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사의 쓸모 - 합리적이고 품위 있는 선택을 위한 20가지 지혜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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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구입한지는 꽤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책이 꽤 있다. 책을 구입한 속도와 읽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매번 반복되는 일이다. 그래서 올해는 최대한 신간보다는 사놓고 못읽은 구간 위주로 읽어보려고 한다. 앞서 리뷰한 두 권도 그랬고, 오늘 리뷰할 『다시, 역사의 쓸모』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변한다. 사람의 힘이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심지어 변화에 필요한 시간도 옛날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예컨데 10년이면 변하던 강산이, 요즘은 5년이면 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지난다해도 언제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 ‘사랑, 배려, 존중, 도리, 신뢰, 진심…’ 등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면 안되는 가치들이 바로 그것이다. 


양력 기준으로 2025년 새해가 되었다. 음력으로 따지면 아직 2024년 말이다. 24년이든 25년이든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생각해야할 건, 위에서 말한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가치들이, 계속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가? 이다.


당장 핸드폰으로, 컴퓨터로, TV로 뉴스를 켜보자. 슬프게도 지금 내가 사는 사회에서 중요 가치로 자리잡은 것은 ‘혐오, 차별, 증오, 폭력…’ 이다. 어딘가에서 혐오범죄가 발생하고, 또 어딘가에선 차별이 발생한다. 혐오와 차별, 증오등으로 인한 폭력도 급증했다. 변하지 않고 늘 그자리에 있어야 할 ‘사랑, 배려, 존중, 도리, 신뢰, 진심…’ 등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사회가 이토록 혼란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혼란을 수습하고, 사람사는 사회로 만드는 법. 답은 하나다. 사라진 가치들을 되찾으면 된다. 큰별쌤이 이 책 『다시, 역사의 쓸모』를 쓴 이유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오랜시간 역사 속에서 변하지 않았던 가치들을,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맞는 스토리텔링하여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하여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수면 위로 올리는 것. 『다시, 역사의 쓸모』가 그 일을 하기 위한 선두주자는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의 위인을 기리고 존경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과제가 있었듯 우리 시대에는 우리 시대의 과제가 있어요. 우리는 이 과제를 풀어나가면 됩니다. 그러니 ‘만약 나였다면’이라고 상상하며 자신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p 019


역사의식은 마치 DNA처럼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평소에는 모르고 있다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짠 하고 발현되는 거죠. 역사의식이라는 DNA가 온몸을 휘감으면서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역사적 장면에 뛰어들게 될 수도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역사 속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사는 길일거에요. 이것이 ‘만약’으로 시작하는 여러분의 질문에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입니다. p 024



많은 사람들이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만약’을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렇다. 예컨데 가야가 연맹국가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도래인의 후예인 고대 일본이 국수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선조가 일본이 침략할 것다는 상소를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조가 일말의 정이라도 남아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벨테브레, 하멜이 조선에 표류했을 때 조선정부가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정조가 문체반정이 아닌 여러 학문에 개방적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고종이 자기 권력이 아닌 백성을 챙기는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등등등. 정말 많은 ‘만약’을 떠올렸다. 물론 이와 조금 결이 다른 ‘만약’도 있다. 예컨데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이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못했을 것이다. 난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죄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에서 큰별샘이 말했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라고, 그때와 우리가 사는 시대과제는 전혀 다르다고. 2025년을 사는 나는, 2025년에 맞는 시대과제가 있으니 그 과제를 풀어나가면 된다고.



지금으로부터 가까운 과거인 1950년, 오랫동안 부진하던 대구상고 야구부가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전국야구선수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대구상고 야구부원들은 기세를 몰아 다음 대회를 생각했다. 당연하다. 아마 현재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적 영웅? 이런 거창한 일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야구대회에서 뛰어야 했을 학생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학도병으로. 군번줄 하나 없어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전쟁 중에 산화했다. 



우리가 역사를 보며 ‘만약’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처럼 학교를 다니고, 운동을 하던 평범한 학생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문제에 맞닥드렸고, 전쟁전에는 생각한적 없던 ‘나라를 지키겠다’라는 생각으로 전쟁에 나선것이다. 





※김득신의 묘비 中

“나보다 머리 나쁜 사람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조선의 노둔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너는 못 해’라고 한계를 정한 적이 없다. 혹시 당신이 살다가 재주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처럼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해보아라. 내 시대에 나보다 시를 빨리 쓰는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시험에 빨리 합격한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글을 빨리 배운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나와 같이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지금 당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시를 빨리 쓰는 사람, 시험에 빨리 합격한 사람, 글을 빨리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것저것 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것보다 하나에 매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건 내가 구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다.” p 086



숙종 재위기 문신 김득신. 안동 김씨 출신으로 조부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이다. 아비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사회적인 명성이 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니, 그 역시 그 뒤를 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그는 머리가 나빴다. 정말 나빴다. 정말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통틀어서! 이보다 더 나쁜 사람은 없을거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나빴다. 오죽하면 그가 글을 깨우친 건 10살 때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득신이 엄청난 독서가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공부도 그누구보다 전투적으로 했다. 다만 암기력이 매우 부족했을 뿐이다. 몇 시간전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최악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 오죽하면 《백이열전》을 11만 3천번을 읽었겠는가. 하지만 11만 3천번 읽은 《백이열전》의 내용 조차도 기억을 못하든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정말 우직하게 공부했다. 그렇게 59세에 이르러서야 대과에 합격했다. 


김득신 일화는 나는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요래서 못한다는 변명으로 중무장 한 사람들이 꼭 봐야할 일화다.




※ 매천 황현의 유언中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괘함을 깨달을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 p 115


황현의 죽음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황현이 죽기 전에 쓴 <절명 시>에는 “그저 인을 이루고자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은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도 아니고, 나라에서 자신을 위해 해준 것도 없다는 거에요. 그렇지만 500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온 왕조의 역사가 끝나는데, 그 왕조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선비 문화의 수혜자 중 한 명도 죽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그가 자결을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p 115



19세기 조선은 어떤 나라였나. 세도정치가 들끓었다. 왕이 누구냐에 따라 안동 권씨, 풍양 조씨가 권력을 나눠가졌고, 얼마안가 여흥 민씨가 그 권력을 가져갔다. 권력을 주로 지녔던 성씨만 바뀔 뿐, 지배층인 그들은 지들끼리 권력을 노나먹고 백성을 수탈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가렴주구,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백성들 등쳐먹는데 혈안이 되었던 이들이 바로 조선 왕실과 권력을 나눠가진 양반들이었다. 물론 권력에서 떨어진 양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반기를 들면 죽음 뿐이니 대세를 따랐다.


