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인문 기행 1 - 고전 들고 떠나는 펠로폰네소스 유랑기 그리스 인문 기행 1
남기환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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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신화는 무엇일까? 아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신들은 누구일까? 길 가는 초등학생 붙잡고 물어보자. 팔 할은 그리스 신을 이야기 할 것이다. 비단 초등학생 뿐이랴? 길 가는 성인을 붙잡고 물어봐도 대다수는 그리스 신들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에선 ‘그리스 로마 신화’가 유명하다. 오죽하면 어려서 처음 읽는 만화책이 ‘그리스로마신화’ 일까.

나 역시 그리스 신 이름을 대라고 하면 줄줄줄 이야기 할 수 있다. 로마신들이야 뭐, 훗날 그리스 땅에 로마가 들어서면서 그리스 신 이름이 로마식으로 바뀌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으니 생략(예컨데 그리스신 제우스가 로마신 쥬피터로 변했다는 뭐 그런정도?). 그러다보니 난 그리스를 꽤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고작 몇개 에피소드, 줄줄줄 꾀고 있는 신 이름들만 가지고 말이다.

그런 내가 여행에세이 『그리스 인문 기행』을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그리스 고전이란 고전을 모조리 독파 후, 고전을 따라 그 지역, 그 장소를 답사했던 그리스 인문기행책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그리스 신도 좀 알고 있고, 나름 세계사도 잘 아는 편에 속했던 나였기에 ‘그리스 인문기행? 가볍게 읽을 수 있겠군!’ 라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그리고...!

난 깨닫고 말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는, 그리스가 아니라고. 난 그리스 무지랭이였다. 정말 무지랭이도 이런 무지랭이가 없을 정도로, 난 그리스 무지랭이였다. 오히려 이 책 덕분에 그리스 역사를 제대로 알았을 뿐더러, 그리스 고전들까지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읽은 책은 한 권인데, 다 읽고 보니 고전을 비롯해 그리스 인문 역사책까지 여러권을 읽은 느낌이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였던 코린토스, 미케네, 스파르타 등을 찾아갔다. 매 챕터마다 장소와 관련된 그리스 고전을 인용하다보니, 어떤 부분에선 21세기 사람이 과거 그리스로 돌아가서, 그 곳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뭐랄까,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내가 모르던 그리스 이야기가 한 가득이라, 이건 뭐랄까. 이 책을 ‘여행에세이’라고 분류하기엔 조금 아깝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자는 이 책이 그리스 여행기이긴 하지만, 그냥 여행기가 아닌 인문학 여행기라고 했다. 정말로 이 책은 인문학을 빼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근데 또 인문학책이라고 하기엔 책이 너무 쉽고 재밌게 읽히고. 고로 이 책을 그리스 인문학 여행 에세이로 분류하기로!


아래는 『그리스 인문 기행』 중 ‘스파르타’에 대한 내용이다. 다른 지역들도 흥미로웠지만, 유독 스파르타가 기억에 남는건 아마도 “디스 이즈 스파르타!!!” 때문이려나? 분명 나에겐 ‘디스 이즈 스파르타’ 였는데, 막상 알맹이를 까보니 과거에 용맹했던 스파르타는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그저 소박한 도시 스파르타였다. 나에겐 그 어떤 반전보다 놀라운 반전이랄까.

가혹함의 원천, 스파르타
프사르타는 군사적 엄격함과 훈련에 대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보통 스파르타를 라케다이몬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스파르타는 상주 인구가 2만명을 넘지 못하는 작은 도시다. 고대 스파르타의 유적은 대체로 소멸하였지만, 고대 극장과 신전, 일부 고고학적 흔적을 볼 수 있다. p 195

겉으로 보이는 유적은 소박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구성된 신전도 웅장한 건축물 하나 없다. 방문객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심지어 낮은 울타리 하나 만들어 놓지도 않았다. 아예 꾸밈이 없다. 투키디데스는 볼 것 하나 없다는 스파르타의 미래를 예견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라케다이몬의 도시가 황폐해지고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후세들은 그 명성에 비해 과거의 힘을 의심하게 될 것이며, 펠로폰네소스의 삼분의 이 이상의 동맹을 통제하며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흩어져 살고 있는 라케다이몬의 인구와 소박한 건물을 보면 그 힘을 실제보다 덜 인상적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 p 139


더 신기한건 이미 2,500년전 인물이 이런 스파르타의 반전을 예견했다는 사실이다. 투키디데스는 예언까지 하는 역사가였던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기원전에 있었던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 흔적은 이제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돌무더기에서 빛나는 그리스 문화를 비춰보고 있다. 이 모든게 기원전에 살았던 투키디데스나, 헤로도토스 같은 사람들이 기록을 남겼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면, 돌무더기를 보며 이 곳이 한때 그리스 세계를 호령하고, 번영했던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공동 식사, 아고게, 크립테이아….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만들어냈다. 선한지 악한지를 떠나 그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스파르타 사회는 유지되었다. 개인적으로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얽매임 없는 삶을 추구하는 나같은 여행자에게는 상상도 못 할 체계이며 소름끼치게 끔찍한 정체(정치체제)다. 그런데도 스파르타의 정체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등 국가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플라톤은 스파르타의 정체를 ‘이상국가’의 원형으로 삼았을뿐더러 스파르타의 정체와 유사한 정치 체제는 지금까지 세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p 161

스파르타는 명령과 복종이 생명과 같았다. 시민 계급인 자신들을 먹여 살릴 농노 계급 메세니아의 헤일로테스를 완벽하게 노예화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으로 복종하게 할 제도가 필요했다. 리쿠르고스는 일종의 비밀 조직을 만들어 내는데, 플라톤은 이를 ‘암행감찰’이라고 기록했다. 아고게에서 전사로 성장한 젊은이 중 가장 촉망받는 인재는 비밀 조직인 크립테이아의 일원으로 차출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헤일로테스 중 노예답지 않은 자나 그들의 우두머리가 될 만한 떡잎부터 다른 싹을 찾아내 목을 베는 것이었다. p 167

