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언제부턴가 도로에서 돌아다니는 차들의 반 이상이 수입차로 보입디다.. 저런 차들 몰려면 최소한의 돈이 있어야될텐데, 난 죽으라고 내 시간도 없이 일해서 먹고 살기도 바쁜데, 저런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좋은 차들을 타고 다니지라는 의문을 가지는 분들, 저를 비롯해서 참 많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방에도 그러할진데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랑, 아니 나랑 다른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시니 그런 금전적 여유가 있으시겠죠, 물론 겉모습과는 다르게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이유로 비싼 수입차를 타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여겨지지만 그런 속이야 저로서는 알 수 없으니 겉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만으로는 그런 수입차를 타시는 분들은 나름 경제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상당한 여유를 가지신 분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너무 많아요, 세상이 살기가 많이 나아졌나라는 생각도 해봤는데, 저의 개인적인 삶으로 보면 젊은 시절보다 지금의 삶이 더 퍽퍽하고 가난하고 여유가 줄어들었는데, 그리고 심심찮게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사회면의 뉴스에는 하루에도 많은 비관 자살의 안타까움을 경험하곤 하는데, 제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주변의 삶과는 다른 분들의 세상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이질적인 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려운 말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된 것인가요, 사회는 여전히 있는 자, 가진 자, 무엇보다 상속받은 자, 받을 자들이 이끌어나가고 그들의 삶에서 100마넌짜리 패딩 한벌은 아무렇지도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남의 한 가게에서 후드 티 한장에 88만원을 하는 걸 보면서 제가 느끼는 감정과 그 후드티를 만지작거리며 색상이 마음에 안든다며 발렌시아가를 40만원 더 주고 사는 사람들의 감정은 완전 다른 세상의 이야기겠죠, 하지만 버젓이 우린 그들과 숨쉬고 이야기하고 만나고 살아갑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말이죠,


    2. 이런걸 흔히 문학적 비유로 빛과 그림자, 뭐 이런걸로 표현하곤 하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뭐 그런겁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나라 경제의 많은 부분이 지하 경제의 사채나 현금 유동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모르질 않죠, 화려함속에 가려진 어둠의 그림자속 세상은 숨죽임과 속삭임속에서 하나 둘 그림자속에서 묻혀가기 마련입니다.. 대다수의 대중은 그런 그림자속과 빛의 경계선에서 한발씩 걸치고 살아가는 것이죠, 누군가에게는 절대 다가오지않을 그림자의 선을 우리 대부분의 서민이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림자속의 세상에 갇힌 이들 역시 쉽게 빛의 공간으로 넘어오질 못하죠, 그나마 우린 이름이나마 존재하죠, 우리가 모르는 어둠의 그림자속 세상속에서는 이름마저 분실되고 기억하지 못한 체 버려진 존재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우린 경계선에서 빛만 바라보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듯 합니다.. 박영 작가의 "이름없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나락에서 멈춰버린 인간들의 존재성을 알려주는 것이죠, 이름을 잃어버린 이들은 단순히 자신의 존재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누군가에게 전달될 뿐입니다.. 자, 소설속으로 들어가봅시다..


