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양념통을 받아왔을 때는 단지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득템’한 기분이었다. 서랍장 형태의 통에 설탕과 소금, 고춧가루를 넣으면 되곘다고 구체적인 계획도 짜놓았지만, 슬프게도 플라스틱 양념통 역시 상부 장에 넣어둔 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 P31

이제서야 물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확실해 졌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절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물건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 P206

처음에는 쓰레기가 우리 집, 내 공간,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만으로 할 일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내나 버린 물건들의 행선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다시 쓰이기를 바랐지만, 대부분은 재활용되지 못하고 쓰레기로 전락해서 매립된다는 것을 알았다. 잘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 P95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을 검색해보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알게 됐다. 제로 웨이스트는 쓰레기의 사용과 배출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실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특히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용기 같이 썩지 않는 소재의 사용을 줄이려는 실천을 말한다. - P96

가방은 무거워졌고, 텀블러는 매일매일 세척해줘야 했다. 우리의 새로운 식수 생활은 생수를 사 먹는 일보다 훨씬 불편했다. 마시고 버리면 끝이 아니라, 손이 많이 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므로 확실히 귀찮다. 하지만 생수보다 보리차가 더 맛 좋다. - P111

이제는 물건을 집으로 들일 때, 내가 물건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까지 생각해본다. 방법은 간단하다. 충동적으로 가지고 싶은 물건이든, 첫눈에 마음이 뺏겨버린 물건이든 간에 우선 이성을 앞세워 이 물건과의 마지막 순간이 어떨지 예상해보는 것이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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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분신이자, 최선의 친구이자, 생의 선후배 사이인 엄마와 딸. 엄마를 온전히 끌어안고 싶은 ㅁ아므을 가득 담아 써내려간 버킷리스트. 엄마와 안경점에 가기, 스마트폰 이모티콘 선물하기, 건강 검진 같이 받기, 노래 플레이리스트 공유하기 …….

거창하지 않지만 마냥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다 ‘엄마를 업고 걸어가는 봄밤’을 거닐 수 있기를. 세상의 모든 설렘을 모아 엄마에게 스무 살 시절을 선물하고 싶은 딸만 있다면, 엄마에게 마음에 꽃이 피는 계절은 바로 지금이니까.

이모티콘을 이모콘티라고 말해서 딸의 짜증을 촉발시킨다. 그 엄마는 요즘은 컴퓨터의 컨트롤 브이와 컨트롤씨도 모른다고 또 딸에게 혼났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딸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쳐주려고 수백 번 설명해주고, 더하기 빼기를 알려주려고 수백 번 가르쳐주었다. 걸음마를 가르쳐주려고 수천 번 알려주고 한 걸음만 떼도 물개박수를 쳐주셨다. 세상 이치를 알려주려고 수천 번이나 얘기해주시는데 딸은 이모티콘이나 컴퓨터 설명 몇 번에 짜증을 낸다. - P88

시간이 엄마의 얼굴에서 젊음을 가져갔다. 김진호의 <가족사진> 속 노랫말처럼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엄마의 모습에 딸의 가슴이 무너진다. - P66

여행지는 어디든 좋다. 발 닿는 데로 가서 팔짱 끼고 걸으며 끝없이 수다를 떨면 된다. 무뚝뚝한 딸이라 미안하다고 속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엄마가 내 엄마여서 행복하다는 고백도 해본다. 엄마는 내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내가 엄마를 예쁘게 찍어주고, 이 골목 저 골목, 알려지지 않은 길을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기도 하고.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엄마인데, 딸인데 ……. - P61

딸은 사실, 엄마의 아기 캥거루이고 싶다. 딸 옆에 엄마가 없으면 행복이라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엄마가 딸에게 그러하듯 딸도 엄마에게 바라는 건 금은보화가 아니다. 엄마가 돈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옆에서 잔소리도 하고 도닥여주고 못난 딸 예쁘게 봐주면, 그러면 된다. 그러니 세상의 엄마들은, 딸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한다. - P48

저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을까요?