소년 때부터 말하는 법을 따로 훈련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스파르타인들의 말은 함축적이다. 말을 짧게 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짧은 표현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말하는 법이 아니라 생각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표현하는게 맞을 수도 있다. ‘몰론 라베(와서 가져가라!)’는 특별히 스파르타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말이며 레오니다스 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p 169
*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할 말만 하는’이라는 뜻의 라코닉laconic 이란 단어가 여기서 유래


‘디스 이즈 스파르타!!!’ 를 알고는 있으나, 이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1도 몰랐던 나다. 하지만 이제 안다. 이 책 덕분에 나 쫌 지식+1 된듯?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지배자라 불리는 리쿠르고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현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런 그가 스파르타 사회 전체를 병영으로 개조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디스 이즈 스파르타!!’가 시작된다.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땐 가혹하기 그지 없는 리쿠르고스가 만들어낸 체제가, 당시 사회상에선 충분히 가능하다못해 환영받던 체제인 것이다. 오히려 그 덕분에 스파르타는 더욱 강성해졌다. 이런 연장선에서 스파르타의 끝을 고하는 테모필레 전투가 나온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여 벌어진 테모필레 전쟁.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300》의 배경이기도 하다.

레오니다스 왕과 선발된 300명의 스파르타인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한다. 스파르타인답게 긴 머리카락을 빗고 다듬으며 한가롭게 적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0년 7월 어느 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p 185

계곡은 전수 소리, 칼의 충돌, 부상자들의 외침으로 메아리 쳤다. 레오니다스도 칼을 들고 전선에 섰다. 레오니다스는 살아남은 그리스 병사에게 달아나 목숨을 건지라 하지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전사를 택한다. 그들은 가족, 땅,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위해 최후까지 싸웠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페르시아인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섬으로 대피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p 186


그리스 무지랭이 였던 나는, 이 책 덕분에 그리스 지식이 +1 되었다. 여기서 반전. 이 책은 1권이다. 고로 언젠가는 2권이 나온다는 것! 내 그리스 지식 업그레이드를 위해서 얼른 2권을 읽어봐야 할텐데?! 으흠. 2권은 언제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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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다 - 인간의 코딩 오류, 경이로운 문명을 만들다
루이스 다트넬 지음,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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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본투비 역덕인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했다. 예컨데 이런거.


백 년 전 조상이 살던 세상부터 조선이 건국되던 오백 년 전, 피터지는 후삼국을 지나 고려가 건국되던 천 년 전,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 땅따먹기 하던 천 오백년 전, 더더더 거슬러 올라가서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까지. 내 조상들이 어떤식으로 문명을 이룩해나갔는지, 매번 궁금했고, 매번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점점 더 진화하여 내 조상, 내 땅을 떠나 ‘인류’ 역사로 이동해갔다.


포유강>영장목>사람상과(유인원과)>사람과>사람속. 인간이 속한 카테고리다. 인간은 ‘인류’, 즉 사람으로 특정되기 전까지, ‘유인원’이었고, ‘유인원’에 속해지기 전까진 ‘영장류’였다. 인간의 시작은 침팬지나 고릴라, 보노보 같은 영장류였다. 헌데 어쩌다 비슷한 동물들을 다 제끼고, 유일한 사람이 되었으며, 심지어 거대 문명을 이룩한 지구 최대 권력자가 되었을까?


이 책 『인간이 되다』는 바로 그 답을 찾는 여정이다.




인류의 여정, 문명의 역사. 이 책을 소개하는 키워드다. 키워드만 봤을 땐 『총,균,쇠』, 『사피엔스』, 『지리의힘』과 비슷한 내용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책 『인간이 되다』는 위 3권과 확연히 다르다. 비슷한면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다르다. 왜?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 『인간이 되다』 는 말 그대로 ‘인간’을 다룬다. 물론 『사피엔스』도 인간을 다루긴 하지만, 그것과도 차별된다. 예컨데 『사피엔스』는 문과적 해석, 『인간이 되다』는 이과적 해석인 느낌 같달까? 고로 관점이 다르니, 진행되는 내용도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되다』가 더 내 취향인듯.




“협력은 우리 종의 초능력이며, 인류가 단지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지구상의 거의 모든 서식지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인간이 되다』 p 025


이 책은 인류가 진화하고 문명을 일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전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반응성 공격성이 감소한 것이며, 또 하나는 고도의 ‘협력’이 가능하도록 사회성이 발달한 것이다. 반응성 공격성 감소와 사회성 발달. 내 방식대로 생각해봤다.


반응성 공격성이 감소, 즉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즉각적으로 반격하는게 아니라 그 순간을 참아내고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반격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계산과정에서 누군가와 ‘협력’ 했을 때, 더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협력을 위해 자연스레 ‘사회성’이 발달되었다.


간혹 다른 동물들도 ‘협력’을 하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유독 인간들이 고도의 협력을 할 수 있는 사회성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언어’ 사용이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소통이 수월해졌고,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집단을 이루다보니 의견이 다른 집단과 배척하기도 하고(때론 배척이 전쟁이 되기도), 서로를 견제할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언어’ 사용은 인간의 사회성 발달을 떠나, 인류 문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우리는 큰 집단을 이루어 평화롭게 살기 위해 공격성 패턴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협력적이고 이타적으로 변했다. 협력과 이타성은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이타성은 제공자가 손해를 감수하는 반면 받는 자에게는 이득이 돌아가지만, 협력은 쌍방에게 이득이 돌아간다. (…) 하지만 인류사이에서 나타나는 협력의 규모는 지구상의 어느 종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문명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협력의 산물이다. p034


간접적 호혜성은 아주 정교한 형태의 인간 협력인데,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이 필요하다. 당사자들 사이에 상호작용을 목격한 목격자가 있어야하고, 당사자들의 행동에 관한 정보가 전체 집단의 공통 정보 풀에서 공유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뒷담화를 해야한다. p 045


반응성 공격성이 감소하면서 사회성이 발달하고, 사회성이 발달하면서 고도의 협력이 가능해졌다. 인류에게 주어진 이 능력으로 인류는 우리가 아는 역사를 쌓아올렸다. 집단을 이루고, 집단끼리 싸우고, 권력자가 나오고, 국가를 만들고, 제도가 만들어졌다. 때론 권력에 취한 독재자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 역시 다른 인간들의 ‘협력’으로 독재자가 제거되고,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된다. 모든게 ‘협력’의 산물인 것이다.