    3. 나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고 이름을 잃어버린 나는 심부름꾼입니다.. '재'라는 인물의 사채업을 돕는 직원이죠, 나는 '재'에게 사채를 빌려쓰고 갚지 못한 체 세상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이 사라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채를 빌리며 자신의 생명보험증을 맡기죠, '재'는 그런 그들이 빚을 갚지 못하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곤 그들이 실종된 후 3년이 지나면 생명보험금을 수령하게 되죠, 결국 빚을 진 이들은 자신이 사라짐으로 인해 빚을 탕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나조차도 '재'에게 빚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맡은 일을 마무리하면 더이상 '재'에게 갚을 빚은 없는 것이죠, 그동안 아버지로 인해 벌어진 빚을 탕감하기 위해 '재'의 수족이 되었지만 이제 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라질 마지막 사람을 만나러갑니다.. 하지만 일은 예상한대로 흘러가질 않습니다.. 그를 찾아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순간 그는 이미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죠, 오히려 자신이 할 일이 줄어들어 다행으로 여긴 나는 죽어버린 그를 캐리어에 담습니다.. 그리곤 집을 나서려는 순간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자살하기 직전 자신의 죽음을 신고한 모냥입니다.. 어쩔 수 없이 표적 처리가 불가능해진 나는 캐리어들 둔 체 집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빚정리가 어려워지죠, '재'는 그런 나에게 현재 사용중인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나 역시 이름이 없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렇게 숨어지내던 어느날 다시금 '재'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더이상 실패를 인정하지않을 듯, 재는 나에게 역시나 사라져야될 존재들을 세상에서 버려진 식인귀가 살아가는 B시에 버리고 오길 원합니다.. 누구나 그곳으로 향하길 두려워하는 B시는 나에게 또다른 죽음을 안겨줄 것만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꼭 해야만할 일이죠, 나는 '재'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4. 사회의 어두운 세상의 삭막한 삶의 모습을 담아낸 느와르소설같습니다.. 느와르라함은 어둡다는 말이죠, 이 작품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어둡습니다.. 인간의 악하고 메마르고 비정한 삶의 내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탐욕적 욕망과 그 본질적 파괴의 감성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의 내면과 빚을 진 세상의 존재들의 탐욕과 그들로 인해 살아가는 또다른 욕망덩어리의 인간들의 생존의 본능과 이로 인해 세상은 화려하고 거대한 외면속에서 병들어가는 내면의 아픔을 간직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공간적인 묘사에 있어서 하나시라는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의 세상은 빈민과 판자촌의 세상을 파뒤집고 그 생존력을 땅으로 묻어 새로운 빛을 가져다줍니다.. 그 속에 갇혀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은 그림자속에 갇혀 사라져버린 것이죠, 하나시의 빛의 중심인 T타워라는 곳에서 바라본 세상의 빛은 화려하기만 하죠, 하지만 주인공들이 숨쉬는 달동네와 판자촌같은 곳은 어둠속에서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격리된 B시의 이야기속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경제가 무너지고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고 그런 시위가 사회를 위협한다는 생각을 가진 기득권자들과 빛의 세상속의 존재들은 경계선속의 인물들의 선을 무너뜨려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어둠속을 가둬버리죠, 그렇게 사라져버린 존재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B시는 식인귀의 세상속으로 아무도 찾지않고 버려진 곳으로 만들어집니다..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고립된 곳에서 죽음을 만나는 모습괴 상황들이 주는 암울한 세상의 내면은 또다른 세상의 공존을 방식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5.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문학적 감성과 상황적 매력인 넘치지만 이야기 자체의 공감은 딱히 많진 않습니다.. 이름이 없는 존재인 나의 이야기가 주는 감흥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하지만 전형적인 부분을 벗어나질 못하죠, 그리고 이야기는 '나'라는 존재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하고 한계에 부닥칩니다.. 개인적으로 '재'라는 인물이 주는 카리스마와 그 내면적 감성이 무척이나 와닿았지만 소설은 나에게서 느껴지는 재의 모습외에 '재'라는 인물 자체가 주는 스토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서유리라는 색다른 인물의 출현과 더불어 발생하는 반전의 상황들도 그렇게 독창적이다거나 상황적 매력을 안겨주진 않더라구요, 흔한 스토리의 극적 재미에 국한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작품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전개에 필요한 부분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감성과 사회적 갈등과 현실들이 드러내는 감각적 표현들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에 서사가 일부분 묻혀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헀습니다.. 또한 소설은 처음부터 가진 감성적 기조를 끝까지 유지하고 이어지죠, 허나 후반부의 반전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들은 대체적으로 예상가능한 부분임을 우린 읽다보면 눈치채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감각이 무디더라도 그정도 센스는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파악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고 그 반전이 어색하다는 것은 아니구요, 충분히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스토리의 반전인지라 그러려니한 것이고 전반적인 작품의 감성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보다 암울하고 비극적인 스토리의 국면을 맞이하였더라면 이 작품의 느와르는 읽은 후에도 끊임없이 머리속에서 되내여졌을 것 같은데.. 좀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6. 그렇게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작품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합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지리하거나 재미없지도 않습니다.. 일반적이고 드라마틱한 인간의 삶의 어두움을 농밀하게 잘 드러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득한 인간의 이야기를 아주 장르틱하게 잘 그려내진 작가님, 칭찬해.. 그렇다보니 조금 더 원하는 부분이 생길 수 밖에요, 서유리와의 관계와 그 스토리나 B시와 관련된 확장력이나 무엇보다 '재'라는 인물이 주는 조금은 과격한 감성적 느와르와 같은 부분이 '나'라는 인물의 관조적 시선속에서 비정하게 드러났으면하는 그런 아쉬움들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충분히 장르적이고 대중적 감응과 동조를 일으킬 수 있는 문장적 매력이 넘칩니다.. 작가는 대중적이되 자신의 의도를 놓치지 않으려고 헀습니다.. 인간의 삶속에서 가려진 내면과 그 어두움을 깊게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동일하게 사회의 어두움 역시 말이죠, 많은 이야기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소설이 주는 감성과 그 진지함은 독자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오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능하면 후속작도 이 스토리의 연결선에서 나와주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목은 '이름 찾는 사람들' 아님 말구요,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이라는, 아시죠, 모름 말구, 땡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얼마전에 아이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고 싶네요, 일종의 열등의식과 자기 패배감과 주변의 시선이 주는 부담감과 함께 항상 느껴지는 자존감의 결여, 난 왜 항상 이 모양일까,라는 생각 말이죠.. 제가 살아온 중딩과 고딩시절은 참 눈부시면서도 안타까운 학창시절이었습니다.. 특히 중딩 3년은 제대로 머리속으로 어떻게 보냈는가를 떠올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담긴 추억이 없습니다.. 단지 공부를 했다는 것만 빼구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전혀 실감나지 않겠지만, 그리고 제가 살았던 지역을 제외한 대도시의 제 또래의 학생들조차도 실감나지 않겠지만 제가 고등 입시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가를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숫자로 정리를 하면 제가 다니던 중딩시절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200점 만점(체력장 20점 포함)에 180점 정도가 되어야 가능했습니다.. 요즘의 자사고나 특목고, 외고에 들어가는 수준인게죠, 전국 최고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당시 서울지역의 커트라인이 130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중딩에 오르자마자 공부,공부,공부를 시킵디다.. 심지어 어중간한 등수의 아이들에게는 입시 전 한달이 넘게 학교에서 합숙까지 시켜가며 공부를 시키곤 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입학한 고등학교이니 나름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생길 수 밖에요, 어른들조차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랑하는게 당연한 것이었죠, 우리 아들(딸) 이 학교 다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그런 뿌듯함 같은게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2. 물론 중학교 입시도 있었던 시절이 있었죠, 하지만 저의 세대는 고등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인 나름의 최신세대였음에도 그렇게 좁은 입시의 세계를 중딩부터 알았던거죠, 자, 그렇게 중딩부터 나름 공부에 재능을 보이던 아이들이 모두 모인 고딩에서 이 아이들이 받는 성적이나 경쟁은 어땠을까요, 중딩에서 반에서 10등안에 들던 아이들이 고딩에서는 30등으로 떨어지는거죠, 이를 경우 자신과 상황과 현실에 대한 갭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주변에서 보는 시선과 상황이 주는 결과물이 반대로 나타나죠, 심지어 노력을 해도 그 수준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고 반등으로 돌아서질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상 자신의 수준을 묶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그리고 자괴감과 열등의식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힘들어하죠, 하지만 이 개인적 자존감의 상실과 패배감에도 불구하고 우린 끝까지 외부적인 시선에 대한 기대를 허물지 못합니다.. 고딩에서 반에서 30등하는 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SKY를 지원하는 것 같은거 말이죠, 그렇다보니 재수, 삼수가 아주 많았습니다.. 아마 전국적으로도 엄청났겠지만 저희 지역은 유독 심했죠, 그리곤 지방대학을 어렵게 입학하게되지만 결국 이런 저런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많은 또래의 친구들은 그런 패배감과 주변의 시선과 노력에 대한 자괴감을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한 자존감이 낮아지게 되면 주변의 이야기에 쉽게 휘둘립니다.. 더욱 소심해지고 자신에 대한 자신이 줄어들죠, 부모와 가족들이 요구하는 부담 역시 끊임없이 머리속에 남아 있습니다.. 여즉 저나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놈이 그렇게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줄 전혀 몰랐다고는 하죠, 지금도 그런 이야기를 심심찮게 하십니다.. 이 작품을 읽다보니 그런 개인적인 과거의 경험과 패배감이 기억속으로 쑤욱 헤집고 들어오는군요, 이 작품은 대단히 장르적 취향에 기댄 느낌이 강한 연쇄살인에 대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담긴 작품입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이야기입죠, 구시키 리우의 "사형에 이르는 병"입니다..