매천 황현은 그런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권력에 몰려드는 개떼같은 양반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부패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 문화의 수혜자이자, 기득권층에 속했기에 받은 만큼의 책무는 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바로 ‘기록’이다. 


부패한 조선 왕실과 양반들의 행태를 가감없이 써내려갔다. 그가 《매천야록》에 남긴 마지막은 ‘경술국치’였다. 그렇게 조선 왕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것까지 적고나서야, 그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고 보았다. 그렇게 그는 서스름없이 자결을 택했다.




※육영공원과 명동학교※

육영공원은 조선 말, 정부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한국 최초 근대적 명문 귀족 공립 학교다. 정부는 외국인 교사까지 초빙하여 엘리트 통역관 양성에 힘썼다. 엘리트 통역관 양성이 목표였기에, 당연히 ‘영어’가 기본이었고 그 외에 여러과목을 가르쳤다. 나라에서 큰돈들여 가르친만큼, 육영공원 졸업생은 높은 관직이 보장되었다. 해서 ‘출세’를 위한 양반가 자제들이 입학하고자 했다. 육영공원 1회 입학생은 누구일까? 대세에 따라 친미, 친러, 친일을 오가며 오로지 출세를 위해 살았던 사람, 성공과 부를 쫓았던 사람, 이완용이다. 친일매국노 중에선 그 어렵다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사람이다. 



명동학교는 독립운동가 김약연은 북간도 지역에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이다. 명동학교의 목표는 ‘한반도에 빛을 밝히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1908년에 설립되어 1925년에 폐교되었는데, 그 동안 천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 면면을 보자.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 나운규’ 등이 명동학교의 졸업생이다. 이들을 비롯한 명동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출세나 성공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했던건 한반도에 빛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2025년 현재를 보자. 지금 우리 학생들이 다니는 초중고등학교는 어느쪽에 더 가까운가. 학교폭력은 과거에 비해 유례없이 증가했다. 학교는 학교폭력 사건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대신 성적을 올리고, 얼마나 많은 졸업생이 서울권 대학교로 진학했는지 광고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은 이완용으로 자라고 있는가, 윤동주로 자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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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길 위에 저 시간 속에 - 빛나지만 음험하고 고요하지만 번화하며 고풍스러우면서도 탈역사적인 척하는 어느 매력적인 도시 여행기
이인우 지음 / 파람북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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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엔 책이 많다. 너무 많다보니 어쩔수없이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종종 나눔을 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책들이 있다. 대체로 역사책 또는 역사기행문 등이 그렇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책, 역사기행문을 다 이고지고 가느냐? 그건 또 아니다. 그 중에서도 내 취향에 맞는 책들만 살아남아,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다.


내 취향에 맞는 역사책, 역사기행문은 대체로 한국사, 일본사, 한일관계사와 관련된 책이 많다. 특히 한일관계사는 고대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자타공인 역사더쿠 피로가 해외 답사를 주기적으로 다니게 했던 건 다름아닌 도래인과 한일고대사 유적지였으니까. 그런 내가 오랜만에 한일고대사 답사 여행기를 읽었다(엄밀히 따지면 이 책은 교토 전체를 답사하는 여행책임ㅋㅋ). 그리고 이 책은 남 주지말고, 끝까지 소장하자고 생각했다.


이 교토 여행책 제목은 『교토, 길 위에 저 시간속에』 다. 제목만 봐도 ‘일본 교토 여행기’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 여행기가 어떤 방식으로 쓰여졌는지는 책을 읽어봐야만 알 수 있다. 혹은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거나. 본격 리뷰에 앞서, 이 교토 여행책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살짝 귀뜸해보자면?



힌트 하나! 이 책의 저자는 현재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힌트 둘 ! 이 책의 부제는 「교토, 빛나지만 음험하고 고요하지만 번화하며 길 위에 저 시간 속에 고풍스러우면서도 탈역사적인 척하는 어느 매력적인 도시 여행기」 다. 


그렇다. 이 책은 교토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문화적 시선으로,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여행기이자 답사기다. 


교토는 헤이죠쿄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한 8세기부터, 19세기 도쿄로 이전하기 전까지 일본 수도였다. 무려 천 년 동안 일본 수도였던 장소이기에, 그 곳에 켜켜이 쌓인 역사는 하루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란다. 하지만 여기서 교토 천 년 역사 중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천 년 역사의 팔할이 한반도 도래인이 쌓아올린 역사라는 점이다. 아니, 교토의 시작 자체가 ‘도래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교토 여행지 중 관광지로 유명한 여러 사찰, 신사들은 한반도 도래인이 창건한 경우가 태반이다. 교토 여행 시 한 번 이상은 꼭 들른다는 후미시이나리타이샤, 기요미즈데라, 키타노 텐만구, 야사카 신사. 이 신사, 사찰을 창건한 사람이나 모시고 있는 신은 모두 한반도 도래인이거나, 도래인이 모셔온 한반도 신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나는 도래인, 한일고대사 유적지 답사를 자주 다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해도, 일본을 연 2회씩 다녔다. 여행겸, 덕질겸, 답사겸 겸사겸사 말이다. 제일 자주 방문했던 곳은 아무래도 ‘교토’다. 일본 곳곳에 도래인 유적지가 산재하지만, 접근성이나 명성 등 교토에 있는 도래인 유적지가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그래서 더 교토를 자주 찾은 면도 있다. 



이 책 4번째 챕터가 바로 교토 도래인에 대한 이야기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내용 자체는 알고 있는 내용들이 다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 테두리 안에서다. 세세한 내용 중에는 처음 알게 된 내용도 많았기에, 더욱 집중하며 읽었다. 특히나 출산 이후 일본을 못 간지가 n년 째 되는지라, 더 집중한 면도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가봤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장소가 많이 변했음을 책을 통해 알게되서 조금은 씁쓸한 면도 있었다.



아래는 ‘도래인’과 관련한 주요 키워드다.