특히나 이 ‘협력’이란 것이 말로는 쉬워보이지만, 절대로 쉽지않은 사회성의 결정체다. 다수가 협력해야 하는 일에 ‘에이 나 하나 쯤이야’ 라고 생각하는 무임승차자(또는 사기꾼)는 어디서든 나올 수 있다. 서로가 나에게 이득이 되는지 여부를 ‘계산’하며 사회성을 키우고 협력해온 사람들에게, 무임승차자 발생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런 재앙마저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또 다른 ‘협력’으로.


훨씬 크고 복잡한 사회에서 구성원이 서로 협력하게 만들어 결국 문명의 탄생을 낳은 핵심 엔진은 무임승차자가 날뛰지 못하게 제어할 뿐만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이타적 행동과 협력을 장려한 체계들이었는데, 이것들은 갈수록 점점 정교하게 발전해갔다. p 062




최재천 교수와 『지리의 힘』 저자 팀 마샬이 이 책을 강력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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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남진 - '원조 오빠'에서 '영원한 오빠'로
온테이블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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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 책 취향과는 사뭇 다른, 정말 새로운 책을 읽었다. 근데 또 책 구성이나, 흐름 이런건 꽤나 익숙하다. 심지어 내 관심사 중 하나인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다르게 느낀건, 이 책 속 주인공 때문이다. 왜? 이 책 속 주인공은 내 세대보다는, 우리 엄마 세대가 좋아할 바로 그 사람! 오빠 부대 원조! 가수 ‘남진’ 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오빠, 남진』.


가수 남진의 음악 인생사는 대한민국 대중가요 음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요는 잘 안듣지만(?) 대중가요 음악사는 꽤 관심이 있는 편이다. 여기저기서 주어들은 잔지식도 꽤 있고. ‘역사’라는 범주 안에 있다면, 어떤 장르의 역사든 일단 파고 보는 습성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우리 전통 음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전까지 왕을 위한 궁중음악과 중인 이상 지배층이 즐기던 가곡, 서민들의 잡가 등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신분제가 폐지되고 근대식 극장과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이런 구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판소리와 잡가에 능한 전문 소리꾼이 국왕에서 천민까지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대중매체가 등장했다. p 022


19세기에 이미 변화를 겪고 있었던 전통 음악은 우리 대중 음악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외래 음악의 영향을 받은 전통 음악이 대중음악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민요풍의 창작 대중가요인 ‘신민요’다. 전통 음악 다음으로 대중음악에 영향을 준 것은 서양 음악이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 그리고 대한제국 군악대 등을 통해 도입된 서양 음악은 창가와 찬송가, 군가의 형태로 우리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그 뒤를 이은 일본 음악은 일본의 전통 음악이라기보다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 음악’에 가까웠다. 서양음악이 일본을 거쳐 우리 대중음악으로 정착한 셈이다. p 025


모름지기 대중음악이란 ‘대중’이 듣는 음악을 말한다. 고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은 대중이 존재하는 시기부터 시작한다. 그 시기가 언제인고 하면, 백년 전으로 훌쩍 올라가 신분제를 철폐한 갑오개혁까지 가야한다. 그 과정과 배경에는 청일전쟁과 조선에서 주도권을 빼앗고자 하는 일본의 흑심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갑오개혁으로 조선에서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물론 왕족 제외하고. 그렇게 이 땅에 대중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개화기. 일본을 시작으로 여러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자연스럽게 외국의 음악도 조선으로 들어온다. 조선 땅에 있는 음악이라고는 궁중음악이나 판소리, 민요 등이 전부였으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여러 장르의 노래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왔다. 백성이었으나, 이제는 대중이 된 개화기 조선 사람들. 그들은 조선에 들어온 외국 노래를 조선화 시키며 부르기 시작했다.


1. 신민요: 기존의 민요를 대중가요화한 장르로 작곡, 작사가가 따로 있다.

2. 트로트: 일본에서 유행하던 대중음악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처음엔 일본 유행가 번안곡 형태로 시작했다.

3. 재즈송: 재즈, 팝성, 샹송, 라틴음악 등의 서양 대중 음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로, 가사에 외래어를 섞어 쓰는 특징이다.

4. 만요: 미국 팝송에 재미난 가사를 붙인 일종의 코믹송. 대표적인 노래로 ‘유쾌한 시골 영감’, ‘오빠는 풍각쟁이’가 있다.


하지만 서슬퍼런 일제강점기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이 연이어 터진다. 개화기 때 한창 발전하던 한국 대중가요는 긴 기간 암흑기를 보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당국의 검열은 더욱 심해졌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노골적인 친일을 담은 군국가요 음반만 발매할 수 있었다. 심지어 빅타와 컬럼비아 같은 레코드 회사는 ‘적성 국가 언어로 된 이름’이라 하여 회사 명칭까지 바꿔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을 거듭하던 대중음악이 암흑기에 접어든 것이다. p 039 


1935년 발매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우리 민족의 현실을 담아낸 가사로 인해, 일본 경찰이 문제 삼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음반사 측 기지로 풀려났고, 오히려 이 일화로 인해 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는 그 노래! 목포 유달산에는 이를 기념하는 노래하는 비석까지 서있다. 그 목포에서 해방을 맞은 1945년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김남진. 무려 양반가문에, 재력까지 있던 집안의 늦둥이였다. 


해방 후 한국의 대중가요는 새로운 도약에 나섰다. ‘이난영(목포의 눈물)’을 시작으로 ‘현인(신라의 달밤)’, ‘한복남(빈대떡신사)’, ‘백난아(낭랑 십팔세’), 등 지금도 많은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는 명곡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 명곡들은 발매된지 채 몇년 안되서, 묻히고 만다. 1950년,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오며 전쟁이 시작되었기에. 바로 한국전쟁, 6.25 전쟁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당시 많은 예술인이 월북(을 빙자한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못지 않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암흑기였다.


