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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3년 12월
평점 :
작년 12월 『한일 근대 인물기행』 이라는 역사책을 리뷰한 적이 있다. 그 책에선 한국와 일본, 양쪽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그들의 활약상이 담겨있었다. 굳이 왜 일본 근대사 인물을 이야기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체로 일본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우리나라 근대사, 즉 구한 말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쭉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과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 근대사와 일본 근대사는 분리할 수 없으며, 같이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사 교육 시간에 일본 메이지 유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선 미진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 메이지 유신 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일제강점기를 배우게 된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머리 속에 무수히 많은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조선 중후기 동안 조선 통신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각종 문물을 받았던 일본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근대국가를 표방하며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조선을 점령한게 아닌가. 심지어 일본이 근대국가가 된 그 짧은 시간동안 조선 위정자들은 또 무얼했는지, 비교도 해야하는데 그마저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메이지 유신 과정을 배워야만 한다. 음, TMI가 너무 길었..나.....
뭐 여튼! 이 책은 위 『한일 근대 인물 기행』을 쓴 저자가 새로 발간한 역사책이다. 제목은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일본의 역사왜곡은 두 말하면 입아플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특히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역사왜곡은 가히 소설에 가깝다. 그들이 왜곡하는 시기는 고대사와 근대사다. 이 역사책 주제는 일본의 근대사 왜곡이니, 고대사 왜곡은 일단 생략!
일본 근대사 왜곡을 보자. 너무 광범위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그 주제를 선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단적인 예가 강제징용, 일본군 성노예 문제다. 엄연한 범죄임에도, 범죄가 아니라며 포장하는 그들의 행태는 너무 적나라하고, 뻔뻔하다. 오죽하면 지들이 일으켰던 세계 2차 대전에 대해서, 앞뒤 맥락 다 자르고 원자폭탄을 맞은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렇게나 심각한 일본의 근대사 왜곡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토록 일본에 만연한 근대사 왜곡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고찰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역사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 근대사 왜곡의 시작점은 대체 어디인가! 그 시작점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18세기 조선과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지식인들에게 신지식으로 자리 잡은 국학의 영향으로 국학자들에 의한 정한론이 주장된 적이 종종 있었지만 이는 재야학자들에 의한 무책임한 일방적 주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의 정한론은 천황을 포함하여 국가정책을 주무르는 고급 관리들에 의해 숙고와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 당시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 따라잡기를 통한 조속한 근대화에 진력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장, 차관과 국장에 해당하는 신정부의 핵심인사 중 약 절반에 가까운 이와쿠라 사절단을 2년 가까이 미국과 유럽에 장기 체류시키면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체험하도록 하고 있었다. p 028
일본의 정한론 파동이 정점을 지날 무렵 그 대상이 되는 조선에서는 이러한 이웃 국가의 동향을 전혀 모른 채 오직 흥선대원군의 권력 유지와 고종의 친정 개시 여부 등 권력 다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에 우리에게는 매우 뼈아픈 대목이다. p 032
위에서도 말했듯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유신을 알기 위해선, 그 이전 18세기 일본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분명 사무라이의 나라였지만, 18세기 사무라이들은 칼 찬 사무라이가 아닌, 책읽은 사무라이였다. 책 읽는 사무라이들은 전통적 봉건사회는 이제 끝이며, 앞으로는 근대사회가 될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들은 일본 근대화에 앞장섰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을 때도 그랬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자신들이 국력이 약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자세로 미국과 유럽에 사절단을 보내어, 서양의 근대화를 몸소 배워왔고, 그렇게 배워온 것을 일본에 적용했으니 그게 바로 일본의 근대개혁, 메이지 유신이다.
일본이 그렇게 근대화에 앞장서는 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는 순조, 헌조, 철종 3대 왕이 재위하는 동안 세도정치가 정점에 달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후 일본 근대개혁인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어, 일본이 동양의 서양을 표방하며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을 그 무렵 조선은 어땠는가?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조선 내 개혁을 표방하며 칭찬을 받을만한 개혁도 하였지만, 경복궁 중건이라던가 쇄국 등 조선 전체적으로 봤을 땐 전통적 봉건 국가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근대국가와 더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일본 메이지 내각에선 초기 정한론 파동이 있었음에도, 조선은 이런 상황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눈과 귀를 모두 닫고 있었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가관이 아니었다. 고종은 아비인 대원군이 시행하던 정책을 전면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왕비 민씨 함께 무당(진령군)에 의존했다. 고종과 민비는 무당에게 수많은 재물을 가져다 바쳤다. 그 재물들의 출처는 내탕금과 국고였다. 백성들이 힘들게 낸 세금을 무당에게 퍼주고, 자신들이 사치하는데 낭비하고 있었다. 고종과 민비는 돈이 부족해지자 지방수령 자리를 팔기 시작했다. 다름아닌 왕실이 나서서 매관매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민씨 척족들도 중간에 개입하여 인사청탁을 받으며 중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종과 민비, 민씨 척족들은 백성들의 고혈에 더해, 매관매직까지 하면서 나라를 거덜내고 있었다.