아오이(=아욱)



 


푸른 아욱 잎사귀는 가모족 신화에 등장한다. 신화에 따르면, 신을 맞이하고자 하는 사람은 ‘푸른 아오이 잎으로 몸을 장식하라’는 신탁이 있었다고 한다. 신이 강림한 신산에는 푸른 아오이가 무성했다고 하고,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는 푸른 아오이 잎이 ‘만남’의 매개가 되어주는 이야기이다. 이 신화에 근거해 아오이의 어원을 일본어의 ‘만나다’라는 뜻인 ‘아우’와 신령 또는 신의 힘을 뜻하는 ‘히’의 합성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손들의 신화적 해석일 뿐 한국어와의 유사성으로 볼 때 ‘아오이’는 토템화된 ‘아욱’ 그 자체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p 260



‘아욱길’을 따라 열도에까지 이른 ‘도래인’들은 어떻게 ‘일본’이 되어갔을까. 아오이마쓰리 퍼레이드의 종착지인 가모신사의 문장은 ‘후타바아오이’. 두 장의 잎으로 묘사된 아오이 문양이다. 이 문장은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인 시모가모와 가미가모 두 신사의 친족 관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저도 있다. 교토의 또 다른 도래인 호족이었던 신라계 하타씨 신사에도 이와 똑같은 문장이 있기 떄문이다. 가모씨와 하타씨는 혼인 등으로 유대를 맺고 고대 교토 일대를 양분해 다스린 호족이었다. 794년 간무덴노가 천도를 단행했을 때 배후에서 이를 지원한 세력이 이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 부족은 덴노가 교토로 옮겨운 뒤에는 황실 수호 신사를 자임했는데, 이런 내력으로 후타바아오이는 가모족의 내부 결합에서 나아가, 가모씨와 하타씨 두 부족 간의 단단한 동맹, 즉 ‘결합력’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개의 가모신사 자체가 애초 가모족과 이즈모족 동맹의 결실이기도 했다. p 262~263



교토를 가면 한 번 쯤은 꼭 거니는 가모강변. 가모강변 상류에는 두 개의 신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가모강변 상류까지 가지는 않는다. 아오이 마츠리가 개최하는 시기 빼고. 여튼! 가모강변 상류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두 개의 신사가 있는데, 바로 시모가모 신사와 가미가모 신사다. 이 두신사는 한반도 도래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사다. 



뭐, 애초에 교토 일대를 일군 사람들이 한반도 도래인이다보니, 교토 내에서 천년 내력을 가진 신사와 사찰 중 도래인 연관성이 없는 곳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긴 하다. 도래인이 창건했거나, 혹은 그 후손이 창건했거나, 혹은 도래인의 비호를 받았던 사람들이 도래인(또는 그들이 모셔온 한반도 신)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거나. 



시모가모 신사와 가미가모 신사 내력을 보면, 아주 오랜 과거 초대 천황인 진무의 정복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운 가모족이 공로로 받은 영지가 바로 가모강변 일대였다. 이후 이즈모족이 가모강변 일대로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두 부족은 영지 다툼없이 융합되어 살았다고 한다. 대충 혼인동맹으로 추정된다고나 할까?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가모족 수장의 이름과, 이즈모족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초대천황 진무는 일본 건국시기를 기원전 660년으로 설정하며 생겨난 허구 인물이다. 초대부터 9대까지는 시간상 끼워맞춘 인물이며, 이들 천황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서기』에도 크게 다루지 않는다. 물론 진무의 이야기를 지어냄에 있어서 일부 사실이 있을 수 있으나, 『일본서기』 특성 상 5%의 진실로 95%의 허구가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가모족 수장의 이름은 ‘야타가라스’. 우리 말로 하면 큰 까마귀다. ‘큰 까마귀’! 한국 고대신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다면, 바로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바로 ‘삼족오’다. 본디 삼족오는 태양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철기 기술을 지닌 부족이기도 하다. 따라서 삼족오(태양)을 숭상하는 부족은 대체로 철기기술을 바탕으로 농경을 하는 집단이다. 이즈모족 명칭도 우리말로 풀이하면 ‘떠나는 구름’이다. 즉 이즈모족도 구름이 떠나면, 떠오르는 태양을 섬기는 농경부족이었던 셈이다. 두 집단 모두 농경 부족이었기에 융합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타 씨(=진 씨)



대언천을 건설한 주체는 4세기 무렵 신라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온 도래인 집단 '하타‘ (한자로는 ‘진’을 쓴다)씨 일족이다. ‘하타’ 또는 ‘하다’ 라는 씨족명은 한국어 ‘바다‘ 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는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파단국’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하타씨는 처음에는 교토 남쪽 나라현 가쓰라기 지방에서 살다가 도래계 주민들을 이끌고 야마시로 (지금의 교토) 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뒤, 당시 황무지였던 이곳 대언천 개발에 성공했다. 하타씨들은 대언천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상업에도 진출, 7세기 초에는 대호족으로 성장했다. 아라시야마 일대는 물론 강 건너 동쪽의 사가노와 우즈마사, 교토 남쪽 후시미의 후카쿠사 등에서 대촌락을 이루었고, 마침내 야마시로 전체의 주인이 됐다. p 267



대호족으로 성장한 하타씨는 대언천 건너 동쪽 지역도 세력권에 넣었다. 마쓰오신사에서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우즈마사 라는 지역인데, 이름을 그대로 풀면 하타씨의 맏이 , 즉 큰집(장손집) 또는 ‘종갓집'을 의미한다. 하타씨의 씨족명이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된 셈이다. 우즈마사와 인근 사가노 일대에는 하타씨족의 것으로 인정된 고분이 즐비하다. 그중 특히 우즈마사 주택가에 돌무지로 남아 있는 헤비즈카 고분이 유명하다. 전장 70여 m로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이 전방후원분 유적은 하타노 카와카쓰축 (생몰년 미상)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것으로 추정된다. 하타씨족의 수장이던 하타노 카와카쓰는 유명한 고류지는 절을 지은 사람으로, 7세기 초 일본의 통치자 쇼토쿠 태자의 정치 고문이기도 했다. p 270