    3.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누구든 화성 살인사건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용이나 방법들이 많이 닮았습니다.. 많은 독후감에서도 이춘재라는 사이코패스의 엽기적 살인을 다루기도 할겝니다.. 이 작품의 연쇄살인마 하이무라 야마토 역시 그런 악한 존재입니다.. 겉보기에는 전혀 사이코패스의 살인자와 다른 모습을 지닌 빵집 주인이었고 그의 살인행각이 밝혀졌음에도 주변의 시선은 도저히 믿을 수없다는 듯,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연쇄살인으로 인한 사형선고를 받고 지금 복역중이죠, 그런 그가 평범한 대학생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의욕조차 가지지 못한 마사야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어린시절 마사야는 하이무라가 있던 빵집 근처에서 살았던 아이였죠, 그의 빵집에서 그를 만났던 시절 그가 아는 하이무라는 대단히 친근하고 편안하고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존재였지만 그가 연쇄살인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왜 편지를 보냈는 지, 그리고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 지, 궁금했던 마사야는 그를 찾아 교도소로 향합니다.. 그리고 하이무라가 요구한 것은 자신의 연쇄살인중에서도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형을 언도받고 항소를 진행하지만 연쇄살인으로 인해 사형을 당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는 그 진실을 밝혀내어 누명을 벗고 싶다고 말이죠, 마사야는 고민끝에 하이무라가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한 성인 여성의 살인사건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하이무라의 내면과 개인적 모습속으로 끌여 들어가게 되죠, 어린시절의 하이무라부터 현재까지의 하이무라의 모든 것을 알아나가면서 마사야는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자괴감과 패배감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지만,,,,,,


    4. 이 소설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의 이야기입니다.. 색다른 설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연쇄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한 반사회적 인격자의 근원을 끄집어내어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영향에 대한 방향​을 잡고 있죠, 사이코패스와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선천적 인격 형성의 부재인가, 아님 가정과 환경에서 비롯된 후천적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인한 문제점인가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있습니다.. 시선이나 시점은 주인공인 마사야에 의해 진행되지만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사이코패스이자 연쇄살인마인 하이무라 야마토라는 인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의 어린시절과 살인사건이 이루어지고 그가 연쇄살인을 저지르게 된 경위를 쫓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씩 미스터리한 자신의 신분적 내면까지 들여다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이코패스의 감정에 동조되어가는 스토리로 이어집니다.. 일본에서 요즘 일종의 장르로 취급되는 이야미스의 께름칙한 비인간적 감정 동조의 방식까지 등장하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방식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설정부터가 그렇죠, 연쇄살인마가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살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하나의 사건의 진실을 어린시절 자신이 알던 한 청년에게 의뢰하고 이어지는 방식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찾아나가면 겪게되는 인물의 심리적 변화도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이야미스 장르다보니 독자에 따라서는 거부적 감성도 이어질 수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후반부에서 이루어지는 반전의 확장성이 상당히 크고 뛰어나기 때문에 결론에 이르러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매력을 가지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건의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의 구조는 상당히 단순하면서도 전형적인 면이 있습니다.. 흔한 사이코패스의 과거의 발자취를 알아나가는 방식과 실질적인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나가는 구성에 있어 일반적인 재미를 제외하고 독자들의 눈을 끊임없이 잡아가는 상황적 집중감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지 못했던 타인의 감춰진 진실을 알아가나는 즐거움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흔한 과거나 어느정도 듣거나 보면 충분히 가늠 가능한 인생의 모습이라면 어느순간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입죠, 이 작품속에서도 하이무라라는 인물의 이야기 자체는 초반의 흥미를 넘어서는 꾸준함은 없습니다.. 그리고 소설의 중심인 연쇄살인과 다른 하나의 사건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마사야의 진행 방식도 겉만 번드르합니다.. 물론 후반부의 반전에서 비롯된 사건의 진실과 내용에 있어서의 매력은 충분하겠지만 중반 전체를 아우르는 사건의 진행은 그닥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사건보다는 하이무라의 이야기에 집중해버렸으니까요, 그렇게 해야지만 또다른 인물의 감응과 사이코패스의 사회적 영향과 이로 인해 발생한 또다른 인간적 영향력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들어날 수 있었을테니 어느정도 이해는 합니다만 결국 재미는 있고 흥미와 매력은 충분하지만 동양적 감흥의 찌릿함까지는 가져오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죠, 쉽게 말해 그들만의 세상속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이지 않은 흥미 위주의 사이코패스의 스릴러적 심리드라마라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합니다..


    6. 소설속에서는 끊임없이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과 그 사이코패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시대와 시간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이러한인간들은 밖으로 드러나고 사람들을 해치곤 하죠, 주기적이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인물들의 사실들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죠, 그 대상이 우리가 되지 않았을뿐이지, 이들은 감춰진 곳에서 사회적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의 삶을 헤집고 들어와 그들을 해칩니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우리와 다르지않은 대중들이고 주변인들이죠, 작가는 그런 세상의 위험함과 이들의 사악함이 주는 영향을 드러내고 싶은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악한 존재는 악함외에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악함에 대한 또다른 공감을 가지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이죠, 가슴속 깊이 숨겨진 파괴적 본능의 인간의 사악함이 어떻게 발현되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이기에 그런 사악함이 또 어떻게 다스려지고 어떻게 변화되어지는가도 보여주죠, 장르소설로서 주는 매력은 아주 좋습니다.. 내용이나 스토리의 측면에서도 충분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솔직히 서양작품이 주는 조금은 별개적 느낌의 영화적 동조가 아닌 동양의 나와 다르지 않은 감성을 가진 일본의 연쇄살인과 사이코패스의 농밀한 심리와 그 내면을 담은 이야미스 작품은 조금 꺼려지는 감성적 공감이라서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만 작품 자체의 장르적 재미가 나쁘지 않으니 이러한 류의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나름 즐거운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다보니 사실 결론 부분의 반전은 제법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들긴해, 땡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나이가 들어가면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죽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이야기를 독후감에서 제법 지껄인 적도 있었구요,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디다... 내가 죽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은 없지만 누군가에게서 어느순간 잊혀져버리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그 현실적 상황이 주는 서글픔 같은 것 말이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지나고 나라는 존재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할 것이라는 그 안타까움에 가슴이 답답해져오면서 꽉 막힌것처럼 숨을 못쉬겠더군요, 이렇게 잊혀져가는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제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잊어버렸던 그 누군가를 떠올렸습니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시다보니 외할머니가 항상 저의 집에서 저를 챙겨주셨죠, 그런 할머니가 어느날 돌아가셨어요, 고2때였죠, 어린시절 함께 잠들고 저를 깨워주시고 밥도 먹이고 세수도 시켜주셨던 할머니가 감기로 힘들어하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근데 그때는 잘 몰랐어요, 그렇게 슬퍼지도 않았구요, 그냥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항상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덩요, 엄마한테도 눈물이 안난다고, 그냥 할머니가 항상 날 지켜줄 것 같아서 그런 지 실감이 안난다고 했죠, 근데 한참이 지나서도 그랬습니다.. 그냥 할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시고 어디에선가 날 지켜주실거라는 믿음 말이죠, 슬프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힘들때마다 고개들어 할머니한테 인사하면 마음이 편안해졌더랬습니다.. 제법 오랫동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유치합니까, 뭐 그냥 그랬다는겁니다..