한국전쟁이 끝났다. 그와 함께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이 주둔하자, 자연스레 팝송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소년 김남진을 사로잡은 팝송의 유행은 한국전쟁 때 한반도로 온 미군과 함께 시작되었다. 전쟁 후에도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판 LP들은 기지촌 주변과 양키 시장에서 유통된 것이다. 1957년 첫 방송을 시작한 AFKN(주한 미군 방송)도 한몫했다. p 058


해방둥이로 태어났던 김남진은, 팝송을 즐겨 듣는 청소년이 되었다. 그렇게 팝송에 푹 빠진 김남진. 그때까지만해도 철부지 김남진은, 자기 인생이 대중음악과 한 몸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극장 쇼는 악극에 신파, 코미디, 국악, 가요, 팝송, 미술까지 망라한 종합 엔터테인먼트였어요. 중학교 때부터 팝송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당연이 국악이나 트로트보다 팝송 스타일의 노래를 좋아했죠. 그래서 쟈니리나 정원, 김상국 같은 분들이 나온다고 하면 학교를 빼먹고라도 꼭 보러 갔어요. 『오빠, 남진』 中


미8군쇼와 미국 대중음악의 유행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팝송스타일의 가요가 주름잡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래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정훈희 ‘안개’등이 있다. 이렇게 팝송 스타일의 가요가 유행한 건 미군 주둔이 제일 큰 이유겠지만, 내적으로 보면 미군에 잘보여야 할 군부독재 정권의 묵인도 한몫했다. 


이때 한창 유행했던게 바로 ‘미8군쇼’다. 미8군쇼에 얼굴을 비치고, 노래를 부르면 바로 인기가수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미8군쇼에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긋는 존경받는 가수가 되었다. 당시 인기가 어느정도였나면, 당시 수많은 음악학원 중 미8군 무대 진출을 위한 음악학원도 있을 정도였다. 


청소년 김남진도 이때 음악학원에 들어갔다. 유명 작곡가 한동훈이 세운 한동훈 음악학원에.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청소년 김남진은 요즘말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팝송을 부르는 그의 실력이 꽤나 좋았다는 이야기다. 


난 진짜 그때 앨범만 나오면 인기 스타가 될 줄 알았어요.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언론사를 통해 기사화까지 예정되어 있었으니 더욱 그랬죠. 앨범이 나오고 기사가 뜨면 방송국에서 내 노래를 틀어댈테니, 인기가수는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오빠, 남진』 中


‘최희준 모창 가수’라고 할 정도로 스타일을 따라한 음악적 한계, 방송계에 촌지를 돌리는게 관행이었으나 이를 몰랐던 신인가수 남진과 고지식했던 작곡가 한동훈. 그렇게 가수 남진의 데뷔곡 ‘서울 푸레이보이’는 대실패했다. 하지만 이 실패는 가수 남진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그때 제일 인기 있던 라디오가 동아방송이었는데, 아는 사람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어요. 지금도 이름을 잊어버리질 않아. 강수향 음악부장님이라고, 원래 테너 가수였는데 은퇴하고 방송국에서 음악 방송 총책임자로 일하고 했었어요. 무턱대고 그분을 찾아가서 앨범을 드리며 인사를 했지.


6개월즘이 지나가 여기저기 다른 방송국에서도 내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MBC, KBS, 동양방송, 기독교방송까지 모두 다요. 심지어 하루에 네댓 번까지도 방송을 탔어요. 정말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죠. 『오빠, 남진』 中


금지곡 지정. 검열이라는 명목하에 금지, 통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신독재시절이다. 금지 사유야 많지만, 실질적으로는 권력자 마음에 안들면 바로 금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었다. 그렇게 남진이 부른 ‘연애 0번지’는 금지곡이 되었다. 여기서 반전. 남진이 부르기 싫었던, 어쩔수 없이 불렀던 트로트 ‘울려고 내가 왔나’가 인기를 타기 시작했다. 요즘말로 순위 역주행!



그때 기분을 지금도 잊지를 못해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디다. 애당초 부를 생각이 없었던 곡인데 작곡가가 술에 취해서 하기 싫은 걸 할 수 없이 불렀고, 다행히 다른 노래가 인기를 끌다가 금지곡이 되어버렸고, 어머지가 이 노래 좋다고 해서 방송국에 부탁할 때도 이게 터질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했어요. 근데 그해 우리나라 가요를 통틀어서 최고 히트곡이 바로 ‘울려고 내가 왔나’였어요.

『오빠, 남진』 中



또 금지곡 지정.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대중들에게 가수 ‘남진’이라는 이름을 깊이 새겼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가수 남진의 음악인생은, 굴곡진 우리나라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대중음악사 지식은 해방이전 근대사에 한했다. 하지만 이 책 『오빠 남진』 덕분에 그 범위가 넓어졌다. 더해서 엄마들이 왜 가수 ‘남진’에 열광하는 지까지!


이 책은 고스란히 우리 엄마님께 상납하고 효도하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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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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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한일 근대 인물기행』 이라는 역사책을 리뷰한 적이 있다. 그 책에선 한국와 일본, 양쪽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그들의 활약상이 담겨있었다. 굳이 왜 일본 근대사 인물을 이야기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체로 일본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우리나라 근대사, 즉 구한 말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쭉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과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 근대사와 일본 근대사는 분리할 수 없으며, 같이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사 교육 시간에 일본 메이지 유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선 미진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 메이지 유신 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일제강점기를 배우게 된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머리 속에 무수히 많은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조선 중후기 동안 조선 통신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각종 문물을 받았던 일본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근대국가를 표방하며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조선을 점령한게 아닌가. 심지어 일본이 근대국가가 된 그 짧은 시간동안 조선 위정자들은 또 무얼했는지, 비교도 해야하는데 그마저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메이지 유신 과정을 배워야만 한다. 음, TMI가 너무 길었..나.....



뭐 여튼! 이 책은 위 『한일 근대 인물 기행』을 쓴 저자가 새로 발간한 역사책이다. 제목은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일본의 역사왜곡은 두 말하면 입아플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특히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역사왜곡은 가히 소설에 가깝다. 그들이 왜곡하는 시기는 고대사와 근대사다. 이 역사책 주제는 일본의 근대사 왜곡이니, 고대사 왜곡은 일단 생략!