이 책 리뷰를 하면서 과거에 내가 포스팅 했던 도래인 유적지 답사 및 역사책 리뷰를 다시 봤는데, 당시 나는 옛 강원도 울진 땅에 있던 ‘파단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하타 씨’가 된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표현했더랬다. 정확히는 신라장군 이사부가 파단국을 점령하던 그 때, 신라에 복속되기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하타 씨’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파단’을 일본어로 읽으면 ‘하타’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왠걸! 현재 한일고대사에선 ‘파단국’ 사람들이 일본 ‘하타 씨’가 된 게 정설이라고 본다고 하니, 내 나름대로 잘 추론한듯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즈마사에 있는 하타씨가 세운 가이코노 야시로 신사 산쥬도리이와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 산쥬도리이와 연관성에 대해서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뜬금없이 왜 산쥬도리이 이야기인가 하면, 일본 신사는 기본적으로 금문(?) 역할을 하는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보통 도리이는 기둥이 두 개인데, 교토 우즈마사에 있는 하타 씨 신사에 기둥이 세 개인 도리이가 있다(일명 산쥬도리이).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에도 산쥬도리이가 있다. 와타즈미 신사에 있는 산쥬도리이는 용왕신 이야기라, 언뜻 보기엔 하타 씨와 큰 연관이 없어보이지만, 이게 또 아예 연관이 없다고 하기엔 좀 꽁기꽁기 하다. 일단 대마도가 한반도와 제일 가까운 지역이자, 도래인들이 넘어갈 때 경유지가 되는 지역이기도 하고 말이다. 





너럭바위배 (핏, 연오랑 세오녀 설화)



일본황실이 시조로 여기는 진무덴노가 정복전쟁(어디까지나 가공의 역사이다)을 벌일 때. “진무의 어머니 다마요리 히메가 오사카만에서 요도가와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사당을 지었고, 그때 타고 온 배를 사람들이 들로 덮어 놓은 것”이란 전설이 ‘황실 버전’이다. 두 번째는 유사한 내용에 주인공이 진무의 어머니에서 가모신사 제신 의 어머니(다마요리 히메라는 이름은 똑같다)로 바뀐 ‘신토 버전’ 이다.p 281



그런데 묘하게도 기후네신사의 중궁은 끊어진 인연을 다시 맺어주는 결연의 신사로 이름이 높다. 고대의 여류시인 이즈미 시키부가 기후네신사를 찾아와 냉담해진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길 빌어 소원을 이룬데서 유래했다는데, 고대의 이 지식인 여성은 무슨 '전승'에 근거하여 이 깊은 산속 신사에까지 와서 재회의 소망을 빌게 됐을까? p282 



우리나라 ‘연오랑 세오녀 신화’와 연관성이 있는 너럭바위 배 전승. 나는 너럭바위배 전승이 시마네현에 있는 카라카마 신사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토 키후네 신사에도 있었다. 물론 카라카마 신사 너럭바위와 키후네 신사 너럭바위에 얽힌 내용은 조금, 아니 상이하긴 하다. 오히려 연오랑 세오녀와 연관성은 교토 기후네 신사보다는 시마네현 카라카마 신사가 훨씬 높다고 해야할까?



물론 세오녀가 일본에서 연오랑을 만난 뒤 ‘귀비’에 추대되었다는 점과 ‘기후네’ 신사 명칭의 연관성, 그리고 연오랑과 세오녀의 끊어진 인연이 일본에서 다시 이어졌다는 점과, 기후네 신사가 끊어진 인연을 연결해주는 신사라는 연관성을 보았을 때, 확실히 기후네 신사에 얽힌 전승이 연오랑 세오녀 전승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나 현제 기후네 신사에서 내려오는 전승은 누가봐도 일본 황실 주도하에 변형된 전승이고. 



연오랑, 세오녀, 너럭바위 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시마네현 카라카마 신사에 얽힌 전승(일본 건국신 스사노오 전승) 살짝 해볼까 한다. 물론 이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건국신 스사노오는 신라국 소시모리라 불리우는 곳에서,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온 신이다. 스사노오가 탄 바위배가 카라카마 신사에 남아있다(①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연오랑). 이 외에도 스사노오 일화 중 야마타노 오로치 퇴치 설화에 ‘가라쿠니(韓國)마루’라는 칼을 사용한다. 이는 가라쿠니에서 만든 칼이라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②철기문화를 지니고 있던 집단으로 대표되는 연오랑/현재 ‘포항’은 제철소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시마네현에는 스사노오를 주신으로 모시는 히노미사키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 권내에 작은 신사가 남아있다. 실제로는 이 작은 신사가 히노미사키 신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작은 신사에는 ‘가라쿠니(韓國)신사’라고 적혀있다.(③한반도 도래인 ‘연오랑’이, 한반도 신을 위해 만든 사당) 또한 시마네현에는 ‘니시코리’라는 도래인 성씨 집성촌이 있는데, 이 성씨의 한자를 풀이하면 ‘비단을 짜는 집단’이라는 뜻이다(④직조기술을 지닌 집단이 ‘세오녀’를 대표하여 일본으로 들어옴). 이 외에도 『이즈모 풍토기』에서 나오는 ‘쿠니비키’ 일화, 시마네현 ‘고진다니 유적’등 스사노오와 ‘연오랑 세오녀 설화’ 연관성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간무 천황



2001년 당시 일본 아키히토 덴노가 68살 생일 기자회견에서 "간무덴노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 이라고 역사(속일본기)에 기록된 사실에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 발언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충격적 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발설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기'를 덴노 자신이 건드렸기 때문이다. 히라노 신사는 아키히토 덴노가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한 간무덴노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신사이다. p 288



적자인 이복동생을 제치고 44살에 어렵게 즉위한 간무는 정통성 강화를 위해 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기존의 일본 태양신(먼저 열도에 들어온 가야, 신라계 태양신앙)에 대륙(고구려, 백제) 태양신을 더해 자신을 하늘이 내린 덴노로 포장하고 싶었다. 황태후 추존문은 그런 당시의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기록은 8세기 일본에도 고구려 난생신화가 전해진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무척 흥미롭다. 이처럼 간무와 니가사는 자신들의 혈통, 즉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진 도래계 계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간무 집권 뒤 정치는 간무 옹립을 주도한 후지와라 가문과 백제, 고구려 출신의 도래계가 주도했다. 대신 등 고위직을 뜻하는 '의정관' 5명이 고구려와 백제계였던 사례는 이때 말고는 없다고 한다.p 294



간무 덴노, 그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고야 신립), 간무 집권 시 도래계 고위직 등 이런 이런 이야기는 포스팅을 워낙 자주 했으니 생략...하지만, 여기서 자주 반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 하나를 말하자면. 간무덴노 당시 일본 최초 정이대장군(쇼균)이 발탁되었다. 그의 이름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그가 발원하여 창건한 사찰이 있으니 바로 교토 최대 관광지 기요미즈데라(청수다)다.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있는 ‘전촌당’에 다무라마로 부부상이 모셔져있다. 물론 비공개라는게 함정.