    2.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가슴이 꽉 막힌 것 처럼 답답하면서 꿈에서 깨어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먼저 할머니가 떠오른 것은 아닙니다.. 꿈속에서 제가 죽고 아이들이 절 잊혀가는 상황을 떠올리는 뭐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 같아요, 마침 깰때여서 새벽녘 밖을 쳐다보면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아, 어느순간 나조차 할머니를 잊어버렸구나,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아이들이나 가족들에게서 잊혀져가는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숨이 막힐 듯 답답해져 오더라구요, 나이가 들어서 주책이죠,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일겝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주는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죠, 삶이 있는 한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는 있지만 죽음은 더이상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공간속에 놓이는 것이니 참 답답하고 아쉽고 슬프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내가 그러했듯이 그들도 그러할테니까요, 그리고 이기적으로 그렇게 잊혀지는 것에 대한 슬픔이 온몸을 휘감더이다.. 조금이라도 그 안타까움이 덜하게 사랑하는 이들이 죽음을 대하는 시간적 여유 정도는 주면 좋겠다는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전혀 뜬금없는 작품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긴 하지만요, 죽어서도 다시 돌아온 이들을 반겨주면 좋겠는데, 현실은 죽어서 다시 살아난 이들을 흔히 '좀비'라 부릅니다.. 올바른 존재가 아니죠, 안타까운 존재의 소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원하는 인간들의 미련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리고 결국 현실에서는 생존을 택합니다.. 어쩔 수 없죠, 내가 먼저 살고봐야지... 안그래요, 그런 이야기들은 고전작품의 이야기속에 담아 새롭게 엮었나 봅니다.. 좀비에 대한 앤솔러지 "좀비 썰록"입니다..


    3. 좀비물 좋아라합니다.. 아무리 흔하고 전형적이라도 읽다보면 항상 재미집니다.. 장르소설속에서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확장되는 캐릭터이기도 하구요, 전형적인 종말론적 세계관속의 인간의 생존에 국한된 서사에서 장르적 확장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근래 들어서는 보다 유쾌하고 인간적인 의도의 독창성이 두드러지는 캐릭터성이 부여되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요, 뭐 저는 그랬습니다.. 이 작품은 썰록이라는 제목처럼 좀비와 관련된 이야기 다섯편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과서에서나 챙겨봤던 국내문학 다섯편의 내용에 좀비를 살짝 들이밀었습니다.. 중졸 이상의 학력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작품들인지라 그 흥미가 더 와닿더군요, 하나씩 함 살펴봅시다.. 읽다가 시험 나올만한 부분은 밑줄 쫙, 먼저 김성희 작가의 '관동행'이라는 작품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비롯된 모냥입니다.. 사실 관동별곡 잘 모르죠, 그냥 정철이 강원도의 산수를 찬양한 조선 최고의 가사중 하나라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관찰사(요즘이면 강원도지사)로 부임하던 상황과 관련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린 건 작품때문입니다.. 원래 교과서에서 나온 작품은 휘발성이 더 강합니다.. 역사상 정철이라는 위인은 임진왜란 전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관동행'이라는 작품에서는 정철의 캐릭터성이나 식속에 대한 가벼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행의 내용처럼 관동까지 가는 길에 벌어지는 좀비와의 생존혈투를 다루고 있죠, 조금은 가볍고 유쾌하면서도 편안한 좀비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난한 느낌의,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좀비 바이러스의 항원과 항체도 우린 만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라도 깊이 R&D를 해야될 검토대상인 듯 합니다.. 진지하게,


    4. 두번째 작품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중 한편인 '만복사 저포기'를 차용한 정명섭작가의  "만복사 좀비기"입니다.. 관동별곡과 함께 국어 시험에 꼭 등장하는 작품입죠, 중요도 최상의 교과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좀비를 접목시켰습니다.. 내용인즉슨 양생이라는 총각이 만복사라는 절에서 부처님과 주사위 도박을 펼친 이야기죠, 타짜인 양생은 부처님을 이기고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만납니다.. 허나 갸가 갸가 아닌것이었죠, 결국 안될 놈은 끝끝내 안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쉬움을 남기고 만 이야기입니다만 정명섭 작가의 작품속 양생도 좀비가 창궐한 역사속 세상속에서도 참 힘든 인생을 삽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양생은 자신을 못알아보는 어머니를 뒤로한 체 마을을 떠나 만복사로 들어섭니다.. 그곳은 이미 피난을 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죠, 힘겹게 살아남은 양생은 달이 밝게 뜬날 어머니가 원했던 자신의 장가를 기원하며 부처님과 게임을 하죠,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여인을 만납니다.. 좀비인 지 아닌지도 모를 여인을 숨겨주며 주위사람들의 압박을 받던 양생은 몰래 만복사를 빠져나간 여인을 쫓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김시습의 오리지널 버전을 크게 벗어나질 않는 범위에서 좀비와 주변의 상황을 엮어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이루어지죠, 독자들에 따라서는 상당히 재미있을 작품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디다..


