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했다.

"이 사변은 내 본심이 아니오.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인민이 피로하고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잘 가시오.‘ - P173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의거한다 - P284

이성계는 그제야 화가위국이 비극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씨에게만 비극의 길이 아니라 이씨에게도 비극의 길이었다.

그것이 왕가의 길이고, 권력의 길이었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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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이 글은 오로지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이순신의 장계, 임금의 교서, 유시를 인용한 대목들은 대체로 이은상의 『이충무공전서』의 문장을 따랐다. 그러나 글쓴이가 지어낸 대목도 있다. 그 구분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 해전(海戰)의 사실은 대체로 『난중일기』에 따랐으나,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글쓴이가 지어낸 전투도 있다. 그러나 이순신 스타일의 전투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책의 부록으로 첨부한 <인물지>와 <연보>에서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

의금부 도사에 따르면,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죄목은 조정을 능멸했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 P24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김덕령은 그렇게 죽었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곽재우는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 P66 ~ 67

이제 서울 백성들 중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터이다.

살아남은 백성들이 마땅이 상복을 입고 있어야 하거늘, 상복 입은자를 볼 수 없으니 괴이하다.

난리중에 강상이 무너지고 윤기가 더럽혀진 탓이로되, 내 이를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서울의 각 부는 엄히 단속하여라 - p193, 선조의 교서

정유년 가을에 나는 타격 방위를 설정할 수 없었다.

조정은 장님처럼 적의 먼 외곽을 더듬고 있었다.

강화 협상의 신기루 속에서 경상 해안 쪽의 점점 더 강력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명의 천자가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밀통해서

내 함대가 아무 곳도 조준할 수 없고 내 칼이 아무것도 벨 수 없게 되는 환영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 P260

신하가 몸을 던져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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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역사, 신화 관련된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재밌고 신화로 버무려진 이야기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의 신화는 정말 보물창고다. 제주도의 창세신화를 보면 옥황상제의 딸 설문대할망이 나온다.

그녀는 워낙 커서 한라산을 베개로 삼고 눕고, 그녀의 발끝은 제주도 바닷물에 담겨있다고 한다. 제주의 수많은 오름을 만든 신도 설문대할망이다. 제주도에서 설문대할망을 뺀다면 앙꼬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다.

하늘이 열리고 길이 열린다

제주도에 신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스 로마보다 풍요롭고 호그와트보다 흥미로운 신화와 마법의 땅 제주

탐라 신의 아들 궤네기또와 하늘의 딸 별아가 펼치는

천 개의 경관, 천 개의 전설 속에 숨은 제주 신화 탐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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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땅이 척박하여 주민들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하여 그들은 고려말, 조선초에는 ‘왜구‘라는 이름으로 조선, 명나라에 기어들어와 도적질을 했다. 세종의 대마도 정벌을 기점으로 왜구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대마도는 조선의 정책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에서 벼슬과 각종 특혜를 받았다. 조선 입장에서는 대마도주를 이용하여 왜구를 단속함으로써 조선의 동해안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대마도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받는 각종 특혜로 대마도의 경제적 활로를 찾았다. 그렇다고해서 대마도가 조선의 속국이 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 대마도를 종속시키자는 의견이 있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만들어봤자 하등 이득이 없다는 이유로 묵살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도는 조선의 속국이라는 인식은 널리 퍼졌다. 여기서 함정인 건 일본도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인식했다‘ 라는 것이다. 153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그렸던 ‘8도총도‘ 에는 대마도가 조선땅이라고 떡하니 그려져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이후에 그려진 조선의 여러 지도에도 대마도는 동래부(지금의 부산)에 수록된 섬으로 그려져있다. (우리땅 내놔 이놈들!!)



대마도가 조선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며 경제적으로 두둑해지는 사이 일본 본토 안에서는 전국시대를 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열도를 벗어나 대륙을 정벌하고자 했고 그 시작은 조선이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전쟁이다. 참혹하디 참혹한 전쟁이었다. 이겼으나 진 것 같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선봉에는 조선의 특혜를 받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있었다.

한국사람들이 대마도에 대해서 느끼는 친밀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왜 우리 땅도 아닌데 대마도를 가깝게 느끼는 걸까?

지금 대마도는 그야말로 일본의 변경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대마도는 우리에게 관광 이상의 곳이다. 과거에도 많은 이해가 얽혀 있었고, 또 국경을 넘어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는 지금이나, 또 앞으로 어떻게 얽힐지 모르는 곳이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 한때는 침략자로 다가온 적도 있었지만, 15세기 이후 각종 경제활동과 전략을 통해 19세기 중엽까지 조일 외교의 중앙에 있으면서 그들의 생활터전을 지켜온 대마도에 대해 한번쯤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그렇게 쓸모없는 일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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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명을 내려 황제, 황후 및 진비, 근비 두 후궁과 태자 푸쥔을 영수궁에 함께 머물게 하고는 시안 피신을 준비했다. 하지만 출궁 전날 저녁, 진비를 생각하니 궁에 남겨두기도 그렇고 데려가기도 마땅치 않자 그녀를 낙수당 뒤 서쪽 우물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을 전했다. 나이 든 태감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피해버렸고 젊은 추이위구이만은 감히 멀리 피하지 못했다. 서태후는 화를 내며 명했다. "추이위구이가 진비를 밀어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모두 참형을 면치 못할것이다." 추이위구이는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진비를 우물에 밀어넣고 말았다.…"

내가 서태후를 처음 만난 때는 광서 28년, 태후가 68세 되던 해다. … 두 눈썹은 정기가 흘러넘치고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다. 아무도 감히 그 눈빛을 마주 대하지 못할 정도였다. 조정에서 군기대신들을 대할 때면 더 없이 온화하고 자상하면서도 그 표정과 자태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이 서려있었다.… 서태후는 공적이 크고 과실이 적은 반면, 광서제는 공적이 적고 과실이 많다고 평가한 것은 확실히 정론이라 할 수 있다. P 40 - P40

가장 잔인했던 일은 바로 서태후가 어느 나이 든 태감에게 그의 대소변을 강제로 먹였던 일이다.

궁안 태감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 노인은 이 일로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서태후 자신은 젖을 잘 내는 두 부녀를 선별해 매일 같이 온 몸을 깨끗히 씻게 했다.

이들이 몸에 꼭 붙는 진홍색 상의를 입고 유두만 드러낸 채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서태후는 침상에 누운 채로 젖을 먹었다.

자신은 사람의 젖을 먹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대소변을 먹이는 것

이것이 바로 황실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P 419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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