여기서 중요한건, 바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본인. 일본 최초 쇼군이었던 다무라마로는 백제계 도래인 후손이다. 책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어서, 후술하자면. 일본 사서 『속군서류종』에 따르면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백제 왕족인 ‘아지사주(=아치노오미)’다. 특히 ‘아지사주’는 야마토 아야씨의 조상이기도 하다. 참고로 야마토 아야씨는, 5세기 야마토 정권 당시 무력(군사력)을 쥐고 있던 도래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후예인 다무라마로가 일본 최초 쇼군에 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여기서 조금 더더더 덧붙이자면, 교토가 수도가 되기 이전부터 야마토, 아스카, 나라시대 모두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황실 외척 및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한일고대사책을 멀리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꺼져가던 지식의 불씨를 살렸다. 이제 다시 한일고대사 책을 읽어보기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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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개를 키우려는 당신에게 - 개를 키울 자격에 대하여
강형욱 지음 / 혜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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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욱 훈련사 책이 나왔다. 반려견 훈려사가 쓴 책이기에 당연히 반려견 문제행동 교정이나, 반려견 훈련법 이런 류의 책이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내 생각은 틀렸다. 강 훈련사가 집필한 책은 에세이였다. 에세이 제목은 『그럼에도 개를 키우려는 당신에게』.




에세이를 쓴 사람이 강 훈련사이니만큼, 당연히 일반적인 에세이는 아니다. 책 전체적으로 반려견, 문제견 교정 등에 대한 지분이 아주 크다. 당연히 반려견을 키우는데 있어서 어떤 훈련을 해야하는지, 돌발사고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 도심에서 반려견을 키우려면 어떻게 훈련을 해야하는지 도 실려있다. 읽고나서 깨달았다. 이 에세이 『그럼에도 개를 키우려는 당신에게』는 이제 막 반려견을 입양한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책이구나!



강형욱 훈련사가 진행했던 EBS <세상에 나쁜개는 없다>, KBS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은 정말 꾸준히 챙겨봤다. 이 프로그램들은 문제견의 행동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실제로는 문제견에 더해 보호자의 문제행동을 교졍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한마디로 문제견이 되는 원인은 ‘보호자’ 였다. 반려견은 보호자의 행동에 따라 문제견이 될 수도, 천사견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해당 프로그램에서 나온 문제견 99.9%의 원인은 보호자였다. 



문제견을 만들어낸 문제적 보호자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랬다. ① 반려견은 사랑스런 내 새끼, 내 가족이에요(유사품: 우리 애는 안그래요! ② 반려견은 내 소유물(애완견)이에요(너무 인형같이 이뻐써 데려왔어요. 한 쪽은 너무 과하게 생각하여 개가 아닌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고, 또 한 쪽은 반대로 내가 원할 때 또는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야 할 소유물로 생각했다. 양극단에 있는 이 두 생각을 가진 반려견 보호자들은, 자신의 반려견을 문제견으로 만들 확율이 100%다.



반려견을 키우기 전에 꼭 명심해야할 사실이 있다. 반려견은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과,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만 인지하고 있어도, 반은 먹고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조금 더하면, 내가 반려견을 키우는 환경은 사람이 많고, 차가 많은 도심이라는 점이랄까.



이 에세이를 읽으며 여러 에피소드 중 유독 머리속에 맴도는 구간이 있었다. 동네 유지가 키우는 폭력적인 개가, 자신의 집에 침입하여 반려견을 물어뜯어 죽인 내용이었다. 그 가해견은 동네에서도 유명한 문제견이었다. 동네에 피해자도 많았다. 하지만 문제견의 보호자는 동네 유지. 그 사람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피해를 입어도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동네에서 온갖 말썽을 일으키고, 여러 유혈사태를 일으켰던 그 가해견과 가해견의 보호자. 결국 그 가해견은 동네로 이사온,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보호자네 반려견까지 물어뜯어 죽이는 사태까지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 체계 안에서 내 개가 다른 개에게 물어뜯겨 죽었다 한들 어떠한 법적 조치를 취할 방도가 없었다. 기껏해야 개값을 물어주는 정도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상황을 보며 강훈련사는 이야기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개물림 사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대처한다고. 



▶ 개물림사고에 대한 미국, 영국 등의 나라들의 대처 방법

마당에서 그 개(가해견)들을 발견했을 때 즉시 경찰에 신고한다. 출동한 경찰이 곧장 그 개들을 포획 또는 사살한다.


포획된 가해견은 적절한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지정된 보호소에 격리시킨다.


피해를 입은 보호자에게 신고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다.


피해를 입은 보호자에게 가해견의 안락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피해견의 보호자가 가해견의 안락사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도,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안락사 여부를 결정한다.


가해견을 안락사시키지 않을 경우에도 다시 원래의 보호자에게 돌려보내진 않는다.


가해견의 보호자는 경찰 조사를 받고 관리 소홀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진다.


가해견의 보호자는 자신의 반려견이 초래한 모든 피해를 보상한다.


사건의 경중에 따라 가해견의 보호자를 형사 처벌할 수 있도록 하며, 다시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못하게 한다.




개물림 사고에 대한 선진국의 대처방법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제 대한민국도 선진국이다. 여러 방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앞서고 있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그런데 왜 반려견 문화에 한해서는 후진국을 자처하는 것일까.