쳇바퀴처럼 고종과 민비는 계속해서 무당에게 재물을 바치고, 끊임없이 사치했다. 부정부패로 늘어나는 돈보다, 사치로 쓰는 돈이 많아져서 자금이 부족해지자, 고종과 민비는 나라에 있는 광물 자원이나 철도부설권 등을 외국에 팔기 시작했다. 고종과 민비는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나라의 모든 것을 내다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일본이 근대개혁을 하는 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고종과 민비가 온갖 사치를 하는 동안 조선 백성 생활은 아귀도가 따로없었다. 작금의 조선은 죽은 아이에게조차도 세금을 물리는 나라였으니까. 그런 백성들의 울분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나온게 동학농민운동이다. 하지만 고종과 민비는 이런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기는 커녕, 폭도(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진압을 명령했다. 심지어 조선 정규군으로 진압이 어려워지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백성을 죽이기 위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꼴이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강화도조약, 텐진조약 같은 조선, 청나라, 일본 간의 여러 조약들을 설명하자면 길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경복궁 점령사건’이니까.
여튼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일본도 덩달아 조선에 일본군을 파병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땅에는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두 나라 군대와 조선 정규군에 의해 동학군들은 말살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사건이 하니 있으니, 바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의 근대사 왜곡 시작점이다.
청일 간 직접 협상이 결렬되고 각국의 중재노력이 가망 없을 것으로 예견되자 무쓰는 7월 10일, 향후의 조선 정세에 대비하여 오토리에게 조선의 개혁파 관리들을 규합할 것과 철도 및 전신 등 조선에서의 실질적 이권 확보를 지시했다. 그날 오토리는 1차 노인정회담에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권고하면서, 조선이 거부할 경우를 상정해 두 가지 안(갑안, 을안)을 본국에 올리며 훈령을 요청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오토리의 두 가지 안 모두 성의 출입문과 왕궁의 문을 일본군이 점령해야 한다는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 갑안이든 을안이든 오토리가 보낸 전문의 표현 중 ‘군대로 경성의 각 대문을 경비하고 왕궁의 문을 지킨다’는 것은 ‘군사력으로 문 안팎의 공간을 제압하여 지배력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 표현은 한성과 경복궁을 군사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p 237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남아있는 경복궁 점령에 관한 오토리 공사의 본국 보고 전문을 찾아보자. (…) 즉 일본 외무성에 대한 내부 보고용으로는 일본군 이동의 목적이 ‘조선 정부의 불만족스런 회답에 대한 응징으로 왕궁을 포위하기 위해서’ 였으며, 그 목표지점은 ‘왕궁(경복궁)’이라고 명시했다. p 260
약 10년 후, 일본군 육군참보본부가 공식 발간한 『일청전사』도 이런 입장의 연장선에 있다. 오토리 공사의 내정개혁 담판 사태가 어려워지자 군사력 일부의 입경을 요청했다고 서술하여 ‘군사력 이동이 조선과의 내정개혁 담판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과 관련있음’을 연관시켰다. ‘군사력 이동의 목표 지점은 왕궁 북방산지’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사건 초기부터 내부 보고용 자료외 외부에 공표하는 자료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p 261
‘경복궁 점령사건’에 대해 일본정부가 지금까지도 시종일관 주장하는게 있다. 이는 계획된 사건이 아니었고, (1)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으며, (2)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하다가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왕궁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으며, (3) 따라서 경복궁 점령사건은 소규모 충돌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사실 왕궁 점령은 고종을 사실상의 포로로 삼고, 왕비 일족과 대립중인 대원군을 떠받들어 정권을 잡게 함으로써 조정을 일본에 종속시키고 청군을 조선 밖으로 쫓아내기 위한 선제적 핵심조치였다. 즉 개전 명분인 조선 조정의 청군축출의뢰서를 일본의 손에 넣고, 나아가 한성에 있는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일본군이 남쪽에서 청군과 싸우는 동안 한성의 안전을 확보하고 동시에 군수품 수송과 징발등을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시행하는 편의를 얻는 등 일석삼조의 목적 아래 계획한 것이다. p 269
『일청전사』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 은 그간 일본 정부와 군 당국이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 또는 ‘조선군이 발포해 이에 일본군이 응전하여 벌어진 우발적 사건’ 등으로 주장했던 사건의 치밀한 기획과 준비에 관하여 육군참보본부가 작성한 실체적 기록이다. 혼성여단이 작성한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이란 ‘경복궁 점령 계획’이었다. 이는 청일 양국의 충돌을 앞두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의 국왕과 정부를 일본 편으로 만들라는 일본 정부의 포괄정 훈령에 따라 그간 오토리가 본국에 수차 강경제안을 했으며, 결국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일본 정부의 포괄적 승인이 내려짐에 따라 조선 현지의 오토리 공사와 오시마 여단장이 협의해 구체적으로 만들어낸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합작품, 즉 ‘합동군사작전계획’이었다. p 275
실질적으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 직후, 일본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으며 조선군 병영을 접수했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는 형식으로 개혁기구를 설치했으니, 그게 바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이다. 뿐만아니라 김홍집 내각이 제대로 구성되기도 전에, 청군축출의뢰서 공문을 확보하여, 청군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조선땅에서 일본은 청나라를 공격했다.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동양의 서양을 추구하며, 서양 강대국 앞에서는 국제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했던 일제로서는 ‘경복궁 점령 사건’이 계획된군사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됐다.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까지는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국제법을 잘 지켰다”라는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당시 국제적 눈초리를 의식한 일본 정부의 의도적 사건 조작과 각색을 거친 허상이며, 일본인의 국뽕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일본 정부의 한일 근대사 역사 왜곡의 시발점이다. p 294
학교에서조차도 깊게 가르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던 ‘경복궁 점령사건’. 이 사건을 모르고 일본 역사왜곡을 논하는건, 메이지 유신을 모르고 일제강점기를 논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