    5. 세번째 작품은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차용한 전건우 작가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원작은 주요섭의 시대적 사회의 윤리적 문제와 여성적 지위와 애정에 대한 파격적 내용이었습니다.. 주요섭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사랑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갖혀버린 사회적 약자와 그 대상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옥희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죠, 아시다시피 주요섭은 미국물을 드신 지식층인 관계로 그 시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상황과 사회적 불안과 신분적 부조리 속에 갇혀버린 인간의 인간다움을 그려내는 뭐 그런 작가 비스므리하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왜, 여성은 남편도 없는데 사랑하면 안돼, 왜 안돼, 뭐 이런 뉘앙스죠, 그런 작품을 전건우 작가는 아주 파격적으로 창조해냈습니다.. 전반적인 설정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아직 죽지않은 남편이 있죠, 그리고 밉쌍 시어머니도 있습니다.. 삯바느질이다 뭐다 하면서 병든 남편, 어린 딸 먹여살리기에 자기 한몸 제대로 챙기지도 몬하고 인생 고통스러운데 되려 돌아오는 건 여자 잘못 들여서 이 고생을 한다는 시댁의 타박뿐이죠, 젠장, 그래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다가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사랑방에 손님이 들어오죠, 옥희는 사랑방 손님에게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지만 6살 아이의 머리는 돌아서면 세상은 여전히 따사롭죠, 단지 누렁이만 위험을 감지합니다.. 어떨땐 개가 인간보다 나을따개 많죠, 그러던 어느날 누렁이가 죽고 일이 벌어집니다....언제나 엄마는 엄마일때 가장 강합니다.. 아주 재미집니다.. 원작이 주는 기억도 있거니와 후반부 벌어지는 반전과 함께 대단히 역동적인 상황의 전개는 매우 즐겁습니다.. 울 엄마 앞에서 깔짝대면 다주그쓰...


    6. 네번째 작품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차용안 조영주 작가의 "운수 좋은 날"입니다.. 원작의 상황적 반어에 대한 비극적 구성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우린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아주 재미지고 비극적인 결말임에도 우린 작품이 주는 따스함과 김첨지의 하루에 대한 뿌듯함을 머리속에 기억하죠, 그리고 아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조영주 작가는 다른 작가와는 조금 다르게 현실적 이야기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작품의 내용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창작물이라고 봐야될 듯 싶습니다.. 현실의 이야기속에서 좀비와 과거의 허구가 하나가 됩니다.. 또한 극중 인물의 캐릭터에 작가의 예명등을 차용하고 현실감을 자아내죠, 게디가 상당히 독창적인 좀비적 캐릭터가 구축됩니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는 크게 다가오질 않습니다만 상황이나 캐릭터의 창조 및 설정의 즐거움을 가득합니다.. 채식과 육식과 사랑과 배신과 허구와 환상과 진실의 경계를 대단히 가볍고 유쾌하며 매력적으로 설정한 방식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매력이 있더군요, 그리고 그사람이 그사람일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허구의 진실의 구라가 웃겼습니다.. 재미있었구요, 마 그정도...


    7. 그리고 마지막 작품은 아무리 책을 안 읽는 학생이라도 이 작품의 감성과 인식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없는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최고봉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가 아닌 '소나기'의 패러디인 차무진 작가의 "피, 소나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원작 소나기가 주는 어린시절 첫사랑의 감각적인 이미지와 문장은 머리속에서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로 시작하는 아련한 감성과 마지막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로 끝나는 애잔한 안타까움을 잊을 수가 없죠, 혹시 기억 안나는 사람을 지금이라도 일단 읽어봐.. 금새 읽거덩, 하여튼 그러한 잊지못할 위대한 순사랑의 아련함을 차무진 작가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탈바꿈 시켜놨다고 봐야겠습니다.. 처음과 끝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원작의 감성과 장르적 비릿함이 아주 적절하게 혼합되어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특히나 좀비인 듯 좀비가 아닌 상황속에서도 순수한 이들의 사랑이 보여주는 아련함은 대단히 감각적이고 좋습니다.. 특히나 소년의 심리와 감성을 적절한 표현과 주변의 상황속에서 그려낸 작가의 의도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만족스럽죠,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돌아온 존재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과 대중적 혼란과 더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돌아왔음에 대한 이들의 감정을 아주 깊이있게 그려낸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특히나 소년과 하나뿐인 증손녀에 대한 윤초시의 감정같은 것 말이죠, 특히나 후반부의 모든 이의 눈돌림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소녀에게 다가간 이미지는 많이 짠했습니다.. 사람 뇌를 닮은 호두알 맛이라도 한번 보여주고 보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여튼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8. 각각의 작품들이 나름의 색채를 띄고 좀비를 다루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류의 작품 앤솔러지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재미지고 매력적인 설정들이라 금새 읽고 입맛을 다셨습니다.. 좀비가 피맛을 즐기듯이 먹고 먹고 또 먹고 자꾸 먹어도 계속 먹고 싶은 그런 허기짐을 만났다고나할까요, 아무리 좀비라는 캐릭터가 확장성을 가지고 장르를 만들어나간하도 하더라도 그 좀비적 개념이 주는 전형적 의도는 쉽게 바뀌질 못하죠, 이럴때 기존 작품들에게서 인지된 수많은 인식들에 대한 좀비적 상상력이 투영되는 즐거움이 무척이나 좋아서 쩝쩝거리는겁니다.. 혹여라도 고전작품, 유명작품에 대한 모욕이니 홀대니, 거부감이니, 이런 유치스러운 감정같은거 좀 던져두시고 누구라도 즐기고 쉽게 다가갈 수있는 요런 좋은 장르소설들이 많이 좀 펼쳐지면 좋겠다누,,, 봐바... 이렇게 이 작품을 안 읽었으면 언제 다시 고전들의 내용을 되짚어 보겠냐고, 송강 정철이랑 정철 영어의 정철이랑 헷갈리지 않으라는 보장이 어디있냐고, 민복사 저포기를 만복사 저팔계로 잘못 알지도 모르잖아.. 또는 사랑방 손님이 뉴스상의 성접대문화에 대한 사회 르포소설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잖아, 또 운수 좋은 날이 경마신문의 한 꼭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소나기속 주인공의 할어버지 윤초시가 독 짓는 늙은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누가 그래, 그러니 이런건 좋은거야.. 난 그렇게 봐쓰.. 땡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진 새 스토리콜렉터 78
수재나 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북로드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너 때문이야, 니가 그랬잖아, 너만 아니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인데, 왜 나서서 니가 일을 어렵게 만들어... 하여튼 니는 뭘하면 안돼, 앞으로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죠, 사람은 그렇습니다.. 누구나 탓을 합니다.. 그 대상이 누가 되었던 탓을 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자신의 잘못이 적은 방향으로 탓을 돌리죠, 자신에게 돌아오는 탓은 자책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인간은 가능하면 타인에게 어떠한 일의 결과중 나쁜 것에 대한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탓을 어릴때부터 듣고 자란 아이들은 어떨까요, 단순한 부모의 잔소리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아이의 이모가 아이랑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나 봅니다.. 아이가 집중해서 뭔가를 하고 있는데 이모가 칭찬을 합니다.. 너무 잘하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이죠, 아이에게 힘이되고 즐거운 칭찬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말을 듣고선 아니에요, 전 잘 못해요, 전 잘하는게 별로 없어요라고 무덤덤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이모는 아이의 엄마에게 신중하게 전달을 합니다.. 보통의 아이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다보니 걱정이 앞선 부분이 있을겝니다.. 아이의 엄마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래의 아이들은 칭찬을 하면 보통은 으쓱거리며 더 잘할 수있다는 의도의 자신감을 내비치거나 더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을 드려내기 일쑨데 그렇지 않다는 점은 아이의 자존감이 너무 낮은게 아닌가하는 걱정인것이죠, 고민이 많았나 봅니다.. 그리곤 부모로서의 자신의 행동과 아이에 대한 훈육방식에 대한 딜레마에 빠집니다..