자신이 키우는 개가 위험하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는 산책과 운동이 필요한데, 자신은 같이 운동할 힘도 그럴 여유도 없으니 너 혼자 돌다 오라면서 그냥 개를 풀어놓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다른 개나 사람을 공격한다면 이후엔 절대로 풀어놓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인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p 051



그동안 훈련사로 일하면서 심각한 반려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보호자의 손가락을 물어서 잘라 버린 개, 옆집에 쳐들어가서 어린아이를 물어 버린 개, 묶여 지내던 동네 개를 물어죽인 개, 산책 중이던 할머니를 문 다음 질질 끌고 다닌 개 등등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견들을 봐 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 개들의 보호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의 법이 약해서 지금 이 개가 살아 있는 거에요. 개를 키우는 분들은 입을 모아 동물 보호법이 다 강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동물 보호법이라는 건 사람을 물고, 고양이를 죽이는 개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보호자님과 이 개는 한국에 살고 있는 걸 천만다행으로 아셔야해요.” p 072



그럼에도 (개 2 마리를) 키우고 싶다면, 제가 드리고 싶은 가장 중요한 조언은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하지 않고 각자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라는 겁니다. 보호자들은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들을 형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려견들이 서로 의지하며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들도 형제들끼리 평생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매일 형제와 식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근데 개들한테는 형제니까 평생 같이 자고 같이 먹으면서 사이 좋게 지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 자체가 반려견들에게는 고통스럽고 무리한 부탁일 수 있습니다. p 109



문제행동을 하지 않는 반려견을 키우기 위해선, 그에 맞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보호자가 반려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반려견이 언제든 뛰어놀 수 있는 너른 야외 공간, 보호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산책 시 안전에 위협을 받지 않는 장소, 개가 짖어도 주변에 소음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집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는 반려견을, 우리나라에서 쉽게 보기 어렵다. 



개가 조금만 짖어도 소음공해 유발자로 낙인찍히는 다세대 주거공간(아파트, 빌라 등), 산책을 하려해도 여기저기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로 인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안전문제, 회사 및 학교 등으로 보호자와 매일 오랜 시간 홀로 있어야하는 외로움 등. 이런 이유로 인해 생각보다 많은 반려견들이 문제행동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저런 악조건에 있다고 모든 반려견들이 문제행동을 보이는 건 아니다.




▶ 강형욱이 추천하는 ‘완벽한 훈련 방법’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밖에 나가 배변을 하게 해주세요 : 반려견들의 본능


집에 있는 시간을 늘리고, 한 장소에 오래 있어 보세요 : 분리불안 예방


입에 있는 것을 뺏지 마세요 : 위험한 물건들을 물고 있는 등의 특수한 상황은 제외!! 


한 번쯤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산책을 다녀와 보세요 : 엘리베이터는 동물의 선천적인 귀소본능을 방해


야외에서 밥을 한 번 먹여보세요 : 반려견에겐 좋은 추억을 주는, 일종의 소풍


집 안에서 산책을 해 보세요 : 기본생활 규칙을 지키게 하고 분리불안 예방을 위함. 단 꾸준한 연습이 필요


산책 중에 낯선 사람과 인사를 나누어 보세요 : 반려견 사회성 개선




이렇게 강훈련사가 추천하는 훈련방법은 반려견을 키우는 견주라면, 반려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진 보호자라면 언제든 쉽게 시도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반려견을 키우는 보호자라면, 부디 반려견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위의 훈련을 반복했으면 좋겠다. 이는 반려견의 문제행동 교정만 고쳐지는게 아니다. 누군가가 키우는 반려견으로 인해 여러 피해를 받던 이웃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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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도쿄 깊숙이 일본 1
진나이 히데노부 지음, 안천 옮김 / 효형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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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여행으로 자주 방문했던 곳이다. 관광객들이 즐겨가는 도쿄 시가지 뿐만 아니라, 외곽도시까지 포함해서. 내 여행 목적은 주로 답사가 많았기에, 교통편을 이용하기보단 걸어다니는 일이 많았다. 도쿄에서 걷다보면 자연스레 만나는게 있으니 바로 마을 주변을 흐르고 있는 인공 수로다. 우리나라처럼 더러운 수로가 아니라, 정말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로. 도쿄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내 발길이 닿는 곳곳에는 언제나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로가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 일본이라는 나라는 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생각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섬나라인 일본은 ‘식수’ 확보가 정말 중요하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주변이 바다이니, 물을 쉽게 구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이 사용하는 물은 ‘담수’, 즉 염분이 없는 물이다. 염분이 기본값인 바닷물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바닷물을 쉽게 구할 수 있을 지언정, ‘담수’를 구할 수 없다면 그 곳에서는 사람이 절대로 살 수 없다. 물론 바닷물을 담수화 시키면 사용할 수도 있지만, 아직 그런 기술이 상용화 되어있지 않을뿐더러, 있는 기술마저도 적용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인간이 담수를 구하는 방법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강(+개천, 저수지 등)’, 하늘에서 내리는 ‘비’ 밖에 없다. 그래서 인류의 터전은 언제나 강변 주변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일본을 떠나 모든 나라가 동일하다.


일본은 그냥 섬나라가 아닌, 화산 섬나라다. 일반적인 ‘산’보단 ‘화산’의 비중이 월등이 높다. 그래서 더더욱 물을 구하는데 진심이었다. 얼마나 진심이었냐면, 고대 일본은 수로, 제방, 토목 공사 기술을 가지고 있는 한반도 도래인이 하타씨를 중용했을까. 


각설하고! 그만큼 일본에게 ‘물’은 중요했다. 


이 책 『물의 도시 도쿄』 은 일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물’과 명실공히 일본의 수도 ‘도쿄’를 엮었다. 정확히는 도쿄라는 공간에서, 그 공간을 흐르는 강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게 도쿄와 강변에 켜켜이 쌓인 시간과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난 역사책이다. 