엄마가 우리 엄마라는 사실은 제 인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신께 감사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고통스러울 때마다 다시 힘을 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눈물이 날 때마다 차라리 웃어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주먹 쥐고 일어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땅을 보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봅니다.

내 삶의 이유, 내 삶의 힘, 내 삶의 배경인 우리 엄마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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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하게 국권을 침탈당한 대한민국 심장부의 아픔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정동,

주선중화로 흩어진 선비들을 결집시키고 진경시대를 열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한껕 드높인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서촌,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 마을에서 사느니 차라리 등지고 살면서 힘든 시절을 견디어 낸 동촌,

한 많은 삶을 흥으로 이겨낸 자주적 개항장 목포,

피난민과 권주민이 윗동네와 아랫동네에 더불어 사는 개항장 부산,

사랑으로 용서팜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을 살림의 지혜로 이겨내개 한 증도,

이 땅에 서려 있는 우리 역사를 걸으며 나를 되찾는다.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공사관에서 가장 좋은 방에 기거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모처럼 안색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개인은 평안했으되, 나라는 거널났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일본이 잠시 후퇴한 사이 황실 인사와 외교, 경제 이권은 러시아가 쓸어갔다. 비등한 여론에 밀려 만 1년 뒤 경복궁이 아닌 경운공, 즉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10년 뒤 160미터 옆에 있는 중명전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꼴을 봐야 했다. - P33

그때 조약에 찬성한 자들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렇게 5인이다. 이들을 똑똑하게 기억하자. 이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 P31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6.25 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사용됐다. 전후월남대사관으로 쓰이던 경교장은 1963년 경교장 뒤편에 들어선 고려병원의 원무실로 사용됐다. 안타까운가? 누구 하나를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를 보존하기에는 아직 시대정신이 성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 P25

평리원과 경성 재판소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건물에서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 건물을 대법원 청사로 사용했다. 의미 깊은 판결들이 이곳에서 나왔다.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법원은 "이 건물만은 꼭 보존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그런데 그 재판정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문화적인 무식함이었는지, 아니면 타협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되, 현재 남아있는 옛 건물은 건물 전면부 외벽과 현관밖에 없다. - P41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타난 수성동계곡을 보면 중간쯤에 다리가 하나 있다. 기린교다.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다가 이 다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파트를 철거할 당시 생태공원을 조성하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수성동계곡을 복원했다. 현재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보존된 다리라고 한다. - P57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포목시장이 형성되고,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채소시장이 형성되는 등 흥인지문과 동대문 시장은 우리 역사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변해왔다. 동대문시장과 흥인지문에 또 한번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일제강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15만 5,000원을 들여서 2만 5,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성운동장을 만든다. 경성운동장을 만들면서 허문 성곽 석재는 남촌 일본인 주거지역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1925년 10월 15일 경성운동장 개장식과 함께 조선신궁에 신상일 안치하는 ‘조선신궁 진좌제’도 거행한다.군사적 지배에 이어서 종교적 지배를 단행한 현장 역시 동대문이다. - P90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서울운동장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차지하려고 하는 좌익과 우익의 각축장이었고 (중략) 1985년 잠실운동장은 올림픽주경기장이 되고,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이 된다. - P91

동대문운동장이 떠난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돌아왔다. 포목시장이었던 역사성을 살리면서도 21세기를 선도할 수 있는 멋진 곳으로 거듭났다 - P9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창달한 나라가 저급한 문화 수준을 가진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은 꼭 독립한다. 일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 문호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 간송이 해야 할 일은 문화보국이다." - P79

"천학매병 속의 69마리 학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날아올랐다. 불감 속에서 목탁소리가 흘러나왔다.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가 고맙다고 손을 잡았다. 백발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다가오더니 큰일 이루었다며 그를 안았다. 1962년 1월 26일 나이 57세 때다." - P82

1897년 10월 1일 고종 황제는 목포를 개항한다. 부산, 원산, 인천, 경흥 등에 이은 다섯번째 개항이었지만, 외국과 별도로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개항한 첫 번째 칙령개항장이다 - P113