일본 근대사 왜곡을 보자. 너무 광범위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그 주제를 선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단적인 예가 강제징용, 일본군 성노예 문제다. 엄연한 범죄임에도, 범죄가 아니라며 포장하는 그들의 행태는 너무 적나라하고, 뻔뻔하다. 오죽하면 지들이 일으켰던 세계 2차 대전에 대해서, 앞뒤 맥락 다 자르고 원자폭탄을 맞은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렇게나 심각한 일본의 근대사 왜곡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토록 일본에 만연한 근대사 왜곡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고찰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역사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 근대사 왜곡의 시작점은 대체 어디인가! 그 시작점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18세기 조선과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지식인들에게 신지식으로 자리 잡은 국학의 영향으로 국학자들에 의한 정한론이 주장된 적이 종종 있었지만 이는 재야학자들에 의한 무책임한 일방적 주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의 정한론은 천황을 포함하여 국가정책을 주무르는 고급 관리들에 의해 숙고와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 당시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 따라잡기를 통한 조속한 근대화에 진력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장, 차관과 국장에 해당하는 신정부의 핵심인사 중 약 절반에 가까운 이와쿠라 사절단을 2년 가까이 미국과 유럽에 장기 체류시키면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체험하도록 하고 있었다. p 028



일본의 정한론 파동이 정점을 지날 무렵 그 대상이 되는 조선에서는 이러한 이웃 국가의 동향을 전혀 모른 채 오직 흥선대원군의 권력 유지와 고종의 친정 개시 여부 등 권력 다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에 우리에게는 매우 뼈아픈 대목이다. p 032



위에서도 말했듯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유신을 알기 위해선, 그 이전 18세기 일본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분명 사무라이의 나라였지만, 18세기 사무라이들은 칼 찬 사무라이가 아닌, 책읽은 사무라이였다. 책 읽는 사무라이들은 전통적 봉건사회는 이제 끝이며, 앞으로는 근대사회가 될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들은 일본 근대화에 앞장섰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을 때도 그랬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자신들이 국력이 약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자세로 미국과 유럽에 사절단을 보내어, 서양의 근대화를 몸소 배워왔고, 그렇게 배워온 것을 일본에 적용했으니 그게 바로 일본의 근대개혁, 메이지 유신이다.



일본이 그렇게 근대화에 앞장서는 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는 순조, 헌조, 철종 3대 왕이 재위하는 동안 세도정치가 정점에 달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후 일본 근대개혁인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어, 일본이 동양의 서양을 표방하며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을 그 무렵 조선은 어땠는가?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조선 내 개혁을 표방하며 칭찬을 받을만한 개혁도 하였지만, 경복궁 중건이라던가 쇄국 등 조선 전체적으로 봤을 땐 전통적 봉건 국가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근대국가와 더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일본 메이지 내각에선 초기 정한론 파동이 있었음에도, 조선은 이런 상황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눈과 귀를 모두 닫고 있었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가관이 아니었다. 고종은 아비인 대원군이 시행하던 정책을 전면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왕비 민씨 함께 무당(진령군)에 의존했다. 고종과 민비는 무당에게 수많은 재물을 가져다 바쳤다. 그 재물들의 출처는 내탕금과 국고였다. 백성들이 힘들게 낸 세금을 무당에게 퍼주고, 자신들이 사치하는데 낭비하고 있었다. 고종과 민비는 돈이 부족해지자 지방수령 자리를 팔기 시작했다. 다름아닌 왕실이 나서서 매관매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민씨 척족들도 중간에 개입하여 인사청탁을 받으며 중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종과 민비, 민씨 척족들은 백성들의 고혈에 더해, 매관매직까지 하면서 나라를 거덜내고 있었다. 


쳇바퀴처럼 고종과 민비는 계속해서 무당에게 재물을 바치고, 끊임없이 사치했다. 부정부패로 늘어나는 돈보다, 사치로 쓰는 돈이 많아져서 자금이 부족해지자, 고종과 민비는 나라에 있는 광물 자원이나 철도부설권 등을 외국에 팔기 시작했다. 고종과 민비는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나라의 모든 것을 내다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일본이 근대개혁을 하는 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고종과 민비가 온갖 사치를 하는 동안 조선 백성 생활은 아귀도가 따로없었다. 작금의 조선은 죽은 아이에게조차도 세금을 물리는 나라였으니까. 그런 백성들의 울분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나온게 동학농민운동이다. 하지만 고종과 민비는 이런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기는 커녕, 폭도(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진압을 명령했다. 심지어 조선 정규군으로 진압이 어려워지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백성을 죽이기 위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꼴이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강화도조약, 텐진조약 같은 조선, 청나라, 일본 간의 여러 조약들을 설명하자면 길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경복궁 점령사건’이니까.


여튼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일본도 덩달아 조선에 일본군을 파병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땅에는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두 나라 군대와 조선 정규군에 의해 동학군들은 말살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사건이 하니 있으니, 바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의 근대사 왜곡 시작점이다.



청일 간 직접 협상이 결렬되고 각국의 중재노력이 가망 없을 것으로 예견되자 무쓰는 7월 10일, 향후의 조선 정세에 대비하여 오토리에게 조선의 개혁파 관리들을 규합할 것과 철도 및 전신 등 조선에서의 실질적 이권 확보를 지시했다. 그날 오토리는 1차 노인정회담에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권고하면서, 조선이 거부할 경우를 상정해 두 가지 안(갑안, 을안)을 본국에 올리며 훈령을 요청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오토리의 두 가지 안 모두 성의 출입문과 왕궁의 문을 일본군이 점령해야 한다는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 갑안이든 을안이든 오토리가 보낸 전문의 표현 중 ‘군대로 경성의 각 대문을 경비하고 왕궁의 문을 지킨다’는 것은 ‘군사력으로 문 안팎의 공간을 제압하여 지배력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 표현은 한성과 경복궁을 군사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p 237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남아있는 경복궁 점령에 관한 오토리 공사의 본국 보고 전문을 찾아보자. (…) 즉 일본 외무성에 대한 내부 보고용으로는 일본군 이동의 목적이 ‘조선 정부의 불만족스런 회답에 대한 응징으로 왕궁을 포위하기 위해서’ 였으며, 그 목표지점은 ‘왕궁(경복궁)’이라고 명시했다. p 260