물의 도시’의 상징, 도쿄 스미다강



스미다강은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과거에는 일본 전통극인 ‘노’와 ‘가부키’, ‘닌교조루리’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와세다-게이오 조정 경기, 스미다강 불꽃놀이 등 도쿄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스미다강변 주변에 센소지를 시작으로 스모의 중심지인 료고쿠 국기관, 에도도쿄박물관, 도쿄 스카이트리 등이 즐비해 있다. 이로인해 도쿄 시민 뿐만 아니라 해외관광객까지도 스미다강을 찾는 이가 해마다 늘어났다. 지금은 명실상부 도쿄 핫플레이스 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스미다강이 도쿄 중심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심지에서 벗어난 스미다강이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우메와카키가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그 무대인 모쿠보지 사원은 큰 의미가 있어 쓰루오카 로스이의 <동도 스미다강 양안 알람>에도 묘사되어 있다. 센소지 사원에서 약간 북동쪽에 있는 마쓰치산도 중요한 곳으로, 작은 언덕이 성지로 여겨진다. 595년에 용이 나타나 이곳이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센소지 사원은 7세기 전반에 스미다강에서 낚시하던 형제의 그물에 관음상이 걸려, 강에서 건져 올린 그 관음상을 모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p 026



스미다강은 에도가 도시로서 발전해 가는데 꼭 필요한 오랜 역사의 뿌리가 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낳는 장소, 즉 에도에서 정신문화의 원류라는 의미를 지녔다. 에도보다 기원이 훨씬 오래되며, 사람들의 의식 구조와 연관이 있는 종교 시설이 많고, 에도가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주변부의 성격을 띠게 된 덕택에 자연의 풍요로움이 보전되었다. 이로 인해 스미다강은 일본인이 선호하는 독특한 개방감 넘치는 곳이 되었고, 신앙과 유희의 요소가 맞물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p 029



그렇다. 도쿄 중심부에서 벗어난 스미다강은 아주 오래전, 에도 시민들의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에도가 권력의 축으로 성장하기 전에는 에도의 중심부랄게 없었다. 그러다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를 발전시키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에도의 중심부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스미다강을 사랑한 거주민들은 끝까지 스미다강을 향한 애정을 지켰다. 그리하여 발전한 에도/도쿄 중심부에 있는 니혼바시강은 그저 물류, 경제와 관련된 ‘실체적’인 문화가 발달한 반면, 스미다강은 에도/도쿄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정신적’인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도쿄의 역사는, 17세기 무렵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에도가 역사의 전면으로 나온 시기가 도쿠가와가 에도 발전을 꾀한 17세기 부터이지 어찌보면 맞는말이긴 하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도쿠가와가 에도로 들어가기 전에도, 에도는 사람이 사는 땅이었다. 7세기에 창건된 센소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9세기에는 스미다강을 건너는 사람이 늘어나 선박을 증편했다는 태정관부 기록도 있다. 심지어 7세기 이전에는 거슬러가면, 스미다강을 포함한 도쿄 일대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자리잡은 터전이기도 하다. 에도는 도쿠가와가 개발하기 이전부터, 고대부터 시작되는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인 것이다.



에도라는 도시에서는 권력의 상징(에도성)과 큰 강(스미다강)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 선착장에 다다르면 막번 체체하의 도시였음에도 일상의 여러 속박에서 벗어나 물가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축제와 행사를 즐기고, 세속적인 놀이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스미다강 중상류 유역의 에코인이나 센소지를 비롯한 사원에 참배하러 간다는 구실도 있었다. 이처럼 에도는 스미다강 건너 보쿠토 지역 또는 스미다강을 거슬러 올라 더 깊숙이 들어가는 원심력이 작용하는 도시였던 것이다. p 042



도쿄 스카이트리가 스미다 강변 동쪽에 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전망이다. 스카이트리에서 내려다보는 도쿄 전망은 이 백 년전 구와가타 게이사이가 그린 에도 조감도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구와가타 게이사이가 그린 에도 조감도는 스미다강 동쪽 고지대에서 서쪽 에도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형태로 그렸다. 이는 에도 조감도의 원형이 되어, 후대 화가들이 계승하여 동일 각도의 에도 조감도가 계속해서 그려졌다. 즉 도쿄 스카이트리에서 내려다보는 도쿄 전망은, 이 백 년전 에도 사람들이 보던 에도와 같다. 게이사이가 그린 에도 조감도부터 후대 화가들이 계승하여 그린 조감도, 그리고 현재 도쿄 스카이트리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그야말로 같은 공간에 이 백 년 차이를 둔 에도와 도쿄가 공존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라 현립 미술관이 소장한 <아사쿠사 요시와라 그림 두루마리>는 스미다강의 역할과 의미를 상징하는 매우 흥미로운 회화 사료다. (중략…) ‘물의 도시’의 다양한 상징, 스미다강변의 지리적 특성, 그리고 ‘깊숙함’을 품은 에도 특유의 도시 공간이 여기 모두 표현되어 있다. 정치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도시 창건 전설과 신화가 저변에 있는 스미다강 상류, 이 주변이ㅡ 센소지 사원과 마쓰치산, 나아가 ‘주변의 나쁜 곳’이라고도 불리는 신요시와라가 에도 도시 공간 안쪽에 자리해 사람들을 매료하는 독특한 구조를 이 두루마리는 보여준다. p 054



에도도쿄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 스미다강. 늘 반짝이는 스미다강, 그 이변에는 무거운 그림자도 있다. 에도도쿄 시민들은 이미 잊어버린 그림자. 하지만 우리는 꼭 기억해야할 그림자. 바로 ‘관동대학살’이다. 스미다강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관동대학살’이라는 단어는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살짝 이야기해보자면.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관동 지역에 속한 에도는 지진으로 집이 무너졌다. 하필 지진이 일어난 시간이 점심시간이라 불을 사용한 집이 많았다.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밥 짓던 아궁이 불이 무너진 자재들에 옮겨붙으며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에도에 있는 집은 대게 나무집이었기 때문에, 에도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믿기지 못할 재난에 에도인은 분노했다. 그 분노를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했다. 바로 조선인 학살이다.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어선 안될 ‘관동대학살’이 시작이다. 그렇게 학살된 조선인 시체는 스미다강에 버려졌다. 당시 스미다강물이 빨갛게 변했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많은 조선인의 피가 스미다강에 흘러들어갔는지는 말해 무엇할까. 



슬프지만 이 책 『물의 도시 도쿄』에는 이런 내용은 없다. 대신 관동대지진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수질 오염된 스미다강, 고도 성장기에 요정가가 즐비해 있던 스미다강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저자는 스미다강 역사를 이야기했지만, 그 역사는 일본인 저자에게 선택된 역사였다. 이 사실이 이토록 씁쓸한 이유는 내가 조선의 후예이기에 그런걸까. 아니면 저자가 한국과 교류가 깊은 일본인이기에, 혹시나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서 그런걸까. 



이런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 『물의 도시 도쿄』은 역사책으로, 인문학책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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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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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에 눈이 내린다. 그 곳엔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져 있다. 마치 엉크린 사람들 같다. 그 뒤로 봉분들이 즐비하다. 검은 통나무는 묘비인가. 어느 순간부터 바닥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내어 말했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거야?’ 무덤이 모두 바다에 쓸려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꿈에서 깬다. 