다순구미는 목포 원주민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고, 우리네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개항장거리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백열등을 밝혔고, 보란 듯 한껏 뽐을 내는 고관대작의 집은 아니지만 고단한 하루를 마치면서 지친 몸 편안하게 누이던 보금자리다. 이곳이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이 없어지는 것 같고 목포의 뿌리가 뽑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이곳에까지 기어이 아파트를 지어야 하겠는가! - P121

그래도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장기려 박사는 대안을 모색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다. 대공황기 미국에서 시작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모델로 해서 1968년 5월 13일 723명의 조합원으로 첫 출범했다. 담뱃값이 100원이던 시절에 한 달 의료보험료 60원을 받고 조합원 진료비 40퍼센트 할인, 30퍼센트 보험료, 나머지 30퍼센트 본인 부담 방식으로 사실상의 무료진료를 이어갔다. 1975년 8월 4일에는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직영병원 청십자병원을 설립했고, 1976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 청십자사회복지회로 개편했다.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하루 전날인 1989년 6월 30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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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확실함과 두려움은 그날 아침 한국인의 얼굴에서 읽었던 그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추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불에 타 검게 그을린 택시와 버스, 그리고 깨진 보도블록 등이 도로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도로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군인들이 나를 ‘동그란 눈’의 외국인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중략)

"우리는 여기를 알릴 방법이 없어. 자네는 봤지? 자네가 본 것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꼭 알려주게"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 P232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33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 P56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P57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 P63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 P70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 P85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 P97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 P105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 P113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 P124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 P134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ㅇ르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 P136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 P146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P178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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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6
이서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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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보고, 남부지방을 간다면 꼭 가보리라 싶었던 지역 통영. 하지만 지금까지도 멀다는 이유로 못 가본 통영. 언제쯤 가보나 고민만 하고 있던 통영인데, 때마침 「대한민국 도슨트」 다음 시리즈로 통영 편이 나왔다. 








난 통영은 이순신 장군으로 시작해서, 이순신 장군으로 끝나는 도시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 사실, 어느 도시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유명인물이 하나 둘쯤은 있지만, 통영은 참 여러사람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 처럼 관광을 위해 내세우는 인물들도 여럿이고,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통영을 만든 사람들도 있었다. 통영은 ‘사람들’이 만든 도시이자, 그 ‘사람들’ 덕분에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도시 통영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7년 후 당시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는 새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해안을 다 뒤지던 그가 ‘여기다!’ 하고 찾은 곳이 두룡포였다. 선조 임금의 허락이 떨어진 게 1604년 9월 9일이다. 조선 최초 군사계획도시였던 통영 역사는 사실상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p 023






이 때부터 300년 가까이 통영은 전함 500여 척, 수군만 3만여 명이 주둔하는 조선 최대 군사도시였다. p 069






통영하면 떠오르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처음 통제영을 설치한 곳은 통영에 속한 섬인 한산도였다. 하지만 한산도 통제영은 짧은 순간에 사라졌다. 선조의 못난 질투심으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할 때였다. 선조와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에게 못난 시지, 질투를 갖던 원균. 그는 이순신 장군의 자리였던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고, 한산도 통제영을 지휘했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다. 조선의 수군은 궤멸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돌아왔을 때, 통제영은 완도에 속한 섬인 고금도에 설치되었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통영에 있었던 때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1603년.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바로 이곳, 통영에 다시 터를 잡았다. 그 때부터 ‘통제영=통영’이 성립되었고, 조선최대군사도시 통영이 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바로 이경준 장군에 의해 시작된거다. 




원래는 100여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던 통제영 관아는, 현재 세병관(객사) 한 동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때 죄다 허물었기 때문이다. 세병관이 살아 남은 이유는? 학교건물로 사용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이쯤에서 눈치채겠지만, 일제강점기 통영도 많은 수난을 겪은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든 저렇든 통영은 일본을 대파한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곳이기에, 일본입장에서는 통영은 짓밟아야 할 도시였던 것이다.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에 나있는 좁은 물길, 통영운하. 이 운하를 만든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그러니까 일본인의 의지로 파낸 운하다. 물론 기존에도 물길이 있었긴 하지만, 일본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운하를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이유는 뻔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 것이다. 그래서 통영8경에도 뽑히는 이렇게 멋진 통영운하가, 한없이 멋지게만은 보이지 않는 이유다. 