약 10년 후, 일본군 육군참보본부가 공식 발간한 『일청전사』도 이런 입장의 연장선에 있다. 오토리 공사의 내정개혁 담판 사태가 어려워지자 군사력 일부의 입경을 요청했다고 서술하여 ‘군사력 이동이 조선과의 내정개혁 담판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과 관련있음’을 연관시켰다. ‘군사력 이동의 목표 지점은 왕궁 북방산지’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사건 초기부터 내부 보고용 자료외 외부에 공표하는 자료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p 261



‘경복궁 점령사건’에 대해 일본정부가 지금까지도 시종일관 주장하는게 있다. 이는 계획된 사건이 아니었고, (1)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으며, (2)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하다가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왕궁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으며, (3) 따라서 경복궁 점령사건은 소규모 충돌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사실 왕궁 점령은 고종을 사실상의 포로로 삼고, 왕비 일족과 대립중인 대원군을 떠받들어 정권을 잡게 함으로써 조정을 일본에 종속시키고 청군을 조선 밖으로 쫓아내기 위한 선제적 핵심조치였다. 즉 개전 명분인 조선 조정의 청군축출의뢰서를 일본의 손에 넣고, 나아가 한성에 있는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일본군이 남쪽에서 청군과 싸우는 동안 한성의 안전을 확보하고 동시에 군수품 수송과 징발등을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시행하는 편의를 얻는 등 일석삼조의 목적 아래 계획한 것이다. p 269



『일청전사』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 은 그간 일본 정부와 군 당국이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 또는 ‘조선군이 발포해 이에 일본군이 응전하여 벌어진 우발적 사건’ 등으로 주장했던 사건의 치밀한 기획과 준비에 관하여 육군참보본부가 작성한 실체적 기록이다. 혼성여단이 작성한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이란 ‘경복궁 점령 계획’이었다. 이는 청일 양국의 충돌을 앞두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의 국왕과 정부를 일본 편으로 만들라는 일본 정부의 포괄정 훈령에 따라 그간 오토리가 본국에 수차 강경제안을 했으며, 결국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일본 정부의 포괄적 승인이 내려짐에 따라 조선 현지의 오토리 공사와 오시마 여단장이 협의해 구체적으로 만들어낸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합작품, 즉 ‘합동군사작전계획’이었다. p 275



실질적으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 직후, 일본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으며 조선군 병영을 접수했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는 형식으로 개혁기구를 설치했으니, 그게 바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이다. 뿐만아니라 김홍집 내각이 제대로 구성되기도 전에, 청군축출의뢰서 공문을 확보하여, 청군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조선땅에서 일본은 청나라를 공격했다.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동양의 서양을 추구하며, 서양 강대국 앞에서는 국제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했던 일제로서는 ‘경복궁 점령 사건’이 계획된군사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됐다.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까지는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국제법을 잘 지켰다”라는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당시 국제적 눈초리를 의식한 일본 정부의 의도적 사건 조작과 각색을 거친 허상이며, 일본인의 국뽕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일본 정부의 한일 근대사 역사 왜곡의 시발점이다. p 294



학교에서조차도 깊게 가르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던 ‘경복궁 점령사건’. 이 사건을 모르고 일본 역사왜곡을 논하는건, 메이지 유신을 모르고 일제강점기를 논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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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7 - 삭제된 기억들 땅의 역사 7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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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역사 7권』이 나왔다. 나름 기자님 스토커(ㅋㅋ)라 ‘땅의 역사’ 신문 연재는 진즉에 끝나고, ‘흔적’이라는 새 주제로 다시 연재하는거 보면서, 역사책 『땅의 역사』도 완결인가 싶어서 괜시리 걱정했는데! 신간이 나와부렸다♡ 오얘예옝예ㅖ예



땅의 역사 7권은 기존에 조선일보에서 연재하셨던 ‘땅의 역사’ 와 현재 연재중인 ‘흔적’에 있는 내용이 섞여 있는거 보니, 앞으로도 역사책 ‘땅의 역사’ 시리즈는 계속 될 것 같은 너낌적인 너낌이다. 암만! 내 답사여행에 시작이 된 책인데, 저얼대 끝나면 안되지!! 지금은 육아로 인해 잠시 멈춘 답사여행이지만, 뿡뿡이가 크면 다시 답사여행을 다녀야하니! 그런 의미에서 기자님께서 계속 쭈욱 답사를 해주셨으면!



이번 땅의 역사 7권도 어김없이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왜곡’된 역사 속 진실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정부 주도하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 피해의식으로 인해 왜곡된 역사,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아서 사라진 역사 그 모든 것들이 주인공이다. 



예컨데 지금 핫한 관광지가 된 경복궁 본연의 역사라던가, 친일파 춘원 이광수가 쓴 소설 『단종애사』로 인해 숙주나물로 왜곡된 신숙주의 일생이라던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 세금 수송 마차를 탈취했던 잊혀진 독립운동가 박상진의 일생이라던가, 정약용과 박제가 등이 인두법을 발견하고 임상까지 하여, 정조의 사상통제만 아니었다면 지석영 우두법보다 빨리 천연두를 몰아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의 역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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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전 매향리 마을에 간적이 있다. 매향리 마을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간게 아니라, 제암리 유적지를 가는 길에 우연히 본 ‘매향리정보화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신기해서 들렀던 곳이다. 우연히 들렀던 그 곳에서 나는 눈물흘리고 말았다.


경기도 화성 매향리 마을. 불과 가까운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미군이 폭격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섬이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1951년부터 연간 250일간 폭격 훈련이 있었다. 사격횟수도 1일 600회가 넘었다. 미공군 전투기는 하루에도 수백번 매향리 마을 상공을 돌며 기총사격과 폭탄을 투하했다. 그렇게 숲이 우거졌던 농섬은 밑둥만 남았다. 


