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6
이서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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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보고, 남부지방을 간다면 꼭 가보리라 싶었던 지역 통영. 하지만 지금까지도 멀다는 이유로 못 가본 통영. 언제쯤 가보나 고민만 하고 있던 통영인데, 때마침 「대한민국 도슨트」 다음 시리즈로 통영 편이 나왔다. 








난 통영은 이순신 장군으로 시작해서, 이순신 장군으로 끝나는 도시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 사실, 어느 도시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유명인물이 하나 둘쯤은 있지만, 통영은 참 여러사람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 처럼 관광을 위해 내세우는 인물들도 여럿이고,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통영을 만든 사람들도 있었다. 통영은 ‘사람들’이 만든 도시이자, 그 ‘사람들’ 덕분에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도시 통영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7년 후 당시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는 새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해안을 다 뒤지던 그가 ‘여기다!’ 하고 찾은 곳이 두룡포였다. 선조 임금의 허락이 떨어진 게 1604년 9월 9일이다. 조선 최초 군사계획도시였던 통영 역사는 사실상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p 023






이 때부터 300년 가까이 통영은 전함 500여 척, 수군만 3만여 명이 주둔하는 조선 최대 군사도시였다. p 069






통영하면 떠오르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처음 통제영을 설치한 곳은 통영에 속한 섬인 한산도였다. 하지만 한산도 통제영은 짧은 순간에 사라졌다. 선조의 못난 질투심으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할 때였다. 선조와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에게 못난 시지, 질투를 갖던 원균. 그는 이순신 장군의 자리였던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고, 한산도 통제영을 지휘했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다. 조선의 수군은 궤멸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돌아왔을 때, 통제영은 완도에 속한 섬인 고금도에 설치되었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통영에 있었던 때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1603년.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바로 이곳, 통영에 다시 터를 잡았다. 그 때부터 ‘통제영=통영’이 성립되었고, 조선최대군사도시 통영이 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바로 이경준 장군에 의해 시작된거다. 




원래는 100여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던 통제영 관아는, 현재 세병관(객사) 한 동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때 죄다 허물었기 때문이다. 세병관이 살아 남은 이유는? 학교건물로 사용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이쯤에서 눈치채겠지만, 일제강점기 통영도 많은 수난을 겪은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든 저렇든 통영은 일본을 대파한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곳이기에, 일본입장에서는 통영은 짓밟아야 할 도시였던 것이다.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에 나있는 좁은 물길, 통영운하. 이 운하를 만든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그러니까 일본인의 의지로 파낸 운하다. 물론 기존에도 물길이 있었긴 하지만, 일본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운하를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이유는 뻔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 것이다. 그래서 통영8경에도 뽑히는 이렇게 멋진 통영운하가, 한없이 멋지게만은 보이지 않는 이유다. 






통영운하 아래에는 해저터널도 있다. 그 해저터널 역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무려 ‘동양최초’ 해저터널이다. 이 해저터널이 지어졌을 당시, 일본인들이 붙였던 이름을 보면 더 씁쓸하다. 그 이름은 바로 ‘태합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태합’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해저터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진왜란 당시, 통영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 이후 약 300여년이 흐른 뒤, 일본은 본인들이 대패했던 그 통영바다에 보란듯이 해저터널을 만든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이 졌지만, 지금은 일본이 이겼다는 사실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런 가슴아픈 곳이 바로 통영해저터널이다.






이순신 장군도, 박경리 소설가도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그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그분들을 기리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통영 음악가 ‘윤이상’. 이 음악가는 오래도록 수면아래에 있었다.






“그러게 왜 간첩질을 해! 간첩질을 안 했으면 영웅이 됐을건데!” p. 120







아직까지도 일부 사람들은 윤이상 음악가를 저렇게 바라본다. 간첩, 빨갱이, 배신자…. 그에게 따라붙던 꼬리표다. 대체 왜일까?






1967년,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에서 간첩단을 대거 잡아들인다. 일명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다. 독일에 체류중이던 수 많은 한국인들이 다짜고짜 납치되어, 한국으로 끌려와 간첩이라며 고문을 당했다. 윤이상도 그 중 하나였다. 세계적인 음악무대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고, 기립박수를 받았던 음악가였던 윤이상이 말이다(윤이상 외에도 서독에 있던 수 많은 교민들이 간첩이라는 죄명하게 죄다 납치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국에 머물던 이들에게 북한에 대한 반감은 있었으나 ‘분단’이라는 인식은 강하지 않던 시기였다. 실제 북한과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은 이도 있었겠지만, 정치적인 일이라 생각치 못하고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북한 사람을 만난 이들도 많았따. 잡혀 온 이들이 받은 고문은 혹독했다. 윤이상도 결국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 물고문 끝에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자’ 라는 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해 12월에 열린 1심 재판에서 무기 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 3심 최종에서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동베를린 사건은 이미 수사 과정에서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독일 정부는 윤이상이 무리하게 끌려가 수사를 받았다며 특별사면을 요구했다. 세계적인 음악가인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을 포함한 음악인 200여 명도 한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보내 항의했다. 결국 1969년 2월 25일 윤이상은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 독일로 추방됐다. p 126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으로 지목된 194명. 과연 이들 중, 저들이 말하던 진짜 간첩이 얼마나 있었을까? 분명 그들이 동독 북한대사관을 자주 찾기는 했다. 다만 당시는 남한보다 북한의 국력이 조금 더 나은 편이었기에, 북한대사관에서는 남한 유학생들에게 밥한끼 먹여주는게 흔한 일이었다. 그 결과 윤이상은 빨갱이가 되었고, 모국에서 추방당했고 죽을 때 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죽은 지 23년이 흘러, 정권이 바뀐 뒤에 그의 유해가 비로소 통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통영은 윤이상의 도시가 되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빨갱이가 되었었고, 나라의 위상을 빛낸 사람이 되기도 한 윤이상. 그의 기구한 일생이 바로 이곳 통영에 있었다.




 


이 책속에는 통영의 어느 한 시간대에 있던 사람들은 분명 여럿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이경준 장군, 백석 시인, 박경리 소설가, 윤이상 작곡가, 김성수 장인, 김용우 동장 등. 그 중에서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빛나는 인물들 보다는, 그늘에 가려진 인물들에게 한없이 마음이 갔다. 비슷한 의미로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지형, 지물에도 마음이 간다. 




지금의 통영은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이 떠오를 만큼 푸르른 해양도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아픈 역사가 있고, 이렇게 푸르른 해양도시를 만들기 위해 뒤에서 애를 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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