의 친구에 대한 당신의 개인적 원한 때문에 말이에요. 결국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한데 엮어 십 대 남학생한테 누명을 씌운거에요" P 067 - P67

"왜 이곳 사람들은 그애들이 죽었다고 그렇게 확신하는 거죠? 조사는 전부 날림으로 이루어졌어요. 그애들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 그렇게 했는지 한 번도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P109 - P109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뿐이에요. 우리가 지금 떨어져 있는 건 내게 아무런 문제도 안돼요. 면회를 하고 싶어요. P 025 - P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 모든 소리와 더불어 자동차 경적,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휴대전화 벨소리, SNS알림음, 공사 현장의 소리, 비행기 소리까지 들으며 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가 우리를 쉴 새 없이 짓누른다. (중략) 우리가 시달리고 있는 문제의 규모와 절박함은 현대의 것이지만 그 뿌리는 시대를 초월한다. - P8

지리상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나 성격이 얼마나 다른지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고대 철학은 완벽하게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기원전 500년에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든, 그로부터 100년뒤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든,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앉아 있던 제자든지 간에 하나같이 침착함과 차분함, 평온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우뻬카(upekkha)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아슬라마(aslama)라고 부른다. 히브리서에서는 히쉬타부트(hishtavut)라고 한다. 힌두교 3대 경전으로 꼽히는 《바가바드 기타》의 2장은 전사 아르주나에 관한 서사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사마트밤(samatvam), 즉 ‘마음의 평정 또는 한결같은 평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스에서는 에우티미아(euthtmia), 헤시키아(hesychia)라고 하고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일컫는다. 기독교에서는 아이콰니미타스(aequanimitas)라고 한다. 그리고 영어로는 스틸니스(stillness). P 017 - P17

고요는 외부의 방해에 취약하므로 세상의 소란함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소음에, 우리 영혼과 육체의 소음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찰나의 고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가장 힘든 상황에서조차 일관성 있게 끌어어낼 수 있는 집중과 지혜다. P 113 - P113

일상에서 마주치는 갖가지 스트레스와 곤경은 우리를 쓰러뜨릴 수 있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면 우리는 하나를 닫으면 또 하나 열리는 온갖 정보 속에 사로 잡힌다. 거기에 앉아 그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할까? P243 - P243

나폴레옹은 우편물이 밀리는 상황을 즐겼다. 그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화나게 할 수도 있고 중요한 가십거리를 놓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사소한 문제들은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실시간으로 뉴스를 받아들일 게 아니라 나폴레옹처럼 여유를 갖는 태도, 유행에 한두 계절 쯤 뒤쳐지는 태도, 내 삶을 받은편지함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P 056 - P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내가 빠져 있는 것. 이 책에 담긴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지극히 사적인 기호보다 균형 잡힌 일상을 가꾸기 위해 내 마음이 나아가는 방향을 기록한 것에 가깝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오래전 나는 사는 게 허무해서 작은 물건이라도 쇼핑하며 하루를 견디듯 살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미니멀리스트로 나의 태도를 변화시킨 뒤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생활과 건강에서 최소 취향이 확고해진 뒤 내가 집중하는 건 배움. 머릿속에 든 건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고 평생 가져가는 거라 하지 않던가. 물건보다 경험을, 경험보다 배움과 깨달음을 얻으며 충만함을 느낀다. - P5

가지고 싶은 물건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느끼는 성취감. 돈을 버는 건 언제나 어렵지만, 물건을 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견디며 돈을 벌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나와 다른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게 맞는 방향 같았다. 가장 손쉬운 기분전환, 수집인지 호딩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며 돈과 시간을 많이 썼고… P 041 - P41

내가 오랫동안 고생했던 문제, 물질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고 부러움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 노력한 끝에 소비중독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감정적 소비가 드물뿐더러 물질 자체에 큰 비중을 두고 살지 않는다. 물질이 채우지 못한 공허와는 다른 감각으로 여백은 여유로웠으나 삶의 재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욕구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 내게 찾아온 부러움의 대상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P 193 - P1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