남양만 남쪽 매향리 앞바다의 농섬은 또 다른 이유로 사라졌다. 매향리와 궁평항을 잇는 화옹방조제로 남양만은 화성호로 변했다. 숲이 우거졌다는 뜻으로 ‘짙을 농濃’자를 쓴 농섬은, 방조제 바깥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정확하게는 밑동만 남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미 공군은 이곳 매향리를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훈련장 이름은 쿠니 사격장 이다. 토착주민은 물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까지, 조개와 굴을 주우며 살던 사람들에게 희생이 강요됐다. p 049



“아기를 낳을 여자들에게는 신생아 귀를 막을 탈지면을 선물했다. 오일장이 서면 사람들은 괘종시계를 들고 장터에 갔다. 벽에 건 시계들이 다 떨어져 고장이 나서”


주민들은 난폭해졌고, 강력범죄와 자살이 잇달았다. 오폭과 불발탄 사고로 많은 이가 죽었다. 2000년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고 한미군사협정 개정이 이슈가 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매향리 문제를 ‘생존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5년 마침대 쿠니 사격장은 폐쇄됐다. p 051



매향리에서 봤던 폭탄 잔존물로 만든 조형미술과 벽화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폭탄 잔여물 위에서 여자아이가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벽화.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은 사람중에는 임산부와 뱃속 아기도 있었다고 했다. 벽화속 꽃이 꼭 별이 되어버린 아기인 것 같아서 그 앞에서 유독 눈물을 흘렸었다.



한국전쟁은 진작에 끝났고, 독재정권도 끝났고, 국민이 1인 1표를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매향리는 더 오랫동안 지옥에서 살았다. 왜? 미군이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따라서 매향리의 문제를 국민들이 알면 안되었고, 당연히 매향리 문제는 묵살되어야 했기에. 



그렇게 오폭사고와 불발탄 폭발 등으로 사망자와 중상자가 끈임없이 나왔던 매향리. 폭발로 인한 주거지, 어장 파괴, 소음성 난청등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매향리. 매향리는 2005년이 되어서야 그 지옥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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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 오이도와 화성 대부도 사이를 가로막는 방조제 공사는 1994년에 끝이 났다. 공업단지 부지와 농경지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엉터리임이 공사 도중에 드러났다. 물이 나갈 길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헛되고 기이한 공사였다. 막힌 하천 물은 썩었고 갯벌도 썩었고 땅도 썩어 버렸다. 그 꼬락서니를 이제 일흔을 눈앞에 둔 당시 젊은 사내 최종인이 보았다. 누구는 그를 개발 방해자라 불렀고 누구는 그를 시화호 지킴이라 불렀다. p 052



2n년간 시흥에 산, 지금도 시흥에 살고 있는 시흥시민으로서 ‘시화호’ 이야기를 그냥 넘기면 섭하다. 시화호는 한 때 ‘죽음의 호수’라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천연기념물까지 찾는 생명의 호수다. 



19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끝나면서, 수많은 중장비와 인력이 남아돌게 된다. 그렇게 남아도는 중장비와 인력을 꾸려 거대한 간척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게 바로 바다를 막아버리는 시화호 간척사업이다. 졸속으로 진행된 간척사업은 실패했다. 시화 방조제는 건설되었지만, 그 안에 가로막힌 바닷물은 썩어들어갔다. 검은호수, 죽음의 호수가 되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호수였다. 전문가들은 시화호가 살아나는데 30년은 더 걸린다고 이야기했다.



이 공사 기간 동안 한 사내가 끊임없이 공사를 방해했다. 그는 시화호가 죽어가는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고, 언론에 알렸다. 끊임없이 정부를 귀찮게 했다. 결국 그 사내말대로 가로막혀있던 물을 통하게 했다. 딱 10년이다. 10년만에 시화호는 생명의 호수가 되었다. 저어새, 밭종다리, 홍여새, 재두루미 등 천연기념물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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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알고 있다. 독일 상인이 흥선대원군 부친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이와 함께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남연군묘 이장에 관한 이야기다. 이 땅에 가야사라는 대찰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부친의 묘를 쓰면 2대가 왕이 된다는 지관의 말에 흥선대원군이 냅다 절을 밀어버리고 자신 부친의 묘를 썼다는 이야기.


역사적 사실이라 알려진 남연군묘 이장에 관한 이야기, 놀랍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남연군묘 앞에 버젓이 진실이 기록된 비석이 서있다는 사실이다.


대원군이 부순 절은 가야사가 아니라 묘암사다. 그리고 석탑 또한 전설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탑이다. 하나 더 있다. 대개 남연군묘, 즉 대원군이 세운 선친 묘가 이장된 해를 ‘고종이 왕이 되기 13년 전’인 185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남연군묘 입구에 있는 비석에는 역사적 진실이 기록돼 있다.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장사 지냈다가 바로 연천 남송정에 이장하고 을사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이장했다가 병오 3월 18일 드디어 중록 건좌한 언덕에 면례하였다.’


이미 대원군은 선친을 한 차례 이장한 뒤 을사년(1845년)에 가야산 북쪽으로 이장하고, 이듬해에는 지금 자리에 묘를 썼다는 뜻이다. 을사년에 첫 이장을 한 자리를 주민들은 ‘구광터(옛 무덤자리)’라고 부른다. 남연군 묘에서 400미터 북동쪽 산기슭 밭이다. 왜 처음부터 석탑 자리에 옮기지 않았을까? 이기웅이 말했다.


“묘암사 주변 주민들과 땅 문제를 협상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절을 불태웠고.”


이장 시기와 토박이 역사가 분석을 들어보니 ‘만세 권력을 누린다는 지관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급히 가야사라는 대찰을 불태우고 주민을 내쫓았다’는 대중매체의 보도와 공식 안내문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p 082



현재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는  옛 가야사가 있던 절터라고 알려져있다. 분명 이는 사실이다. 헌데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때려부수고, 남연군묘를 이장했다는 건 일부 거짓이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 양반네들은 사찰과 승려를 천시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바로 왕실사찰이다. 왕실의 원찰로 지정된 사찰은 막대한 권력을 누렸다. 보통 태실이나 왕릉을 조성했을 때 이를 수호하는 사찰이 지정되는데, 이런 사찰들이 바로 원찰이다. 원찰은 뒷배가 무려 왕실이기에, 양반네들이 함부러 할 수 없었다. 외려 원찰 소속 승려들이 양반네들을 상대로 떵떵거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원찰에 지정된 사찰 중 하나가 바로 예산 가야사다. 가야사는 광해군이 왕이었을 때, 세자 이지의 원찰이었다. 세자 이지 태실은 황해도 신계군이 있었으니, 태실 수호사찰은 아닐테고. 세자 이지를 지지하기 위한 원찰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여튼! 원찰이 된 가야사는 거대해졌다. 그러다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폐위되었고, 당연히 세자도 폐위되었다. 폐세자 원찰이었던 가야사는 몰락했다. 당시에 이미 가야사는 텅 비어있었고, 가야사의 말사였던 묘암사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흥선대원군이 가야산 북쪽에 남연군 묘를 이장하고, 일정 기간 뒤에 남아있는 묘암사를 철거 한 뒤 현재 자리에 남연군묘를 이장했다. 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남연군 묘 이장 스토리는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왜곡된 이야기라는 것. 하지만 왜 바로잡지 않는건지는 당최 모르겠다. 


