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사의 쓸모 - 합리적이고 품위 있는 선택을 위한 20가지 지혜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책장에는 구입한지는 꽤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책이 꽤 있다. 책을 구입한 속도와 읽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매번 반복되는 일이다. 그래서 올해는 최대한 신간보다는 사놓고 못읽은 구간 위주로 읽어보려고 한다. 앞서 리뷰한 두 권도 그랬고, 오늘 리뷰할 『다시, 역사의 쓸모』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변한다. 사람의 힘이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심지어 변화에 필요한 시간도 옛날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예컨데 10년이면 변하던 강산이, 요즘은 5년이면 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지난다해도 언제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 ‘사랑, 배려, 존중, 도리, 신뢰, 진심…’ 등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면 안되는 가치들이 바로 그것이다. 


양력 기준으로 2025년 새해가 되었다. 음력으로 따지면 아직 2024년 말이다. 24년이든 25년이든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생각해야할 건, 위에서 말한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가치들이, 계속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가? 이다.


당장 핸드폰으로, 컴퓨터로, TV로 뉴스를 켜보자. 슬프게도 지금 내가 사는 사회에서 중요 가치로 자리잡은 것은 ‘혐오, 차별, 증오, 폭력…’ 이다. 어딘가에서 혐오범죄가 발생하고, 또 어딘가에선 차별이 발생한다. 혐오와 차별, 증오등으로 인한 폭력도 급증했다. 변하지 않고 늘 그자리에 있어야 할 ‘사랑, 배려, 존중, 도리, 신뢰, 진심…’ 등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사회가 이토록 혼란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혼란을 수습하고, 사람사는 사회로 만드는 법. 답은 하나다. 사라진 가치들을 되찾으면 된다. 큰별쌤이 이 책 『다시, 역사의 쓸모』를 쓴 이유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오랜시간 역사 속에서 변하지 않았던 가치들을,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맞는 스토리텔링하여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하여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수면 위로 올리는 것. 『다시, 역사의 쓸모』가 그 일을 하기 위한 선두주자는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의 위인을 기리고 존경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과제가 있었듯 우리 시대에는 우리 시대의 과제가 있어요. 우리는 이 과제를 풀어나가면 됩니다. 그러니 ‘만약 나였다면’이라고 상상하며 자신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p 019


역사의식은 마치 DNA처럼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평소에는 모르고 있다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짠 하고 발현되는 거죠. 역사의식이라는 DNA가 온몸을 휘감으면서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역사적 장면에 뛰어들게 될 수도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역사 속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사는 길일거에요. 이것이 ‘만약’으로 시작하는 여러분의 질문에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입니다. p 024



많은 사람들이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만약’을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렇다. 예컨데 가야가 연맹국가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도래인의 후예인 고대 일본이 국수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선조가 일본이 침략할 것다는 상소를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조가 일말의 정이라도 남아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벨테브레, 하멜이 조선에 표류했을 때 조선정부가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정조가 문체반정이 아닌 여러 학문에 개방적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고종이 자기 권력이 아닌 백성을 챙기는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등등등. 정말 많은 ‘만약’을 떠올렸다. 물론 이와 조금 결이 다른 ‘만약’도 있다. 예컨데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이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못했을 것이다. 난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죄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에서 큰별샘이 말했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라고, 그때와 우리가 사는 시대과제는 전혀 다르다고. 2025년을 사는 나는, 2025년에 맞는 시대과제가 있으니 그 과제를 풀어나가면 된다고.



지금으로부터 가까운 과거인 1950년, 오랫동안 부진하던 대구상고 야구부가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전국야구선수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대구상고 야구부원들은 기세를 몰아 다음 대회를 생각했다. 당연하다. 아마 현재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적 영웅? 이런 거창한 일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야구대회에서 뛰어야 했을 학생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학도병으로. 군번줄 하나 없어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전쟁 중에 산화했다. 



우리가 역사를 보며 ‘만약’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처럼 학교를 다니고, 운동을 하던 평범한 학생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문제에 맞닥드렸고, 전쟁전에는 생각한적 없던 ‘나라를 지키겠다’라는 생각으로 전쟁에 나선것이다. 