    2. 아이가 사랑스러운 말썽꾸러기입니다.. 그래서 항상 혼이 먼저 나죠, 조금만 눈을 돌리고 있으면 항상 어질러진 공간에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다른 형제들보다 조금 더 혼이 나는 편입니다.. 근데 그런 잔소리가 아이에게는 자존감에 있어 정서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고민을 부모로서 하게 되더군요, 솔직히 전 아이의 엄마와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동일한 기준에서 충분한 칭찬과 훈육이 나름의 밸런스를 맞추고 아이에게 전달되는 훈육은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물론 아이의 특성과 성향에 따라 그 반응을 고민하고 맞추어야되는 것도 맞구요, 누군가의 비교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아이의 상황에 대한 훈육은 자존감에 대한 상처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오히려 전 아이가 자신이 잘하고 못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인식을 하고 판단을 빨리 했다고 생각을 헀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낮게 보는 것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거덩요, 또래의 남아들처럼 제 아이도 그림이나 음악적 재능, 글쓰기, 수학같은 공부보다는 게임이나 동영상이나 어떠한 상황을 파악하고 기억해내는 것은 뛰어나다고 아이 스스로가 말합디다... 하지만 엄마가 받아들인 자존감과 같은 불안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를 해봄이 맞겠죠, 어린시절 아이탓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흔한 상황에서 자란 아이는 심각한 자존감의 저하로 인한 자책이나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고 주변에 대한 의지와 집착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을겝니다.. 그리고 항상 그러한 아이의 내면은 외롭고 두려운 자신의 자아에 대한 정체성으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죠, '루시 플라이'도 그런 여성이었던 모냥입니다.. 수재나 존스의 데뷔작 "지진 새"에서 루시는 일곱명의 오빠가 있음에도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영역과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이죠,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일본에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된 작품입니다.. 지금 영화도 절찬리에 상영중이라 보실 수 있는 멋진 작품 줄거리 함 봅시다..


    3. 머나먼 영국의 요크셔를 떠나 일본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루시 플라이는 과거를 지우고 싶어합니다.. 어린시절 일곱명의 오빠와 함께 살아온 루시의 삶은 지옥과 다르지 않았죠, 부모는 일곱의 아들을 두고 딸이 태어났지만 아들이 아님에 낙심하고 방치합니다.. 제대로된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빠들은 그런 루시를 괴롭히죠, 그러던 어느날 루시를 괴롭히던 오빠중 한명이 루시로 인해 죽게 되죠, 이후로 루시는 자신으로 인해 죽음을 당한 노아 오빠에게서 벗어나질 못한 체 가족에게서 벗어나고자 어린시절부터 다짐합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는 시기가 되자 곧바로 자신의 가족이 모르는 일본으로 향합니다.. 그런 루시에게 일본은 제2의 고향과도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 자신의 고향일 수도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루시가 아닌 오롯이 자신만의 루시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곳에서 루시는 새로 태어난 것이죠, 그런 일본에서의 삶에서 루시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길거리에서 도로의 고인 물 사진을 찍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가진 데이지라는 남자에게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나서고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죠, 사랑하는 이를 만난 루시에게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곤 릴리 브리지스가 나타납니다..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의 릴리는 우연히 자신에게 다가왔죠, 루시는 그녀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조금씩 그녀에 대해 문을 열게 됩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길 거부했던 루시에게 릴리는 불안한 기시감을 선사하는 존재였죠, 그런 릴리가 사라지고 어느날 발견된 후 루시는 경찰에 연행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과연 루시는 릴리를 죽였을까요,


    4.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로 보입니다.. 시작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한 용의자로 심문을 받는 루시에게 있어서의 과거와 그녀의 개인적 이야기가 그녀의 시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로 진행이 됩니다.. 소설은 '나'라는 존재와 '루시'라는 3인칭의 존재를 번갈아가면서 사용합니다.. 미스터리한 사건의 내막을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속에서 드러내면서 루시 플라이의 삶과 '나'의 심리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상황을 끄집어내죠, 작가는 작품의 이야기와 구성을 그렇게 길게 이어가지 않습니다.. 각 챕터의 길이도 그렇게 길지 않게 적용하면서 루시의 과거와 릴리와 데이지의 관계를 번갈아가며 루시의 인생과 그녀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합니다.. 우린 루시라는 여성이 가져온 삶의 무게를 그녀의 심리와 시선속에서 공감해나가게 됩니다.. 소설속의 '나'라는 존재가 보여주는 감성은 대단히 시니컬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성이 혼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루시의 데이지를 향한 감정의 문장들이 보여주는 강렬함과 함께 그를 제외한 그녀의 삶의 메마름은 대단히 큰 비교가 됩니다.. 독자들 또한 이러한 감정선의 혼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가진 심리적 불안과 극단적 성향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나가게 되죠, 나름의 혼재된 심리임에도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루시에게 있어 릴리라는 존재는 영역속에서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이죠,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와 '루시'라는 3인칭의 동일한 존재를 스스로 비교해나가는 방식은 상당히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장르소설을 읽어온 독자의 어설픈 짐작으로 처음에는 해리성 인격 장애를 겪는 주인공인가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오히려 자아라는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객관화를 시켜나가는 주인공임을 깨달았습니다..