통영운하 아래에는 해저터널도 있다. 그 해저터널 역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무려 ‘동양최초’ 해저터널이다. 이 해저터널이 지어졌을 당시, 일본인들이 붙였던 이름을 보면 더 씁쓸하다. 그 이름은 바로 ‘태합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태합’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해저터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진왜란 당시, 통영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 이후 약 300여년이 흐른 뒤, 일본은 본인들이 대패했던 그 통영바다에 보란듯이 해저터널을 만든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이 졌지만, 지금은 일본이 이겼다는 사실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런 가슴아픈 곳이 바로 통영해저터널이다.






이순신 장군도, 박경리 소설가도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그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그분들을 기리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통영 음악가 ‘윤이상’. 이 음악가는 오래도록 수면아래에 있었다.






“그러게 왜 간첩질을 해! 간첩질을 안 했으면 영웅이 됐을건데!” p. 120







아직까지도 일부 사람들은 윤이상 음악가를 저렇게 바라본다. 간첩, 빨갱이, 배신자…. 그에게 따라붙던 꼬리표다. 대체 왜일까?






1967년,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에서 간첩단을 대거 잡아들인다. 일명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다. 독일에 체류중이던 수 많은 한국인들이 다짜고짜 납치되어, 한국으로 끌려와 간첩이라며 고문을 당했다. 윤이상도 그 중 하나였다. 세계적인 음악무대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고, 기립박수를 받았던 음악가였던 윤이상이 말이다(윤이상 외에도 서독에 있던 수 많은 교민들이 간첩이라는 죄명하게 죄다 납치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국에 머물던 이들에게 북한에 대한 반감은 있었으나 ‘분단’이라는 인식은 강하지 않던 시기였다. 실제 북한과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은 이도 있었겠지만, 정치적인 일이라 생각치 못하고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북한 사람을 만난 이들도 많았따. 잡혀 온 이들이 받은 고문은 혹독했다. 윤이상도 결국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 물고문 끝에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자’ 라는 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해 12월에 열린 1심 재판에서 무기 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 3심 최종에서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동베를린 사건은 이미 수사 과정에서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독일 정부는 윤이상이 무리하게 끌려가 수사를 받았다며 특별사면을 요구했다. 세계적인 음악가인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을 포함한 음악인 200여 명도 한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보내 항의했다. 결국 1969년 2월 25일 윤이상은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 독일로 추방됐다. p 126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으로 지목된 194명. 과연 이들 중, 저들이 말하던 진짜 간첩이 얼마나 있었을까? 분명 그들이 동독 북한대사관을 자주 찾기는 했다. 다만 당시는 남한보다 북한의 국력이 조금 더 나은 편이었기에, 북한대사관에서는 남한 유학생들에게 밥한끼 먹여주는게 흔한 일이었다. 그 결과 윤이상은 빨갱이가 되었고, 모국에서 추방당했고 죽을 때 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죽은 지 23년이 흘러, 정권이 바뀐 뒤에 그의 유해가 비로소 통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통영은 윤이상의 도시가 되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빨갱이가 되었었고, 나라의 위상을 빛낸 사람이 되기도 한 윤이상. 그의 기구한 일생이 바로 이곳 통영에 있었다.




 


이 책속에는 통영의 어느 한 시간대에 있던 사람들은 분명 여럿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이경준 장군, 백석 시인, 박경리 소설가, 윤이상 작곡가, 김성수 장인, 김용우 동장 등. 그 중에서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빛나는 인물들 보다는, 그늘에 가려진 인물들에게 한없이 마음이 갔다. 비슷한 의미로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지형, 지물에도 마음이 간다. 




지금의 통영은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이 떠오를 만큼 푸르른 해양도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아픈 역사가 있고, 이렇게 푸르른 해양도시를 만들기 위해 뒤에서 애를 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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