※김득신의 묘비 中

“나보다 머리 나쁜 사람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조선의 노둔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너는 못 해’라고 한계를 정한 적이 없다. 혹시 당신이 살다가 재주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처럼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해보아라. 내 시대에 나보다 시를 빨리 쓰는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시험에 빨리 합격한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글을 빨리 배운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나와 같이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지금 당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시를 빨리 쓰는 사람, 시험에 빨리 합격한 사람, 글을 빨리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것저것 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것보다 하나에 매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건 내가 구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다.” p 086



숙종 재위기 문신 김득신. 안동 김씨 출신으로 조부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이다. 아비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사회적인 명성이 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니, 그 역시 그 뒤를 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그는 머리가 나빴다. 정말 나빴다. 정말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통틀어서! 이보다 더 나쁜 사람은 없을거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나빴다. 오죽하면 그가 글을 깨우친 건 10살 때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득신이 엄청난 독서가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공부도 그누구보다 전투적으로 했다. 다만 암기력이 매우 부족했을 뿐이다. 몇 시간전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최악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 오죽하면 《백이열전》을 11만 3천번을 읽었겠는가. 하지만 11만 3천번 읽은 《백이열전》의 내용 조차도 기억을 못하든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정말 우직하게 공부했다. 그렇게 59세에 이르러서야 대과에 합격했다. 


김득신 일화는 나는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요래서 못한다는 변명으로 중무장 한 사람들이 꼭 봐야할 일화다.




※ 매천 황현의 유언中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괘함을 깨달을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 p 115


황현의 죽음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황현이 죽기 전에 쓴 <절명 시>에는 “그저 인을 이루고자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은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도 아니고, 나라에서 자신을 위해 해준 것도 없다는 거에요. 그렇지만 500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온 왕조의 역사가 끝나는데, 그 왕조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선비 문화의 수혜자 중 한 명도 죽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그가 자결을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p 115



19세기 조선은 어떤 나라였나. 세도정치가 들끓었다. 왕이 누구냐에 따라 안동 권씨, 풍양 조씨가 권력을 나눠가졌고, 얼마안가 여흥 민씨가 그 권력을 가져갔다. 권력을 주로 지녔던 성씨만 바뀔 뿐, 지배층인 그들은 지들끼리 권력을 노나먹고 백성을 수탈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가렴주구,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백성들 등쳐먹는데 혈안이 되었던 이들이 바로 조선 왕실과 권력을 나눠가진 양반들이었다. 물론 권력에서 떨어진 양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반기를 들면 죽음 뿐이니 대세를 따랐다.


매천 황현은 그런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권력에 몰려드는 개떼같은 양반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부패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 문화의 수혜자이자, 기득권층에 속했기에 받은 만큼의 책무는 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바로 ‘기록’이다. 


부패한 조선 왕실과 양반들의 행태를 가감없이 써내려갔다. 그가 《매천야록》에 남긴 마지막은 ‘경술국치’였다. 그렇게 조선 왕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것까지 적고나서야, 그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고 보았다. 그렇게 그는 서스름없이 자결을 택했다.




※육영공원과 명동학교※

육영공원은 조선 말, 정부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한국 최초 근대적 명문 귀족 공립 학교다. 정부는 외국인 교사까지 초빙하여 엘리트 통역관 양성에 힘썼다. 엘리트 통역관 양성이 목표였기에, 당연히 ‘영어’가 기본이었고 그 외에 여러과목을 가르쳤다. 나라에서 큰돈들여 가르친만큼, 육영공원 졸업생은 높은 관직이 보장되었다. 해서 ‘출세’를 위한 양반가 자제들이 입학하고자 했다. 육영공원 1회 입학생은 누구일까? 대세에 따라 친미, 친러, 친일을 오가며 오로지 출세를 위해 살았던 사람, 성공과 부를 쫓았던 사람, 이완용이다. 친일매국노 중에선 그 어렵다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사람이다. 



명동학교는 독립운동가 김약연은 북간도 지역에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이다. 명동학교의 목표는 ‘한반도에 빛을 밝히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1908년에 설립되어 1925년에 폐교되었는데, 그 동안 천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 면면을 보자.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 나운규’ 등이 명동학교의 졸업생이다. 이들을 비롯한 명동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출세나 성공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했던건 한반도에 빛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2025년 현재를 보자. 지금 우리 학생들이 다니는 초중고등학교는 어느쪽에 더 가까운가. 학교폭력은 과거에 비해 유례없이 증가했다. 학교는 학교폭력 사건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대신 성적을 올리고, 얼마나 많은 졸업생이 서울권 대학교로 진학했는지 광고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은 이완용으로 자라고 있는가, 윤동주로 자라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