    5. 루시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서 시작과 끝으로 이어집니다.. 한 여성의 삶에 대한 주변의 모습과 자신이 이끌어나가는 개인적 존재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인물의 내면의 자아와 상황으로 인해 벌어진 상실, 외로움, 관계적 불균형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서양인으로서의 동양속에서의 삶을 대단히 리얼하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영국인의 이야기가 그림처럼 그려집디다.. 물론 "지진 새"라는 제목의 동물이 주는 감성적 의도와 그 내면의 이야기를 살펴볼작시면 지진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일본에 있어서 그 징후전 후에 들려오는 '지진 새'라는 존재는 일종의 혼란적인 상황이나 불안한 심리의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그려내기에 적합한 소재인 것 같기도 합니다..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혼란과 흔들림이 끝나고 들려오는 조용한 새의 울음은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한 진실의 끝자락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장르소설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로맨스소설입죠, 대단히 미스터리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긴장감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내면이 주는 충격적 결말의 반전을 생각하더라도 이 소설은 심리스릴러로 묶을 것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픔을 간직한 한 여성의 성장소설로 바라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소설의 전반적인 미스터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너무 한 여성의 시선과 시점에 깃대어 그의 이야기에 국한된 상황에 이끌리다보니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조금 지리함이 생기더라구요, 보일듯 말듯하면서 벌어질듯 말듯하면서 알듯 말듯하면서도 제대로 그 내막이 뒤로 자꾸 밀려나가는 상황들이 아쉬음이 좀 남습니다..


    6. 사실 이 작품은 오래된 작품이더군요, 작가의 데뷔작으로 2001년도에 집필된 작품입니다..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장르소설과 순문학의 경계를 아우르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더군요, 전반적인 서사의 흐름이나 연결구도는 미스터리를 접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상황을 끊임없이 긴장케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작품의 성향은 사랑과 성장에 관련된 순문학에 대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후반부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의도한 미스터리한 진실의 내막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독자로서 기대감이 클 수 밖에 없었지만 후반부의 결론에 이르러 작가가 독자에게 던져놓은 진실의 화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내면과 사랑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렇다보니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의 개방적 반전의 진실이 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을테고 또는 그러려니하면서 조금은 허탈한 마무리에 대한 아쉬움이 생길 수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무척이나 재미진 소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루시라는 여성의 시선과 심리에 따라 이어지는 이야기가 대단히 찰지고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을 확실합니다.. 사실 남자로서, 그것도 중년의 무덤함한 돼지 아저씨로서 느껴지는 감성이 일반 여성적 관점의 이 작품의 독후감과는 조금 다를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여성분들의 감성과 공감이 더 크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을겝니다.. 그런 공감이 지배적인 이야기구도이기도 하구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지금 이 작품이 넷플릭스라는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절찬리로 상영중이라고 합디다.. 혹시 회원이신 분들은 감상을 해보셔도 되실 듯, 근데 주인공인 루시의 이미지는 좀 달라보입디다.. 소설 속 루시는 그렇게 아리따운 외모의 여성은 아닌데(하지만 그녀의 눈만은 사람을 끌어들이죠) 영화에서는 알리시아 비칸데르라는 여성인데 전직이 대저택을 소유한 대단히 활동적이고 글로벌적인 재벌가의 여성이라서 그런가봅니다.. 게다가 덩치가 소설의 이미지보다 너무 작아요, 근데 또 책 표지는 또 비칸데르를 닮은 듯, 하기사 뭐, 저예산 영화도 아닌데 주인공의 외모가 중요하긴 하지.. 기회되면 루시를 얼매나 잘 그려냈는 지 함 봐야그쓰... 땡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급생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반백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여즉 친구로 남아서 만날때마다 한말 또하고 대화의 반은 욕에다가 병신처럼 웃다 술에 취해 즐거워 몸둘 바를 모르며 행복해하는 친구들은 고딩 친구들입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편한 주변인은 그때 그 친구들입니다.. 제 안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입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달이 만나도 우린 그때 그시절의 삶과 인생으로 돌아갑니다.. 독후감에서도 이야기한 듯 싶긴한데,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죠, 저라는 사람이 만들어지고 그 중심을 잡는 시간의 모든 것을 함께 한 존재들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제 인생에서 만난 시간으로는 짧은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친구는 기껏해야 고3 일년동안만 만났으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대학시절 수년동안 함께 동거동락한 친구와 더 많은 소통과 추억이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시절 그 순간의 기억은 고딩때에 멈춰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중딩때의 친구, 대학때의 친구,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소통과 삶의 추억이 가득한 이도 있겠으나 저로서는 응답해야할 1988년의 시절을 잊지를 못하겠습니다.. 고2, 제가 살아온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시절속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움이 가득했던 시절의 추억을 말이죠,


    2. 참 선생이 싫었습니다.. 인간적인 슨생들이 별로 없었어요,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학생들을 패대기치고 체벌이라는 이유로 엉덩이에 피멍이 들 정도로 때리고 모욕과 비교를 스스럼없이 해대는 비열한 인간들이 슨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학생의 입장과 권리를 챙겨주시고 소통을 해주시는 슨생님들이 계셔서 우리는 나름 학교라는 공간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추억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폭력과 경쟁과 비교와 불통의 세상이었지만 결국 이해와 포용과 양보와 공감의 세상이기도 한 시간속에서 우린 기성세대의 세상이 응답해주길 바라던 시절의 갓 태어난 정신적 미성숙아의 시절이였습니다.. 이제 알기 시작한 세상의 의도와 나의 주체적 존재의 가치가 인정받고 고속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깨우치려고 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교육받은 세상과 현실의 괴리와 부조리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던 시간속에서 가장 나를 나로 인정하고 지켜주는 존재가 바로 그 시절의 친구였습니다.. 그렇기에 수십년이 흘러 그때 슨생들의 나이보다 훨씬 지나버린 지금에도 우린 여전히 만나면 그때 그 슨생을 그때의 나로서 욕을하고 진저리를 칩니다.. 이 친구란 놈들은 술값은 안아까워해도 책 한권 사는거는 드럽게 아까워합디다.. 제가 가진 소설 몇권 던져주면 웃음꽃이 활짝 피더이다..그래서 잘 읽히고 재미진 작품을 찾다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참 많습니다.. 그만큼 게이고 슨생은 뛰어난 작가인게지요,, 그런 작가의 초기작들은 무척 재미지고 느낌도 좋습니다.. 이번에 읽은 "동급생"도 그런 작품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나 다를 바 없는 고딩들의 성장통을 다룬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합니다..