소설은 경하의 꿈 이야기로 시작한다. 5월의 광주를 소재로 소설을 쓴 이후에 시작된 꿈이었다. 길몽은 아니다. 악몽이라고 치부하기엔 무언가 찝찝하다. 아마도 경하의 꿈은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죄책감,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미안함, 국가에 대한 분노 등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무의식중에 발현된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꿈은 경하만의 꿈이 아닌, 제 2의 경하, 제 3의 경하가 꾸었을 꿈이기도 하다. 어쩌면 5월의 광주를 소재로 소설을 썼던, 한강 작가가 꾸었을 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5월의 광주에 메여있던 한강 작가가 제주 4.3에 눈길을 돌린 건 필연이었다. 그리하여 한강 작가는 제주 4.3을 주제로 한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했다. 다만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지극한 사랑이야기’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자의 말이 이해가 갔다. 이 책 저변에는 정말 사랑이 깔려있었다. 진짜로 지극한 사랑이야기가. 그렇다. 이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은 증언문학이기 이전에, 정말 지극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다.


소설 속 인물인 경하도 작가처럼 제주 4.3에 다가섰다. 인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선, 그녀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인선은 자신을 향한 부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의 뜻모를 고통과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부모의 감정이 자신에게 옮겨지는게 두려웠다. 그래서 인선은 제주를 떠났다. 그렇게 육지에서 인선은 경하와 만났고 친해졌다. 경하는 인선에게 꿈 이야기를 했고, 자신의 꿈을 영상으로 만들기로 했다. 인선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각박한 현실을 살아내느라 경하와 인선은 잠시 멀어져있었다. 그 사이에 인선은 다시 제주로 돌아갔다. 자신이 업으로 삼던 일조차 뒤로한채.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겨울, 경하는 인선의 연락을 받았다. 병원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그렇게 경하는 인선을 찾아 병원으로 갔고, 인선의 요청으로 제주로 내려갔다. 눈이 세차게 내리던 겨울 날에. 그날 경하는 마주하고야 말았다. 제주에서 벌어졌던 참극과, 그 참극으로 인해 무너져내렸던 인선의 가족사를. 



인선의 엄마는 한날 한시에 부모와 동생을 잃었다. 겹겹이 쌓인 시신들 사이에서 부모 시신을 찾겠다고, 시신에 쌓인 눈을 쓸어 내리는 열 일곱 살 언니 옆에 붙어서, 열 세살 동생은 시신들 얼굴을 확인했다. 부모 시신은 찾았으나, 동생은 보이지 않아서 불타 무너져 내린 집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숨만 붙어있던 동생을 발견했다. 동생이 살아나길 바라며,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동생 입에 물렸다. 그저 살아나기만을 바랐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생사확인이 안된 오빠를 찾고자 노력했다. 오빠가 주정공장에 갖혀있었단 사실을 알았고, 잠시나마 오빠를 만났다. 하지만 오빠는 대구로 이감되었다. 그렇게 인선 엄마의 오빠, 인선의 외삼촌은 영영 실종상태다.



인선의 아빠는 젊은 남성을 대상으로 한 예비검속(보도연맹)을 피하기 위해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주민 명부에 있는 사람이 집에 없다는 이유로, 남은 가족들이 군경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게 인선의 할아버지가 죽었다. 인선의 아빠도 결국은 예비검속으로 끌려갔다.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다 대구로 이감되었다. 대구로 이감된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학살되었지만, 형기가 길었던 인선의 아빠는 살아남았다.



오빠를 찾던 인선의 엄마는, 그렇게 인선의 아빠와 만났다. 오빠 소식을 듣기 위해. 그렇게 몇 년 후 그들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인선이다. 인선이 그렇게나 도망치고 싶었던, 인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모의 행동과 감정. 인선은 성인이 되어, 어머니가 성치 않아 돌보기 위해 제주로 돌아오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의 부모가 그런 행동을 보인건, 자신을 진정 사랑해서였노라고. 다만, 인선을 사랑하는 부모가 어린날 겪었던 참극이 그러한 사랑의 형태를 만들어 냈을 뿐이라고.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인선 또한, 부모를 사랑했기에, 부모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이라고.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 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한 거야. p 218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p 220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p 251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p 288


잠들어 던 내 입에 손가락을 물리고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엄마는 아이처럼 울었어. 짜고 끈끈한 그 손가락을 억지로 빼내지 못하고 나는 견뎠어. 장사처럼 힘이 세진 엄마가 숨을 못쉬도록 나를  껴안을 때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주 껴안았어. 엄마는 나를 죽어가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어. 언니라고 믿을 때가 더 많았고. 어떨 때는 낯선 사람으로 여겼어. 자신을 구하러 온 모르는 어른. 무서운 악력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엄마는 말했어. 구해줍서. p 312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하지만 책 속 인선의 가족들이 겪었던 일들은, 1947년 4월 제주도민이 겪었던 일들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소설이지만 실화다. 제주 4.3은 국가의 주도하에 일어난 국민 학살극이었고, 국가의 주도하에 잊혀져야 했다. 그렇게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간인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제주 4.3는 언급할 수 없었다.


난 제주도를 갈때마다 4.3유적지를 찾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북촌, 터진목, 광치기해변, 성산일출봉, 서우봉, 종남밭, 당오름, 섯알오름, 화북동 등.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 곳에서 죽어간 그들을 추모했다. 내가 제주 4.3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설 속 경하가 꿈을 꿨듯,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모르고 살았던 미안함, 국가에 대한 분노 등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연장선상에서 블로그에도 제주 4.3과 관련된 글을 자주 올렸다. 그래서 누군가 제주 4.3이 왜 일어났냐고 물어본다면, 당장이라도 대답할 수 있을 정도다. 제주 4.3의 배경과 도화선, 국군과 미군정의 제주도 초토화 계획, 제주도민을 학살하기 위한 국군과 미군정의 사기극까지. 그 뿐만인가?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서 자원입대자가 많았던 이유가, 빨갱이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서라는 것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여전히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저 제주 4.3이다. 제주4.3 평화공원기념관에 있는 백비에 비문이 새겨질 날이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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