흥선대원군이 ‘무자비하게 사찰을 부시고 부친 묘를 이장하여,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라는 풍수지리 중요성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건지, 아니면 흥선대원군이 ‘무자비하게 사찰을 부시는 바람에, 왕이 된 아들이 나라를 말아먹었다’라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건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될대로 되라- 싶은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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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추석, 산청에 살던 선비가 고택을 찾아왔다. 고택에는 정온의 증손자 정중원이 살고 있었다. 선비의 이름은 유이태다. 그는 한양에서 임금 숙종의 병을 치료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유이태는 선비의사다. 유의라 한다. 유학자이면서 동양적 의학 이치에 통달한 선비다. 두창(천연두)과 마진(홍역) 치료에 능했다. 거창에서 태어나 남쪽 산청에서 살았는데, 워낙 의술이 뛰어나 영남과 호남 일대에 숱한 전설과 설화를 남겼다. p 195



명의, 산청, 전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맞다. 과연 자기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은, 의성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아닌가. 산청에는 유의태를 기리는 테마파크 동의보감촌이 있고 그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결론부터. 여의태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는,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집념> 속 인물이다. 거창에서 태어나 산청에서 활동하고 임금 숙종의 병을 고치고 의술을 베푼 의사는 유의태가 아니라 유이태다. 동계 고택에서 주인장과 대작하고 죽은 해가 1715년이니, 허준(1530~1615)보다 100년 뒤 사람이다. p 196



민관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역사왜곡, 허준 스승 유의태. 이 인물은 명확한 ‘허구’다. 민관은 유의태라는 허구 인물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 실제 역사속 인물 유이태를 꽁꽁 감추었다. 실존 인물 유이태의 흔적은, 허구 인물 유의태의 흔적으로 바꿔치기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관은 이들이다. 『한국인물사』에 허준 스승 유의태를 소개한 한의사 노정우,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소설 『동의보감』을 집필한 소설가, 이를 드라마로 만든 방송사, 이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동의보감촌을 만들고 광고한 산청군. 이들 연합작전으로 인해 산청에서 실재 활동했고, 산청에 무덤까지 있는 선비 의사 유이태는 사라졌다. 대신 유이태의 모든 흔적을 가로챈 소설 속 인물 유의태가 나타났다. 그 누구도 이 거짓을 바로잡지 않았다. 실존 인물 유이태 후손이 나와 논문까지 써가며 반박하기 전까지.



허구 인물 유의태의 흔적이라던, 유적지라던 공간은 하나둘 철거되었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다. 산청군은 아직도 허구인물 유의태를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무원칙의 원칙을 모아 보니 온통 대한제국이고 고종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국민은 ‘간악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탁 트인 경회루 경치를 감상한뒤, ‘총독부 박물관’ 건물에 상주한 경복궁 관리소 관할 경복궁을 떠나, 촬영 세트장으로 변한 덕수궁 월대를 넘어서 ‘순종 황제가 즉위한 장소임을 절대로 알리면 안되는’ 덕수궁관리소가 상주한 3층짜리 신축 건물에서 끝나는 테마공원 조선 궁궐을 소유하게 되었다. p 212


위 유의태 이야기는 지방정부가 주도한 왜곡이라면, 이번엔 중앙정부다. 무려 문화재 당국이 주도한 결과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를 1888년으로 설정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후를 기준으로 했다. 2023년에 복원된 경복궁 앞 광화문 월대. 월대가 설치되었던 해는 1866년이다. 그러다 1917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세워진지 고작 100년도 안된 월대였지만, 복원 기준 연도 안에 포함된다. 문화재청은 원칙대로 1888년에 그 자리에 있었을 월대를 복원했다. 



1888년 경복궁 경복궁 경회루에는 사방에 담장이 있었다. 그러다 일제 시대에 담장이 철거되었다. 현재 복원된 경회루는 딱 두 곳에만 담장이 있다. 관람객 편의를 위해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이유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경복궁 동쪽에 숨어있는 경복궁 관리소 사무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총독부 박물관이다. 당연히 문화재청이 설정한 복원 기준 연도 1888년에 없었다. 오롯이 일제가 만든, 강탈한 문화재 전시용 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멀쩡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다음은 덕수궁 돈덕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공간이다. 2층 건물이었던 돈덕전은 1920년에 철거되었다. 현재 복원된 돈덕전은 실제를 기반한 복원이 아니다. 사라진 돈덕전을 재현하기 위해 상상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건물이다. 심지어 지금 재현된 돈덕전은 3층 건물이다. 3층은 덕수궁 관리소다. 이 돈덕전 재현을 위해 600년간 그 자리에 있었던 회화나무 한 그루를 옮겨버렸다. 



기함할 이야기 하나 더. 문화재청은 경복궁 영추문루 소문이 1926년 소실되었고,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놀랍게도 영추문 소문은 100년간 쭉 경복궁 안에 있었다. 자경전 구역에 이전된채. 자경전은 위에서 말한, 총독부 박물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복궁 관리소 지척에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은 역사 전문가나 문화재 당국이나 알 법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문화재 안내판이나, 역사 교과서 등을 통하여 일반인에게 알려야 한다. 나같은 일반인들이 역사적 지식을 습득하는 제일 쉬운 경로가 바로 문화재 안내판이나 역사 교과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국에서 맘 먹고 왜곡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왜곡된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처럼, 유이태 후손 유철호씨처럼, 이 책을 쓴 박종인 기자님처럼 왜곡된 사실이 바로잡고자 하는, 외력에도 흔들림없고 끈질긴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처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들을 지지하여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이니.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가려지고 왜곡되고 사라진 역사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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