    3. 하루미라는 여동생의 병과 관련된 서장에서 나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동생 하루미는 심징질환을 앓고 힘겹게 이겨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간은 흘려 몇번의 수술을 거쳐 이제 어느정도 세상속에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하루미때문에 가족의 모든 중심은 하루미에게 집중되어 있죠, 하지만 하루미는 그런 자신의 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명랑하게 말하지만 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하루미의 병은 우연히 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하루미를 아프게 만든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꼭 복수하겠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들은 누구인 지, 그리고 난 어떻게 그들에게 복수를 할 것인 지, 모르지만 소설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시작과 함께 유키코라는 여학생이 죽은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니시하라 소이치, 학교 야구부의 주장, 그리고 죽은 아이는 미야마에 유키코라는 야구부에서 매니져 관리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충격과 함께 유키코의 교통사고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문을 갔다가 집으로 향하는 니시하라에게 동급생인 미즈무라 히로코가 유키코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던져주죠, 유키코가 임신을 한 체 사고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시하라는 그 임신의 중심에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되죠, 그로 인해 유키코는 죽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도 또다시 유키의 죽음에는 또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름아닌 학교의 학생 지도교사인 미사키라는 여선생의 감시와 미행이 유키코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사실을 알게된 니시하라는 자신의 책임을 떠올리며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 학교측과 맞서는데........


    4. 이 작품은 무척 재미진 학창시절의 성장통을 다룬 미스터리소설입니다.. 소년이 아닌 성인으로서의 경계적 위치에서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고 세상의 삶을 배워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죠, 하지만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어른들의 세계는 그들의 눈에는 부조리와 거짓이 가득찬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선생이라는 존재는 통제와 감시와 압박의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 어른들의 세상속에서 만들어진 강박적 시스템속에 가두고 그속에 아이들의 자유를 구속하며 소통과 이해의 역할이 아니라 그들의 잣대에 맞춘 옳고 그름의 기준속에서 학생들을 미리 단죄하고 잘잘못을 가려 우월을 가르치기에 급급한 사람들입죠, 물론 요즘하고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그런 슨생들이 많았습니다.. 일본도 그런 모냥입니다.. 그런 공간을 중심으로 게이고 슨생은 아주 매력적인 인물적 캐릭터를 구성했습니다.. 니시하라라는 고3의 남학생의 주체적 활약은 아주 좋습니다.. 흔한 수동적 학생의 모습이 아니죠, 옳고 그름의 판단에 있어서 자신의 잘못과 주변에 벌어지는 상황적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따져나가는 모습과 함께 어른이 어른답지 못함을 니시하라는 있는 그대로 까발리면서 학교의 부조리와 세상의 어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사회적 불의를 순수하면서도 강력하게 끄집어냅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자신들을 꾸역꾸역 밀어넣기 위해 슨생들이 만들고 열어놓은 문을 향해 들어가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과 몇몇 아이들은 그 문 외에도 또다른 길을 찾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강력한 사회파 소설이라고 전 봤습니다..


    5. 학창시절에서는 가장 큰 사건이기도 하죠,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과 그 중심에 놓은 인물의 이야기는 만약 내가 저 주인공의 입장이라면, 그리고 남녀의 감정등이 만들어낸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성도 엿보입니다.. 남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입니다.. 사랑에 대한 책임, 관계에 대한 책임, 서로에 대한 책임을 기본적으로 가져야만하죠, 다시 말하면 이것은 배려이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이죠, 상처를 주지 말아야한다는 배려, 그리고 책임이 사랑에 대한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고자한 의도가 짙습니다.. 단순한 어린 학생들의 불장난이 초래한 죽음이라는 악몽같은 시간이 그들의 삶과 인생에 어떻나 반향과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어른들의 시선과 그들만의 잣대속에 갇혀버린 아이들의 통제적 세상의 억압들을 다루고 있죠,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 작품은 미스터리입니다.. 유키코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과 함께 학교에서 발생한 선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죠, 니시하라는 이 모든 죽음의 중심에 선 인물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그와 관련이 있죠, 그리고 그 죽음의 진실을 니시하라는 제대로 찾아내려고 하죠, 감추기에 급급한 학교의 슨생과 어른들, 그리고 그들의 방법에 적응한 아이들의 행동들, 하지만 니시하라를 비롯한 몇몇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의 정의를 자유롭게 만들어나갑니다.. 그리고 순수하지만 아픈 사랑과 공감과 공유를 나누죠, 친구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흔한 학창시절의 드라마틱한 극적 구성으로 그려졌지만 탄탄하고 꼼꼼하게 그려낸 이야기와 인물들의 매력은 아주 뛰어납니다.. 특히나 고등학생이라는 그 시절의 고민이 가득한 혼란스러운 심리적 문제를 대단히 섬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6. 게이고 슨생은 아시다시피 많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가독성이 좋습니다.. 스토리의 구성이나 인물들의 대중적 투영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공감도 잘되죠, 그렇기에 나쁘게 받아들여지는 작품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보통 재미는 있는데 예전보다는 못해라는 독후감이 많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게이고의 초창기의 작품들은 무척이나 좋습니다.. 설정이나 소재나 주제적 측면에서도 이후에 집필된 다양한 작품의 의도보다는 보다 질적 접근이 잘 이루어진 경향이 짙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동급생"은 작가가 만들어낸 학창시절을 다룬 얼마되지 않은 작품중에서도 아주 재미지고 찰진 내용을 가진 작품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흔한 스토리의 극적 전개이긴 하지만 가볍진 않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들어나는 진실속에서 보여주는 사회파적 관심은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의 화두는 지금 우리의 삶과 현실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아이들의 눈과 시선속에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고 만들어가는 세상의 모습은 여전히 혼란스럽게 부조리한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세상의 모습을 어른들은 여전히 가르치고 그들처럼 만드는 것이 아이들이 잘 되는 것이라고 최면을 걸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도 아이를 키우고 살아가는 이시대의 어른이지만 지금의 저의 여유를 찾기 힘들고 경제적으로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저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억압되고 통제되어서라도 스스로 경쟁에서 이기고 남들보다 우위가 되어 이미 만들어진 기득권의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맞을겁니다.. 그게 조금 힘들더라도 나중의 아이의 삶을 위해 어른이 해줘야되는 책임일지도 모르죠, 정말 과연 그럴까요, 이미 세상속에서 비교되어버린 어른들의 시선이 아니라 이제 세상속으로 나아가는 비교되지 않은 아이들의 시선속에서 그들의 요구와 요청을 들어줄 순 없을까 한번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뭐야 이거 느무 꼰대적으로 마무리되는거 아냐, 끝내, 땡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